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자의 기호 - 비(雨)

김강훈展 / KIMKANGHOON / 金剛勳 / painting   2020_1026 ▶ 2020_1113

김강훈_비의리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레진_130.3×193.9cm_202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제주문화예술재단

관람시간 / 09:00am~06:00pm

돌담갤러리 DOLDAM GALLERY 제주도 제주시 중앙로 58 하나은행 금융센터지점 B1 Tel. +82.(0)64.757.2171

세계 내 나에서, 자연 속 만물과 동등해진 나, 제3자의 시선 ● 세계는 홀로 인 것 같지만 같이 물려있고, 같이 있지만 홀로인 것이 분명하다. 또 분명하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고 분명하지 않은 것이 선명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관계라는 것이 상황적으로 다르기도 하고, 다양하게 변한다는 것이다. ● 세계는 내가 생기(vitality)가 있음 그 자체인 것이며, 내가 느끼는 것이 그 살아있음의 표현이다. 그래서 세계는 내가 느낀 세계일 뿐, 그런 내가 살아있음으로써 내 세계라 부르는 것이다. 내 세계는 내가 감지한 순간들의 불균형한 바이브레이션이다. 그것은 작동하는 시간 속에 놓여 있는 나이며, 굳은 채로 남겨지는 존재의 잔해란 없다. 무상하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아는 것, 그런 결과에 이를 수 있었음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의 결과이다. 자신의 생각으로 그렇게 생각했든, 그래서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든, 세계는 전혀 자신의 생각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 놓여진 어떤 것이다. 하나의 생각처럼 그렇게 됐다고 믿는 자신의 경험적 집착은 이념의 결과들이다. 이념은 대상에 대해 집착하는 자기 신뢰이며, 일시적 신념일 뿐이다.

김강훈_나와 우주 그리고 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레진_193.9×86.3cm_2020

세계는 거대한 호흡의 하모니다. 숨을 쉬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 사물들 모두가 자신들의 호흡이 같이 숨을 쉬면서, 뭉쳐지기도 하고 모였다가 흩어지기도 하며, 홀로 남았다가 다시 다가오기도 한다. 때문에 이런 작용을 생명운동의 본질이라고 하는데 생명운동은 각자 모두가 작용하는 것이다. 숨이 생성하는 것과 소멸하는 것의 동시 작용인 것처럼 생성하면서 소멸하는, 모았다가 흩어지는 순간들에서, 있음과 없음의 작용을 동시에 느낄 때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다. 숨을 쉬면 살아있다고 하고 숨이 멈추면 죽었다고 하는 것도 내가 숨 쉬고 멈추는 것의 고통을 느끼는 것의 결과이며, 생명력이란 들숨과 날숨의 동시에 있는 순간을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잠녀들의 숨비소리처럼 존재의 드러냄이고, 생명력이며, 살아있음의 표현인 것이다. 들숨 쉴 때 깊게 멈추고, 날숨 쉴 때 '호(呼)이'라고 순간적으로 소리나는 것은 그 숨이 날숨이기 때문이다(呼, 外息也). 들면 나오고, 나오면 다시 들이쉬어야 한다. 이와 같이 누구나 한 순간, 한 번, 하루는 그렇게 이루어지고 다 지나간다.

김강훈_붉은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레진_145.5×112.1cm_2020

그래서 생명은, 호흡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물이 여전히 지속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것, 곧 행위자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만물의 그런 행위가 객관적이다. 사물의 그런 작용을 자신이 동시적으로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주어진 공간에서 그렇게 작동하는 것을 감지했는가 하는 것 자체가 이 세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 생명, 즉 살아있음은 나와 세계의 공감 속에 있다. 노자에, '생명을 일부러 보태려는 것을 괴이하다고 하고, 마음이 기를 부리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사물이 강해지면 쇠퇴하게 된다(益生曰妖 心使氣曰强 物壯則老). 강약성쇠(强弱盛衰). ● 임마뉴엘 레비나스(E. Levinas, 1906~1995)의 말을 빌리면, "세계 안에서 인간들이 맺는 모든 구체적인 관계들은 그것의 실제적인 성격을 제3항으로부터 얻는다. 그 관계들은 공동체이다. 이 관계들이 직접적으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사람들의 부조화조차 환상적인 것이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행위하는 것의 대중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다. 공동체, 즉 사회는 어떤 것을 형성시키는 조직이다. 어떤 기획이, 공동체 다수의 평가처럼 보이는 반응, 혹은 관심의 결과라는 것인데. 제3항이란 개인들의 긍정적인 웅성거림, 혹은 유인(誘引)이나 의도(意圖)할 수 있는 결과일 수도 있다.

