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XIS 2020

김승현_유지영_이의성展   2020_0827 ▶ 2020_1023 / 월요일 휴관

김승현_Born-serie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53cm_202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_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021갤러리 021GALLERY 대구 수성구 달구벌대로 2435 두산위브더제니스 상가 204호 Tel. +82.(0)53.743.0217 021gallery.com

당신의, 당신에 의한, 당신을 위한 미술 ● '인간은 왜 사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와 같은 삶의 본질적인 목적에 대한 고민은 인류가 이 세상에 등장했던 까마득한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어져오고 있다. 이 질문은 단순한 단답형 시험문제처럼 손쉬운 정답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체자로서 한 개인이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마주하는 여러 국면들 속에서 자신의 존재이유와 삶의 목적을 밝혀가는 방대한 의미부여의 과정일 것이다. 이에 어느 시인은 "왜 사냐건 웃지요." 라 답하며 자연 속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자신이 찾은 삶이라 말했고, 20세기의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도 그의 생애 말년에 이르러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o Are We? Where Are We Going?」(1897)를 선보이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임을 시사하고 있다. 화면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종교적인 모티브들을 넣음으로써 삶의 목적과 본질에 대한 고민은 인간의 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영적인 차원에 기대어 해석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의 목적과 방향성을 두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존재라면, 인간의 정신적 산물이라 할 수 있는 미술작품은 어떨까? 미술작품을 향해서도 '작품은 왜,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 지난해 대구미술관의 『팝/콘』전에서 「본시리즈 Born-Series」(2019)를 선보인 김승현은 미술작품의 존재 목적과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가이다. 그는 팝송에서 차용한 영어문장을 패러디해 설치작업과 캔버스에 텍스트를 '찍어내는' 작업 방식을 선보인다. 캔버스에 텍스트를 찍어내는 작업의 경우, 관람자는 가장 먼저 캔버스 위에 적혀진 영어 문장의 '텍스트'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텍스트를 봄으로써 그것이 지닌 의미들을 해석을 하게 되는데, 이는 이내 그들의 머릿속에서 일련의 이미지들로 변환되는 경험을 동반한다. 즉 관람자는 '텍스트'를 통해 결과적으로 자신이 산출해 낸 '이미지'로부터 작품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는 '이미지'나 '한국어 문장'을 제시했을 때와는 분명 다른 효과를 준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미지와 한국어 문장이 갖는 직접성과 미묘한 의미구조의 차이를 피하기 위해 영어문장을 사용함으로써 관람자 스스로가 의미를 파악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이미지를 만드는 재맥락화의 과정을 유도하는 것이다. 영어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작품들이 하나의 이미지 덩어리로 인식되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김승현 작가는 2012년부터 삶과 미술의 관계 및 미술이 작동하는 이유를 탐구하는 「본시리즈 Born-Series」를 선보이고 있다. 기존의 「스트럭쳐 시리즈 Structure-Series」가 사회구조가 지닌 문제들을 꺼내 보이는 작업이었다면, 「본시리즈」는 그 고민의 방향이 '구조'라는 사회적 차원에서 미술작품의 존재 이유라는 다소 본질적인 차원으로 옮겨간 것이다. 대구미술관에서 선보였던 「본시리즈」는 '내 거실이 생긴다면 내가 좋아하는 가구들과 작품들로 채우고 싶다.'는 작가의 소망과 미술관의 소장품이 만나 탄생한 작품이다.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컬렉터의 거실 모습을 시각화하여 선보임으로써 일종의 가상적 개인이 되어보는 경험인 셈이다. 작가는 「팝/콘」전에서 두 개의 공간을 연출하였는데, 공간 속 작품들은 대구미술관의 소장품들 중에서 작가의 취향이 십분 반영된 것이며 각각의 공간은 디자이너가 제작한 브랜드 가구들과 함께 배치되어 있다. (중략) ● 앞서 언급한 미술작품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작가는 『팝/콘』전이 전시되었던 대구미술관의 제1전시실의 출구의 벽면에 「기능 버튼」을 부착해 그 답을 대신하고 있다. 뱅앤올룹슨(Bang&Olufsen)사의 전화기의 버튼에서 착안한 「기능 버튼」은 'Enter', 'Pause', 'Memory', 'Redial' 이라는 각각의 기능이 담긴 버튼을 확대해 전시장 출구에 부착해 놓은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관람객이라는 한 명의 주체가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들어가고(Enter),멈추어 서서 작품을 보고(Pause), 작품 또는 작품이 전달하는 메세지들을 기억하고(Memory), 마지막으로 이를 자신의 삶의 순간순간마다 적용하고 재맥락화(Redial)하는 것이 작품의 본질임을 은유하고 있다. 미술가 최정화는 "Your Heart is My Art. 당신의 생각이 올바릅니다. 자신감만 가지세요. 미술사도 필요 없고, 설명서도 필요 없고, 현재 당신이 느끼는 그것을 기념합시다."라고 말했다. 결국 미술작품의 목적은 주체인 '나'의 일상의 공간에서 나와 함께 머물면서 감각을 충족시킬 뿐 아니라, 생각을 환기하는 데에 도움을 주며 더 나아가 나의 삶의 목적을 찾는 긴 과정 중에도 함께 하며 상호작용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 방선현

