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강지윤_김혜연_최희정
후원 / 서울문화재단_서울시_아트랩반
관람시간 / 01:00pm~07:00pm / 월요일 휴관
아트랩반 ARTLABBAN 서울 서대문구 증가로 29(연희동 121-6번지) 중앙빌딩 2층 Tel. +82.(0)10.3406.7199 www.facebook.com/artlabban
느릿하고 흐릿한 이탈 ● 제자리 귀가 예민했다면 알아챌 수 있었을까. 나는 그렇지가 않으므로 그러지 못했다. 다만 낱자를 골라낼 수 없는 웅성임을 들었을 뿐이다. 자그마한 스피커에 귀를 가까이 대도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다. 다짐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여럿의 목소리를 겹쳐 내용을 알 수 없는 소리가 되었지만 (혹은 그 덕에) 힘을 잃거나 지워지지는 않았으므로, 소리 내어 읊는 일 자체가 중요한 주문이라고 하는 쪽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살 것이다, 잘 살 것이다. 최희정의 「tracks」가 짐짓 모른 체 흘리는 소리다. 왼쪽에 놓인 화면 속에서 여럿이 철로를 따라 걷는 동안 정면에 있는―그러나 옆면만이 보이는, 그러므로 아직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화면 속에서도 사람들은 역시 저마다의 궤도를 걷는다. 뜻했던 대로는 아니다. 「이곳에서 길을 잃는 것은 불가능합니다」에서 강지윤은 길을 잃을 요량으로 눈을 감고 걷지만 실패하고 만다. 흔한 실패는 아니다. 내가 아는 한 그만큼 방향감각이 좋은 사람도, 제 움직임의 느낌을 온전히 믿어도 될 정도로 몸이 곧은 사람도 많지 않다.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라는 말에, 틀림없이 뜨고 지는 해의 경로에 기대어 보려 했던 김혜연은 아침에 일찍 깨지 못하거나 저녁에 지하철이 늦거나 하는 이유들로 결국 「지는 해와 지는 해가 아닌 모든 것」을 각각 기록한다. ● 이곳에서 길을 잃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반어법으로 내밀려 했던 강지윤의 기획도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의 해를 보려 했던 김혜연의 기획도 실패하고 말았다고 한다면 남은 것은 건강하고 웃는 할머니가 되겠다는, 아직 그 끝이 확인되지 않은 최희정의 다짐뿐이다. 그러나 이 또한 실패할 것이다.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길을 따랐거나 결국은 병들 것이기 때문은 아니다. 미리 다 알 수 없으므로, 그저 삶이 원래 그런 탓이다 (혹은 그런 덕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계획은 틀어지게 마련이다. 확정적인 실패의 가능성, 어쩌면 그것이 출발점이다.
실패를 지우고 새로 시작할 일은 아니다. 그저 다음의 실패를 향해 나아간다. 여기 걸어 둔 실패의 기록은 실패의 예견이기도 하다. 철로와 역사를 비우고 화면에서 사라져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한다. 길을 잃는 법을 몰라 처음으로 돌아오고 마는 것, 실패할 줄 모르는 것이 어떤 실패인지를 생각한다. "출발점을 폐기하는 대신 그 출발점에서 더 멀리 […] 처음 시작한 곳이 더는 안 보일 때까지" 가기로 한다.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 문장을 쓴 방정환이 ㄱㅅㄲ라는 걸. 강간 피해를 호소한 동료 작가 김명순을 두고 처녀도 아니면서 처녀 행세를 한다고 썼죠."(둘 모두 김혜연, 「지는 해와 지는 해가 아닌 모든 것」. 지는 해를 찍지 못한 날들을 담은 채널에서.) 애초부터 잘못 주어진 출발점이었지만 떠날 곳이라면 잊지도 지우지도 않아도 좋을 테다. ● 제자리, 를 생각했다. 제 자리는 아니다. 온전히 제 것으로 가져 본 적 없는 자리, 스스로 택한 적 없는 자리. 그러나 어째선지 그래야 한다고 정해져 처음이 되어 버린 자리. 그런 제자리를 생각했다. 떠날 수밖에는 도리가 없는 자리다. 단단하고 안전한 곳, 원하면 들이고 원치 않으면 내칠 수 있는 자리는 갖지 못한 이들로 보였다. 그런 자리를 찾고 짓는 대신 그렇지 못한 제자리를 떠나 떠돌고 만나기로 한 이들로 보였다. 그곳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궤도들과의 거리는 늘었다 줄었다 할 것이다.
