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We Ever Meet Again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정희민展 / CHUNGHEEMIN / 鄭熙慜 / painting   2020_0625 ▶︎ 2020_0814 / 월요일 휴관

정희민_If We Ever Meet Again展_021갤러리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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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_12:00pm~07:00pm / 월요일 휴관

021갤러리 021GALLERY 대구 수성구 달구벌대로 2435 두산위브더제니스 상가 204호 Tel. +82.(0)53.743.0217 021gallery.com

오늘날의 '만남'은 여러 형태를 포괄한다. 그것은 물리적인 접촉을 의미하기도 하고 하나의 아이디어로만 존재하기도 하며 계획에 의한 것일 수도, 때론 우연적인 사건일 수도 있다. 만남은 반복될 수도 일회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일상을 매개하는 여러 조건들이 물리적 실체로 존재하는 대상을 전제하지 않으며 점점 분석과 예측을 위한 데이터가 되는 세계에서 '만남'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동일한 정서적 가치를 가질까? 어쩌면 더 이상 복수(둘 이상의 사람이나 사물의 동작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언어 형식)는 만남의 필요 조건이 아닌지 모른다. If We Ever Meet Again은 만남의 여러 새로운 조건들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전시로, 대상이 부재하는 만남의 경험이 축적되어 만들어내는 시적이면서도 기만적인 감각을 물질로서 비유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정희민_If We Ever Meet Again展_021갤러리_2020

"나의 작업은 급격한 기술의 개입으로 나의 일상이, 그리고 내가 나의 주변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며 시작된다. 그리고 이 관찰은 기술이 일으키는 형이상학적 사건들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나는 모든 산업의 기반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급격히 이행하며 삶의 구석구석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던 1990-2000년대 초반에 유년기를 보냈다. 때문에 나의 모든 충동과 선택들은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와 기술 유토피아에 대한 선망이라는 양극단의 욕망을 내재한다. 이 둘 사이의 중재에 실패할때 생겨나는, 혹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자신과 데이터로 존재하는 자아 사이의 불일치가 초래하는 멜랑콜리는 내가 작업을 시작하던 시점에 좋은 모티베이션이 되어주었다." ● "나에게 회화는 세계에 접촉하는 도구이자 실존적 질문이자 속도에 대항하는 일종의 저항의 제스처이기도 하다. 나는 회화를 통해 미묘한 징후들을 꿰어 궁극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고, 뚜렷이 인식할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모호함을, 환상이 실재에 남긴 흔적들을 찾아간다. 그것들은 밀납판 위에 새겨진 글씨처럼 몸(디바이스 혹은 신체)의 무의식 어딘가에 남아있다." (Artist Statement 발췌)021갤러리

정희민_포말이 되어 #1~#7 Be Born of the Foam #1~#7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 겔 미디엄, 스프레이_117×91cm×7_2020
정희민_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If We Ever Meet Again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 겔 미디엄, 스프레이_가변크기_2020

보이지 않는 시간을 이해하는 것 ●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If We Ever Meet Again』은 '만남'이라는 일상적인 사건 혹은 행위가 새로운 정서적 가치와 함의를 가지게 된 일련의 경험을 통해 작가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조건에서 과연 정서적인 감각이 어떻게 전달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정희민은 이번 전시를 통해 더 이상 '만남'이라는 조건이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전시라는 매체에서 항상 부재했던 작가의 몸과 존재, 그리고 과거의 시간이 어떠한 형태로 남겨져 있는지에 대해 미지의 만남과 경험에서 촉발된 새로운 감각의 상태를 물질로써 비유해 보고자 한다. ●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단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 시간 동안 멋진 그림을 그리려면 적어도 네 시간 동안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데이빗 린치의 말처럼, 회화에 있어 과거란, 작가가 작품을 그리는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전시장에서 마주하는 그림은 완결된 상태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시간을 상상해보는 것은 통합적으로 그림을 이해해보려는 감상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림 안에는 붓질의 형태와 속도감,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 이를 마주했던 화가의 몸짓이 담겨있다. 그림에는 크게 혹은 작게 뒤로 물러나거나 몸을 잔뜩 웅크린 화가의 몸이 그려낸 시간의 층위가 담겨있고, 춤을 추듯 재빠르게 획을 그려내거나, 수행하듯 자신의 몸짓을 반복하는 화가의 존재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축적된 시간과 몸짓은 총체적인 서사가 부여된 후 비로소 그림으로 완결된다.

정희민_내 낡고 빛바랜 팔레트 My Old Faded Pallete_가변크기_2020
정희민_묘비 시안 2 Mockup for the Grave Stone 2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스프레이_72×60cm_2020

정희민의 그림은 디지털 구현을 시작점으로 삼는 과정의 결과물이다. 스크린 안에서 프로그램을 통해 이미지를 구현하고, 이를 스크린 밖으로 꺼내어 캔버스에 옮기는 것은, 디지털상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공감각적 상태를 재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디지털 툴로 가공되어 시간과 서사를 상실한 이미지들은 다시금 작가의 몸을 빌려 물리적으로 구현된다. 그는 이 과정에서 그림에 개입하는 작가의 신체를 다변화하고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상업 인쇄 기술인 실크 스크린 기법을 통해 기계와 자신의 신체를 동기화하여 작업적 욕구를 충족한 앤디 워홀이 당시 제작 방식의 한계를 벗어나게 했던 전략과 수단의 변모를 꾀한 것처럼, 정희민은 자신의 신체를 스크린 내부로 편입시키고 동기화함으로써 보다 확장되고 경계가 없는 화면의 무한성을 획득하였다. 문제는 동기화되고 렌더링이 끝난 이미지를 다시 스크린 밖으로 꺼내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그는 적극적으로 신체를 활용한다.