김승현_Born-serie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4.2×33.4cm_2020
김승현_Born-serie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7.9×25.8cm_2020

"'본-시리즈(Born-series)'는 2011년부터 시작된 연작이다. 작업 초기에는 미술과 미술품의 쓰임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볼 생각이었다. 그룹 퀸의 노래제목 'I Was Born To Love You'를 패러디한 'I Was Born To Decorate Your Living Room (나는 당신의 거실을 장식하기 위해 태어났다).'가 가장 처음 만든 본-시리즈의 문장이었다. 이후 쓰임 뿐 아니라 다른 이야기들도 하고 싶어졌다. 그런 이유로, 어느 공간에서 본-시리즈와 함께 놓일 가구들과 조명들, 작가들의 이름까지 포함시키며 문장은 길어지게 되었다. ● 본-시리즈에 등장하는 내가 좋아하는 가구와 작가들은, 미술을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책과 전시장에서 접하고 만났던 것들로 나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던 것들이다. 나는 과거의 사람들이 물건을 수집해 그것들로 경이로운 방(분더캄머)을 꾸몄던 것처럼 나만의 경이로운 방을 만들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경이로운 방을 위해 가구와 작품을 수집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것들의 이름을 모아 영어문장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이 공간은 문장으로 만 존재하며 머릿속에서만 떠올릴 수 있다. 지금까지 본-시리즈를 이어오면서 드는 생각은, 머릿속이야 말로 진정 경이로운 방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 김승현

유지영_Anti-Sea_UV 프린트, 리넨에 색연필, 석고, 아크릴채색, 젤 왁스, 유리_200×140×5cm_2019
유지영_Anti-Sea_UV 프린트, 리넨에 색연필, 석고, 아크릴채색, 젤 왁스, 유리 _200×140×5cm_2019_부분

