페인팅의 방법 / Way Of Painting

이겨레展 / LEEGYEORE / 李겨레 / painting   2019_1220 ▶︎ 2020_0131

이겨레_2/3_캔버스에 유채, 3개의 패널_각 162.2×130.3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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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겨레 홈페이지_www.rehlee.net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료 / 6000원

관람시간 / 10:00am~11:00pm

히어컬처 Heer Culture 경북 구미시 문장로 142-6 Tel. +82.(0)54.715.5700

페인팅의 방법 - 이겨레의 회화적 기획에 관하여부역할 것인가, 배반할 것인가 한 사람이 캔버스 위로 등장한다. [「2/3」(2013)] 그는 무언가를 밀어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 동작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그가 밀어내려던 것이 캔버스의 가장자리임이 드러난다. 이 캔버스는 꼭 같은 크기를 가진 두 폭의 캔버스와 맞닿아 있다. 푸른빛을 고르게 띄는 두 폭의 캔버스는 모노크롬 추상화 같아서 스스로 물감이 칠해진 캔버스, 곧 '회화'임을 한치의 의심없이 공언한다. ● 물론 이것은 그림일 뿐이다. 붓질이 남긴 물감 자국의 흔적들로 구현한 어떤 형상들의 집합. 캔버스에 떠오른 사람의 형상도 실은 물감의 자취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당연한듯 존재하는 이 그림 속에서 물감 자국에 불과한 한 사람이 자신을 막아서는 두 모노크롬 캔버스를 있는 힘을 다해 밀어내고 있다. 이 부조리한 조건 속에서 그림 속의 한 사람과 캔버스는 스스로 회화의 부역자가 되었다가 그것을 배반하기도 하면서 모종의 한계를 하염없이 읊조린다.

이겨레_피할 수 있는 곳_캔버스에 유채_200×250cm_2019
이겨레_상부와 하부_캔버스에 유채, 2개의 패널_각 97×162.2cm_2015
이겨레_방문자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0
이겨레_ground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15

한계의 역학: 저지선 또는 ● 이겨레의 회화는 한계를 설파한다. 캔버스는 그려진 인물들의 크기, 동작 등 그 존재 조건을 규정한다. 인물들은 캔버스에 꼭 맞는 크기로 그려지며, 때로는 팔을 벌리거나 캔버스에 매달리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이 물리적 조건을 직접 지시한다. 캔버스의 면적뿐 아니라 하나의 사물로서 그것이 가지는 질감과 두께 등의 조건, 나아가 안료와 미디엄이 섞여 만들어진 젤로서 물감 특유의 흐르고 고이며 스며드는 성격 또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감지할 수 있는 한계를 극대화한다. 이는 즉각적으로 회화 그 자체의 물리적 조건에 주목한 모더니스트들의 대답과 공명한다. ●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예컨대 「피할 수 있는 곳」(2013-5)에서 작가는 캔버스 전면에 일정한 방향으로 물감을 흩뿌렸다. 따라서 정면에서 이 작품은 전형적인 추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관객이 화면의 중심에서 벗어나 캔버스의 두께를 감지할 수 있는 측면으로 이동하면, 평소 감상의 대상이 아니었던 캔버스의 측면에서 작은 사람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뛰어가고 있다. 그러나 캔버스의 두께가 끝나는 곳에서 막다른 벽에 부딪힌다. 더 나아갈 곳이 사라져버린 이 도저한 한계 속에서 캔버스는 그 자체로 감옥이 되는 듯하다. 하지만 한발 물러나 캔버스의 전면과 측면을 동시에 조망했을 때, 측면으로 뛰어나간 인물과 전면의 흩뿌린 물감 자국은 서로 조응하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흩뿌려진 물감은 별안간 쏟아진 소나기가 되며, 캔버스의 측면은 비를 피해 달아나는 인물을 위한 피난처로 변모하는 것이다. ● 다른 작품 「상부와 하부」(2017)에서 작가는 같은 크기의 캔버스 두 개를 위아래로 걸고, 푸른 안료를 묽게 개어 상단 캔버스의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칠해 내려갔다. 천천히, 균일하게. 물감이 아래로 흘러간다. 흐름은 느리고 꾸준하게 진행되어 두 캔버스가 맞닿은 경계에 끈적하게 고이고, 끝내 넘쳐 흘러 아래쪽 캔버스를 향해 내달린다. 마침내 그 흐름이 멈추어 선 곳에는 사람의 형상이 자리한다. 그는 머리 위로 흘러내리는 물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간단히 엄습한 한계를 직시하는 인물의 형상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는 이 물감의 흐름에 잠식당할 것인가, 아니면 이 물감의 흐름이 그를 베일처럼 감싸고 보호할 것인가?' ● 이겨레의 회화에 한계에 대한 인식이 가로놓여 있다면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이중적이다. 작가는 이 한계를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짓기보다 그와 더불어 유희하는 방법을 찾고자 한다. 작가에게 회화가 지닌 한계는 그 고유한 문법으로 각각의 장면에 보다 풍부한 이야기를 부여한다. 이야기를 촉발하는 것은 캔버스 안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작가의 회화 속에서 사람들은 재현된 이미지이자 퍼포먼스의 수행자로서, 회화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한계와 적극적으로 관계한다. 캔버스의 틀을 밀어젖히고 물감의 흐름에 저항하는 사람의 형상은 회화가 가진 조건이라는 모더니즘의 의제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회화의 한계로 말미암아 행동하기 시작하며, 그들과 관계 맺음으로써 회화는 비로소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한계는 이야기를 시작하게 하는 필요조건이다. ● 초기작(2010)과 비교해 볼 때, 작가의 회화에서 사람이 갖는 역할의 전환은 실로 극적이다. 선천적 시각 장애로 인한 극심한 근시와 난시라는 작가의 시각적 한계는 그가 한계라는 문제에 주목하게 된 계기였다. 이를 좀 더 직접적으로 다루었던 초기작에서 사람의 이미지는 작가의 시각적 한계를 가장 뚜렷하게 환기하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작가에게는 자신의 시야에 불현듯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리는 인물들의 예상할 수 없는 움직임이야말로 자신의 시각적 한계와 그 어려움을 끊임없이 확인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사람의 이미지에 부여된 역할의 전환은 한계야말로 그 너머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음을 거듭 이야기한다.

