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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展 / SONGIN / 宋寅 / painting   2020_1022 ▶ 2020_1121

송인_잠식된 휴식_장지에 먹, 수정테이프, 콘테, 오일파스텔_180×220cm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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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20_1022 ▶ 2020_1101 세종시 문화예술진흥기금 선정展 관람시간 / 11:00am~06:00pm

조치원 문화정원 Chochiwon Cultural Garden 세종시 조치원읍 수원지길 75-21(평리 12-1번지)

2020_1104 ▶ 2020_1121 장은선 갤러리 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장은선갤러리 JANGEUNSU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3-8(경운동 66-11번지) Tel. +82.(0)2.730.3533 www.galleryjang.com blog.naver.com/jang_gallery

송인의 회화-폭력의 연대기 ● 작가 송인은 폭력적인 현실에 관심이 많다. 자신이 폭력적인 현실에 노출됐는지도 모르는 무감각한 사람들, 폭력적인 현실에 대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쩌면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 보통사람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폭력적인 현실에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의 초상을 그리는 작가의 그림은 작가 개인의 경계를 넘어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그러므로 다시, 작가는 폭력적인 현실에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다. 그동안 작가의 그림을 지시하기 위해 이런저런 주제가 호출됐지만, 사실상 작가의 그림을 관통하는 진정한 주제의식이며 인문학적 배경으로 봐도 되겠다. ● 현대사회는 복잡하다. 현대인도 복잡하다. 폭력이 자기를 실현하는 경우의 수도 복잡하다. 여기에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폭력을 특정하고 지목하기도 쉽지가 않다. 폭력도 생물처럼 진화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미셀 푸코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서로 폭력을 주고받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잠정적인 피해자라 했고,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잠재적인 가해자라고 했다.

송인_당신은 지금 안전한가_장지에 먹, 수정테이프, 콘테, 오일파스텔_116.7×91cm_2020

그동안 폭력은 육체를 린치하는(고문의 역사), 육체를 변방으로 내쫓는(추방의 역사), 감옥과 정신병원에 육체를 가두는(감금의 역사) 직접적인 방식을 지나, 육체를 감시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바로 판옵티콘의 출현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전 세계가 인터넷망으로 연결된 시대에 더 교묘해진 느낌이고, 그 자체 판옵티콘이 전자적 판옵티콘으로 진화했다고 봐도 되겠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어쩌면 이미 현실일 수도 있는 것이, 누구든 인터넷에 접속하는 순간 자동으로 감시의 망에 포섭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인터넷을 안 할 수도 없는 일이다. 현대사회에서 폭력은 이처럼 감시사회와 전자정보를 넘어 서로가 서로의 양심을 감시하는, 개개인의 심리를 파고드는 차원으로 진화하는데, 도덕과 윤리, 상식과 지식, 교육과 이성(도구화된 이성)의 이름으로 수행된다는 데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 여기에 한국은 급조된 근대화의 과정을 거쳤다. 경제 제일주의 원칙과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을 좇으면서 경제성이 떨어지고 효율성이 없는 것들을 버렸다. 상품적 가치를 상실한 사람들을 버렸다. 소외를 버리고, 자폐를 버리고, 불안을 버리고, 자살을 버렸다. 조증과 울증을 버리고, 대인기피증과 광장공포증을 버리고, 과대망상증과 피해망상증을 버렸다. 그리고 여기에 판단불능증이 있다. 순간적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는 도무지 판단할 수도 결정할 수도 없다. 어쩌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소위 멍 때리기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판단 강요로부터 잠시 잠깐 판단정지를 위한, 웃지 못할,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웃기지도 않은 시대적 우화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송인_어느 평범한 오후_장지에 먹, 수정테이프, 콘테, 오일파스텔_116.7×91cm_2020

그렇게 작가는 폭력이 만연한 사회를 그리고, 그 사회를 사는 보통사람들의 초상을 그린다. 작가의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경우로 치자면 칠흑같이 어두운 화면 위에 클로즈업된 얼굴이다. 색깔이 없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흑백 모노톤의 절제된 색채 감정이 관념적으로 보이고 내면적으로 보인다. 배경화면과의 대비가 강조되면서 화면 위에 부유하는 얼굴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 초상을 매개로 한 작가의 주제의식에도 부합한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선 초상이 강조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배경화면은 다만 그 위에 부유하는 얼굴을 강조하고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바탕화면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배경화면에는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숨겨놓고 있는 것인가.