연쇄적 풍경을 갱신하기 ● 월요일이 지나면 화요일이 온다. 그리곤 수목금토일을 거쳐 다시 월요일이 시작된다. 이 순차적인 나열은 하나의 마디로 여럿 모여 열 두 달의 자연스러운 시간의 관습을 만든다. 문자는 하나 이상의 규칙에 따라 서로 달라붙어 단어가 되고, 이 뭉치들이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순차적으로 정렬되면 문장이 될 수 있다. 이 문장들은 일정한 물리적 프레임에 차곡차곡 담겨 줄곧 책이나 원고가 된다. 암묵적으로 합의된 일련의 선형적 체계는 사회문화적인 관습에 의해 결정되며,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 속한 개체들의 의미나 형태를 정의하거나 제한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 일상적 사물에서도 기능적으로 최적화된 시스템이 적용된 정렬이나 묶음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 계란은 규격화된 계란 판에 담겨 일정한 단위로 소비되고, 원고지는 한 장에 들어갈 단어의 수를 제한한다. 유지영은 현실에서 한 대상이 효용성을 획득 혹은 유지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용인하는 구조들의 연쇄를 의심하며, 각 항의 위치에 임의의 변용을 가하며 이 문제를 가시화한다. 이를 위해서는 몇몇 가설이 전제된다. 만약 하나의 거푸집에 속해 있던 개체의 일부가 밖으로 탈주한다면 상황은 어떻게 변모할까? 내용물들의 열거가 연속성을 가질 것이란 믿음이 부분적으로 좌절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게 되는가? 이를테면 「Calendar Series」(2019)처럼 계란이 계란 판의 묶음을 빠져나와 달력의 묶음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계란과 달력의 의미와 기능은 달라질까? 「Bric-à-brac」(2019)에서 완벽한 이미지의 구성을 담아내는 회화의 화면 한 부분이 찢어졌을 때, 그 안에 담겨 있던 이미지의 나열은 쏟아져내려 어디로 가는가? ● 전시장에는 위 질문을 구체화한 예외적 상황이 펼쳐진다. 우선 대상의 배열 체계를 결정하는 용기container는 군데군데 찢어지거나 구멍 난 그리드의 형태로 드러나 있어, 이것의 기존 기능이 다소간 무용한 것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이탈한 색채, 숫자, 이미지는 3차원의 시공간으로 흘러내려 서로 뒤섞인다. 틀의 안팎에는 계란, 시트러스 과일, 컵이 작가가 내린 임의의 결정에 따라 나열되어 있다. 무작위로 선택된 것처럼 보이던 이 사물들은 자신이 예속된 시스템의 속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문제의식을 또 한 번 환기한다 - 말랑말랑한 과일의 껍질은 그 속에 여러 조각으로 나뉜 과육의 크기와 모양을 결정하는 피부로서, 액체를 담는 컵은 그것이 수용하는 매질을 일시적으로 보호하고 형태를 결정하는 또 다른 상위 개념으로서 존재한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분류 시스템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그 속에 현실의 사물을 교차, 재배치, 레이어링 하는 플레이 속에서 작가가 선택한 실험체는 당연시되던 일상적 구조의 작위성을 직면하게 하는 매개가 된다. 다시 말해 그녀는 전시 'One after another' 에서 회화가 갖는 일련의 연쇄적 관계(이미지-캔버스-벽)를 통로 삼아 현실의 분류 체계와 인간의 인식 단위의 역학관계로 비판적 시선을 옮겨간다. ● 그래서, 유지영은 이 배열을 부정하거나 모두 해체하려 하는가? 사고와 행동의 단위가 되는 개념적, 물리적 장치들을 제거함으로써 문화적 규범이 만든 수많은 체계에 작은 종말을 고하려 하는가? 작업을 서둘러 의미의 영속된 종착지로 데려가려는 우리의 의무감은 또 다른 언어적 프레임 안에 의미를 말끔히 나열하려는 오래된 관습을 되풀이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기호와 의미의 연쇄들을 완벽하게 해체할 수 있는 절대적인 논리나 돌파구는 애초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도리어 의미의 단위를 생산해내는 구조적 모델의 경계에 계속해서 머무르며 이것을 변용할 때, 이 틀의 작동 원리와 속성에 관한 효과적인 비판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그녀의 제스처를 익숙하고 평범한 사물 속에 굳어진 현실의 감각을 순환시키는 작은 신호로 볼 수 있다. 그 신호는 수용자로 하여금 의미에서 해방된 개체들과 나열의 형식 사이를 충분히 표류해볼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한다. ■ 박지형

유지영_(from left) October, May, June, December, August_ 나무에 유채, 아크릴채색, 석고_53×55×4.5cm_2019
유지영_September_나무에 유채, 아크릴채색, 석고_53×55×4.5cm_2019

