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도 아닌

이은미展 / LEEEUNMI / 李銀美 / painting   2020_0421 ▶ 2020_0502

이은미_바깥_캔버스에 유채_45×54cm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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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

이 세상의 끝, 다른 세상의 시작 ● 이은미의 「어디도 아닌」 전은 '어디'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듯, 어떤 자리나 공간에 대해 말한다. 조너선 스미스의 「자리잡기 to take place」에 의하면, 구체적 자리(place)와 추상적 공간(space)은 차이가 있지만, 어떤 구체적 자리로부터 시작되어 추상적 공간으로 마감되는 이은미의 작품은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경계 위에 존재한다. 「자리잡기」는 공간을 명사로, 자리를 자리잡기라는 동사로 이해하면서 기존의 종교적 해석의 중심보다는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시한다. 이 중심은 결국 없을 수도 있으며, 부재하는 중심을 양파처럼 에워싸는 기나긴 미로 속의 여정만 남는다. '중심의 상실'(제들마이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형이상학적 정점(定點)으로 작동하는 중심보다는 자리를 찾아가는 시간적 과정이 더욱 설득력이 있으며, 그것은 이은미에게도 그렇다. 예술적 서사는 이 시간 속에서 펼쳐지고 접혀진다. 이렇게 목적지가 불분명한 이동인 유목은 현대문화 키워드 중의 하나가 된다. ● 어느 장소의 부분인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일단 벽, 바닥, 계단, 조명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관객들은 '여기가 어디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 마치 어디인지 알면 바로 작품의 진의가 파악될 듯이 말이다. 추상화가 아니면서도 교묘하게 지시대상을 괄호 치는 작품들은 그 어디도 될 수 있는 가변성을 가진다. 길은 어디로도 뚫려있다. 비교적 정확하게 대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둥근 빛」은 갤러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명이지만, 천정 모서리의 선은 언뜻 수평선이나 지평선으로 확장되고 구멍은 항성(태양) 또는 위성(달)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어디를 선택하든 비슷한 분위기에 잠겨있는 그림들은 마음의 풍경이기도 하다. 상상의 공간이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넣었다가 빼낸 공간이라는 것이다. 지하의 탈주자에게는 희망의 구멍일 수도 있다. 조너선 스미스가 차이를 둔 자리와 공간이라는 의미를 포괄하기 위해, 일단 '자리 없는 공간'(블랑쇼)이라고 해두자. ● '어디도'에 바로 따라붙는 '아닌'은 자리나 공간의 불확실성을 말한다. 전시부제는 황정은의 소설집 「아무도 아닌」에서 영감 받았다. 그 소설을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말라르메, 카프카. 블랑쇼, 바르트 그리고 누보로망의 소설가들이 묘사한 현대의 익명성과 무관치 않으리라 추측한다. 대중적 익명성은 작가라는 주체에게도 연동되어 '작가의 죽음'(바르트)이 주장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고는 (후기)구조주의를 비롯한 이론적 배경이 있는 문학적 논의지만, 이를 미술에 적용시킨다면, 르네상스식 고전주의나 이를 19세기의 당대성에 적용시킨 리얼리즘으로 대변되는, 확고한 재현의 체계가 해체되는 과정과 밀접하다. 재현의 대상이 불확실해지면, 재현의 주체 또한 그렇게 된다. (문학에 비해)그림이라는 구체적인 형식은 '아닌'이라는 부정어를 모호하게 한다. 이항 대립적 사유의 보편화는 부정적인 정의를 쉽게 이해되는 어법으로 만든다.