송인_오늘은 또 누가_장지에 먹, 수정테이프, 콘테_110×360cm_2020

다시 말하지만, 현대사회는 복잡하다. 복잡해서 복잡한 것이 아니라, 표면과 이면과의 분리를 강조하고, 표면을 권장하면서 이면을 억압하는, 그리고 그렇게 표면과 이면과의 차이를 종용하는 사회적 구조가 사회를 복잡하게 만든다. 지금처럼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는 표면의 사회이고, 그 표면의 사회를 지지하는 것이 소위 이미지정치학이다. 그러므로 모든 길은 이미지로 통한다. 이미지가 모든 것을 삼킨다. 그렇게 표면이 곧 현실이고 사실이며, 길(어쩌면 유일한)이요 진리다. 이런 표면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이면은 억압되고 소외된다. 주체가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분리되고, 사회에 내어준 주체(사회적 주체) 혹은 제도의 이해관계에 부응하는 주체(제도적 주체)와 그 이면에 억압된 주체로 분열된다. 그리고 그렇게 억압되고 소외된 나, 상처투성이의 나,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한 나는 가면 뒤에 숨는다. 그러므로 너는 결코 나를 본 적도 알 수도 없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송인_운명의 순간_장지에 먹, 수정테이프, 콘테, 오일파스텔_110×360cm_2020

이제 다시 배경화면을 보자. 배경화면이 숨겨놓고 있는 의미심장한 의미가 설핏 보이는가. 칠흑 같은 배경화면은 말하자면 타자들의 바다다. 억압된 나, 소외된 나, 상처투성이의 나, 너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나, 너에게 들키면 안 되는 나, 때로 나 자신에게조차 낯 설은 나, 그렇게 나 자신조차도 모르는 나, 그러므로 또 다른 나, 어쩌면 나의 너를 위한 집이다. 그 집에는 전기가 끊긴 지 오래고, 최소한의 희미한 불빛의 기미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암흑이다. 그렇게 작가는 다만 얼굴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둠 속에 숨은 몸을, 마음을, 무의식을, 욕망을, 상처를, 소외를 같이 그린 것이다. 심연 속에서 부유하는 얼굴들을 그리고 사람들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어쩌면 심연이 밀어 올린 표면이라고 해야 할 얼굴들 위로 작가는 개인의 외상이며 시대적 아픔을 호출하고, 역사적인 폭력의 현장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송인_제2의 정복자_장지에 먹, 수정테이프, 콘테_180×660cm_2020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코로나 정국을 주제화한다. 폭력적인 현실에 주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작금의 현실에 초점을 맞춘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확인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흑백 모노톤으로 한정된, 절제된 색채 감정의 와중에도 오직 공간 속을 부유하는,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진 코로나 균만이 무슨 적색경보라도 발하듯 붉은 돌기를 강조하는 있는 그림들이다. 그림 속 사람들을 보면, 방호복으로 완전무장한, 아마도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을 의료진들이며, 방역에 지친 의료인들이, 그리고 하나같이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린 탓에 다만 눈으로만 그 표정을 읽을 수 있을 뿐인, 코로나 균을 곁눈질로 경계하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저녁 황금시간대 뉴스를 넘어 24시간 코로나 특보로 매체를 도배하다시피 한 장면과 불안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 같은(불안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것 같은?) 침울한 느낌을 주는 그림들이다. ● 그리고 여기에 아마도 작가가 근작에서 가장 많은 힘을 실었을 대형 그림이 있다. 코로나를 테마로 한 작가의 그림 중 방점을 찍는 그림으로 봐도 되겠다. 코로나 정국에 대한 국가 간 미묘한 입장과 상황 논리를 반영한, 한 중 일 3국 수장들의 초상을 하나의 화면 속에 나란히 배치한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얼굴에 마스크를 한 채 중국의 눈치를 보는 한국의 대통령과 역시 마스크를 착용한 얼굴로 한국의 눈치를 보는 중국의 주석이 대비된다. 아마도 코로나 사태의 원인과 사후관리와 관련해 서로 다른 속내를 내비치고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중국 주석의 눈길은 좀 더 비스듬한 각도의 허공을 향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림 속에는 없지만 한 중 미 간 삼각관계(힘의 논리?)를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혹, 우리는 아니야, 라고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반면, 일본의 총리는 눈 표정이 주는 정황상 이 두 사람과는 사뭇 동떨어져 보이고, 자기 생각 속에 빠져있는 것 같다. 마스크도 쓰지 않은 앙다문 입술로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는 아마도 도쿄올림픽을 못 치를 수도 있다는 염려와 함께, 코로나 정국이 영 달갑지 않은 표정이다.

