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김명진展 / KIMMYUNGJIN / 金明辰 / painting   2020_0907 ▶ 2020_0916

김명진_흔들리는 밤_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_227×145cm_2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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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시각예술 창작산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

어둠 속에 명멸하는 타자들의 행렬 ● 축제의 계절인 내년 5월, 2부를 기약하는 『축제』 전이 유례없는 돌림병이 창궐하는 2020년 가을에 열린다. 밤보다 더 어두운 밤에 열리는 축제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그네 뛰는 소녀와 그 아래의 어깨, 광대의 줄타기, 뿔난 이들, 광야에서의 경주, 하얀 코끼리, 곡예사, 가면 쓴 이, 세례식, 나무를 옮기는 사람, 빛을 캐는 사람, 고독한 왕, 광인의 행렬....' 등이다. 어느 구멍으로 새어 들어온 지 알 수 없는 빛이 활주하는 암흑 상자 안 존재들은 '창 없는 방인 모나드'(라이프니츠)같은 어두운 화면에서 서로를 비추면서 서사를 이끌어 나간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은 명석 판명한 이성을 지향하는 대낮의 철학에 대해, 밤하늘의 별같이 다양하게 빛나는 세계를 지향한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빛남의 조건인 어둠은 불가피하게 무거움 또한 내포한다. 김명진의 작품은 하나의 규칙으로 총괄될 수는 없지만 비슷한 등장인물이 여러 화면에 등장하면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야기가 계속된다. ● 김명진의 최근 작품들은 죽어야 사는 희생양의 기제를 깔고 있다. 잔혹성이 포함된 즐거운 유희이다. 살과 피의 상징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검은 화면, 그리고 드물게 나타나는 주묵의 붉은 빛은 카니발에 가까운 축제를 말한다.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이태리 르네상스 문화』에서 유럽에서 축제의 주요 형식은 신비극과 행렬이라고 서술한다. 신비극은 성서이야기 등을 극으로 만든 것이고, 축제행렬은 종교를 주제로 한 화려한 행진이다. 전통사회에서 신화나 종교는 허구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현재 단순한 신화로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이전에는 주술의식으로 실제 거행되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평민이 왕의 분장을 하거나 인간이 신격을 가지고 제물로 바쳐지는 축제가 고대에 널리 이루어졌다. 광대로 나타나곤 하는 왕의 의무는 계절을 질서에 따라 바뀌게 하고 대지에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한다. 그러나 축제 마지막 날은 짚으로 만든 왕이 제의화 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 인류학자 카유와도 『인간과 성(聖)』에서 이 가짜 왕의 비극적 운명을 말한다. 교수형에 처해지는 기괴한 사육제의 인형은 실제의 인간 제물을 대신하게 될 때 의식은 풍자적 모방이 된다. 축제는 가면과 흉내내기(mimesis)의 연기를 끌어들였다. 카유와는 가짜 교황이나 왕을 뽑는 희극적이면서도 신성모독적인 풍자적 모방 속에서 사물의 질서를 주기적으로 전복시키려는 인간의 오랜 관심사를 본다. 이러한 역전은 기존 질서를 뒤집어엎으려는 위기의 시간에 발생한다. 카유와에 의하면 이 같은 반전의례(ritual of reversal)는 고도로 위계화 된 집단적 관계에서 카타르시스를 주는 역할을 한다. 축제의 주인공이었다가 희생되는 광대는 대개 이방인들이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에서 축제가 끝나면 처형되는 사육제의 왕, 그 광대는 집단의 안녕을 위해 하나가 희생되는 희생양의 기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대개 희생되는 것은 사회적 관계가 소원한 주변인들이다. ● 제의적 희생물인 그들은 사회적 관계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복수의 위험 때문이다. 복수의 위험이 없는 이방인들은 살해되고 나서는 다시 신성시 된다. 김명진의 축제에도 인류학자나 종교학자가 밝히는 축제의 상징적 구조가 깔려 있다. 물론 구조는 허구지만 역사의 흔적이며 다시 현실화될 수 있다. 현실과 환상은 꼬리를 물며 인과관계를 형성한다. 프랭크 커머드는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에서 허구는 정신의 구조물이긴 해도, 인간이 허구를 원하는 까닭은 위안을 얻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 한가운데에서 냉엄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김명진에게 작업은 자신을 포함한 가장 작은 공동체부터 그가 직면한 세상을 이해하고 때로는 변화시키는 방식이다. 먹과 한지 꼴라주 등으로 만들어진 모노톤의 작품들은 어둡고 무거워 보이기는 하지만, 가라앉지는 않는다. 작품 「파도 위와 그 아래」(2020)에서 보이듯이, 빛의 힘으로 물위를 걷는 듯한 이미지가 나오기도 한다. ● 바닥이 없기에 가라앉을 수도 없다. 그렇지만 중력감은 존재하며, 작품 속 등장인물들을 가는 줄 위이나 그네 등에 매달려 추락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광대의 뾰족 모자와 들어 올린 발치를 관통하는 긴장감이 검은 화면을 횡단하는 선들을 통해 전해져 온다. 오래전부터 실험해온 한지 꼴라주 작업에서 가늘게 오려낸 얼룩진 선들은 최근 작품에서 내용을 담은 형식이 되었다. 어둠속 빛을 연상시키는 선은 순수한 광선은 아니지만, 추락과 익사, 또는 그 직전에서 고통 받는 존재들을 들어올린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것들은 급격한 존재의 변환을 겪는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존재들에는 지상의 존재들에게 안정감을 부여하는 명암법이 관철되지 않는다. 신체 일부를 표현한 작품은 생명체의 항상성을 위해 필요한 외곽선이 흩어져 있다. 어둠이 편재하는 얼룩덜룩한 형상들은 삶에 내재한 죽음을 표현한다. 피에로 복장이나 가면을 쓴 인물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를 상징한다.