이은미_벽과 벽_캔버스에 유채_60×50cm_2019

가령 우리는 천국을 잘 모르지만, 그곳이 '이세상이 아닌 곳'은 분명하다. 근대적 담론의 확고함에 비해 느슨한 근대 후기의 어법은 ' --이다' 대신에, '--이 아니고'의 연속으로 무엇인가를 규정하려 한다. 가령 주체는 여성이 아니고, 아시아인이 아니고, 이슬람교도가 아니고, 동물이 아니고, 성적 소수자가 아니고....궁극적으로 타자가 아니다. 이 부정어는 계속 나열될 수 있다. '어디도 아닌'에서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인 유토피아('어디에도 없는 곳')의 예를 들어보자. 리차드 해리스는 「파라다이스」에서, 유토피아는 1516년 토마스 모어가 이상적 사회를 주제로 쓴 책제목으로, 그리스어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뜻의 outopia와 '완전한 곳'이란 뜻의 eutopia사이의 모호한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고 썼다. 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토피아와 유토피아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란다우어는 현실의 모든 질서를 'topie'라고 한다면, 이상은 역사의 전환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라고 한다. ●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 의하면, 무정부주의자인 란다우어는 혁명이나 유토피아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그 밖의 모든 토피아(존재질서)를 악한 것으로 보았다. 유토피아는 토피아와 상보적인 관계이다. 칼 만하임의 주장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모든 기존의 질서가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토피아 중 한 가지 양식일 뿐이라는 결론이다. 그것은 제한된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은미의 그림에서는 무엇이 아니기 위해 그 무엇이 일단 드러나야 한다는 역설이 있다. 그래서 현대의 예술작품에서는 '부재'와 '흔적'이라는 관념이 그렇게도 많이 사용되는지도 모른다. 이중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의 작품들은 확실하고도 단호한 면이 있다. 개인의 성향을 드러낼 수 있는 붓질은 감춰지고, 이미지 또한 선과 그 연장인 면으로 이루어진다. 본 것을 기억하기 위해 찍은 사진적 프레임이 화면 내부의 선의 배치를 결정한다. 선들은 관계적이다. ● 차이의 관계 속에서 여러 좌표들이 설정된다. 작가의 동선을 알 수 있는 어떤 기표도 생략된다. 현대 소설가들이 '특징 없는 인간'을 묘사하려 했을 때, 그들이 있었을 법한 특징 없는 공간/자리이다. 회색과 보라색이 주조인 색감도 서늘하다. 형태(포지티브) 보다는 그림자(네가티브)에 가깝다. 따스한 노랑색이 부족한 색감은 빛이 포함되어 있다. 선택된 자리는 대개 인공적 조명에 의해 다양한 드라마가 연출된다. 배우 없는, 심지어는 사물도 없는 드라마가 그림의 주인공이다. 작가는 이렇게 비워둔 시공간을 빈 서판(書板)으로 삼아 관객들로 하여금 쓰기를 자극한다. 시작은 작가가 했지만, 마무리는 관객이 한다. 그 반대편에 읽기가 놓인다. '---읽기'는 계몽적 개괄서의 제목으로 자주 활용되며, 롤랑 바르트가 소비라고 비판하고, 수잔 손택이 해석이라고 비판한 문화산업의 국면을 말한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결국 연동되어 있지만, 시작을 책임지는 일, 즉 작가의 과업은 여전히 무겁고 어려운 것으로 남아있다.

