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 / 花園

차규선展 / CHAKYUSUN / 車奎善 / painting   2020_0611 ▶︎ 2020_0713 / 백화점 휴점일 휴관

차규선_花園_캔버스에 혼합재료_227×181cm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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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 / 대구신세계백화점

관람시간 / 11:00am~08:00pm / 금~일요일_11:00am~08:30pm / 백화점 휴점일 휴관

대구신세계갤러리 DAEGU SHINSEGAE GALLERY 대구시 동구 동부로 149 동대구복합환승센터 대구신세계백화점 8층 Tel. +82.(0)53.661.1508 www.shinsegae.com

아티스트의 발견: 차규선을 새로운 담론적 시각에서 바라보다 ● '아티스트의 발견'이란 제목이 진부하게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차규선 작가는 이미 한국화단에서 작가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와서 기성작가를 '아티스트로서 발견'한다는 말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정한 아티스트를 발견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런 제목을 사용한다.

차규선_花園_캔버스에 혼합재료_248×333cm_2020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초의 현대(contemporary) 문명 사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것인가?(Do They Mean What They Say?)"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어떤 단어들을 나열한 낱말과 낱말의 모임인 문장으로 말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쓰는 단어가 본래의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티스트'라는 말, '아트(예술)'라는 말도, 그것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모든 것이 광고, 홍보, 포장되어 상품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 말의 목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소통은 희석되고 약화된 지 오래기 때문이다. 가장 심오하게 20세기 현대문명의 문제점들을 사유한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는 우리 시대에 현대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예술'은 예술 본연의 모습과 역할을 망각한 허무주의적 양산에 불과한 것이 주종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영미분석철학 철학자 스탠리 카벨 역시 "모던아트의 상황을 특정해주 것은 산재한 지적 사기의 가능성"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다"라고 했다고 한국에서만 유명한 명언이 있는데, 사실은 명언이 아니라 실언에 불과하다. 본래 예술은 사기가 아니라 무척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본연의 예술의 의미를 되찾는 것이 우리 시대의 역사적 과제인 것이다. 사기인 것은 "현대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여 지는 서구의 전위예술 및 후기모던 예술 등이다. ) 다음에 나는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서술하고 차규선은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나서는 역정을 밟았고 그 의미를 성취한 작가라는 사실을 밝히는데 지면을 할애할 것이다.

차규선_花園_캔버스에 혼합재료_227×181cm_2020

나는 차규선이 예술가로서의 자세는 물론 그의 작품에서 하이데거가 말했던, 우리가 지금 망각하고 있는, 예술의 본래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확신한다. 차규선은 세계화된 현대예술의 이런 저런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소박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내면과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담담하게 자기만의 예술의 길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사실 노장을 비롯한 고대 동양의 선가(仙家)에서는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본래성(本來性)'을 중시하면서 '본래로의 회귀'를 중시했다. 소박한 인생의 맛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본래성의 회복이다.

차규선_花園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130cm_2020

차규선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나라 예술가들은 서구현대미술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경향과 트렌드, 아젠다 등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뉴욕이나 런던, 파리에 유학 가는 것이 필수인 것처럼 생각했다. 왜냐하면 서구 중심부의 예술대학에서 수학하고, 그곳의 화랑,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현지 평론가나 큐레이터로부터 인정받은 것을 최고의 영예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예술가들이 중시하는 서구지향적인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무엇보다도 서구 중심부를 이루는 몇몇 국가들(미국, 영국, 프랑스 및 독일)은 현대문명의 모든 분야에서 가장 첨단을 가고 있다는 전제가 그 기저에 깔려 있다. 그것은 비단 과학과 기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가장 앞선 최첨단의 예술문화도 앞서 말한 선진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믿는다. 또 이 서구 중심부의 문화권력자들도 스스로 가장 발전된 첨단 예술(the most advanced art)이란 말을 곧잘 사용한다. 그러나 예술에서의 최첨단 운운하는 것은 개념적 오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영미분석철학의 아버지 비트겐슈타인이 "문화는 삶의 형식(culture as a form of life)"이라고 지적했듯, 어떤 삶의 형식이 다른 삶의 형태보다 우월하다거나 더 첨단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나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 혹은 아감벤(Giorgio Agamben)과 같이 좀더 심오한 사유를 하는 철학자들이 옳다면, 서구에서 비롯된 현대예술은 첨단은커녕 허무주의적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버전의 금융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포장만 잘하면 내용과 내재적 가치와 무관하게 표면의 모양만으로 얼마든지 고가의 명품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기저에 깔고 있다. 하이데거가 허무주의라고 부르건 말건 그들한테 중요한 것은 화폐 가치(value in dollar-terms)이며 그것이 현실(reality)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허무주의에 찌든 정신문화는 결국은 영혼 없이 무엇이든 먹어 치우는 아귀(餓鬼)의 욕구 충족으로서의 예술일 뿐이다. 그것이 전 세계를 하나의 큰 시장으로 만든 서구 현대문명 세계의 대세인 만큼 그런 대세에 역행해서 진정함을 찾는 것은 그것이 예술이거나 학문이거나 혹은 정치거나 미련한 짓이라고 보일 수밖에 없었다.

