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den Place

이채영展 / LEECHAEYOUNG / 李彩瑛 / painting   2019_1226 ▶︎ 2020_0123 / 일요일 휴관

이채영_길_한지에 먹_130×162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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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서울특별시_문화체육관광부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세줄 GALLERY SEJUL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40 Tel. +82.(0)2.391.9171 www.sejul.com

정적(靜寂)의 한 연구 ; 떠나고 나면 남는 것들1. "외적 황폐(荒廢)뿐만이 아니라, 자기네들의 정신적 지주의, 또는 이제까지 지켜져 왔던 가치 기준의, 뿌리까지도, 그것이 난도질당해, 잿속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메마른 겨울의 쇠락한 도회지, 기업이 떠난 산업지대의 공장과 창고 등 도시를 벗어나면 우리가 만나는 것들이다. 경쟁에서 밀려나고 사라져가는 산업화시대의 퇴색된 기록이기도 하다. 이 암울한 공간에서 앞 세대는 말없이 분투했던 것이다. 지난 시기 산업화 시대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삶의 기억이 결코 사라지지 않은 채 끈끈하게 그 흔적을 남겨놓은 풍경이다. 개인의 취향과 꿈을 가슴 한켠에 깊이 재워둔 채 안정과 풍요를 향해 총력하였던 세대의 성공과 좌절의 연대기처럼 읽을 수도 있다. 이 세계의 주민들은 좌절된 욕망, 채워지지 못한 결핍들로 삶을 꾸려온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건 모두 노동자의 자식이다. 그림을 그릴 때 어려움과 힘든 것은 체력이다. 일상을 꾸려나가면서 작업을 견지하는 이중의 노동이 작가의 현실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작가의 노동과 현실을 감상하고 소비한다. 그림 속 배경은 축소되거나 사라지고 대상에 근접해 화면을 가득 채워 재현하고 있다. 활력을 상실한 빈 공장, 창고, 퇴락한 건물의 외벽에 새겨진 시간과 허물어짐, 얼룩들, 무료함, 공허, 불안, 막막함. 화면은 생명의 활력보다 고요한 정적(靜寂)이 팽배하다. ● 사람처럼 건물도 물건에도 표정이 있다. 시선이 있다. 작가가 대상을 보지만 동시에 대상도 작가를 본다. 우리가 그녀의 그림을 보지만 그림 또한 우리를 바라본다. 존재의 차원에서는 유기체이건 아니건 동일한 수준의 관계를 가지며 상호관계성을 구성한다. 그런데 그녀의 풍경은 마치 넘나들 수 없는 멈춰진 시간대에 있는 것 같다. 이쪽에서는 저쪽으로 건너할 수 없고 저쪽에서는 이쪽으로 건너 올 수 없는 상태가 반복된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운동할 수 없는 것이다. 너무나 막막한 풍경이 펼쳐진다. 세계가 확대되고 욕망이 거대해지면서 좌절과 결핍의 크기와 세기도 덩달아 확대된다. 세대가 거듭될수록 욕망의 충족은 요원하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삶의 지속성은 약화되고 단편적인 조각들로 해체되거나 순간의 현재성만이 현실로 인식되게 된다. 과거도 미래도 모두 사라지며 현재성의 감각도 파편화한다. 영화촬영장처럼 비현실적 풍경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온전히 현실을 재현한 것이다. ● 보도블록의 경계선과 날카롭게 분리되며 살아있는 것들이 복잡하게 얽히며 자란다. 이차원의 평면과 평면적 구조물 사이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변치 않는 힘, 우직하게 정진하는 생명체들 힘과 형상. 그녀의 회화에서 유일하게 활력을 주는 요소는 한가하지만 길가의 나무, 건물에 기대어 오르는 넝쿨의 잎들이다. 너무 약해서 느끼지 못할 정도의 바람에도 나뭇잎은 감각하고 흔들린다. 주위의 모든 것이 석화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풍경이란 이런 것일까? 너무나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그것은 심연의 풍경인 것이다. 너무나 단조로운 풍경이 오히려 너무나 복잡한 차원을 담고 있다. 이채영의 회화는 유희할 수 없는 또는 창백한 유희의 감각을 담고 있다. 우리는 모두가 떠나버린 뒤 남겨진 예기치 못한 낯선 세계에 도착한다.

