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의 아이들 II

홍현아展 / HONGHYUNAH / 洪賢娥 / painting   2020_0617 ▶ 2020_0622

홍현아_슬픈 몰골의 기사 2_캔버스에 유채_146×114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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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57th 갤러리 57th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17(송현동 57번지) 2층 Tel. +82.(0)2.733.2657 www.57gallery.co.kr

천진난만함으로 위장한 하드코어 ● 더 이상 겸손이 미덕이 아닌 세상에, 세르반테스가 스스로 돈키호테의 서평을 쓴 것처럼, 또한 '자기를 칭송해 줄 사람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를 칭찬할 정당한 권리를 갖는다'는 속담을 인용한 에라스무스처럼, 구구절절 나의 돈키호테 입덕기를 쓴다.

홍현아_형편없는 자의 경건한 고백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19
홍현아_불가능한 것도 엉터리도 아니네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19
홍현아_아직 해는 담장 위에 있다_캔버스에 유채_146×114cm_2019

돈키호테, 먼 옛날 서양 꼰대, 아마도 내가 알고 있던 그 유명한 기사에 대한 이미지는 그 정도였을 것이다. 햄릿이나 삼국지처럼 사방에서 두고두고 사골처럼 우려먹는, 다소 고리타분한 그 소설에 하물며 나도 숟가락을 얹게 되었다. 난 어느새 그 노기사의 촌스러움과 당당함과 일관됨에 반하여 그를 일종의 롤모델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지난 5년간 「돈키호테의 아이들」 연작을 하며, 잊혀지거나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사물들을 찾기 시작했다. 버려지거나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물건에서 나는 돈키호테를 찾으려 했다. 어릴 적 뒷마당에서 나뒹굴던 장난감들처럼, 정리되고 처분되어야 할 쓰레기들 말이다. 구멍 난 양말을 꿰매 듯이, 난 그것들의 표면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햇볕을 쪼이고, 물을 주고, 색을 입혔다. 시골 외할머니 댁에서 옛 추억을 찾아 감성팔이 하는 로맨틱 장르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천진난만함으로 위장한 하드코어에 가깝다.

홍현아_부수고 베고 구기고 말하고 행했노라_캔버스에 유채_130×195cm_2019
홍현아_작당모의_캔버스에 유채_89×116cm_2019
홍현아_거지들 : 대 피테르 브뤼헬 오마주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20

나는 그들이 촌스럽고 당당하고 일관되길 바랐다. 어마어마한 스케일이나 글로벌한 감각, 형이상학적 치장 없이도 멋스럽고 재밌고 위엄 있기를 바랐다. 유행을 따라가지 못해 우스꽝스러워 보여도,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비장미는 충분했다. '혀에 종기가 있는 닭이라도 살아있어야 한다.' 그 당연한 권리의 긴 싸움을 인정해야 한다. 후미진 골목이건 험난한 산중이건 해는 뜨고 달도 뜬다. 최첨단으로 반짝일 것 같은 21세기는 400여 년 전 세르반테스가 살던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울증, 공황장애, 왕따, 파산, 빚… 다들 아등바등 전력으로 달리며 산다. 어쩌면 늘 바보 같고, 늘 한심했을 지도 모른다. 그 불완전함에도 눈 가리고 귀 막고 앞만 보고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장 난 바퀴로 언덕길도 올라가고, 무디어진 칼로 허공이라도 베어야 한다. 절실함이, 그 볼품없고 가난한 몸짓이, 내가 사랑하는 돈키호테의 모습이다. 그것이 그가 우스꽝스러우나 하나도 우습지 않은 이유이고, 바로 그것이 내가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다. 서사와 낯설게 하기 사이를 갈지자로 떠돌며, 난 돈키호테처럼 친절하게 칼을 휘두르고, 지루하게 해명도 하면서, 그렇게 바보 같지만 '간지' 나는 정물들을 그린다. ■ 홍현아

Vol.20200617b | 홍현아展 / HONGHYUNAH / 洪賢娥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