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를 잇는 시간

신예선_스톤김_최성임展   2020_0618 ▶︎ 2020_0708

ⓒ 디자인_마음의시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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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대화 / 2020_0626_금요일_10:30am

작품 리뷰어로 김대균(건축, 착착스튜디오 소장), 박남희(미술평론), 장유정(전시기획, 성북문화재단 미술팀), 조숙현(미술평론, 아트북프레스 대표) 참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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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화예술재단 선정 우수기획창작활동展

기획 / 박민희 영상 / 마음의시력(강건) withthemind.com 글 / 박남희_장유정_김대균 출판 / 아트북프레스(조숙현) 후원 / 제주특별자치도_제주문화예술재단

관람시간 / 09:00am~07:00pm

앤트러사이트 제주 한림 anthracite coffee Jeju Hallim 제주시 한림읍 한림로 564 Tel. +82.(0)64.796.7991 anthracitecoffee.com

신예선 작가의 집 앞에서는 한림읍 사무소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현대인들에게 건축 공사 현장을 마주하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특히 제주에서 낡고 오래된 건물이 철거되고 신축 건물이 들어서는 일은 어느 마을에서나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창 너머 항상 초록을 선사해주던 울창한 나무가 잘려나간 그 날, 신작가가 느꼈던 상실감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앤트러사이트 제주 한림은 1990년대 이후 쓸모를 잃고 방치되었던 옛 전분 공장 터를 지키기 위해 부분 개조하여 조성되었다. 앤트러사이트는 '공간의 보존'이라는 가치 전달과 더불어 방문객에게 어떤 '미적 체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예술과 닮았다. 신작가는 이 공간을 좋아했고, 자주 방문했다. 딱히 쓸모 없지만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길바닥에서 주웠지만 버리지 못하는 것,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전환되는 그런 것들. 일상 속 소소한 장면들을 관찰하고 신경 쓰고 성찰하는 태도, 볕이 모이는 부분에 씨를 심고 가꿔 나가는 마음, 얇은 실을 한 올 한 올 풀어 기댈 수 없는 벽을 만드는 시간, 상상 속 이미지를 스케치하고 모델을 만들고 과정을 구체화하여 시각화하는 일. 만나고 싶은 사람, 나누고 싶은 말들. 『쓸모를 잇는 시간』은 신예선, 스톤김, 최성임 작가와 만나 대화하는 과정 자체에 영감을 얻어 기획되었다. 그 마음에 대해, 서로를 지탱해주는 관계에 대해, 예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전시다. ●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지속되면서 우리의 『쓸모를 잇는 시간』은 더욱 절실해졌다. 우리는 만날 수 없었다. 개인적인 공간과 관계 속으로, 각자의 콘크리트 구조 속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내며 자연계의 생명력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대면할 수 없는 시대, 예술은 더욱 쓸모를 잃어가는 듯 했다. 하지만 우리가 멈췄던 시간에도 앤트러사이트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사람들은 온갖 가치들이 부유하는 일상을 뒤로 하고 이 곳을 찾아 온다. 빛과 소리, 물기를 품은 공기, 작은 생명들 그 찰나의 무수한 것들이 피부로 와, 닿는다. 우리는 77일 만에 다시 만났을 때 비로소 서로의 쓸모를 이어갈 수 있었고, 앤트러사이트를 체험하며 동시대예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쓸모를 잇는 시간』은 화이트큐브가 제공하는 예술의 권위에 질문을 던진다. 자연과의 공존, 사회와의 적극적인 소통에 대한 바람이자 실험이다. ■ 박민희

스톤김_작업의 역설_사진, 렌티큘러_150×100cm_2020 ⓒ 사진_스톤김

개인적으로 오감의 정보가 분주하게 사방에 존재하는 낮보다는 오감을 어느 정도 내 스스로 제어 할 수 있는 밤을 좋아한다. 낮은 다른 어느 것보다 시각적 정보가 많고 그것들로 인한 잡음들이 나를 산만하게 하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이다. 외출 땐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꼭 쓰고, 눈은 어느 한 부분이나 내 눈에 띄는 시각 요소에 집중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서 산만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나 보다.) 그런 고로 내 집의 모든 창문은 암막 시트지 처리를 해 놓았다. 낮에도 깜깜한 밤 같이 말이다. 지금의 집 주변은 그야말로 회색 도시다. 사방엔 새로 공사 중인 빌라들과 아파트 단지 그리고 내부순환로 고가도로가 떠억하고 집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농담처럼, 보이는 색의 80퍼센트는 "그레이-색이다." 그러다 뜻밖에 일상의 숭고함을 마주 하게 됐다. 창밖에서 비춰지던 강렬한 주황색을 대면한 그 순간은 십여 년 전 마크 로스코의 무지막지하게 큰 페인팅을 마주했던 기억을 소환하였다. 알 수 없는 압도감에 움직일 수 없었던 그 때의 순간을 여기 한국, 내 집 창문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장면에 놀란 마음에 창문을 열었다. 그리곤 실망감에 급히 닫아버렸다. 그것은 신축 빌라 공사장에서 발생하는 먼지를 막기 위해 가설된 폴리에틸렌 가림막이었다. 일상의 숭고함을 연출해 준 사물이 고작 빳빳하고 인공적이고 삭막한 공사장 먼지 가림막 플라스틱 천 쪼가리라니. 결국 내 기억의 소환을 이끌어 낸 트리거는 그 플라스틱 천의 본질을 다른 방식으로 포장해 버린 내 집의 창문이었다. ● 남은 양파가 싱크대 밑 서랍 안에서 싹을 틔우는 것을 발견한 순간, 이 양파의 처리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싹을 틔우기 전까진 그저 식량이지만, 녹색의 싹이 손가락만 하게 자랐다면 생명체로 인식하는 기묘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 나는 그것을 키우기로 결정했다. 크기에 맞는 컵을 찾아 양파를 넣고 몸통의 절반까지 물을 붓는다. 일조량까지 생각해 창문 틀에 놓는다. 생명체를 살려냈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해선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파의 싹은 줄기가 되고 쑥쑥 자란다. 그러다 진동하는 양파 냄새와 겉잡을 수 없이 자라버린 줄기를 견디기 힘든 지경이 돼 버렸고, 처리를 고심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어 가차없이 쓰레기 봉투에 담아 버려버렸다. 이 일련의 태도가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행해지자 자기 반성을 위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일련의 경험들은 내가 고민하는 개인적인 예술의 의미와 그것을 실행하는 행위의 의미를 상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작업을 생산하는 방식과 그것에 소모되는 시간들 그리고 생산되어진 결과물의 향방을 역설적으로 압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의 입장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수많은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 스톤김