이채영_길_한지에 먹_130×162cm_2019

2. "나는 철저한 리얼리즘만이 완벽한 심볼리즘에 도달하는 지름길이라고 믿었다." (이성복 『문학앨범』) 자본과 시장의 이념으로부터 이탈한 풍경은 또 다른 자본과 시장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재개발만을 기다리는 거처럼 느껴진다. 좌절된 꿈과 희망의 시대는 석기시대의 고인돌처럼 한때의 위대함을 남기려는 듯 유적처럼 남겨진 채 망각과 침묵이 거주하는 장소가 전면에 펼쳐진다. 역사에 기록되는 현실보다 망각되고 사라지는 현실이 압도적으로 많다.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몰입하려한다. 그러한 이러한 무모한 욕망을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망각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망각이 기억보다 우리에게 더 친근하다. 이채영의 회화를 통해 우리는 무언가를 기억하기 보다는 무언가를 망각하는 존재라는 인식과 마주한다. 작가의 이미지는 기억하려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환상은 교정할 수 없다. 시간은 상처를 남기고 흉터를 새긴다. 반복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 가끔은 이렇게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에서 우리는 현실 또는 일상의 감각을 벗어나 기이한 감각과 체험의 차원으로 도약하기도 한다. 반복은 신화 서사의 기본 특징이다. 대동소이한 풍경의 반복 또한 이러한 신화적 서사를 구성하기도 한다. 이채영의 작업 또한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이미지는 수묵화의 조형미를 감상하기에는 너무 적막하고 우울한 마음 속 표정을 담고 있다. 과거와 미래가 거세된 무표정하고 무관심한 표정의 현재. 사람들이 사라진 거리의 건물과 길과 가로수가 교차하며 작가의 내면이나 관객의 내면을 표현하는 내면의 이미지이다. 우리는 희망도 감정도 빠져버린 다큐멘터리를 대하고 있다. ● 파스빈더(Rainer Werner Maria Fassbinder)의 영화나 빔 벤더스(Ernst Wilhelm Wenders)의 영화는 20세기 인간이 처한 피할 수 없는 실존의 깊은 우울과 고독을 담고 있다. 인간의 내면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해체되어 황폐한 황무지처럼 변해버렸다.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Paris, Taxas, 1984)'도 깊은 우울과 벗어날 수 없는 실존의 상황을 반복한다. 『파리텍사스』의 중년의 남성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뜨거운 태양의 열기 속에 메마른 황야를 묵묵히 걸어가는 상징적 씬이 떠오른다. 텍사스의 황야에서 현대 도시의 상징인 화려한 파리를 떠올리는 상상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당시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든 주인공은 등장인물이나 인물들 간의 극적 긴장이 아니라 바로 그들을 둘러싸고 영화 내내 펼쳐있던 황량하고 적막한 풍경이었다. 과거의 사건도 단지 지나버린 사건일 뿐 결코 해결되지도 치유되지도 않은 채 깊은 상처 그대로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것은 냉혹한 현실이자 동시에 환상적 이미지였다. 현실은 이미지에 포섭되어 우리를 낯선 세계의 이민자들과 같은 혼란에 빠뜨린다. ● 짐 자무시(Jim Jarmusch)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Stranger than Paradise,1984)' 또한 유머러스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우리 내면의 벗어날 수 없는 고독과 우울을 흑백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대중적 흥미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영화들은 일반적인 기승전결의 스토리라인을 따르지 않는다. 시작과 끝, 갈등과 클라이막스 등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영화 전체가 풍기는 그 분위기,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느끼면 그만인 것이다. 경험은 반복되는 것인가. 이채영의 풍경은 그와 닮아 보인다.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작가들은 사람들이 잊으려 하는 상처의 전부 또는 일부를 예술의 이름으로 차용하곤 한다.

