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컬처 part2 : 모호한 경계 / Ambiguous boundary

김홍수展 / KIMHONGSU / 金弘洙 / video   2020_0718 ▶ 2020_0731

김홍수_검색하는 사람_단채널 영상, HD(1080p), 디지털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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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인천광역시_인천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7:00pm

인천문화양조장(스페이스빔) Incheon Culture Brewery(Space beam) 인천 동구 서해대로513번길 15(창영동 7번지) Tel. +82.(0)32.422.8630 www.spacebeam.net

#서브컬처 - '존재하지 않는 실체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 ● 현대인들은 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중 불안과 우울증, 결핍 등에서 얻게 되는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이러한 정신적 질병들을 치유하거나 억누르려고 노력한다. 어떤 이는 가까운 사람과 함께 수다를 떨며 털어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에 흠뻑 취해 털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비도덕적인 방법을 이용해 자신만의 질병들을 치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주목하고 있으며,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비도덕적 행위가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저마다 가진 욕망들이 점차 뒤틀린 모습으로 변질되어 발현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행위들에 엄중한 잣대를 들이미고 누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결국 이러한 개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이상향을 찾아 깊이 파고들기를 반복한다.

김홍수_지하주차장_단채널 영상, HD(1080p), 디지털_2020

#모호한 경계 - '서브컬처 part1의 주제는 말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해 다루었다면, 서브컬처 part2의 주제는 수집하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 총이라는 물건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허가를 받지 않는 한 개인이 소지할 수 없는 물건이다. 그러나 총을 비롯한 모든 금지된 물건을 남모르게 소유한다는 행위는 개개인에게 있어 굉장히 매혹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 여기서 내가 다루고자 하는 모조 권총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구매를 해서 소유할 수 있는 완구의 형태이긴 하나, 완구를 구성하는 부품들을 하나둘씩 교체해 자신이 상상하는 실제의 형태에 다가가기 위해 외관과 작동 방식들을 변형시켜 국가에서 정해놓은 기준과는 완벽히 멀어지는 형태를 보이게 되는, 즉 뒤틀린 욕망에 사로잡혀 금지된 물건을 소유하려는 행위에 대해 다루고 있다. ■ 김홍수

김홍수_맞은편에서001_단채널 영상, HD(1080p), 디지털_2020

생태학적 관찰 : 욕망하는 사회와 접속하는 신체 ● 김홍수의 애니메이션 작업에는 생태학적인 관점이 스며있다. 이제까지 작업에서 도시의 특정 환경과 산업현장 안에서의 사람의 몸짓을 채집하듯 보여줬던 김홍수는 최근 두 번의 《서브컬처》 전시에서 작가 본인이 목격한 특정 하위문화 안에서의 인간의 행동을 애니메이션으로 담아내어 보였다. 그의 형식적 특징이라 할 만한 인간 생태의 미시적 장면들에서 인간과 현대사회의 보편적 관계를 숙고할 수는 없지만 인간과 외부 환경과의 접속이라는 사건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총기 수집, 불법 개조와 매매라는 독특한 주제를 다루는 이번 전시 《서브컬처 part2: 모호한 경계》는 크게 세 개의 무빙이미지 섹션과 한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각 섹션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저마다 다른 포맷을 가진다. 첫 번째 무빙이미지 섹션에는 총기 거래의 과정을 보여주는 여덟 편의 애니메이션이 있다. 인체가 현재의 작업을 보여줄 수 있는 간단한 사물과 함께 화면에 꼭 들어차는 앵글은 서브컬처 연작 이전의 작업에서 보던 것과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전작에서는 배경이 과감하게 생략되었던 것에 비해 이번 작업에서는 배경이 무대로서 살아있으면서 전시 전반에 흐르는 서사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이다. ● 두 번째 섹션에서는 '건블루'라 불리는 검푸른 빛을 얻기 위한 연마 과정을 보여주는 7편의 「Polishing」 영상이 있다. 각각의 「Polishing」 작업이 과감하게 생략된 배경과 함께 사물을 다루는 기계적 손동작을 반복적으로 보임으로써 작동하는 기계의 일부분처럼 보이게 하였다는 점과 전체를 모아 동시에 상영할 때 큰 기계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업들과 형식적 유사함을 보이지만 이전의 작업에서는 머리를 포함한 인체의 전신 혹은 반신이 기계와 함께 작동하듯 움직였던 것에 비해 여기서는 클로즈업된 화면에 총은 고정되어 있고 손이 반복적으로 움직이며 총에 봉사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 이 모든 과정의 서사를 담고 있는 텍스트 작업 「리볼버」는 표현이 억제되어 건조하게 비춰지는 애니메이션에 비해 묘사와 감정 표현이 다소 희화화하여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때문에 영상과 텍스트는 서로 맞닿아 있지만 영상 작업이 마치 현실의 부분이며 텍스트는 현실에서 파생된 허구처럼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총에 대한 페티시적 시선이 머무는 이미지로서 「건블루」를 제시한다.