밝은 방 ● 희미했다. 큰 창을 통해 거리가 그대로 들어왔다. 영상들 사이에서 거리의 소음이 울렸다. 그 위에 햇빛이 앉았다. 블라인드 위에 비춘 「이곳에서 길을 잃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는 종종 얇은 판을 뚫은 햇빛에 거의가 지워지고 얼굴을 가린 반사판만이 하얗게 떠다녔으므로 이 방은 너무 밝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블라인드 사이의 틈을 지나 창 아래의 그늘진 곳에 빗살무늬로 가 닿은 약간만이 선명했다. 기꺼이 실패하는 이들은 기꺼이 흐려진다. 성기게 채우고 남은 자리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시시한 안부를 묻는 쪽지를 공들여 접고 익숙하지만 이름만은 설어져 버린 마실거리를 건네고 아슬한 곳에 발을 내딛는다. 전시장 문을 열고 처음 닿은 것이 웅성대는 소리인 양 했지만 실은 그 전에 하나가 더 있었다.( 이제 익숙할 만도 한 시기가 되었으므로 의식하지 않고 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만, 문을 열고 아직은 구분되지 않는 무언가를 보고 듣는 순간부터를 관람이나 감상의 폭에 넣어도 좋다면 이 역시 전시 경험으로 쳐도 좋을 것이다.) 체온을 재고 펜을 들어 몇 가지 정보를 기재한다. 오늘 내 몸의 상태를, 혹은 나의 이름을, 곱씹어 적는다. "매일의 꾸준한 수행적 작업을 통해, 고립과 긴장 속에서 균형과 연결의 감각을 유지하는 시도를 통해, 비대면-간접적 상호작용을 통해" 달라진 일상의 가능성을 타진해야 했던 배경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작은 테이블 앞에 섰다. 관객은 이름을 적고 이 방에 들어옴으로써 무언가를 포기하고 감행한다. 고립을 통해서만 피할 수 있어 보이는 위협 속에서 각자가 가늠한 것들을 다시 한데 모아 내밀고 이들을 맞이함으로써 자신들 사이의, 그리고 찾아오는 이들과의 간격을―상징적으로가 아니라, 전시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물리적으로―지운다. 많은 것이 들어와 많은 것이 흐려지는, 많은 것을 들여 많은 것을 흐리는 밝은 방은 이 역설의 은유가 된다. ● 이중의 역설이 있다. 하나는 이미 말한, 애써 취했던 간격을 지운다는 사실이다. "물리적 고립이 감정적 고립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발견되지 못했거나 숨겨져 있다. 전시장에 내지 않은 대화에서 이들은―신체적이기까지 한―접촉에의 갈증을 표한다. (역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예술이 할 수 있는 바, 혹은 여기 모인 작업들이 하는 바가 있다면 일상을 제약하는 조건의 변화에 굴하지 않고 간격을 지우게 만드는 것, 물리적 고립이라는 명령에 감히 반함으로써 감정적 고립을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 두 번째 역설은 미술은 언제나 일정 정도의 고립 속에서 존재해 왔다는 점에 있다. 간격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말보다는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간격을 토대로 삼았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우리가 흩어져 있는 이 대지에서 미술이 찾아가는 곳은 많지 않다. 누군가에게 가깝다는 것은 누군가와는 멀다는 것을 뜻한다. 납작해져 떠도는 이미지가 아니라 특정하게 구성된 공간의 일부를 점유하며 사방을 갖는 물질로서 존재하고 접촉하고자 할 때 필연적으로 형성되는 간격이 있다. 이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지금을 통과하며 낯설게 혹은 곤란하게 겪고 있는 가깝던 이들로부터의 거리와는 달리, 오랫동안 당연하게 존재해 왔던 거리다. 많은 것은 인쇄되거나 전자적으로 복제된 이미지를 통해, 이런저런 글들을 통해, 혹은 아예 소문만을 통해, 거리를 두고 전해진다.(이 전시는 한편으로는 서울이라는 문화적 중심지에서, 또 한편으로는 한국이라는 문화적 변방에서 열렸다. 어떤 면에서는 기꺼이 선택된 위치, 어떤 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진 위치일 것이다. 그 위치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거리들 또한 마찬가지다.)