이은미_둥근 빛_캔버스에 유채_60×41cm_2019

'아닌'이라는 방식으로 보면, 이은미의 작품에서 펼쳐지는 역설의 세계가 조금은 분명해질지도 모른다. 우선 아닌 것을 살펴보자. 텅 비어있다시피 한 작품은 소유와 지배를 향하는 도구적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다. 소유와 지배는 향유와 변화와 반대 항에 놓인다. 단편적 정보로 나타나는 빈곤한 지식들은 가슴이나 머릿속에 머물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뇌까려지곤 하며, 대화를 빙자한 독백은 작품의 개념이나 작가의 사고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작품은 침묵하는데 작가만 떠드는 상황이다. 특히 가다만 여정은 원래의 맥락을 탈구시켜 왜곡까지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 속에서도 대화를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이은미의 작품은 말이나 생각보다 시선이 우선한다. 그것은 작가가 세상의 구석들을 그런 식으로 먼저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을 주시하면서 거기에서 끝없는 이야기꺼리를 끌어낸다. 관객의 상상력은 작은 조명구에서 우주적 웜홀을 보고, 계단에서 주름진 시공간을 보는 식으로 확장될 수 있다. ● 작가는 주변이나 소외 등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구석들을 주목하기는 하지만, 소박한 감정이입은 아니다. 거기에는 바라보기 특유의 거리감이 있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본다는 것은 거리를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본다는 것은 그것과 접촉하지 않을 수 있는 힘, 즉 접촉 속에서 오는 혼돈을 피하고자 한다. 블랑쇼에 의하면 본다는 것은 이러한 분리가 만남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보는 방식은 '감각적인 접촉'인데. 여기에서 '가시적인 영역과 비가시적인 영역 중 그 어느 것도 다른 하나에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블랑쇼). 이은미는 자신이 조우했던 장소들에서 '딱딱함, 흩어짐, 멀리 보이는...' 등의 감성을 끌어내곤 한다. 이야기는 바로 앞선 내용으로부터 꼬리를 물고 이어지므로, 이 침묵속의 대화는 할수록 할 말이 많아지는 생산성을 가진다. 대부분의 독선적 대화, 즉 독백은 주체가 임의적으로 확정한 시나리오를 반복해서 강요한다. 반면 침묵의 대화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계속 틀어가는 길을 만든다.

이은미_한 조각_캔버스에 유채_65×50cm_2020

거기는 아무것도 없는 '어디도 아닌' 곳이지만, 정적이지는 않다. 그곳은 '무한히 움직이고 있는 비어있음'(블랑쇼)의 자리/공간이다. 최근 몇 년 간의 전시부제인 「어떤 곳」 (2019), 「건너편」 (2018), 「멀고도 가까운」 (2017), 「스미다」 (2015)를 보면, 공간적으로 경계에 걸쳐 있는 경우가 많고, 그곳들이 경계인 한 잠재적인 움직임이 있다. 대개 어딘가 가다가 멈춰 서 본 곳/것들이다. 그러나 본 것의 핵심은 뺀다. 이전작품에서 이러한 선택의 극명한 예는 허공에 떠있는 외투그림이다. 외투에서 사람을 뺀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황당한 작품에서 '모자가 사람을 만든다'는 서양 속담처럼 물신적 사고에 대한 비평을 볼 수도 있다. 기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은미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기표를 지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품 「사이」는 단순하게 벽에 붙은 하얀 종이를 보여준다. 뭔가 그려져 있었을 표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벽에 붙은 종이를 그린 캔버스는 동어반복처럼 그림에 대한 그림이다. 거기에는 그림 자체에 주목하기 위해 지시대상을 삭제했던 현대미술의 역사가 있다. ● 그러나 추상화가 말레비치의 화법과 다르게, 종이(삭제된 그림)는 벽에서 살짝 들려서 그 사이의 그림자를 강조했다. 이 '그림'에서 주목할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빈 그림자다. 작가가 이미지를 빼버린 것은 환타지 소설의 원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차원을 넘나드는 거울처럼, 이동하기 위해서다. 재현적 원근법이 외눈박이 시선을 고정한다면, 이 무명의 장소/공간은 '빈 종이처럼 텅 빈 장소였다. 항상 걷고 싶어 했던 곳,...그것은 나의 내면을 찾아가는 여정이다'(2018년 작가노트) 중심이 아닌 주변, 동일자가 아닌 타자, 전체가 아닌 단편, 읽기 보다는 쓰기, 고정이 아니라 과정을 선택하는 이은미의 작품에서 형태 대신에 그림자를 종종 주인공으로 나서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작품 「바닥」에서 약간 볼륨감이 있는 사선은 대상을 뺀 그림자를 보여준다. 원래의 대상에 대한 기억이나 흔적은 없다. 또 다른 작품 「바닥」은 바닥과 벽이 만나는 선을 보여주는데, 꺽어 가로지르는 그림자가 무엇의 그림자인지는 공간만큼이나 오리무중이다.