이겨레_몇 명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_캔버스에 유채_152.5×227.3cm_2016~7 이겨레_몇 명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_캔버스에 유채_52.5×53cm_2016~7

한계의 승격: 공동의 가능성을 가늠하기 ● 한계를 갖는다는 것은 사적인 일에 그치는가? 작가가 우리 앞에 나타나 대답한다면, 분명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지극히 사적인 자신의 한계를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로 확장한다. 그러다 보면 한계는 어느새 '사람들'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된다. 이 사람, 저 사람을 경유하면서 이들 각각이 가진 혹은 공유하는 한계로 인해 이겨레의 회화에는 좀더 복합적이고 풍부한 의미가 깃든다. ● 「ground」(2015) 시리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공간의 한계를 가늠해본 작업이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대개 물감을 'ground', 그 지지체로서 캔버스 표면에 좀 더 단단히 붙들어 매기 위해 젯소를 칠한다는 기초 작업을 방법 삼아, 화면 위에 일종의 한계선을 만든다. 이 한계선은 일말의 지지체가 존재하는 공간과 그것이 소실된 공간을 가른다. 이 경계의 안쪽은 비좁지만 소극적인 자유나마 허락하는 공간이다. 한 작품에서 작가는 그의 자취방에서 오롯이 휴식을 위해서만 소용되는 공간의 면적을 가늠하여 그려 넣었다. 흰 공간 속 인물들은 짐짓 편안한 모습으로 누워있으나, 주어진 공간의 협소함이 그들의 안락함을 희박한 것으로 만든다. 같은 시리즈의 다른 작업에서 작가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 경계의 바깥을 바라보게 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경계의 가장자리로 몰려가,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관객은 이 무리를 따라 그림 속에 재현되지 않은 무언가를 향하여 시선을 던지게 된다. 작가는 이 작업에 2014년 성남시 판교에서 환풍구가 붕괴되어 16명이 사망한 사건의 보도 이미지를 사용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묻게 된다. 이 비가시적 영역에는 도대체 누가 존재하는가? ● 「몇 명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2016-7)는 캔버스를 표본 삼아 공동의 삶이 가능한 토대의 한계를 실험한다. 이 작업에서 'ground'는 거대한 캔버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거대한 캔버스를 골라 전체를 하나의 색으로 균일하게 채웠다. 그리고 이 거대한 캔버스 위에 작은 캔버스들을 올라갈 수 있는 만큼 올려 두었다. 이 작은 캔버스들은 각기 제 나름의 한계를 가진 한 사람을 품고 있다. 하지만 이 작업에서 공동의 토대는 위태로운 것으로 나타난다. 거대한 캔버스가 포용할 수 있는 작은 캔버스의 수량은 한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작은 캔버스들은 완전히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곧 가장자리로 추락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 명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라는 작가의 물음은 좌절의 목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공동의 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모색에 가깝다. 생각보다 공고하지는 않을지라도 서로 다른 크기의 캔버스가 맞닿아 있는 이 일시적인 상태가 가진 가능성이 그 자체로 주목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 회화에서 공동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작가의 실험은 최근 역사와 시간의 문제까지 나아갔다. 서로 다른 시간에 속한 것들을 하나의 화면 위에 병치했는데, 이런 관심은 대개 특정한 장소가 촉발한 경험에 의해 매개된다. [「해 질 녘」(2018), 「Platz」(2017-2018), 「아버지와 아들」(2017-2018)] 그 중에서도 「슈피너라이의 한 작업실」(2017)은 최근에 작가의 문제의식이 한층 복합적인 문제들로 뻗어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업은 작가가 독일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작업실로 사용했던 공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1884년 처음 세워졌을 당시 이 공간은 방직 공장으로 사용되었다. 작가는 방직 기계의 형상과 작업을 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한 자리에 그려 넣음으로써, 이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같은 공간을 사용했던 여공들과 모종의 대화를 시도한다. 상이한 시간, 계급, 정체성이 교차하면서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런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함께 자리하는 회화적 공간이다. 작가의 작품에서 회화적 공간은 서로의 한계를 뛰어넘어 만날 수 없던 것들과 회합하는 가능성의 장소로 승격된다.