단숨 ● 전시의 물질성이 전시장에 올 수 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에 만드는 격차를 길게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격차가 작가와 관객 사이에서 반복되거나 예견되는 모습에 관심이 있다. 이들이 아무리 몸과 몸의 접촉을 그리고 꿈꾼다 해도 몸과 몸의 사이에 작업이든 언어든이 놓이는 한 만남은 언제나 거리를 둔 간접적인 것이 된다. 작가나 발화자의 복제물일 수만은 없는 독립적인 대상이 생산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작가의 일부를 전하지만 동시에 다른 일부를 가리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직접성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 보이는 살과 살의 접촉마저도 실은 살들 너머의 감정들에 관한 것이라면, 고립은 어쩌면 애초부터 간격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는 것으로서 등장한다. ● 밝은 방은 이 역설의 은유가 된다, 는 말은 조금 더 정확히 고쳐 쓰는 편이 좋겠다. 만나지 못함을 고민한 끝에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그러나 그 조우는 만남과 동시에 거리를 전제하는 형태로만 이루어진다는 역설 혹은 불가능성 자체의 은유이기보다는 깰 수 없는 역설에 비껴 맞서는 어떤 시도의 은유라 쓰는 편이 좋겠다. 물리적 고립에 잠식되지 않으려는 시도는 물리적인 공간을 구축하는 데에 이르고 말지만 이는 동시에 작업에 들인 시간과 작품이라는 물질적 매개를 사이에 두고서―거리를 토대로―이루어지는 고립의 극복이다. 몇 번이고 쪽지를 접고 몇 번이고 발을 내딛고 몇 번이고 해를 띄우고 지움으로써 시간적 거리가 압축된다. 빛과 소음을 들임으로써 작품이라는 벽을 흐린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사라지지는 않는다.) 거리를 토대로, 거리가 줄어드는, 혹은 뛰어넘어지는 공간이 발생한다. ● 그런 공간에 투사된 궤도들이 있다. 믿고 따를 만한 것은 못되는, 그럼에도 이미 올라타 버린 궤도들이다. 궤도 위에 놓여 있는 잠정적인 실패는 곧 이탈의 가능성이다. 궤도에 오르는 것도 궤도를 좇고 탐색하는 것도, 이탈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까지도 모두가 느리고 꾸준한 과정이지만 이탈은 언제나 단숨이다. 길이 깔리지 않은 곳에서 방향을 가늠하고 거리를 가늠하는 법을 우리는 알고 있을까. 한참을 가야 이웃집을 만나는―아무와도 이웃하지 않은 채 동네를 이루는―산촌散村, 그곳에 새로 보금자리를 정한 이들을 생각한다. 이탈은 단숨이다. 그 뒤는 다시 느리고 꾸준할 테다. ■ 안팎
Vol.20200909i | 얼굴없는 것들과 마주하기 Face the faceless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