이은미_옆에 있는_캔버스에 유채_91×113cm_2019

작품 「한 조각」은 벽에 비친 반투명한 그림자로, 대상이 아닌 반영 상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그림자는 바로 대상 옆에 비켜서 있는 것이며, 작가는 앞이 아니라 옆을 주목한다. 검은 사각형이 공간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여주는 작품 「짙고 단단한」은 모서리를 만나 굴절되는 빛을 견고한 본질이나 실체처럼 내세웠다. 이은미의 작품은 덕지덕지 많은 칠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작가가 표현하려는 심연이 암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심연은 깊이 있게 칠해지지 않은 표면에 있다. 단지 친숙해서 확고해 보일 뿐인 일상(그리고 상식)은 명확한 좌표축 위에 배열되어 있는데, 이은미의 작품에서는 이 좌표축이 불안하다. 좌표가 없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선택의 유희를 통해서 다양화된다. 그것은 근대의 절대적 시공간 개념을 상대화시키는 '좌표적 정의'의 공간이다. 세상의 어느 자리/공간을 이루는 구석은 대개 한 개 이상의 선으로 이루어진다. ● 어떤 작품은 매우 많은 선이 교차한다. 어떤 것은 인체의 일부를 떠오르게 하는 육감적인 선의 만남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무엇의 일부인지 가늠하기 힘든 해체적(구성적) 선의 유희가 있다. 모서리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작품 「모서리들」은 무엇인가의 일부인 단편이 전체의 관계를 모호하게 한다. 그것은 공간의 유기적 관계를 해체한다. 모서리를 이루는 면이 화면을 가로지르면서 공간적 단층을 이루는 이 작품은 평면, 즉 추상에 가까워진다. 작품 「층」은 회화라는 창을 가득 메운 층의 일부로, 접힌 면 같은 효과가 있다. 벽과 바닥 사이의 모서리가 짙은 음영이 있는 작품 「벽」은 원근감이 있지만, 모서리를 이루는 선들이 화면의 프레임에 닿아있어 평면성을 강조한다. 세 개의 모서리 선이 모이는 작품 「구석」은 여성의 은밀한 신체 부위같기도 하다. 무엇의 일부인지, 무엇에 사용되는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가 한가운데 자리한 작품 「어떤 것」에서, 미지의 대상은 어디선가 들어온 빛을 다양한 강도로 공간에 배분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작품 「벽과 벽」은 물리적 공간에 의한 선과 광학적 효과에 의해 생겨난 선이 거의 동급으로 작용한다. 회화라는 좌표축 안에 또 다른 좌표축들이 설정하는 유희가 행해진다. 회화의 논리로 소화된 기하적 상상력이다. 작가가 장황하게 어떤 기하학이나 형이상학 등을 논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에는 그러한 이지적 감성이 녹아있다. 혹자는 보잘것없는 구석들을 소외라는 근대 특유의 상태를 느낄 수 있다. 막장이라는 어둡고 텁텁한 공간과 비교하긴 그렇지만, 나는 이은미가 그린 세상의 구석들에서 막장을 보았다. 점점 사라져서 탄광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은 이때, 막장은 더 이상 갈데없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된다. 그런데 막장에 가야 귀중한 자원을 캘 수 있으며, 워낙 깊이 들어가다 보니 뭔가 캐냈어도 세상으로 다시 돌아나갈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작업장인 막장이 무덤이 되어, 보석을 품은 채 발굴되는 유해가 가득한 곳이 바로 예술계 아닌가. ● 문예사조사는 그러한 추세가 대세가 된 시대를 근대라고 정확히 규정한다. 근대의 예술가는 지도가 없거나 지도가 더 이상 지시하지 않은 막장에 있다. 그곳에서 예술가들은 길을 만든다. 그 길은 때로 탈주로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애초에 작가가 막장으로 파고든 것이 탈주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중심에 놓여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아름다움은 너무 닳고 닳아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을 때, 탈주는 세상의 지배적 질서가 가리키는 장소의 아래 또는 옆을 향할 수 있다. 작품 「옆에 있는」은 굳게 닫힌 셔터 문을 보여주는데, 셔터의 수평선들의 녹슨 얼룩들은 시간의 침식을 드러낸다. 이 열리지 않는 철문을 통과하기 위한 작가의 전략은 수직선 보다 많은 평행선들을 활주하는 것, 그 평행선 위에 불규칙적으로 침식되어 가는 약한 부분을 활용하는데 있다. 작품이 암시하는 바로는, 길은 앞이 아니라 옆에 있다. 벽과 모서리 등 주로 실내의 구조물 일부가 소재로 등장하는 이 전시의 작품 중, 유일하게 바깥이 암시되는 작품은 「바깥」이다. 그것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통해 상승 감을 준다.