김명진_뿔난이들_천에 먹, 한지콜라주_45.5×65cm_2019~20
김명진_커플couple_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_116×97cm_2017

가장(假裝)은 동일자 안의 타자를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예술가적 정체성과 만난다. 타자로서의 예술가는 자신을 표현하는 자이기 보다는, 미지의 힘을 통과시키는 매개자다. 일찍이 현대의 문화적 징후를 작품화한 카프카는 현대의 정신분석학적 논리를 연상시키는 어투로, '나는 나 자신과도 공통점을 갖지 못한다. 나는 내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쓰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말하며, 내가 생각해야만 하는 것과는 달리 생각한다. 그렇게 계속해서 심오한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고 말한 바 있다. 우주적 밤을 떠올리는 깊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존재들은 축제의 행렬을 이룬다. 심연으로부터 들어 올려지긴 했지만 그들이 안전해진 것은 아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그들이 발 딛고 서 있을 든든한 지반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줄을 타고 있거나, 그네를 타고 있거나 서로를 밀고 당기는 줄과 연결된 채 공중에 붕 떠 있다. ● 줄은 가느다란 버팀대가 되어주지만 동시에 속박, 운명, 조종 등 부정적인 상징 또한 선명하다. 수없이 추락해 본 노련한 광대만이 그가 타고 움직이는 칼날 같은 좁은 입지를 초월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곡예사들은 줄 위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그 위에서만 비상할 수 있다. '장미빛 시대', 또는 '어릿광대 시대'로 알려진 시기의 피카소가 성(聖) 가족의 이미지로 변환시킨 광대와 그 가족의 이미지는 그들이 무대 밖에서는 철저히 주변적 존재임을 알려준다. 덧없는 환영이지만 무대는 광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김명진의 작품에서 광대는 나/가족일 때도 그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광대 복장이 아니어도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하다. 어두운 바탕은 무대를 조명 받는 어떤 영역에 한정시키지는 않는다. 서사는 축제처럼 좌표를 설정할 수 없는 막막한 바깥에서 펼쳐진다. 조각들이 덧붙여지고 때로는 긁어내며, 재도 포함되는 김명진의 작품은 이질적인 것들이 섞이는 장이다. ● 그가 이번 전시에서 축제를 호출한 것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 관련된다. 원근법을 비롯한 재현의 장치로부터 벗어난 현대 미술가들에게도 축제는 작품의 한 소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미학과 닿아있다. 축제 이미지로 가장 유명한 현대 화가는 샤갈일 것이다. 샤갈에게는 유년기의 추억과 함께 하는 유대인 사육제가 나타난다. 이때 어릿광대들은 종교적인 의식이 열리기 전에 맨 앞에서 행렬을 지어 공연을 하곤 했다. 루이 아라공은 샤갈의 작품에 대해 '사람과 새가 아무런 차이가 없고 당나귀가 하늘을 나는 이 무중력 상태의 나라에서는 모두 서커스를 하고 사람들을 거꾸로 걷는다'고 묘사한다. 샤갈의 전기 작가 장 레마리에 의하면, 샤갈의 작품이 '모든 피조물은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의 왕국에서 화해하고 소통 한다고 믿으면서 원죄 이전의 세계를 창조한다'고 본다. 역사로의 추락은 그자체가 실낙원의 여정이었으니, 축제는 복락원을 향한다고 할 수 있다. ● 미하일 바흐친에 따르면 카니발은 총체적인 혼융을 지향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개체의 고유한 한계를 넘어 우주적 합일에 이르고, 인간 본성을 나눌 수 없는 살아있는 전체로 복원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내려간 낮은 곳을 새로운 시작의 자리로 만들고자 한다. 카유와에게도 축제는 우주의 초기 단계인 태고, 즉 창조적인 힘을 지닌 시기를 다시 실현시키는 것이다. 축제는 신성성이 부여되는 시간을 재구성하여 초자연적인 것과 다시 접하게 함으로서 인간을 초월적인 에너지에 접근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구는 길지 않다. 많은 이들이 묵시록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는, 인류 최초의 대량살상이 벌어진 세계대전 전야에 짧은 '좋은 시절'을 구가한 유럽에서 서커스는 화가들에게 인기 있는 소재였다. 예술가적인 직감은 이 축제의 희비극적인 주인공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했다. 작품과 비교될 수 있는 축제, 또는 서커스라는 마법의 원 속에서 그들은 왕이었던 것이다.

