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나는…

이인석展 / YIEINSEOK / 李寅碩 / sculpture   2020_0612 ▶︎ 2020_0809 / 월요일 휴관

이인석_내 안에 나는…_마끈, 합성수지_가변설치, 250×184×65cm(남자), 237×181×65cm(여자), 197×162×60cm(아이)_202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봉산문화회관 기획 전시공모 선정작가展 '헬로우! 1974'『유리상자-아트스타 2020』Ver.2

관람시간 / 10:00am~01:00pm / 02:00pm~05:00pm / 월요일 휴관 7월 1일부터 사전예약 후 관람 Tel. +82.(0)53.661.3526,3517

봉산문화회관 BONGSAN CULTURAL CENTER 대구시 중구 봉산문화길 77 2층 아트스페이스 Tel. +82.(0)53.661.3500 www.bongsanart.org

봉산문화회관의 기획, 『유리상자-아트스타 2020』전시공모선정 작가展은 동시대 예술의 낯선 태도에 주목합니다. 올해 전시공모의 주제이기도 한 '헬로우! 1974'는 우리시대 예술가들의 실험정신과 열정에 대한 기억과 공감을 비롯하여 '도시'와 '공공성'을 주목하는 예술가의 태도 혹은 역할들을 지지하면서, 동시대 예술의 가치 있는 '스타성'을 지원하려는 의미입니다. 4면이 유리 벽면으로 구성되어 내부를 들여다보는 관람방식과 도심 속에 위치해있는 장소 특성으로 잘 알려진 아트스페이스「유리상자」는 어느 시간이나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시민의 예술 향유 기회를 넓히는 데 기여하고, 열정적이고 창의적인 예술가들에게는 특별한 창작지원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공공예술지원센터로서 시민과 예술인의 자긍심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전국공모에 의해 선정된 참신하고 역량 있는 작가들의 작품 전시를 지속적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 올해 유리상자 전시공모 선정작 두 번째 전시, 『유리상자-아트스타 2020』Ver.2展은 응용미술을 전공한 이인석(1966년생)의 설치작업 『내 안에 나는…』입니다. 이 전시는 '연결, 유대, 공유'를 상상하는 '실, 끈, 줄'이 끊어져 '단절, 분리, 해체'된 현실 세계의 상황과 그것의 원인이 우리 자신의 뜻과 무관한 또 다른 자신의 양면성으로부터 기인 할 수 있다는 자기 성찰의 시각화입니다. 또한, 무수히 많은 끈을 집적하는 행위의 흔적으로서 이 작업은 세 개 유형의 얼굴을 매개로 작가 자신의 과거 기억과 미래, 나아가 인간과 세계에 작용하는 '관계'의 다양성과 '양면성'을 탐구하려는 지금, 현재의 예술적 제안이기도 합니다.

이인석_내 안에 나는…_마끈, 합성수지_가변설치, 250×184×65cm(남자), 237×181×65cm(여자), 197×162×60cm(아이)_2020