이은미_구석_캔버스에 유채_45×53cm_2019

그렇지만 바깥의 절정인 하늘은 작은 퍼즐조각처럼 화면 한 귀퉁이에 자리할 뿐이며, 정작 작가는 계단참 아래의 음영을 미세하게 표현하는데 집중한다. 칙칙한 시멘트 구조물과 대조되는 화면 귀퉁이의 하늘색은 진짜 하늘과 관련된 색일까. 이전 작품에서 계단이 나오는 「도달할 수 없는」을 염두에 둔다면, 비약이든 단계별 이동이든 초월적 방향의 이동(또는 탈주)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전망이 밝지는 않다. 초월은 관념적이다. 관념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엄밀하게 규정되지 않을 때 손쉬운 타협책이 된다는 점이다. 이은미는 모호한 것을 그려놓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하는 부류는 아니다. 명료함은 작가가 지향하는 또 다른 축이다. 위로의 방향은 초월적이며, 종교의 역할을 계승한 근대예술에서의 선택지이기도 하다. 아래는 그 반대방향이다. 신이 있으면 악마가 있듯이 말이다. 이은미의 작품은 위도 아래도 아닌 옆을 가리킨다. 현대과학이나 철학이 주목하는 뫼비우스적인 시공간 모델은 바로 옆이 역변의 자리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 「그 옆에」라는 작품제목도 있다. 옆은 확실하지만 무엇의 옆인지는 불확실하다. 구상에서 시작해서 이제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선까지 진입했지만, 실재감을 위해 여전히 추상으로의 선을 선뜻 넘지 못하는 작가는 대상의 기표를 제거하거나 프레임 조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구상과 추상을 왕래한다. 옆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또는 중요하지 않지만), 무엇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 존재는 옆 공간의 위상에 영향을 준다. 현대우주론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상자같이 담아내는 공간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주인공이라는 가설을 내세운다. 안보이지만 영향력이 있는 무엇이 있다. 마치 비어있는 상징처럼. 조너선 스미스는 비어있는 상징을 설명하기 위해 레비 스트로스처럼 영(0)을 예로 든다. 그에 의하면 영(0)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자체로는 의미가 비어있으면서도 중요한 차이를 표시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숫자들과 결합할 때면 의미로 가득 찬다. 그것은 불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사유에 연속성을 가능하게 한다' 이은미의 작품에서 옆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의미작용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 구조주의적 사고에 의하면, '그 요소들은 기표이면서도 동시에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요소들로 구성된 체계'인 '무수한 기호들'로 기능한다. 옆은 '순수한 차이내기'의 결과이다. 우리말에 '삐딱선 탄다'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삐딱선은 맞서지 않지만 물러나지도 않는다. 승화도 퇴행도 아니라, 비스듬하게 피해간다. 옆이 중요할 뿐 무엇의 옆인지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정확히는 관심도 없다. 중요한 작품이 걸려 있었을 전시장의 한 구석이 생각나는 작품은 빈 바탕이나 그림자로만 나타난다. 이은미의 '어디도 아닌'에서 부정적인 것만을 보는 것은 편파적이다. 근래 몇 년간 매년 전시해온 그녀의 작품들에는 피난처의 아름다움 또한 포착되어 있다. 작년에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에서 전시한 「어떤 곳」에서, 시골 쌀 창고가 서있는 황량한 풍경에는 예술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 있다. 미술에 비해 서사성이 강한 영화에서 지고의 아름다움 장면은 탈주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이은미_사이_캔버스에 유채_91×73cm_2019