이채영_이상한 오후_한지에 먹_148×140cm_2019
이채영_이상한 오후_한지에 먹_130×193cm_2019
이채영_이상한 오후_한지에 먹_130×162cm_2018

3. 그림에 집중하고 그것을 반복하는 가운데 우리 일상은 죽음에 이른다. 우리는 어떤 미적 또는 도덕적 또는 형이상학적 종착역에 도착하는가? 그다음에는? 풍요의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빈곤의 시절을 회고할 수 있다. 비곤 가운데 빈곤의 인식을 약화되거나 실종된다. 빈곤의 시절 우리의 감각은 풍요를 향해 몰입하고 매몰된다. 풍요로 넘치는 풍경은 동시에 너무나 비곤한 풍경이기도 하다. 가난의 위기가 지나버린 또는 곧 도래할 가난의 위기를 예감하는, 어쩌면 작가의 풍요의 시절에 예민해지는 감각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 풍경은 수평의 구조가 강조되는 건물이나 벽과 나무와 덤불과 낮은 높이에서 조망하는 저수지나 늪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마치 식물학자의 식물도감처럼 풀과 나무, 나뭇잎 하나하나를 일일이 채집하듯 기록한다. 감정을 절제한 상태에서 작업한다. 가능한 채색을 단조롭게 하거나 완전히 제거한 모노크롬의 채도와 대상의 정교한 관찰과 기록으로 채워진다. 그리지 않은 여백마저 미세하게 붓질로 가득 찬 것처럼 느껴진다. 늪이나 저수지, 황량한 벌판 위나 도시 외곽에 띄엄띄엄 자리한 오래된 창고들, 공사장을 가린 임시 방벽과 잡초들이 조감된다. 오래되고 퇴락한 시멘트벽과 습기에 침식되어 썩고 있는 벽, 잡초들, 방치된 장소의 전형성을 담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개별적으로 분해되어 고립된 일상을 담고 있다. 일상은 사물화 되고 파편화되어 무채색의 태양광으로 아주 낮은 빛을 발할 뿐이다. ● 작가는 대상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찰하며 조밀하고 꼼꼼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사람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와 대상의 관계만이 드러난다. 그러나 건물과 장소는 비밀스런 방식으로 사람을 기억하고 관계를 재생한다. 망각되는 것들은 건물이나 장소, 풍경이 아니라 그 안에서 복작거리며 아귀다툼 하는 사람들이다. 연상되는 이미지와 관념의 연쇄를 통해 작가가 속한 사회, 시대와 장소, 과거의 관념과 시각이 침범한다. ● 일상과 현실의 욕망과 관계가 증발된 곳에서 솟는 회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채영의 이미지는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의 적막감, 종교적 차원의 적멸(寂滅)의 형상일지도 모른다. 오래전 욕망이 모두 사멸해 버린 뒤의 풍경이다. 사람들의 구체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공간이 균일하게 나타난다. 너무나 균일하고 조용하며 규칙적인 상황에서는 아주 미세한 변화나 소음도 마치 천둥처럼 느껴진다. 박제화 된 일상의 변화, 내면의 작은 감정의 변화 또한 마찬가지다. 단독자 또는 개별자로서 실존하는 개인의 독립적이자 동시에 원자적 고립의 상태는 일종의 생명과 문화를 영속할 수 없는 불임상태이다. 그러나 불임의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수많은 생명 탄생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숨마저 멈춰 버린, 균일하지만 무언가 떠나버린 텅 빈 이미지는 의미의 부재와 동시에 의미가 탄생하는 순간을 은유한다. 시간이 멈춘 장소. 모두들 떠난 빈자리. 텅 빈 공간.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 김노암

Vol.20191226c | 이채영展 / LEECHAEYOUNG / 李彩瑛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