김명진_빛나는 얼굴_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_100×80cm_2019~20

그러나 짧은 축제가 끝나면 처형될 존재라는 점은 여전하다. 신화학자들은 실제로 일어났던 희생 제의가 이후에 상징적 차원으로 변화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피 흘리는 희생, 속죄, 부활 등등의 기제는 축제의 속성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이후 축제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예술에도 스며든다. 누가 강제로 시킨 것은 아니지만, 예술가는 대표적인 희생양 아닌가. 김명진의 작품 속 인물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자연광은 아니다. 굳이 자연광과 비교하자면 햇빛이 아니라 달빛에 더 가깝다. 그들은 저 너머에서 오는 빛을 반사한다. 얼룩덜룩한 신체는 빛을 받는 존재의 이질성을 나타낸다. 정상/병리의 구별에 의하면 이질성은 병적으로 간주되지만, 동시에 그것은 다양성이다. 누군가는 거기에서 또다른 '생명의 과정'(깡길렘)을 본다. 꼴라주 된 오려진 선들을 더 어두운 바탕 면에서 빛줄기와도 같은 위상을 가진다. 김명진은 지필묵이라는 전통에서 '필과 획을 한줄기 한지 조각으로 변환시키고 뒤섞는다.' ● 그러나 그것은 숭고를 지향하는 추상회화에서 등장하곤 하는 빛의 선과도 다르다. 존재의 크고작은 상처를 받아낸 붕대나 낡은 밧줄 같은 것과 비교할 수 있는 얼룩 진 선들은 순수하지 않다. 인류학자들의 분류에 의하면 오염에 속한다. 동서고금의 축제는 경계를 위반함으로서 질서를 재정립하는 장이다.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김명진의 작품은 이러한 경계 위반을 일삼는다. 한지 꼴라주라는 그의 형식은 우연과 필연의 경계를 넘나든다. 휴지통 안에 모아놓은 한지들은 오려지기도 하고 찢어지기도 하면서 화면에서 뒤섞인다. 손에 닿는대로 선택된 한지 조각들에 의해 중첩된 화면들은 스스로 만든 것을 (재)발견하는 장이다. 한지의 물성을 재발견 하는 중인 최근 작업은 점차 두꺼워지고 있다. 재를 활용하여 울퉁불퉁한 화면을 만들기도 한다.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파편과 파편이 겹쳐지고 재로 뒤덮인 묵시록적 세계, 이러한 복합적 바탕에서 마술의 상자처럼 무엇이 솟아난들 놀라울 것이 없다. 그것은 단지 형식적 실험이라기보다는 때로 신비함으로도 이어지는 존재의 불투명성과 닿아있다. ● 금기를 위반하는 곡예사/예술가는 이 한시적 시공간을 이끄는 주인공들이다. 이러한 한시성이 그들을 화려하게 하고 또 비참하게 한다. 작품 「고독한 왕」(2018-2019)에서 김명진은 벨라스케스와 베이컨의 계보를 이어서 전기의자에 앉아 그대로 죽은 듯한 왕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어릿광대는 축제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전통을 배경으로 한다. 원래는 무교였다가 5년 전에 절박한 실존적 요구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집근처의 작은 성당에 다니면서 천주교에 입문한 작가는 현대사회에서 예술만큼이나 타자화 된 또 다른 전통에 자신의 경험을 접목시킨다. 종교인에게 기도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듯이, 작업 또한 그러하다. 축제라는 판을 가정한 행렬은 묵상 중에 명멸하는 무명의 존재들로 하여금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환상적 무대를 연출하게 한다. 종교적 묵상과 예술적 상상은 자아 뿐 아니라,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공동체, 그리고 사회적 맥락까지 확장된다. ● 특히 인간의 오만이 큰 몫을 차지하는 근자의 자연재해는 깊은 어둠을 배경으로 하는 김명진의 형이상학적 작품에 시사성마저 부여한다. 자개처럼 빛나는 하얀 얼룩들은 편재하는 빛을 암시함과 동시에, 밤이나 우주를 닮은 검은색 배경을 더욱 깊게 만든다. 「흔들리는 밤」(2019-20)이라는 제목의 작품도 있지만, 작가는 굳이 밤이라는 단어를 쓰기 싫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밤이 아니라 자신의 깊숙한 곳이다. 물리적 밤이 아닌 꿈같은 밤이다. 악몽이든 길몽이든 자신의 현실과 깊이 관련된 무의식의 저장고로서의 어둠이다. 제작 과정에서도 어둠이 먼저이다. 화면을 까맣게 한 후에 들어간다. 먹에는 수많은 색이 잠재해 있다고 간주되어 왔지만, 먹을 포함한 복합적 재료가 사용되는 그의 화면에서는 형태 또한 찾아진다. 작업은 잠재적 형태가 현실화되는 과정이다. 시작은 분명한 듯 하지만 매듭 짓기 힘든 고뇌의 연속이다. ● 너무 깊이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는 사태를 걱정해야 할 만큼 검은 공간의 흡입력은 크다. 모든 생명이 태어났다 다시 돌아가는 어둠은 양가적 상징을 가진다. 기독교에서 중요한 '살과 피'라는 상징이 멜랑콜리한 정서와 만났을 때 먹은 보다 보편적인 조형언어로 재탄생한다. 작가는 이 검은 공간에 대해 '그곳에는 사연 많은 감정이 얽혀진 살과 피의 잔여물'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검은 공간은 명멸하는 빛의 시간성을 드러나게 한다.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에서 '빛은 시간이고 색은 공간이다'라고 말했듯이, 김명진의 작품에서도 빛은 시간이다. 시간은 이야기이다. 빛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빛이 창조된 창세기, 그리고 마지막 장인 묵시록일 것이다. 아득한 빛은 우주적 종교적 상징으로 다가오지만, 가까운 시간대로는 고향의 빛과도 연결될 수 있다. 그가 태어난 섬과 대륙을 연결하는 다리는 매우 무서웠던 기억이 남아 있지만, 분리된 것이 이어지는 종교적 체험은 개체의 역사에서도 반복된다.