이겨레_슈피너라이의 한 작업실_캔버스에 유채_180×220cm_2017
이겨레_암각화 (페인팅의 방법)_캔버스에 유채_260.6×259.5cm_20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한다는 것 ● 진정 회화가 이러한 가능성을 성취할 수 있는가? 확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회화의 한계와 가능성을 가늠하는 작가는 이 질문 앞에서 겸손하며 성실하다. ● 「암각화(페인팅의 방법)」(2018)는 그 예시다. 이 작품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둘러싼 쟁점에서 출발하는 회화적 기획이다. 1965년 사연댐 건설 이후 반구대 암각화는 매해 물에 잠겼다 드러나기를 반복해왔다. 그 해결은 녹록지 않았는데, 지역의 식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연댐의 수위를 낮추는 일이 울산의 물 부족 사태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캔버스가 특정한 높이로 걸린다는 조건을 이용한다. 네 폭의 캔버스는 서로 다른 높이에 걸린다. 각각 수면 아래와 수면 위를 보여주는 왼편의 두 캔버스에서 암각화는 수면 아래 잠겨 있다. 작가는 오른편의 두 캔버스를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걸었다. 오른편의 두 캔버스에서 수면은 정확히 왼편의 캔버스와 오른편의 캔버스가 걸린 높이의 차이만큼 낮다. 그리하여 오른편의 캔버스에서 암각화는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 물론 이런 조정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며, 한낱 회화가 그러한 능력을 지닐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 회화적 기획에 '페인팅의 방법'이라는 의미심장한 부재를 붙인다. 작가는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한계 조건에 의해 물에 잠기고 드러나는 암각화의 운명에서 언뜻 회화의 운명을 감지했는가? 실로 회화는 무력한 매체일지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보여줄 뿐, 결코 직접적인 해소를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캔버스를 높이 걸어 감히 조정을 시도한다. 그리하여 수천년 전 그려진 암각화가 그러했듯, 소망과 기원을 위한 공간으로 회화를 변모시킨다. 그 안에서라면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희망하고, 평소 마주할 수 없던 것조차 만날 수 있도록 했다. 회화의 물리적 조건을 통해 한계와 소망 사이의 낙차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암각화(페인팅의 방법)」은 한계를 향한 '의지'로 정초된다. ● 나는 이러한 회화적 기획이 예견되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희미한 시야 속에서 자신을 스치고 지나쳐 간 사람들을 회화로 붙들었을 때부터. [「방문자」(2010)] 아마도 이것이 오랜 시간 자신의 한계를 회화와 더불어 고민하고 그 발화의 방식을 정교하게 다듬은 끝에 그가 회화적 공간에 담아낸 가능성일 것이다. 그의 회화는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더욱 절실히 한계에 의지한다.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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