차규선_花園_캔버스에 혼합재료_140×110cm_2020

그런데 과연 그럴까? 역사는 긴 안목으로 봐야 한다. 이미 서구 문명권 내부로부터 자성의 목소리는 몇 세기 전부터 있었다. 그리고 문명의 발전 방향의 조정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20세기 초에 이미 독일의 사회철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현대문명의 내재적 갈등요소 때문에 궁극적으로 현대인들은 철창에 갇힌 신세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런데 2020년 지금 현대문명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한꺼번에 록다운되어 자가 격리하는 신세가 되어있지 않은가? 이것이 막스 베버의 예측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코로나 판데믹은 현대문명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언젠가 코로나 바이러스 판데믹이 해소되어 현대문명세계가 일상의 정상을 되찾게 되면, 현대문명의 미래에 대한 전 지구차원에서의 진지한 반성과 성찰의 시간이 필요함은 물론이고, 싫든 좋든 포스트코로나 시대는 현대문명의 재구성(Re-Configuration)을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예술문화의 재구성도 빠르고 강력하게 요구될 것이다. 재구성될 포스트코로나 현대문명세계에서의 현대예술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서구중심부의 주류로서의 현대미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문명의 상부구조인 정신문화의 허무주의가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지독한 인간영혼의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일찍이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본래성을 되찾은 예술이야말로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19세기 말에 영국에서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를 중심으로 '예술공예운동(Art and Craft movement, 1860~1910)'이 있었다. 가장 먼저 산업화를 이룬 사회답게 영국에서 산업사회의 내재적 모순이 가장 먼저 사회 문제로 부각되었다. 산업사회에서의 현대문명인들의 인간소외의 현상이 생겼다. 대량생산 속에서는 마땅히 신성해야 할 노동과 장인정신의 완전한 배제된다. 신성한 정신의 절멸은 비단 기계 공산품의 대량생산 체계뿐만 아니라 예술창작 과정에서도 재현되었고 그것이 바로 현대인을 정신적 허무주의로 치닫게 할 파국적 귀결이라 보았다. 즉 정신의 망각이 예술 역시 소비재로 존재지위를 격하시켰고 궁극적으로 현대의 허무주의의 극치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윌리엄 모리스가 이미 100년 전에 현대문명에 내린 진단이 틀리지 않았고, 그래서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의 전세계 현대인들한테 현대예술을 포함한 현대문명의 제 분야에 대한 재구성의 방향을 제시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반드시 그들의 문제의식을 재검토하고 참고해야 한다.

차규선_花園_캔버스에 혼합재료_116×91cm_2020

우리나라 작가들이 서구중심부의 트렌드와 경향에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을 때 차규선 작가는 작가 정신으로 일관된 작업을 일찍부터 해왔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차규선은 산천초목의 정신을 온몸으로 느끼며 스스로 수련했다. 절치탁마로 작가가 닦아낸 것은 그 무엇의 단순 반복적 기술력의 발전만이 아니다, 정신적 수행을 철저하게 병행했다. 우리 동양에서 정신이란 처음에 기술적 연마로 시작하더라도 그런 과정에서 '물심합일' 의 경지와 만나는 것을 가리킨다. 수행을 통해 깨달음과 참된 자아를 찾게 된다. 자기를 비우고, 표층의식의 자기를 내려놓고 심층에 잠재적으로 내재하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여 그것이 지닌 가능성(potential)으로서의 씨앗(알)을 움틔워 자기만의 결을 갖춘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는 것을 가리켜 우리 고어에서 '알움답다'고 했다. 서구미학 용어인 '아름답다(beautiful)'라는 말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본질적으로 다른 고차원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 우리 고유정신의 올바른 이해와 깨달음의 바탕에서 하이데거가 서구의 현대예술에서 절망하던 것을 우리는 차규선의 예술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만일 하이데거가 아직도 생존하여 차규선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고, 우리 고어 '알움다움'에 내재된 개념으로서의 해석을 이해했다면 찬탄했으리라 확신한다.