김명진_기도_장지에 안료, 주묵, 한지콜라주_50×44cm_2017

축제와 서커스를 표현한 작품은 이 전시의 주제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축제의 행렬을 표현한 작품 「행렬」(2018)에서 직선적 요소로 쭉 뻗은 길 위의 다양한 존재들은 다양한 행위를 하면서 나아간다. 어두운 배경은 같이 있는 각각을 단독자로 만든다. 어떤 인물은 어둠에 갇혀 있는 듯도 보인다. 어둠에서 나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갈 존재들은 가득 펼쳐진 빛살 위에서 의기양양하다. 작품 「바다에서 연못까지」(2019-2020)에서 인간은 서커스 속 배우처럼 줄로 연결된다. 빛줄기같은 연결망에 대한 유비(analogy)는 원시적 축제부터 현대 정보사회에 편재하는 그물망에 이를 것이다. 줄 위에서 밀고 당기기는 위태로움 또한 확장시킬 것이다. 서커스의 동물들이 등장하는 「공 굴리는 코끼리」(2018)에서 화면 가득한 큰 원 위의 하얀 코끼리의 공은 사선 위에 걸쳐있다. 작품 「jump」(2016)에서 줄에서 줄로 위험한 이동을 하는 곡예사, 그리고 공위에 공, 또 그 위의 공에서 중심잡고 있는 「곡예사」(2018)의 검은 배경에는 그들의 위험한 행위를 보호해줄 어떠한 안전장치도 보이지 않는다. 배수의 진은 없다. ● 줄 타는 피에로를 그린 「가면놀이」(2018)는 분장과 가면이 가지는 특성, 즉 감추면서 드러내기라는 역설적 면모를 보여준다. 피에로의 「피에타」(2018)는 축제의 주인공이 곧 사회의 안녕을 위해 희생될 것임을 예고한다. 모든 것을 삼키는 검은색과 어울리는 애도의 주제는 여러 버전의 피에타 상을 낳았다. 작품 「모자상」(2018)은 비극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공감을 자아낼,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다. 줄들 사이에 장대 다리 한 피에로를 표현한 「흔들리는 조각들」(2018)과 뾰족한 바다의 물결들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인물 「파도 위와 그 아래」(2020)는 지상에 제대로 발이 닿을 수 없는 위태로운 존재조건을 보여준다. 둥근 원 안의 곡예사가 기하학적 구조들을 서로 연결하는 「곡예사」(2018)에서 이 만능 재주꾼은 기하학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유희하는 전능한 존재이기도 하다. 얼룩지고 찢어진 단편들을 붙이고 긁어내기를 반복하며 만들어진 형상이지만 검은빛 공간에서 얼굴들은 빛을 발한다. ● 작품 「아무것도 아닙니다」(2020)는 아래부터 무너져 내리는 듯한 얼굴이다. 조각들로 기워진 인간은 분열과 해체의 경계에서 가까스로 자기정체성을 유지한다. 작품 「생각하는 사람」(2017)에서 해골 실루엣의 인물은 너덜너덜한 표면을 벗겨낸 환골탈태한 모습이다. 축제는 공동체의 행사지만, 작가는 가장 작은 공동체인 남자와 여자, 또는 가족을 축제의 주요 장면에 넣었다. 광대가 줄 안팎에서 자유롭게 유희한다면, 그들은 풀 수 없는 줄로 엮여진 사이다. 가상적 엮임이 강화될수록 실제의 엮임은 회피되기도 하지만, 인생과 마찬가지로 예술도 실전이다. 최근 작품은 특별히 더 어둡고 무거운 것은 아니지만, 지배적 문화가 더욱 얄팍해질수록 그의 작품이 더 어둡고 무거워져 보일 것은 분명하다. 