정희민_도피 앤 드라우지 휴 Dopey and Drawsy Hue, 퓨어 새티스팩션 페일 Pure Satisfaction Pale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91×72cm×2_2020
정희민_도착하지 못한 인사 Greeting That Has Never Been Arrived_ 캔버스에 겔 미디엄, 잉크젯 프린트_24×33cm_2020 정희민_채도가 짙어진 기분의 순환하는 밤들 Cyclical Nights in the Saturated Mood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00×80cm_2020

2016년 그의 첫 개인전 『어제의 파랑』과 금호 미술관에서 선보였던 「UTC-7:00 JUN 오후 세 시의 테이블」(2018)은 그가 직면한 회화의 재현 문제와 동시대 창작 환경의 대립적 상황과 고민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가 작성한 회화에 관한 노트를 다시 그림에 재현하고 충돌시키거나, 가상 현실의 상태를 현실로 소환하여 비현실적인 상황을 물리적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이때 전시장은 일시적인 재현의 장으로 치환되고 혼합 현실의 상태로 존재한다. 이후 그는 그림에 두께와 요철을 부여하고 코팅하거나 덧바르는 후가공의 과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이는 작가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촉각'이 결핍된 상태에 관심을 가지면서 가상에 관한 현실의 반증으로 디지털 이미지를 재현한 표면에 작가의 적극적인 신체적 개입을 통해 리얼타임의 생경함과 현실감을 부여하고자 하는 그의 제스쳐일지도 모르겠다. ● 또한 『이브』(삼육빌딩, 2018)와 『2019 젊은 모색: 액체, 유리, 바다』(국립현대미술관, 2019)에서 작가는 전시장 벽면을 꽉 채우고, 캔버스 뒷면의 존재를 지웠다. 벽이 없는, 지지체가 없는 장면 앞에 마주했을 때 우리는 회화의 감상보다 장면으로 편입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현장에서 완성된다. 어디에서 끝을 맺고 어디까지 캔버스에 담을것인지, 작가는 캔버스의 사이즈를 정하고, 이미지의 크기와 형태를 결정함에 따라 기존에 구축한 스크린 내부의 가상 세계는 줌인 되거나 줌아웃 된다. 데이터의 집합체이자 가상 환경에서 지워지고, 편집되고, 덮이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그의 작업 과정은 그래서 더욱 작가의 선택과 결정, 그리고 최종적으로 종결된 상태가 놓이는 전시장의 환경이 모두 고려되었을 때 완결의 서사를 얻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스튜디오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핸드폰을 통해 데이터 파일 혹은 인쇄물의 이미지로 그림을 접한다. 그래서 종종 그림의 옆면, 또는 벽면과 캔버스 사이의 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인스타그램이나 출판물로 이미지를 접하는 경험이 반복되고 일상화되면서 크롭된 이미지로서의 작품과 물리적인 존재로서의 캔버스 사이의 간극은 더욱 커졌다. 주광색 조명을 쓸 건지, 전구색 혹은 주백색 조명을 쓰는지에 따라 전시장에서 마주하는 그림은 다른 의미와 이미지로 전달되기도 하며, 흰 벽에 걸리는지, 전시장 동선에 따라 어떤 장면에서 마주하는지에 따른 감상 조건의 차이는 관람자로 하여금 각기 다른 감상의 결과를 초래한다.

정희민_내가 그리울거야 You Will Miss Me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스프레이_130×97cm_2020
정희민_​새로운 나 A New Me_ 캔버스에 겔 미디엄, UV 프린트_100×80cm_2020 정희민_아이언 드롭 2 Iron Drop 2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길이 20.32cm_2020

그의 그림은 무겁다. 실제로 정희민의 그림을 전시장에서 본 사람이라면 캔버스와 프레임의 묵직함을 인지 했을 것이다. 이러한 두께와 존재감은 그가 디지털 이미지 안에서 수집하고 선택하여 현실로 옮겨오는 과정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더 두드러져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납작하고 열화된 이미지들이 스크린 밖으로 꺼내지는 과정을 거쳐 캔버스에 재현될 때 작가는 현실의 무게와 존재를 드러내고자 촉감을 더한다. 그리고 때때로 그의 이미지들은 아크릴 조각, 캔버스, 스크린 그리고 책에 안착하기도 한다. 그의 가공 세계는 이렇듯 부유하다. 안착하는 매체에 따라 그 깊이와 무게를 달리한다. 결국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고 가늠해 보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사색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이해한다는 것을 그래서 어렵지만 분명 가치가 있는 일이다. ■ 홍이지

Vol.20200625b | 정희민展 / CHUNGHEEMIN / 鄭熙慜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