송인_37.5°展_조치원 문화정원_2020
송인_37.5°展_조치원 문화정원_2020

그렇게 작가는 코로나 정국을 계기로 본 한 중 일 간 나아가 한 중 일 미 간 미묘한 신경전과 정치 상황을 그려놓고 있었다. 이처럼 다만 마스크와 눈 표정만으로 복잡한 정치 현실을 손에 잡힐 듯 그려놓고 있는가 하면, 여기에 미처 그려지지도 않는 관계마저 암시로 불러내는 것에서 세심한 관찰력과 함께 작가적 역량이 돋보이는 경우로 봐도 될 것이다. ● 그리고 작가는 동서양의 명화를 패러디한다. 모나리자(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비너스(보티첼리), 진주 귀고리를 한 여인(베르미어)과 가체 머리를 올린 미인(신윤복)과 같은 명화 속 주인공들이 코로나 정국의 현실 위로 호출되는데, 마스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거나 코로나 균을 장식처럼 문양과 패턴처럼 거느리고 있는 그림들이다. 흑백 모노톤의 다른 그림들이 암울한 느낌을 주고, 여기에 코로나 균의 붉은 돌기가 불안을 조성하는 것에 비해 보면, 색채도 다채롭고 온건한 편이다. 아마도 코로나 정국에 던지는, 코로나로 지친 일상에 던지는 농담(아니면 위로)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송인_37.5°展_조치원 문화정원_2020
송인_37.5°展_조치원 문화정원_2020

작가의 그림은 초상이고, 초상의 핵심은 얼굴이다. 작가가 그린 일련의 그림들에서 특히 얼굴(혹은 같은 의미지만 표정)이 강조되는 것인데, 사실적으로 그려진 얼굴의 질감이 특이하다. 가녀린 수정 테이프를 층층이 쌓은 연후에 그 위에 덧그린 그림이 중첩된 마디처럼 보이는데, 중첩된 터치가 변형 적용된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이로써 자기만의 형식을 얻기 위한 형식실험의 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회화를 쪼개보면 무분별하게 중첩된 터치들의 소립자로 환원된다(주지하다시피 이로부터 인상파가 유래했다). 그런가 하면 사진의 소립자는 자잘한 망점들로 환원되고, 디지털 이미지는 무수한 픽셀들의 조합으로 환원된다. 그렇게 수정 테이프를 도입한 기법의 이면에는 모더니즘적 환원주의에 대한 동의와 함께, 회화에 대한, 나아가 이미지에 대한 자기 반성적인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 한편으로 이처럼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수정 테이프를 도입한 것은 형식실험의 경우로 봐야 하지만, 여기에 또 다른 의미심장한 의미마저 내포돼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알다시피 수정 테이프는 잘못된 것을 고치고 수정해 바로 잡는 도구다. 그리고 발터 벤야민은 철학이 세계를 수선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혹 작가는 굳이 수정 테이프를 도입하면서까지 폭력이 만연한 사회를 다시 고쳐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계를 수선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고충환

Vol.20201022a | 송인展 / SONGIN / 宋寅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