작품 「흔들리는 밤」(2019-20)에서 소녀를 무릎 위에 세워 그네를 타는 듯한 위태로운 상황을 보여준다. 고난과 역경을 포함한 지상의 삶을 함께 헤쳐 나갈 커플에게 자명한 것은 없다. ● 피에로를 포함한 작품 속 존재들은 우연과 필연, 유희와 운명이라는 구별되는 두 힘의 압박을 동시에 받는다. 팽팽한 밀고 당기기는 이 어두운 세상을 부조리하게만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무기력하기는 하지만 인간에게는 최소한 두 가지 방책은 있다. 그것은 과학과 예술이다.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풀 하우스」에서 과학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예술'이라고 인용하면서, 해답 가능한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한다. 예술은 해결하지는 못한다.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문제들을 실감나게 제시함으로서 해결에 가까이 가고자 한다. 양자는 방법론에도 차이가 있다. 분업을 통해 생산력을 확장시키는 과학적 방식에 비한다면, 예술은 소수자의 길이다. 소수자의 예술을 지지하는 철학자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사유를 시작하게끔 자극하는 기호들은 사랑, 광기, 죽음 등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사유가 결정적이고 명시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대신에, 우연히 맞딱뜨린 힘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 그에 의하면 인간은 참된 것에 대한 욕망, 진실에 대한 의지를 처음부터 갖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진실을 찾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리고 이 진실 찾기로 몰고 가는 어떤 압력을 격을 때만 우리는 진실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폭력과 광기의 기호들이 논리와 고상한 언어로 꾸민 기호에 맞서면서, 또 그 기호들의 배후에서 하나의 전체적인 파토스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두뇌/ 로고스의 차원이 아니라, 육체/ 파토스의 문제이다. 들뢰즈는 '우정과 철학'이라는 전통적인 쌍에다 '사랑과 예술'이라는 쌍을 대립시킨다. 들뢰즈는 노동, 지성, 선의지의 결합이 낳은 객관적인 진리, 즉 외부의 압박이 오기 전에 미리 활동하고 싶어 하는 추상적인 지식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제는 기호들로부터 압박을 당하고, 그 기호들을 해석하기 위해서만 활기를 띄는 지성, 또 자신을 질식하게 하는 공허, 자신에게 침입해 들어오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만 활기를 띄는 지성이 문제다. 이때 기호는 투명하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징후적으로 감식될 따름이다.