김강훈_월우(月雨)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레진_97×324.4cm_2020

인간은 '나'가 핵심이며, 나는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고, 제1자와 제 3자를 번갈아가면서 아우르는 존재다. 어떤 때는 1자(나)일 수도 있고, 여전히 제 3자(지켜보는 자)가 되기도 한다. 이것 또한 상황적으로 변할 수 있다. 우리는 늘 행위하는 주체(主體), 너(타인), 소외된 자, 관찰자 등 제3의 관계를 오간다. 이 관계의 뒤바뀜은 한 사회의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데 사람들은 주체가 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소외의 공포라고나 할까. 인간은 경제적으로 소외(疎外)가 되기도 하고 철학적으로는 실존에 대해 스스로 소외를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한 가지의 소외는 다른 소외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그것을 무시할 수도 있다. ● 사회적 동물이라는 이름의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공동체에 의해서 제1자가 될 수도, 제3자가 될 수도 있다. 사회란 그런 생태를 가진 유기체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유기체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존재하고자 하는 동물이다.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야만 하는 것, 인간에게 생존만이 모든 것에 우선하며 오랜 진화도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다양한 인간군은 이 생존의 그물망 속에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때로 이념은 생존의 그물망을 이용하는 수단이 되거나 타파하는 변혁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김강훈_물고기도 비에 젖는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레진_162.2×130.3cm_2020

존재의 마당은 항상 활력이 넘친다. 생물만이라고. 아니다. 사물들도 그 몫에 기여한다. 비는 기후에 의한 자연의 작용에서 내리는 물이다. 우리는 물을 죽은 사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비를 보라, 내린다는 것은 운동성이다. 죽은 사물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물이 돼 흐른다는 것이 살아있음이고 운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기물을 '생명 없음'이라고 판정했다. 당연히 유기체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그저 생명의 비주체로서 죽은 자연이 된 사물이라는 관념이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라. 이 세계는 생명의 집합인 것이다. 죽었다는 것도 생명의 작용이라면, 역설적으로 죽음도 살아있음의 현상에 불과하다. 죽었다는 것은 살기 위해 기다리는 살아있음, 곧 살아있는 죽은 시간이고 죽었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것이 산 것이 된다. 지구의 탄생이 바로 죽은 것들로 살아 있는 것을 키우는 것이라는 노자의 패러독스는 부정이 곧 긍정이 된다. 아니 긍정 부정의 관계가 아니라 자연이 살아있어 그러한 것이다. ● 김강훈은 제3자라는 개념을 가지고 세계를 본다. 이 세상은 인간 중심의 주체의식으로 형성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세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을 넘어서는 객관성, 즉 3자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넘어선 제3자, 오직 제 3자의 역할만이 나, 너, 우리라는 관념의 벽을 넘어서서 인간, 모든 사물을 한꺼번에, 동시에 누리고 끼치는 무엇, 바로 자연 현상인 것, 우주의 작용인 것이다.

김강훈_후려치는 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91cm_2020

구름, 비, 만물, 인간은 하나에 의해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한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있다. 우리의 인식대로라면 인간의 느낌으로 사물에 작용하는 객관적인 자연현상들에 대해 감정이입을 하겠지만, 김강훈은 오히러 감정이입을 배제한다. 비가 오면 사물이든, 인간이든, 생물이든 다 그냥 맞으면 된다. 자연 자체가 제3자가 돼 만물에 동시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것에 예외는 없다. '세계내 존재'였던 인간이 '자연 속 존재'로 확장되는 것이다. ● 이제는 김강훈에게 그린다는 행위가 퍼포먼스가 된다. 무엇을 닮았다, ~같다. ~처럼이, 아닌 제3의 작용을, 그 느낌을, 그 순간의 감정대로, 욕구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순간에, 비를 맞듯이 일어나는 행위가 된다. 무작위적인 행위가 결과적으로 작위로 남는 흔적이 돼버리는 것이 세계였다. 우리가 흔히 즉흥성이라는 추상적 행위가 결과적으로 형체를 남길 수밖에 없는 구상적 논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구상이나 추상의 구분이 얼마나 위험했던 이데아의 산물이었고 권력적이었나를 비로소 알게 된다.

김강훈_소나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레진_112.1×162.2cm_2020

사실, 구상과 추상은 행위의 사이에 있다. 행위에는 추상적 힘, 순간의 발상, 보이지 않는 기운이 결합 돼 제작 과정에서는 추상으로 보이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구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의도적인 구상이라도 구상에는 추상적 형상들로 채워져 있다. 목적을 가져도 완전히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예술 행위의 목적성은 무목적이 돼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내가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이 느낌을 갖는 것, 비가 오면, 또 젖는 것이 정상적 상태가 아닌가. ● 김강훈의 작업은 재료적으로는 고전적이다. 오랜 전통의 캔버스와 유채, 그 매개체가 주는 표현력의 매력이 있다. 행위가 만들어내는 무의미의 의미가 드리핑 예술의 결과였다면, 그린다는 행위가 그에게는 비를 맞듯이 자연스러운 제3자의 위치에서 비를 맞고 살아가는 행위인 것이다. ● 김강훈의 사유(思惟)의 출발은 인간도 다른 만물처럼 의도하지 않아도 그 상황 속에 있다는 생각이다. 제3자의 미학은 바로 세계 내 존재에서 주체, 혹은 객체에서 벗어 나 자연 속에서 그대로 시간과 함께 모든 것들과 동등해진 나, 바로 만물과 동등해진 순간에 서 있는 제3자로서의 나가 아닐까. ■ 김유정

Vol.20201026b | 김강훈展 / KIMKANGHOON / 金剛勳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