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좋은 드로잉 Organic Drawing

윤상윤展 / YOONSANGYOON / 尹相尹 / painting   2020_0502 ▶ 2020_0524 / 월요일 휴관

윤상윤_몸에 좋은 드로잉 organic drawing_오일파스텔_24.6×35.5cm_2019

초대일시 / 2020_0502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토요일_12:00pm~09:00pm / 일요일_12:00pm~06:00pm 화~금요일_05:00pm~09:00pm / 월요일 휴관

과수원갤러리 Gwasuwon Gallery 서울 종로구 삼청로 106-9 (삼청동 56번지) 3층 Tel. +82.(0)2.733.1069 @gwasuwon

(누구의) 몸에, (어떻게) 좋은, (무슨) 드로잉인가. 분명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을 테니, 제목에 대한 의문점은 우선 뒤로 미뤄두겠다. ● 『몸에 좋은 드로잉(Organic Drawing)』은 미술감독 윤상윤의 첫 개인전이다. 동명의 연작 「몸에 좋은 드로잉」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유려한 곡선의 반복이다.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는 선들, 그리고 그 선이 서로 맞닿아 이룬 어둑한 그림자. 직선으로 가득한 공간 속에서 암흑이 탄생할 때, 징검다리마냥 띄엄띄엄 그려진 선 사이에서는 들숨과 날숨이 올라온다. 이와 동시에, 공기층의 흔적을 에둘러 그린 듯한 형태는 조약돌이 되어 가늠할 수 없는 무게로 전시장 한가운데에 놓인다. 그들은 가끔씩 선명한 상상의 세계로부터 색채를 얻고, 어둠을 더듬는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자세히 관찰한 결과라기보다 손목의 처연한 움직임이 종이 위에 새겨진 결과다. 특정한 작품을 만들어내겠다는, 다분히 의도적인 틀이 없어도 작가의 손목 스냅은 정해지지 않은 길을 따라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한다. 그리하여 윤상윤의 드로잉은 신체 자체로부터 시작된다. 다만 그것은 형상을 구축하기 위한 기계적 반복이 아니기에 감상자의 눈앞에 정답을 내밀지 않는다. 바로 이때, '(무슨) 드로잉을 그렸다'는 환상이 깨진다. ● 이후 펼쳐지는 「under the sea」, 「잎사귀」 연작과 「까마귀」 연작은 단순히 발에 채인 잡초나 길을 가던 중 발견한 새를 그린 기록물이 아니다. 인간이 오랜 기간 천착해온 자연의 소재를 다시금 탐색하겠다는 시도는 더더욱 아니다. 그보다는 제유법(提喩法)을 통로 삼아 펼친 '몸'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앞선 「몸에 좋은 드로잉」 작업이 그리는 행위로써 현존하는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었다면, 윤상윤의 다음 연작은 다른 생(生)을 응시하는 단계 그 자체다. 즉, 우리와는 사뭇 다른 세포를 지니고 있을 동물과 식물들의 신체에 작가의 시선이 도달한다. 윤상윤의 화면은 마치 영상 스틸 컷인 듯 2차원에 차분히 존재하지만, 되감기 버튼, 재생 버튼, 정지 버튼을 번갈아 눌러 만들어낸 내부의 대상에는 아직도 운동감이 엉겨 붙어 있다. 「잎사귀」의 잎맥과 「까마귀」의 깃털을, 그리고 파도를 따라 흔들리는 「under the sea」의 표면을 바라본다. 그들이 가느다란 선으로 묘사되었든, 투박한 면으로 묘사되었든 속도감은 미미하게나마 주어진다.