이번 전시는 사방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상자 공간에 소중하고 가치 있는 발언을 담으려는 작가의 내면적 요청에서 시작됩니다. 이 공간 안에는 세 개의 커다란 갈색 얼굴이 천장에 매달려 있습니다. 가로 방향의 8㎜ 굵기 섬유질 밧줄을 위로 촘촘하게 쌓아서 구현한 남자와 여자, 아이의 얼굴은 중앙 한곳의 축으로부터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184×250×65㎝, 181×237×65㎝, 162×197×60㎝ 크기의 이 세 얼굴들은 실재하는 특정인을 닮기보다 작가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일반적인 인간의 얼굴로 짐작됩니다. 다만, 얼굴의 여기저기에 밧줄이 끊어져 상처처럼 훼손된 구멍이 있고, 얼굴을 구성하는 밧줄이 얼굴의 양 끝 50㎝쯤에서 절단되어서 세 사람 얼굴 사이가 밧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이어져 있을법한 밧줄이 끊어진 것과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얼굴들의 시선에서, 우리는 기존의 결속 관계가 해체되어가는 동시대의 수많은 사건과 현상이 인간 소외와 폐허를 향하여 치닿는 게 아닌가하는 단절과 해체의 우려를 읽을 수 있습니다. 작가는 '끊어진 끈'을 통하여, 한 가족 구성원의 해체된 관계를 은유하고, 지금의 세계를 구성하는 동시대 인간의 면모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습니다. ● 흥미롭게도, 이 작업은 관객과의 특별한 공감 장치를 숨겨두었습니다. 유리상자 주변이 어두워지는 밤이 되면 바닥에 반사된 인공조명의 빛 때문에 얼굴 뒷면의 윤곽이 잘 드러납니다. 아마도 세 개의 얼굴을 형성하고 있는 밧줄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었다면 볼 수 없었을 장면, 즉 얼굴 뒷면의 음각이 양각으로 보이는 착시를 일으키며 관객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그 얼굴의 시선이 따라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여자, 남자, 아이가 각기 자신의 시선으로 관객의 시선과 마주하며 자기만의 주장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이 같은 음각과 양각 부분에 대하여 인간의 '양면성'을 언급합니다. 작가가 제기하는 양면성은 반성이나 후회 또는 인류 계몽의 의견이기보다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앎'에 관한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현재 혹은 과거의 시점에 발견하거나 눈치채지 못한 것을 그것이 사라지거나 제거된 후에 그 본연의 정체와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작가의 이번 작업은 이 같은 '앎'에 관한 사고의 시간과 탐구 행위의 집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어떤 현실의 변화에 대하여 자신 안의 '앎'으로 번안하려는 이번 유리상자 『내 안에 나는…』은 변화하는 세계를 주의 깊게 살피고, 그 속에서 자신의 인식과 예술의 유효성을 성찰하려는 작가 스스로의 질문처럼 보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변화變化와 균형均衡을 담보하는 자연설계自然設計에 관한 세밀한 관찰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자연설계와 만남은 '살아가기'라는 작가의 해석으로서, 세계의 모든 것은 양면성을 동반하여 끊임없는 변화와 균형의 순간을 이어 순환한다는 보이지 않는 실체의 운용에 관한 깨달음일 것입니다. ■ 정종구

이인석_내 안에 나는…_마끈, 합성수지_가변설치, 250×184×65cm(남자), 237×181×65cm(여자), 197×162×60cm(아이)_2020

우리는 사람과 사람, 조직과 조직 간의 이해를 얻기 위해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라는 사회적 고리를 형성하며 살고 있다. 이렇게 형성되는 '인간관계' 속에서 개인은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찾거나 채워가며 자신의 이데아를 완성해 간다. 이렇듯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결코 원치 않는 감정들, 이를테면 이해와 오해, 포용과 배척, 사랑과 증오, 행복과 불행, 희망과 절망 따위로 점철된 대립 항의 두 가지 성질 즉, '인간의 양면성'을 접하게 된다. 이런 양면적 대립 항의 감정들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생성되고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사슬로써 삶을 옥죄기도 한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절대적 힘을 기반으로 이해와 포용으로 무엇이든 담아내는 큰 그릇과도 같은 유기체"인 '가족' 관계에서도 예외는 없는 듯하다. ● 여기서 나는 '가족사'라는 지극히 예민하고도 사적인 경험을 굳이 작업의 소재로 소환한 이유는 보이는 나와 감추어진 또 다른 나의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양면적 태도가 생산한 엄청난 결과에 아직도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회한과 반성의 태도로서 한걸음 물러나 객관적 시각에서 '인간의 양면성'에 대하여 고찰하려 한다. 내 안에 또 다른 나의 어리석은 감정이 때로는 상대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며, 나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운 불편하고도 심각한 상황을 만든다는 생각을 시작으로... ■ 이인석

이인석_내 안에 나는…_마끈, 합성수지_가변설치, 250×184×65cm(남자), 237×181×65cm(여자), 197×162×60cm(아이)_2020