김명진_아무것도 아닙니다_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_53×45cm_2020

김명진의 작품에서 존재들은 칠흙같은 공간 속에서 빛을 버금은 가는 선들의 파장을 통해 소통한다. 보일 듯 말듯한 줄로 연결된 커플은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기호에 민감하지만, 여기에서 소통은 투명하지 않다. 커플은 마주 보지 않는다. 들뢰즈는 기호를 해석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거미의 예를 든다. 그에 의하면 거미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지각하지도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한다. 거미는 거미줄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강도 높은 파장을 타고 그의 몸에 전해지는 미소한 진동을 감지할 뿐이다. 눈도, 코도, 입도 없는 이 거미는 오직 기호에 대해서만 응답한다. 이 기호들은 파장처럼 거미의 신체를 관통하고 그로 하여금 반응하게 한다. 한편 그네는 고공에서의 기예가 있는 서커스의 주요 장치이자 유년기부터 친숙한 놀이기구이기도 한다. 작가는 그네에 대해 '땅에서 띄워진(괴리된) 비현실적인 공간과 시간을 은유'하고, '놀이기구이면서 시계추와 같이 반복되는 몽환적인 장치'라고 말한다. 소년과 소녀는 그네에 매달려 세월이라고 표현될 만한 시간을 함께 보낸다. 팔짱을 끼고 그네에 나란히 앉은 「커플」(2017)에서 소년은 더 불안한 모습이다. ● 소년은 공중에 매달려 있는 상황만큼이나 상대에 대한 이해불가로 곤혹스럽다. 개성의 차이도 있겠지만, 사회의 상징적 질서가 남성 주체에게 부과한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인물들이 어둠 속에 자개 파편처럼 섞여있다면 인물 자체도 어둠을 품고 있다. 얼룩덜룩한 인물들은 어둠을 배경으로 할 뿐 아니라 그자체도 어둡다. 화면 가득히 신체 일부가 포착된 경우에는 숨은 그림처럼 기관들을 찾아내야 한다. 「빛나는 얼굴」(2019-2020)과 「Hand」(2020) 등이 그렇게 처리되었다. 손이나 얼굴은 가장 인간적인 신체 기관이다. 공동체의 윤리를 생각하게 하는 '타인의 얼굴'(레비나스)과 위로하고 치유하는 손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기관은 선명하지가 않다. 안수 기도 하는 신부님의 손처럼 화가의 작업 또한 치유적 차원을 가질 수 있을까. 김명진의 작품에는 여러 차원의 연결고리가 있지만, 그 중에서 종교와의 연결고리는 끈끈하다. 그렇지만 직접적인 종교적 도상은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작품 속의 성모, 기도하는 소년 등은 굳이 제목이 아니라면 다른 맥락으로도 볼 수 있다. ● 「세례식」(2019-2020)과 「기도」(2017)의 등장인물은 작가 개인사와 관련된 인물들이며 몇 년 전에 입문한 종교, 그리고 가족을 상징한다. 「어린양」(2020)이나 「광야에서」(2017)는 전통적인 도상을 사용하지 않은 채 종교에 접속한다. 「나무를 옮기는 사람」(2016, 2018)은 아내와 뒷산에서 땔감을 할 쓰러진 나무를 같이 메고 오곤 하는 일상이 반영된 작품이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같이도 보인다. 어둡고 희박한 공기 속에서 유희하고 고뇌하는 존재는 종교적 주체를 떠올리지만, 그는 자연에서도 자신을 지탱할만한 힘을 느낀다. 꽃이 피고 지는 뒷산에서도, 열매가 열리는 텃밭에서도, 살아가는 기술이 이미 입력된 채 태어나는 생명체들에서도,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섬에 대한 기억에서도 종교에서 받았던 위안을 느낀다. 자연에도 종교의 두 특성인 율법적인 측면과 신비적인 측면이 있다. 신비적 측면은 정통종교에서 이단시되었지만, 축제를 통해 되살려진다. 단독자(單獨者)의 회심 또한 주요한 통로다. 타자라는 같은 처지의 예술은 신화와 종교, 그리고 자연을 관통하는 세계의 신비와 접촉하는 또 다른 축제다. ■ 이선영