"유지영은 회화의 관습화된 조건을 의심하며 매개체의 형식이 내용에 관여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특히 거듭 변해서 가늠하기 어려운 대상을 사용자의 편의나 이해를 위해 일정한 규칙에 따라 인위적 틀 내에 나열할 경우, 매체의 형식이 개체 특유의 의미, 형태 혹은 본질을 갈음하며 쓸모 있는 도구로 바꿔 놓는다—컵이 형태를 갖지 않는 액체를 자신의 모양대로 담아내듯, 달력은 경계 없는 시간의 계기를 하루라는 단위로 절단해 칸칸이 나누고 문자는 변덕스러운 생각의 흐름을 일렬로 꿰어내 선형적으로 늘어놓는다. 작가는 자신의 주 매체인 회화를 이러한 문제의식에 접근하는 통로로 삼는데, 미적 사물이 회화로 인지되기 위해 갖춰야 하는 구조적 연쇄를 '벽–지지체–이미지'로 간주하고 관계식을 임의로 교차하거나 변주하여 가시화한다. 내용물이 효용성을 약속하는 틀을 찢고 나오면 어떤 형태로 어딜 향해 흘러갈까? 혹은 다른 틀로 거처를 옮기면 어떨까? 물이 컵을 벗어나면 쏟아지는 것처럼, 지면을 벗어난 문자나 캔버스 바깥으로 탈주한 이미지는 증발해버릴까? 이처럼 작가가 가정한 예외적 상황은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용인하는 구조들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환기한다." ■ 유지영

이의성_미세한 예술입자 Fine Art Particle_종이, 흑연, 알루미늄, 스틸, 나무_가변크기_2018_부분
이의성_미세한 예술입자 Fine Art Particle_ 종이, 흑연, 알루미늄, 스틸, 종이, 흑연, 알루미늄, 스틸_가변크기_2018_부분

예술의 생산성에 관한 실험 ● 예술가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정은 작업에 포함되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외에, 작업하는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정신/육체노동이다. 이의성의 전시는 젊은 작가로서 이 이중의 노동을 수행하며 생겨난 의문에 대한 탐구이다. 작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의식이 깔려있는 작품들은 재능이나 의지만으로는 지속할 수 없는 작업의 세계에서, 예술은 얼마나 생산적인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다. 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있을 수 없지만, 한 번 해보는 것과 안 한 것과의 차이는 존재한다. 작업 또는 노동에 투입된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를 다루는 그의 작품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듯한 예술작업에 대해 차분하게 대차 대조표를 만들어본다. 들어간 것(input)과 나온 것(output) 사이에는 차이가 발생하기 마련이고, 이 차이가 가시화 된다. 이의성은 주로 물리적인 양의 차이를 다루지만, 그 차이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이다. 작업을 통해 유실된 물질과 에너지를 측정하고 기록하는 그의 방식은 예술적 재현이기 보다는 과학적 재현을 떠올린다. 시험관, 저울, 자, 가격표 등등이 곳곳에 자리한다. 과학이 진리를 확증하는 방식은 재현이다. 누가 실험을 해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가설은 진리로 인정받는다. 생산된 것은 보여 져야 하고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유실된 실오라기 하나하나도 다 체크하는 엄격함을 보여주면서 작업을 통해 사라진 무엇이 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전시장 1층의 작품 [물리적 드로잉]은 린넨 천을 프레임에 고정시키고 파장 형태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 부산물을 모은 것이다. 족집게로 모아 저울 위에 올려놓은 실밥의 무게는 천에서 뽑은 실과 모아놓은 실의 차이를 지시한다. 기록에 의하면 2g의 차이가 났다. 저울 위의 실밥은 금속이나 천 같은 평범한 재료가 노동의 과정을 거쳐 예술 작품이 되었을 때 측정될 수 있는 물리적 변화의 일례이다. (중략) ● 이의성의 중성적인 작품은 그러한 사회적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작업과정에서 나오는 물리적 유실을 통해 생산물이 생산물로서 가능하기 위한 무형의 것을 암시한다. 경제학이 아닌 철학적인 용어로 다시 읽자면, 그것은 바로 동일자를 구성하는 타자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체계의 바깥에 있으면서 그 틀 안으로 결코 내면화될 수 없는 타자, 그러나 그 틀의 존립자체가 가능하기 위해서 부단히 소통되지 않으면 안 될 타자, 그런 타자의 존재를 양각화'(가라타니 고진)하는 것이다. (중략) ● 예술은 노동, 특히 소외된 노동처럼 인간의 일부가 도구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 전체가 작동한다. 이성은 물론 꿈과 무의식까지 활용된다. 그래서 예술은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지만, 그 가치의 측정 기준은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불투명성은 억압적이기도 하고 해방적이기도 하다. 이의성의 작업은 판매가 아닌 생산 단계에서도 '운명을 건 도약'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40가지의 도구를 나무로 깎은 작품 「노동의 무게」는 가치가 생산되는 과정의 임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들은 일견 매우 질서정연한 것 같지만, 그때그때 조달해온 나무로 만들어진 도구들의 비율은 들쭉날쭉이다. 엄청나게 큰 바늘이 있는가 하면 원래 크기보다 아주 작은 연장도 있다. 유일한 원칙은 하루에 한 개만 깎는다는 것이다. 다소간 기계적으로 정해진 원칙은 임의성을 감추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깎기 전의 무게와 깎은 다음의 무게의 차이를 노동의 무게로 간주했다. 하루에 한 개씩 40일간 깎은 시간도 그래프로 표시했다. (중략) ● 이의성은 작업과정 중 사라진 것에 주목한다. 그러나 예술 작품에서 사라진 것은 단순히 낭비된 것이 아니다. 사라짐이 없다면 변형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변형이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단순한 재료와 노동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건조한 실험실 같은 전시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부분은 사라진 물질과 에너지에 대한 미세한 감각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소통(유통) 되는 가치에 대한 개념과 연결된다. 물질 A가 물질 B로 변환, 또는 생산되어 유통의 회로에 투입되었을 때 어떤 가치가 발생한다. 작가는 사라진 것을 기준으로 가치를 측정한다. 예술이야 말로 사라진 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그러나 예술/노동은 너무 가치가 높아서 아예 가치가 책정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의 작품은 열정으로 시작했겠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본전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결과물 없는 무상의 행위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 이선영