최성임_두 줄기_황동, 파이프, 아크릴, 면사_ 290×10×10cm, 270×10×10cm_2020 ⓒ 사진_스톤김
최성임_두 줄기_황동, 파이프, 아크릴, 면사_ 290×10×10cm, 270×10×10cm_2020 ⓒ 사진_스톤김

기둥은 건축공간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 중 하나이다. 상부의 하중을 받치거나 지탱하는 역할을 주로 하며 수직적이다. 작업 전반에 걸쳐 기둥을 오랫동안 만들었다. 그 기둥은 가로막히지 않고 공간을 투영하고, 가볍고, 주변에 흔들리고, 거대하고 스펙타클하지 않고 사소한 수많은 겹을 가진 느낌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토목이나 교회 건물의 확고한 혹은 불변해보이는 기둥이 아닌 집 마당의 빨래대나 식물의 지지대, 걷기보조장비 등으로부터 주로 영감을 받았다. 작년 봄, 교토에서 하나미(꽃구경)를 한 적이 있다. 오래된 벚나무를 지탱하며 얼기설기 서 있는 지지대의 구성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벚꽃을 가리지않고 시각적으로 거슬리지 않게 해야하지만 보조역할을 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들, 어렸을 때 강낭콩을 심으면서 싹이 나면 줄기가 타고 올라갈 막대기를 꽂았던 일, 양양가는 길 복숭아 밭 농작물의 지지대들, 빨래 양에 따라 늘었다 줄어드는 빨래대도 생각났다. 육중하지 않은 존재감이 주어 뒤의 부사어처럼 보조 장치 역할을 하던, 유연하고 가볍게 그래서 상상을 더할 수 있었던 기둥들의 이미지를 가져오고 싶었다. 아마도 그것들에서 살아있는 다리나 팔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 최성임

신예선_희미한 벽_견사, 아크릴, 양면테이프_가변설치_2020

창 너머 거대한 나무가 잘려나간 후 오래도록 상실감을 느낀다. 나는 정말 이것을 귀하게 여겼다. 태풍이 그 나무의 잔가지들을 모두 솎아냈을 때 속이 후련했다. 나무도 묵은 때를 밀어버린 것처럼 홀가분했을 텐데... 이웃들에게 그 같은 감정을 쏟아냈으나 동의를 얻지 못한 것에 서운함이 여전하다. 집 근처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던 공간은 그 시간만큼 흔적을 새겼다. 공간 속 식민지 시대의 동력 장치는 시간을 회상시킨다. 바닥 돌 틈으로 올라온 초록은 여름에 들어서며 무성해지고 이 퇴색한 용암 위에 초록의 덮개를 깔았다. 안은 바깥을 불러들이고, 인공적인 것은 야생의 것에 매료된다. 곰팡내 나는 오래된 집은 새 카펫을 위한 낯선 무대이다. 삭막한 땅 위 노쇠한 공간은 풀과 나무를 들이고 나는 다시 그 안에 희뿌연 벽을 세운다. 벽은 집을 위한 최소한의 단위이다. 원래 있던 집의 서까래는 내 희미한 벽을 지지해 주는 기둥이 되고, 누에가 뽑은 탄력 있고 광택 나는 분비물은 이 골조에 기대어 벽을 차곡차곡 늘려간다. 천창의 햇빛은 하늘거리는 벽을 지나친다. 햇빛은 다시 집 속의 집, 그 안의 풀을 키운다. 공간은 안과 밖을 반복하고, 이 반복은 복제가 아닌 차이가 있기에 생명을 지녔다. 스쳐 지나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 공간에서 나무에 대한 향수에 동의를 구한다. ■ 신예선

Vol.20200618d | 쓸모를 잇는 시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