현재 모습의 절반밖에는 말할 수 없는 그것들 ● 어떤 가족 이야기다. 한 가장이 있고 그에게는 아내와 자녀가 있다. 이 남자가 벌인 예술 계통 사업은 잘 되었지만, 그건 언제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담벼락 위에서 벌이는 일이었다. 사업이란 게 한 번 꼬이면 모든 게 연쇄적으로 활로가 막히는 법이다. 그 사건은 한 가족에게 갖가지 좋지 않은 일들로 모양을 바꿔 들이닥쳤다. 우리도 우환을 크고 작게 겪어봐서 알지만, 이럴 때 기댈 수 있는 보루가 가족이다. 가족의 결속력은 그 어떤 재화나 사회보장책보다 더 큰 힘이다. 하지만 어느 임계점을 지나면 그 결속의 끈 자체가 떨어진다. 이 전시가 덤덤히 보여주는 게 한 가족 이야기의 후술이다. ● 이인석의 『내 안에 나는…』은 비교적 정석에 가까운 가족 해체를 다룬다. 『내 안에 나는…』은 기획자 정종구 선생도, 서문을 쓰는 나도 아닌 작가가 지은 전시 제목이다. 어떤 글에서나 말줄임표를 잘 쓰는 사람들의 심성은 고운 편이다.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벌어지는 맺고 끊음의 냉엄함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인본주의자들이다. 이인석 작가도 그렇다. 말과 행동이 곧은 작가에게서 나온 작품이니까 작품이 정석에 기울어져 있는 건 당연하다. 한 집안의 불행은 당사자들에게는 비극이지만, 전형성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남들에겐 재미없는 이야기다. 흔하기 때문이다. 딱한 사정에는 공감하지만, 거기에 몰입하고 빠져들 오지랖이 요즘 사람들에겐 없다. 하나의 제도로써, 사회복지는 이런 불행에 실천적인 개입을 하고, 과학 가운데 이를테면 사회학은 여기에 냉랭한 관찰을 벌이기는 한다. 종교는? 상황에 따라 벌도 주고 약도 준다.

이인석_내 안에 나는…_마끈, 합성수지_가변설치, 250×184×65cm(남자), 237×181×65cm(여자), 197×162×60cm(아이)_2020

이들 제도에 비해 예술이야말로 조건만 맞는다면 사적 영역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그 아픔을 감싸거나 까밝힌다. 잘 알려진 바대로, 켄 로치가 열어젖힌 영국의 사회파 영화는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모순과 가족의 변증법적 모순을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무시무시하게 병렬해 보여준다. 우리 대중음악사의 동시대에 걸치는 30년 안에, 가족 해체에 관한 가장 섬뜩한 성취는 어어부 프로젝트 데뷔 앨범에 실린 "아름다운 세상에 어느 가족 줄거리"일 것이다. 현대 미술가인 이인석의 결은 그들 영화나 노래와 다르다. 작가는 가족이 흩어지게 된 사연에 관해서 사회파 영화처럼 그럴듯한 핍진성을 세우지 않는다. 또 어어부 프로젝트 식의 극단적인 니힐리즘으로 치닫지도 않는다. 왜? 자기 이야기니까 그렇다. 켄 로치나 마이크 리, 또는 백현진과 원일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매몰차게 몰아간다. 이인석은 본인과 살붙이 이야기를 그렇게 다룰 수 없다. 그러다보니까 『내 안에 나는…』은 자기 기술(self-descriptions)의 흔한 도식 안에 침잠하는 면이 있다. 그러면 어떤가? 괜찮다. 이것이 작가의 스타일인데. 하고 싶은 건 해야지. 이인석은 단순한 방식을 동원해서 그 안에 자전적 이야기를 삭혀 넣었다. ● 일단 작업 구성이 선명하다. 이 설치 작업을 본 사람들은 그 강렬함을 잊지 못할 것이다. 전시는 공간에 매달린 세 개의 얼굴 형상 내지 마스크로 이루어져 있다. 이게 전부다. 거대한 입체물들은 각각 아빠 엄마 자식을 가리킨다. 아, 관점을 바꾸면 남편, 아내, 자식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작가에겐 남매가 있는데, 지금은 장성한 그 아들딸을 한 명의 어린애로 표현했다. 가까이 가서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가는 밧줄을 무수히 이어서 완성한 입체물이다. 합성수지를 녹여서 틀을 잡은 뼈대 위에 그 양면에 밧줄을 붙인 방식이다. 갈색 밧줄은 잔 실이 부풀부풀 일어나는 질감이 있으며, 멀리서 볼 때와 그 느낌이 다르다. 작품이 여기에서는 안팎을 다 살필 수 있는 환조로 등장하지만, 다른 장소에 가서는 부조 식으로 벽면에 걸 수도 있을 법하다. 관객들은 우선 그 크기에 사로잡힌다. 유리상자 안에서 작가가 계측한 거의 최대한의 크기다. 상처 입은 듯 구멍 뚫린 얼굴은 그들 모두의 인격이 훼손된 상황을 상징하다. 우리가 쓰는 '쪽팔리다'라는 속어가 얼굴이라는 쪽을 어떤 등가가치에 매겨져 드러낸다는 뜻이라면, 작가는 그 손상 받은 체면을 전시를 통해 기꺼이 밝히고 있는 셈이다. 공중에 매달아 둔 건 아마도 그의 작가 이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작가에게 직접 물어봤는데, 그가 처음으로 직시한 콘템포러리 아트 형식이 종이를 주렁주렁 달아놓고 빛을 쏜 미디어아트였다고 한다. 그것을 체화시킨 이 거대한 얼굴은 그래서 자연스럽고 겉멋이 없다.