영화 속 탈주자인 델마와 루이스가 '우리 다시는 잡히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주행을 하며 보았을 멋진 풍경이 떠오른다. 그곳은 이 세상의 끝이자 다른 세상의 시작일 터이다. 요즘은 에베레스트 산도 줄 서서 등반할 만큼 번잡하다고 하는데, 가기 힘든 곳에 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색다른 비전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멀리 있는 유명한 곳에 가지 않는다. 일상적 주변, 정확히는 자기가 있는 곳의 옆이다. 위는 초월을 아래는 퇴행을 앞은 대결을 뒤는 추리를 요구할 것이다. 어떤 방향이든 무리수가 따른다. 더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것을 하기 위해 투입되는 에너지가 크다. 그러나 이은미가 바라보는 옆은 큰 몸동작이나 힘겨운 이동을 전제하지 않는다. 이 작은 그림들은 세상에 대해서도 그렇게 대응한다. '어디도 아닌' 전에 제시된 세상의 구석들은 CCTV가 있다면 사각 지대에 놓여있을 이상한 자리/공간들이다. ● '어디도 아닌'은 미셀 푸코가 근대의 감시 및 조절 기관인 패놉티콘을 설명하면서 비유한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즉 이전시대 신을 닮은 편재하는 시선에 대응 할 수 있는 장소이다. 거대한 감시의 그물망으로 포착하기 힘든, 포착된다 해도 그 의미와 기능을 알 수 없는 그래서 권력이 간과할 수 있는 자리/공간이다. 여기에 주변적인 타자의 시선이 닿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어디도 아닌' 이 구석진 곳에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중심지향성의 압력이 느슨한 그래서 소외와도 연결되는 해방구이다. 현실보다는 환상으로 간주되는 영역이다. 한 사회의 상징적 우주를 지배하는 시선이 주목할 만한 코드로부터 탈구된 영역이다. 물론 탈영토화는 재영토화될 수 있다. 패놉티콘이 거시적이라면 '어디도 아닌' 구석들은 미시적이다. 우리 속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때의 그런 우묵한 장소이다. 현대인은 집에 있으면 직장에 자리가 있는 양, 직장에 있으면 집에 자리가 있는 양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나 집과 직장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 이전 시대처럼 자기가 태어난 집과 천직이 없는 세상이다. 누구와도, 어디에서도 교환 가능한 존재를 요구하는 코드의 세계에서 집과 직장만큼 불확실한 것도 없고, 그 연장선상에서 집과 직장의 연장이랄 수 있는 주체 또한 그러하다. '어디도 아닌', '아무도 아닌' 등과 같은 흐릿한 또는 시적 표현은 2015년 개인전 제목 「스미다」처럼 우리 옆에 어느 날 갑자기 다가와 있다. 이은미의 작품은 이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없어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추동된 탈주의 결과물이었지만, 그것들은 현실을 지시한다. 또는 현실에 도달한다. 현실은 우회로를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는 미지의 대상이지 자명할 출발점이 아니다. 나, 그리고 예술가 또한 마찬가지다. 도달점을 출발점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서 모든 오류와 독선이 야기된다. 이은미가 보고 표현한 세상의 구석들은 일견 잔잔하다. 그 현실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해서 머리가 얼얼하다. 현실은 단순하지만 거기에 내포된 진실은 복잡하다. 이때 예술은 현실을 각성시키는 아름다운 폭력이다. ■ 이선영

Vol.20200421b | 이은미展 / LEEEUNMI / 李銀美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