이의성_드로잉의 가격 Price of Drawing_종이에 흑연_각 24×60cm, 70×24×24cm_2018
이의성_적합하지 않은 도구의 탄생 The Birth of Unsuitable Tools_ 나무조각, 흑연, Birth Records of Tools_가변크기_2015
이의성_적합하지 않은 도구의 탄생 The Birth of Unsuitable Tools_ 나무조각, 흑연, Birth Records of Tools_가변크기_2015_부분

"저는 개인과 사회구조간 상호작용하는 적응의 방식들을 관찰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작업에서 주요한 질문들 중 하나는 : 우리의 행동과 사고 그리고 삶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 및 과정으로 일상 안의 가치체계, 힘의 구조, 노동의 형식 등과 맞물려 변화되는가? 입니다. ● 최근 작업에서 저는 도구들의 다른 형식, 쓰임새 그리고 조합방식을 통해서, 개인과 사회의 변형된 관계를 노동이라는 지속가능한 매개행위로 연결지어 해석하고 있습니다. 도구들이 일과 노동의 개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그것들은 육체적인 행위와 과정이 물질적으로 구체화 되어 있으면서도 관념적인 노동의 가치와 목적이 사회구조와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도구는 제게 있어 몸의 육체적 확장 뿐만 아니라 사고의 확장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제가 만든 도구들은 매개자이자 동시에 개인의 연장(tool/extension)으로 활용됩니다. 저는 도구를 통해 의미를 추출하고 사회에 스스로의 윤곽을 남기는 일련의 과정, 그 시작과 끝을 드로잉을 비롯한 예술매체로 매개하여 허상과 실상을 오가는 생산적인 가치체계를 구현하는 실험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 이와 같이 작업은 도구의 다른 형식과 쓰임새를 작가 자신의 유무형의 예술노동으로 연계하고 있으며, 이는 현재 예술노동과 그것을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한 이중의 노동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작업(art work)이 일(work)의 개념에서 사회가 정의하는 혹은 인정하는 노동생산성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냐는 의문에 기초하여 작업 또는 노동에 투입된 물질과 에너지를 측정하고 기록해보고 있습니다. 노동의 양을 무게나 길이로 환산한 도구를 만들거나 관념적인 노동의 가치를 덜어낸 드로잉의 가격을 제시하는 예와 같이 들어간 것과 나온 것의 차이, 처음과 나중의 차이로부터 유실되는 노동의 가치와 의미를 가시화해보고 있습니다." ■ 이의성

Vol.20200827a | AXIS 2020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