이인석_내 안에 나는…_마끈, 합성수지_가변설치, 250×184×65cm(남자), 237×181×65cm(여자), 197×162×60cm(아이)_2020

왜 끈으로 엮은 얼굴인가? 작가는 그 실마리를 가족이라는 인연이 끊어져 버린 까닭을 자신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자아로부터 찾으려 한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인 복수로서의 자아 개념은 조지 허버트 미드 같은 상징적 상호작용주의 사회학 이론가들의 기본 가정이다. 또 『부정의 변증법』에서 현대인들은 여러 개의 얼굴을 숨기고 사회에서 살아간다고 봤던 테오토르 아도르노의 주장 또한 비슷하다. 우리가 페르소나(persona)라고 부르는 가면은 유럽의 궁정시대 사교 공동체에 쓰이던 물건이었다. 겉과 속이 같을 수 없는 가면은 사람들의 양면성을 빗댄다. 페르소나에 명사 형식을 덧붙이면 인격(personality)이라는 단어가 되지 않나. 주관성의 표현을 중요한 과업으로 여기는 예술에서, 탈춤과 같은 연희 장르가 아니더라도 이를테면 많은 시각예술은 가상의 얼굴을 표현하며 우리가 품은 본성과 허상의 경계를 직시하고자 했다. 내 생각에, 자화상을 포함한 숱한 초상화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미술 양식에서 평면 회화보다 더 극적인 효과는 조각을 거쳐 미디어 아트와 영화까지 뻗어간다. 예컨대 LED로 얼굴 표면을 생성하여 실재와 환영의 관계를 다룬 김형기의 미디어아트나 마블 원작 영화에서 구현된 도르마무의 그래픽은 많은 사람들이 접한 콘텐츠다. ● 디자인을 전공한 작가 이인석의 이력을 놓고 볼 때, 이번 전시는 개념의 완성도만큼이나 공공성의 원칙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해가 어렵지 않은 이 프로젝트에는 세 개의 조형물 이외에 다른 소품이나 장치를 두지 않았다. 덩그렇게 노출된 작품은 작가가 의도했거나 그러지 않았거나 간에 어느 정도의 공포심을 일으킨다. 이런 효과는 원래 있던 친숙한 것을 뒤틀어 발생시키는 낯섦에서 일어난다. 공포는 우리 주변에 항상 도사린다. 무서운 현실은 이들 가족이 서로가 얼굴을 마주 하지 않고 뒤돌린 상황을 만든다. 다소간에 인위적인 설정 같지만, 그렇다고 다르게 표현할 방법도 없다.

이인석_내 안에 나는…_마끈, 합성수지_가변설치, 250×184×65cm(남자), 237×181×65cm(여자), 197×162×60cm(아이)_2020

이 작업의 창작과 전시 동기가 정상 가족(normal families)으로의 복원이나 안녕을 염원한다고 볼 수 있나?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비평을 하는 나도 이 단락 즈음에 와서 작가의 더 나은 상태를 희망하는 식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그런 섣부른 온정주의를 내세우는 건 헛일이다. 작가의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이 『내 안에 나는…』은 가족이나 연인 혹은 친구 관계 같은 게마인샤프트를 침해하는 여러 징조의 메타포로 읽힐 수 있다. 예컨대 정치 신조에 따른 세대나 성별 간 갈등이나, 각자의 온라인 공동체가 원래 준거집단을 깨트리는 세태를 은유하는 식으로 말이다. 심각하던 사소하던 그 모든 상황이 친밀성의 위기인 건 맞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과거가 지금 이곳에 낯선 작품으로 현재화된 모습은 세상에서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비출 수 있는 고백인 동시에, 작가가 가족에게 전하는 내밀한 암호다. 우리가 그들만이 식별할 메시지를 넘볼 권리까지는 없다. ■ 윤규홍

시민참여 워크숍-작가와의 대화 작업 과정의 설명과 함께 작품을 감상하며 느낀 점을 공유하고, '인간의 양면성'이 이상적인 인간관계 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토론해 본다. - 일정: 전시기간 중 홈페이지 공지 예정 - 장소: 봉산문화회관 2층 아트스페이스 - 대상: 일반시민 - 참가문의: Tel. +82.(0)53.661.3526

Vol.20200612g | 이인석展 / YIEINSEOK / 李寅碩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