윤상윤_이인세계 二人世界_목탄, 콘테_36.6×25.6cm_2018

이러한 움직임은 「이인세계(二人世界)」 시리즈로 이어진다. 신체란 차이적인 감각 생성의 터전이라고 했던가. 위와 같은 들뢰즈의 논의가 관능적인 리듬으로 환원될 때, 두 인간 신체의 형상을 따라 흐르는 선은 운동감을 안고 인간의 내부에서 새로운 관계를 구축한다. 그 선이 구성하는 세계는 한껏 추상적인 덩어리로 변환되기도 하고, 흐릿한 크로키가 되기도 한다. 윤상윤은 빠르게 교차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황을 얇게 저며낸 뒤 이러한 개별적 경험을 드로잉으로 제시한다. 감상자의 이해를 위해 특별히 요구되는 내용이 없는, 그야말로 미묘한 떨림과 충동으로 가득한 수용체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발생시키고, 우리를 어디로 초대하는가. 쇤베르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의 모든 것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기 위해 그 바퀴에 몸을 싣는 행위가 바로 예술이라고 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윤상윤이 무언가를 그리기 위해 초점을 두고 있는 세상은 지극히 일상적이고도 미시적이며, 부분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모두의 이야기이자 모든 것의 이야기로 번역된다는 점에서 (누구의) 몸인지 묻는 질문을 무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 한편, 리듬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fireworks」 연작에서는 '몸'이라는 전제조건마저 무너진다. 비생물에게 주어진 감각은, 혹은 비생물로부터 오는 감각은 동식물의 신체를 통한 것만큼이나 직관적이다. 「몸에 좋은 드로잉」에서 반복된 곡률과 색채가 먼 길을 돌아 이곳의 불꽃놀이에 재소환되는 것이다. 동일선 상에서, 이번에는 「그림자」 연작을 보자. 앞서 등장한 신체들이 또 다른 차원에 놓이게 된다. 작가의 초기 작업을 하나하나 꿰매는 듯한 '차원 운용의 감각'은 우선 그림자를 매개로 하여 솟아오른다. 그 첫 단계에는 기하학적이고도 건축적인 요소가 겹겹이 축적되어 있는데, 「그림자」 시리즈의 경우 조형 요소가 차원에서 차원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재빠르게 포착한다. 여기에서 윤상윤은 종이 위에 그려두었던 패턴을 칼로 오려 일부분을 들어내고, 그 종이가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이동하며 생겨난 그림자를 재차 2차원으로 옮겨낸다. 이미 구획된 사각형을 새로운 갈래로 확장시키기 위해 잘라내기의 방법론을 취한 것이다. 차원과 감각의 한계를 뛰어 넘는 드로잉을 위해 단계별 비-드로잉의 방식을 선택한 작가는 경계선으로부터 오는 생소함을 지속적으로 포개어 둔다.

윤상윤_불꽃놀이 fireworks_목탄, 콘테, 파스텔_39×54cm_2018

만약 앞서 살펴본 「under the sea」와 「잎사귀」 등이 다음 차원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림자」는 독립적인 작품이 될 뿐만 아니라 차원의 간격을 헤집으며 경계 넘기의 가능성을 확인한 습작이라 불릴 수도 있겠다. (작가는 이미 드로잉의 소재였던 것들을 자수로 수놓으며 3차원 드로잉으로서의 매체 실험을 하고 있다.) 「reflection」 시리즈 또한 그러하다. 수면 위로 비치는 하늘의 모습과 유리 건너편에 놓인 무언가의 형상은 본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물결과 빛이 중첩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드로잉에 투영된 색채로써 명확하지 않은 저 너머의 세상을 자유롭게 그려본다. 어쩌면 이들은 전시장의 벽을 가운데에 두고 양립 불가능한 외연과 내연의 경계를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맞은편 세계를 보기 위해, 우리는 결국 신경을 곤두세운 채 감각의 끝에 놓인 길을 찾아 떠난다. ● 그런가 하면, 「페탕크(Pétanque)」 연작은 위와 유사하게 차원 간 통로를 종횡무진하면서도 특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제목과 같이 프랑스의 구기 스포츠 '페탕크'를 즐기는 인물들을 담는다. 작가가 우연히 발견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들은 하나의 원을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삼아 각기 다른 형광색의 공을 던진다. 우리는 플레이어들의 이름도, 표정도, 나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작가가 그간 축적해둔 기하학적 요소들과 차원의 경계가 사그라지는 순간의 그림자가 이처럼 일상세계의 온도에서도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은 금속 공과 나무 공이 되어 돌아왔고, 선은 운동장 라인이 되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모호한 안개 너머로 떠다니는 것만 같았던 조각들이 실재하는 풍경으로 찾아올 때,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이 필연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존재하지 않던 것이 현존하게 된 전시장에서 그 누구도 이것이 (어떻게) 좋은지 묻지는 않을 테다. ● 이쯤에서 본 전시의 영문 제목 'Organic Drawing'을 다시 상기해본다. 이 모든 것의 발원지였던 「몸에 좋은 드로잉」부터 몇 년간의 작업이 응축된 「페탕크」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쌓인 드로잉의 서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이내 하나의 '유기체'로 발현된다. 또한 드로잉을 하나의 장르로 보기엔 너무나 가볍다고 말하는 혹자의 주장을 밀어내듯이, 작가는 오히려 부족한 무게감으로 한계 없는 상상을 가능케 한다. 풍경이 담긴 물감의 깊이가 언뜻 얕아 보이고 인물을 이루는 선이 바스라진 듯하여도, 윤상윤의 드로잉은 미래에서 온 얇고 투명한 막으로 기능한다. 그러니 이제 평면 매체가 입체로 전환되고 2차원이 3차원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서서 핀셋을 들 것을 제안한다. 파고드는 송곳이나 찔러내는 바늘 대신, 전시장에 온 모든 이들과 함께 핀셋을 들자.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어떻게든 좋은 윤상윤의 드로잉을 한 겹씩 떼어낸 프레파라트(Präparat)로 머지않아 도래할 미래의 차원을 투시해보자. ■ 전민지

Vol.20200502e | 윤상윤展 / YOONSANGYOON / 尹相尹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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