김홍수_맞은편에서002_단채널 영상, HD(1080p), 디지털_2020

페티시를 정신분석학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자아가 정상적인 경로로는 성취할 수 없는 욕망을 대신 충족시킬 현실 속의 대리물이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성숙한 자아는 현실의 규범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도 소외된 욕망과 통제되지 않는 충동을 예술과 문화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아였다. 그러나 여기에 실패한 주체는 현실의 사물에서 숭배할 물신을 찾아냄으로써 결핍을 극복하기도 함으로써 균형을 찾게 된다. 만약 그마저도 실패한다면 주체는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충동과 결핍 사이에서 영원히 고통 받게 될 것이다. 프로이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법의 경계를 넘나들게 하는 총에 대한 욕망과 타인과의 단절로 인한 좌절로 그려진 《서브컬처》 연작은 인간의 고통과 심연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욕망을 초월적 본성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흐르며 발현되는 것으로 보았던 들뢰즈와 가타리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읽힐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욕망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지였으며, 관계를 통해 흐르듯 이동하고, 그로써 무한한 생산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욕망은 하나의 개체 안에서 결정될 수 없으며 오직 어떻게 접속을 이루어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구체화되는 것이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존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관계를 구성하는 이항 접속의 구조를 '기계'라 일컬었다. 만약 욕망이 작동하는 이항적 접속이 구성된다면 그것은 욕망하는 기계가 되어 인간도, 사회도, 체계도 모두 욕망하는 기계일 수 있는 것이다. 작가가 사람이 다른 사물과 접속하여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다룬 것은 「Factory」, 「Sign」과 같은 전작들에서 부터였다. 세부묘사가 생략된 사람과 사물의 부분들은 사람과 환경이 만나는 인터페이스로서 나타난다. 사람의 몸은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힘을 받고 있듯 어색하게 움직인다. 오히려 기계, 정육, 간판과 같은 사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꿈틀대고 빛을 발하도 한다. 때문에 사람이 주체로서 사물을 작동시키고 있는지 사물과 환경이 사람의 동작을 주관하고 있는지 모호해진다. 프레임에 갇힌 작가의 작업 속 인물들은 시간으로부터 분리되어 레버를 움직이는 사람, 고기를 포장하는 사람, 유흥가를 걸어가는 사람처럼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서브컬처 part 2》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디바이스에, 웹에, 미디어 환경에 접속하는 사람, 해체된 총과 연결되어 작동하고 있는 사람의 손이다. 이렇게 최소한의 환경과의 접속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사람의 이미지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접속, 기계, 리좀의 개념을 세우는데 영향을 미쳤던 독일의 생태학자 야콥 폰 윅스퀼(Jakob von Uexküll, 1864~1944)의 도해와 흡사한 면이 있다.

김홍수_수취 완료_단채널 영상, HD(1080p), 디지털_2020

고전과학에서 단일한 환경 안에 하등동물부터 고등동물까지 위계적으로 거주한다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윅스퀼은 각 생물종이 관계하는 세계는 서로 다른 것이며 무한히 다양한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도해한 동물의 서식 환경은 오직 그 동물이 직접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표식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벌에게 있어서 꽃은 꽃잎, 암술, 수술, 꽃받침으로 구성된 총체가 아니라 눈과 더듬이로 감각하는 색깔, 향기로서 존재한다. 윅스퀼은 각 개체의 세계가 저마다 존재하여 각 세계는 매개를 통해 관계한다고 여겼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단일한 세계에 놓여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환상이었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윅스퀼의 생태학적 관점에서 난초와 말벌의 관계를 부품들이 만들어내는 기계적 결합으로 묘사한 바 있다. 말벌은 난초의 생식계통으로부터 분리된 부분이고, 난초 또한 말벌의 오르가즘의 대상이며 분리된 생식 기관으로 말벌과 난초의 부분이 만들어내는 '사랑의 관계'로 생성이 일어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렇게 잠재성이 충만한 세계를 인용하며 주체와 사회의 본래적인 경계와 정체성의 해체 가능성을 제시했다.