차규선_花園_캔버스에 혼합재료_116×91cm_2020

물아일체의 경지에서 작업에 임한다는 것은 '담(潭)'의 정신의 작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차규선은 '담'의 작가이다. 담담하다는 말은 차규선 작가가 표층의식인 자기를 내려 놓고, 즉 외부로부터 만들어진 '자기-나'를 잊어버리고 잠재적 무의식 속의 참된 나로 우주의 기운과 합일되어 자기 예술을 구성했다는 뜻이다. 그때 육체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말하는 "기관 없는 몸(body without organ)"이 되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립자의 소우주로서의 어떤 에너지파동의 순환체제가 된다. 우리나라 옛날 언어에 바로 그런 개념이 이미 선취되어 있다. 우리 선조들은 몸을 '뮈욤'이라고 불렀다. 뮈욤은 서양의 현대 해부도처럼 여러 장기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주역의 8괘의 우주의 순환원리가 소우주인 우리 몸에서 작동하는 '기(氣)' 운영체제를 말한다. 미립자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어떤 사물이나 장애물도 자유롭게 뚫고 다니며 서로 교류하고 상호작용한다. 그래서 스테펜 젭케 같은 사람은 들뢰즈의 철학을 "미립자들의 노래(Song of Molecule)"라고 부른다 .

차규선_花園_캔버스에 혼합재료_116×91cm_2020

송나라 곽희(郭熙, Guo Xi) 같은 산수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는 마음을 비우고 담담한 물아일체의 상태에서 자신의 몸(뮈욤)이 내면에 담지했던 주제(painterly mountain motive)와 합일되며 매체에 있는 그대로 나타냈다. 곽희는 결코 자신 표층의식 속의 주체를 인위적으로 자기의 의지로 이렇게 저렇게 그림으로 구상하여 그리지 않았다. 표층의식의 인위적 구상이 바로 서양화의 방법론이자 결과물이다. 우리 그림은 물아일체가 빚어낸 절대자유의 경지에서 완성된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서양화와 다른 점이다. 곽희가 어떻게 그림 그렸는지 그의 아들 곽사(郭思, Guo Si)의 글에 잘 나와 있다.

차규선_花園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130cm_2020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려 할 때면 깨끗한 책상에 앉아서 창문을 열고 방안을 밝게 했다. 피운 향의 좋은 냄새가 방안 여기저기로 스며들었다. 아버지는 섬세한 붓을 골랐고 가장 귀한 먹을 준비했다. 손을 깨끗이 씻고 벼루를 정갈하게 한 뒤 마치 아버지는 스스로 이 문방사우들과 하나된 듯 느끼는 것 같았다. 마음이 고요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는 순수한 시간이 다가오면 비로소 그리기 시작했다. ● 세잔의 생빅투와르 산의 그림도 곽희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차규선 작가의 그림도 곽희나 세잔과 상궤(常軌)를 함께 한다. 대가들과 동류의 의식으로 그림 그렸다. 그래서 차규선의 소나무 그림에서는 '소나무의 상서로운 기운'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진달래꽃의 생명력'이 화면에 넘친다.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살아서 우리와 호흡을 주고받는 생명으로서의 산이 진정한 예술형식으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것은 대상과의 물심합일이 가능해서 대상의 존재적 분위기 (ontological mood)를 화면 위에 나타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차규선 작가의 존재론적 그림에 대한 해석이 더욱 풍부해질 때 동시대의 여러 문제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의 우리 미학이 재정립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차규선이 견지하는 세계로 말미암아 우리 고유의 회화 전통이 새롭게 꽃피울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 홍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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