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서쪽으로 진 뒤에

As after sunset fadeth in the west;展   2020_0923 ▶ 2020_1216 / 일,공휴일 휴관

포스터 디자인_CBR Graphic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보민_신익균_이소요_이지원+정연두 김윤경_유세현(국가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전수조교) 박창영(국가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보유자) 박형박(국가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이수자)

기획 / 우란문화재단 협력 / 영집궁시박물관 공간디자인 / VIAMOON(이상준)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우란문화재단 우란1경 WOORAN FOUNDATION ART SCAPE 1 서울 성동구 연무장7길 11 1층 Tel. +82.(0)2.465.1418 www.wooranfdn.org www.facebook.com/wooranfdn

오랜 시간을 지나온 사물(事物)을 알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시간의 마디들을 채워왔던 삶의 흔적들이 겹겹이 중첩되어 있는 까닭이다. 전통으로 명명된 공예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집단이나 공동체 내에서 형성되어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내려오는 양식이나 그것의 핵심을 이루는 정신적 가치 체계로서 공예품은 단순히 과거로부터 전승된 산물이 아닌, 생활상과 정체성을 담는 문화적 유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예를 이해하고자 할 때는 물질적 대상으로서 형태적 특성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둘러싼 사회를 보는 것이 필요하다. ● 전시에 앞서 진행된 사전 리서치에서는 우리의 머릿속에 너무나 익숙하게 자리잡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사물부터 다시 보고자 했다. 시기는 근대 이전에 지금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조선 시대로 정하고, 이 시대를 지탱한 유교 사상과 그 안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에 주목해보고자 했다. 이렇게 진행된 연구는 결국 '양반'이라는 키워드로 좁혀졌고, 이들을 상징하는 '갓'과 '궁시'로 귀결되었다. ● 『해가 서쪽으로 진 뒤에』 는 이러한 맥락 안에서 조선 시대 문무(文武)를 갖춘 양반(兩班)의 일상 속에 자리했던 '갓'과 '궁시'를 바라보고, 당대 추구했던 미감과 사회문화적 가치를 살펴보고자 했다. 더불어 이 갓과 궁시가 유교적 공동체 내에서 형성되어 정착된 물질문화라는 것에 주목하여 시대적 배경을 짚어보고자 했다.

해가 서쪽으로 진 뒤에展_우란문화재단 우란1경_2020

흰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선비의 모습은 익숙하지만, 현세대에게 '양반' 혹은 '유교'로 상정되는 이 이미지는 그다지 호감을 주는 인상이 아니다. 20세기까지 지속된 조선 시대의 유교적 이념과 가치들이 여전히 우리 삶과 무의식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충돌하며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들에는 양면성이 존재하듯, 50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조선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유교문화 속 양반사회의 작동 원리에서 찾을 수 있겠다. 조선은 유교적 가치관으로 사대부가 통치하던 국가였다. 문치를 내세웠지만 무예를 중시하며, 무(武)를 통해 문(文)을 유지했던 양반의 나라였다. 문무 겸비의 모습이 있었기에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전쟁을 겪고서도 지탱될 수 있었다. 갓과 궁시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안에서 존재했고 유지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들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 조선 시대 남성들에게 '의관정제(衣冠整齊)'는 어떤 의미였을까. 이들의 사고에는 학문하는 것보다 더 우선해야 하는 것이 의관을 바르게 하는 것이었다. 학문을 하는 이유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의관을 바르게 차려입었을 때 바른 마음이 생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갓을 쓴다는 것은 의관정제의 마무리이다. 이렇게 갓은 유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머리의 언어'로서 실용성, 장식성 보다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으로 작용했다. 생존을 위한 수렵 도구뿐만 아니라 전쟁의 무기로서 발전해 온 활과 화살은 무예로서의 궁술로 성행하며 심신의 수련을 위한 운동으로 그 맥을 이어왔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남자가 갖추어야 할 육예(六藝)로 여겨 왕을 비롯해 문무를 가리지 않고 활쏘기를 즐겼다.

박창영+박형박_갓

『해가 서쪽으로 진 뒤에』는 장인의 공예품과 이를 둘러싼 시대와 사회, 전이를 작품으로 풀어낸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을 한 공간 안에 전시하여 시간의 흐름과 세대의 공존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조화를 위한 공간은 조선 시대 서원에서 보이는 동시적 풍경을 가져와 구현되었다. 서원이 가지는 특징은 입구에서부터 유식 공간, 강학 공간, 제향 공간으로 나뉘어 있으며, 안쪽으로 진입할수록 지반의 높이가 상승하는 경사 지형을 이용한 공간의 분리 효과를 연출한다는 것이다. 전시장 안에 공간적 배치를 적용하여 문화와 공간, 그리고 자연이 만나 시간의 흐름이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풍경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 공간 요소로 더해진 '보'와 '댓돌'과 함께 관객들은 서원을 거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윤경_궁(활) / 유세현_시(화살)

그 시대 양반들이 서원 혹은 한옥 집을 산책하듯 전시장 안에 들어서면, 갓과 궁시가 보인다. 갓은 말총과 대나무로 만들어져 은은하게 비치는 투명함과 겹침으로 나타나는 무늬와 곡선이 특징이다. 전시에서는 박창영 보유자와 박형박 이수자의 작품을 통해 시대와 형태에 따라 변화해왔던 갓을 선보였다. 유연한 곡선미와 팽팽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활과 강하고 빠른 지향성을 가지는 화살은 태초와 다른 쓰임과 가치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여전히 제작되고 있다. 전시에서 선보이는 김윤경 전수조교의 전통 활과 유세현 전수조교의 전통 화살을 통해 무기와 심신수련의 도구를 넘어 조형성이 돋보이는 공예품으로서의 궁시를 만날 수 있다. 전시 안에서 선보인 장인의 작품들은 그 조형성과 당시의 미감을 보여줌과 동시에 시간의 흐름에 따른 기능과 형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가치를 선보인다.