김홍수_Polishing006_단채널 영상, HD(1080p), 디지털_2020

사람의 몸과 공장의 기계, 유흥가의 사인물의 접속을 그리는 김홍수의 도해에서 자본주의의 부품으로서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서브컬처 part 2》에서도 개인으로 하여금 총에 대한 구체적인 환상을 갖게 하고 유통경로를 제공하는 미디어환경 너머에는 세계를 하나의 단일한 체계로 통합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원리, 자본주의가 있음을 안다. 자본주의 체계 역시 욕망 기계이다.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화폐의 추상적 가치로 인해 모든 것이 잉여 가치를 위한 수단이 된다. 이 기계가 접속한 문화의 질적 가치는 화폐가치로 전환되고 질서는 자본주의에 봉사하는 범세계적 규범으로 교환된다. 그런데 《서브컬처 part 2》에서 그려진 인물들은 이러저러한 부추김에 의해 생겨났을 총에 대한 욕망으로 규범에서 일탈하고 자본주의 원칙을 위반한다. ● 그것은 작가가 '서브컬처'라는 주제에 대해 "전문성은 갖추고 있으나", "현시대에서 도태된 이미지"라 언급한 것과 관련을 찾을 수 있다. 화폐로 전환되어야 하는 노동가치와 숙련된 전문성이 위법적이면서도 잉여가치의 산출로 이어지지 않는 비생산적인 활동에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 의아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잉여가치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욕망을 내적 규범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작업 속 인물들의 몸짓들은 이전의 작업들에서 보던 것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의 작업 속 인물에는 인격을 특정 지을 고유한 묘사가 부재하듯 고유의 몸짓 또한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작품의 일부는 CCTV, 뉴스화면 등 실제 사건 장면으로부터 제작되기도 했지만, 또 일부 작업에서는 밀수와는 전혀 무관한 일상의 장면들이 몽타주되어 사건 현장으로 재구성되기도 했다고 한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자세, 화물을 나르는 몸짓, 컨베이어벨트에서 화물을 확인하는 동작, 총을 손질하는 손동작은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는 동작과 흡사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접속의 사건에서는 고유하지 않은 몸짓이 무게를 갖는다. 자본주의 기계로서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러나 다른 계열체를 구성함으로써 '~ 할 수 있는' 잠재성 또한 있다.

김홍수_Gun blue(wave003)_3채널 영상, 3840x1024, 디지털, 가변크기_2020

단일한 세계는 위계로 구성된다. 다양성이 사회와 문화의 선결조건으로 강조되는 이 시대에도 분명히 다수의 사람에게 통용되는 주류문화가 있으며 소수만이 인지하고 더욱 소수의 사람들이 종사하는 하위문화의 위계가 존재한다. 단일한 세계를 지탱하는 모든 규범들은 자본주의 안에서 작동한다. 예를 들면 총에 대한 법률이 작동하는 경계는 자본이 총을 상품화함으로써 얻는 최대의 이윤과 안정적인 사회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규제가 균형을 이룬다고 여겨지는 지점이다. 그런데 여기 전시 《서브컬처 part2: 모호한 경계》에서 다루는 어떤 욕망은 단일하고자 하는 세계의 의지를 흔든다. 애니메이션 속의 인물들과 몸짓은 일상 안에 탈주의 가능성을 불러온다. 무엇으로써 스스로의 욕망을 말하고 실현할 것인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위반할 것인가. 불법 총기 매매인의 이상향인 '건블루'에 접속하고자 하는 시각예술가의 환상에서 확인되는 것은 페티시적 시선인가 예술적 승화인가. ■ 서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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