김명진_파도위와 그 아래_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_72×50cm_2020
김명진_나무를 옮기는 사람_패널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_37×58cm_2016
김명진_곡예사_캔버스에 먹,안료,재,한지콜라주_53×45cm_2018

축제 ● 어둠을 향해 두 손을 뻗는다. 손과 손 사이에 연한 바람이 맴돈다. 나와 이웃과 침묵의 잔해. 명멸하는 빛. 흙으로 빚은 듯한 종이 인형. 얼굴의 알 수 없는 빛과 얼룩의 향연. 저마다 빛나는 얼굴들. 얼굴은 자신이 빛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당신의 눈동자처럼, 오소서! 인형은 소녀의 고백에서 태어났다. 그네 뛰는 소녀와 그 아래의 어깨, 광대의 줄타기, 뿔난 이들, 광야에서의 경주, 하얀 코끼리, 곡예사, 가면 쓴 이, 세례식, 나무를 옮기는 사람, 빛을 캐는 사람, 고독한 왕, 광인의 행렬...현실의 안쪽과 바깥에서의 줄타기. 선택 받은 이, 이방인, 여행자도 좋다. 축제다. 형제여, 주술이든, 충동이든, 여름 밤의 꿈이면 어떤가. 두려움없이 나아가게 하소서. 그래, 축제다. ■ 김명진

김명진_광야에서_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_53×65cm_2017

축제는 그 배경과 성격이 종교적이지만, 사회적·문화적 행사를 기념하고,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역할도 한다. 특히, 작가는 가족공동체에 주목을 하는데, 삶의 기쁨, 슬픔, 소소한 일상에서 「자신을 위한 기도」를 통한 사유를 작업으로 풀어내는 과정이 함축되어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그네, 서커스, 경주, 줄타기, 광대, 가면 쓴 사람, 성모상, 기도하는 소년 등의 상징 안에는 자신의 주변, 그림과 가족에 대한 연민과 갈등, 실존에 대한 물음을 은유한다. ● 동양화를 전공한 김명진 작가의 열 두번째 개인전이다. 김명진의 한지 꼴라주 작업은 2015년 이후부터 검은빛의 자전적인 이야기에 기반한 형상 작업으로 집약되고 있다. 작가는 기억, 일상, 허구의 서사를 현실에 기반하여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함축한다. 소년, 소녀, 형제, 자매, 성모, 피에타, 커플 등을 통하여 시대와 인간의 고독, 불안, 감정, 실존적 사유 등을 화면에 소환한다. 2000년 이후부터 「축제」, 「다른 나라에서」, 「눈먼 정원」, 「소년, 만나다」, 「이식하기」, 「움직이는 풍경」등을 주제로 12회의 개인전을 발표하였고, 2000년 동아미술상을 수상, 2005년 국립고양창작스튜디오 1기 입주작가, 2014년 서귀포 이중섭 창작스튜디오에서 작업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는 남양주시 수동에서 거주하며 작품생활을 활발히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경기도미술관, 미술은행, 외교통상부, 이중섭미술관, 양평군립미술관, 한국천주교순교자 박물관, 제주현대미술관, 경기문화재단 등에 소장되어 있다. ■ 갤러리 담

Vol.20200906c | 김명진展 / KIMMYUNGJIN / 金明辰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