김보민_망건_비단에 먹, 호분_31.8×40.9cm_2018 김보민_흰 천_비단에 먹, 호분_ 38.2×24cm, 49.3×33.8cm, 60.5×44.3cm_2018

김보민 작가는 영국인 버튼 홈즈(Burton Holmes)가 조선의 거리를 찍은 흑백 기록 영상에서 추출한 장면을 회화로 그려내어 역사적 전통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시 외국인의 시선으로 조선의 시간을 기록한 영상은 현대의 시간 속을 살고 있는 작가의 시선에도 동일한 낯선 감정을 불러왔고, 타자의 시선으로 시공간의 물리적 경계 허물기를 시도했다. 「망건」은 망건을 쓰는 남성의 모습에서 얼굴을 생략하고 움직임의 잔상만을 그려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당시를 회상하게 한다. 특히, 비단 캔버스에 투과되는 조명이 만들어내는 은은한 그림자들은 장인의 갓 작품들과 함께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이소요_『玆山魚譜』, 그림 없는 자연사: 형태적 종의 개념_ 동물 표본, 참고문헌_가변크기_2020
이소요_『玆山魚譜』, 그림 없는 자연사: 형태적 종의 개념_ 동물 표본, 참고문헌_가변크기_2020

이소요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실학자 정약전이 남긴 『자산어보』를 소재로 조선의 류서(類書)에서 생물에 대한 형태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서술 및 분류하여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 작품은 일반적인 어류 도감에서 보이는 시각적 자료가 부재한 채, 문자로만 구성된 방식에 대한 의구심으로 시작되었다. 자산어보의 내용 중에서 특히 형태 묘사가 서술된 구절에 주목하여 문자를 시각화하고자 했다. 이 작품을 통해, 당시 성리학에서 실학으로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비로소 문자에서 벗어나 물질을 직접 만나고 다루었을 당대 학자의 경험을 사변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

이지원+정연두_이도삼희 李祹三熹_3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_00:15:00_2020(2014)
이지원+정연두_이도삼희 李祹三熹_3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_00:15:00_2020(2014)

이지원, 정연두의 영상작품은 세종대왕 시대를 이끌었던 두 학자 최만리, 신숙주의 생각들을 목소리로 들으며 그들이 산책하는 시점으로 들어가 보길 제안하고 있다. 한글 창제를 둘러싼 보수적 가치와 새로움에 대한 열망 사이에서 오는 두 사람의 갈등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이는 세대 간의 갈등과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같은 생각과 다른 맥락은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는 지혜를 옛 선현의 산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신익균_춤 아님 넘어짐_목재, 불, 기계장치_가변크기_2020
신익균_조금 망가짐_발포지, 실리콘, 기계장치_170×170×45cm_2020

전시장 내외부에 설치된 신익균 작가의 작품은 전시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끝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춤 아님 넘어짐」은 무기의 역할을 했던 활과 화살이 시대와 환경적 조건에 따라 적응하며 변화되는 모습 즉, 무기가 미술이 될 때의 순간을 포착한다. 작품을 통해 작가는 원래의 존재 이유를 고집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들과 계속되는 변화에도 살아남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외부에 설치된 「조금 망가짐」은 계단 아래에서 회전하며 조금씩 구겨졌다가 펴지는 행위를 반복하며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지속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여기서 '망가짐'은 미술이 되기 위해 원래의 상태를 망가트리는 작가적 상상이다.

해가 서쪽으로 진 뒤에展_우란문화재단 우란1경_2020

'당연(當然)하다'는 인식은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화된 사고와 일치가 되어 쉽게 정의하고 판단하는 의식 상태가 된 것을 의미한다. 당연한 것은 늘 존재해왔고, 변화해왔다. 당시 당연했던 공예품의 쓰임은 이제 당연하지 않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곁에 남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당연하다는 인식을 내려놓고 새로운 눈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면, 그 사물의 이치와 현상,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개인이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고 한들 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유교가 지시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가지고, 자신을 바로잡고 다스리는 태도 등 어떤 가치들은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대를 거듭하며 되새길수록 힘을 가질 수도 있다. ● 미래는 알 순 없지만, 과거의 역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순 있다. 해가 서쪽으로 진 뒤에 어둠이 찾아오지만, 이내 곧 다시 밝은 빛으로 돌아온다. 오늘은 현재이지만, 내일의 과거이면서 동시에 어제의 미래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세대를 잇는 매개체로서 공예품을 바라보며 과거의 시간 속에서 만난 사람과 생각들 속에서 현재를 찾고,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되길 기대해 본다. ■ 정지영

Vol.20200923g | 해가 서쪽으로 진 뒤에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