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아닌 섬

허미자展 / HEOHMIJA / 許美子 / painting   2020_0107 ▶︎ 2020_0116 / 월요일 휴관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130×194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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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0_0109_목요일_05:00pm

후원 / 내일신문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내일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3길 3(내일신문) B2 Tel. +82.(0)2.391.5458

섬, 아닌 섬-허미자의 회화 ● 방향을 가늠할 길 없는 너른 공백 속에서 문득 어떤 그림자들이 나타난다. 그것들은 서서히 눈앞에서 자라난다. 순식간에 화면을 가득 채울 듯이 다가왔다가 아득히 멀어지는 그림자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안개 속을 항해하는 사람들은 이따금 홀연히 떠오르는 섬에 눈길을 빼앗긴다. 이윽고 섬의 실루엣은 시야를 가득 채우지만 거기에 익숙해질 때쯤 섬은 다시 사람들의 눈길을 벗어나 곧 안개 속에 신기루처럼 잦아든다. ● 화가 허미자의 붓끝에서 하나 하나 태어나는 어두운 색의 묵흔(墨痕)들은 막막한 화면 공간에 다도해의 섬들처럼 산포된다. 그러한 붓의 흔적들은 밋밋한 평면공간을 들쑥날쑥한 복합적 공간으로 만든다. 다양한 면적과 형태를 가진 얼룩들 사이에 펼쳐지는 공간은 얼룩들을 고립시키기보다 그것들을 더욱 크고 넓은 차원으로 밀어넣는다. 그럼으로써 붓의 자취들은 독자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다른 얼룩들과 함께 다층적 풍경을 이룬다. 섬, 또는 묵흔들은 다른 흔적들과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며 서로 가까워지거나 멀어진다. 가까이 있는 얼룩들은 서로 환영처럼 겹쳐지고 스며들며 서로를 당기거나 밀어내고, 지우거나 살려낸다. 빈 공간에 여기저기 떨려 나온 얼룩들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가진 공간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130×194cm_2019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145×110cm_2019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145×110cm_2019

섬의 비밀은 보이지 않는 물 속에 잠겨있는 더 큰 몸의 일부라는 데에 있다. 그것들은 서로 멀리 있는 다른 섬들과 따로 떨어져 고립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물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섬들은 육지와도 이어져 있다. 그들은 하나의 모체로부터 다른 곳에 솟아나있는 다른 모양의 가지와 잎새들이다. ● 오랫동안 허미자는 나무나 식물의 몸통에서 따로 떨어져나온 듯이 보이는 가지나 잎새의 일부를 아크릴 물감으로 밑칠을 해놓은 화면의 바탕 위에 먹물을 사용하여 거친 드로잉으로 그려내는 작업을 해왔다. 그것들은 한계지워진 사각의 화면에 잘려서 고립된 개체로서가 아니라 각자가 화면 밖의 더 큰 몸체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섬이 섬이 아니라 육지의 일부이듯이 더 큰 실체의 단편들처럼 불현듯이 드러나 있다. ● 화가 허미자가 이들의 모체로서 어떤 커다란 존재를 구체적으로 전제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그것이 그녀의 작업에서 필요한 요인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개체가 개체로서 독자적일뿐만 아니라 개체 이상의 존재가 되는 것은 개체가 자신과는 또다른 모체를 늘 생각해서가 아니듯이 그것들은 우선 홀로 존재하지만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더 큰 존재의 부분으로서도 존재한다.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각 20×30cm_2019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각 20×30cm_2019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30×20cm_2019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각 40×40cm_2019

눈에 보이는 무수한 사물들의 구체성이 흐릿해지는 지점에서 상상의 여백이 한껏 둥지를 튼다. 여백은 보기보다 넓고 깊게 그것이 에워싸는 사물들의 막막한 밀도를 초월한다. 여분의 공간에 자리하는 얼룩들은 무한히 상상력의 영토를 넓혀간다. 그녀의 붓이 그려내는 실루엣의 흔적들은 각자의 캄캄한 어둠 속에 다양한 형태와 풍부한 표정을 숨기고 있다. 동양화의 필법에서 나오는 묵흔 같기도 한 그것은 그러기에 동양적인 현(玄)의 오묘함과 깊이를 함축하고 있다. 실루엣이 감추고 있는 보이지 않는 표정들은 그래서 더욱 깊은 상상의 여지를 숨기고 있다. 먹물의 생생한 ● 기세와 농담을 한층 더 누그러뜨리는 마감재인 미디움의 피막 아래에서 그것은 가장 온전한 심급으로 살아있다.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145×110cm_2019
허미자_Untitled_혼합재료_145×110cm_2019

동양의 사유를 깊이 있게 연구한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스와 쥴리앙(François Jullien)은 '큰 이미지'는 형태를 갖지 않는다고 말했다. 만일 근대 이전의 서구인들이 그랬듯이 하나의 시점만으로 대상을 파악하고 고정시킨다면 그 대상은 수많은 다른 시점들을 잃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회화가 대상을 하나의 분명한 형태로 잡아두기 위한 고정된 시점을 버리고 다시점 또는 무시점을 향해 진화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묵(墨)의 그윽함이 가진 오묘한 깊이에 세상의 이치를 내맡기고 있었다. 따라서 허미자의 회화적 태도는 오히려 이러한 동양의 정신에 닿아있는 듯이 보인다. 그녀의 필흔(筆痕)을 파생시키는 보다 더 큰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하나의 명확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허미자의 회화가 숨기고 있는 함의는 더욱 크다. ● 이처럼 그녀의 묵흔, 혹은 섬은 섬이되 섬이 아니다. 섬은 더 큰 세상을 숨긴 하나의 표정이다. 그것은 구체성을 생략하고 묵묵히 드러난 그대로 담담하게 세상 만물을 받아들여 고요하게 껴안는다. ■ 서길헌

Vol.20200107b | 허미자展 / HEOHMIJA / 許美子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