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산의일각

무나씨_김지희_윤연두展   2020_1028 ▶ 2020_1115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2:00p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인 Gallery IN 서울 서대문구 홍제천로 116 201호 Tel. +82.(0)10.9017.2016 www.instagram.com/_innsinn_

타이틀인 빙산의 일각은 사전적의미로는 대부분이 숨겨져있고, 외부로 가타나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아니함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현재 보이는 작업 이면에 숨겨져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 갤러리인

무나씨_너에게 보인다면 줄게_종이에 잉크_27.3×34.8cm_2020
무나씨_나라는 사건_종이에 잉크_53×40.9cm_2020
무나씨_가만, 봄_종이에 잉크_116.5×91cm_2020

허전한 마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종일 내리던 비가 문득 그치고 나면 왠지 모르게 서운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 요동치던 마음이 가라앉아 조용해지면 조용한 대로 또 섭섭합니다. ● 시끄러우면 조용한 곳으로, 또다시 심심해서 요란한 곳으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도망 다니지만, 늘 괜히 서운하고 섭섭한 기분에 이르고 맙니다. 마음이 이끄는 곳에 늘 허전한 마음이 있다면, 헛된 것을 좇는 것이 마음의 본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의 본성이 그러하다면, 무언가 쫓아다니는 그 자체로 안심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마음을 담고 있는 나라는 그릇은 아직 여기에 있고, 그 그릇을 움직이는 마음은 지금 어디로든 무엇이든 좇아 떠나 갈 수 있으니까요. ■ 무나씨

김지희_일부3_종이에 아크릴채색_30×30cm_ 2020
김지희_정물 67_종이에 아크릴채색_102×130cm_2020
김지희_일부4_종이에 아크릴채색_20×30cm_2020

수년간의 도자기 공부를 하면서 도자기와 정물 시리즈에 큰 관심을 갖게되었고, 사람 사이의 복잡한 감정에 비해 정물 사이의 단순하고 순수한 감정을 좋아합니다. ● 그림 속 동물들의 생명은 정물로 대체 되었고, 그 질감을 도자기 질감으로 처리 하였습니다. 원래 생명력이 느껴지는 눈빛도 흐릿한 효과로 처리 하였습니다. ● 이런 표현의 뒤에는 제가 오늘날 사회에서 사람들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저의 배척과 풍자의 표현수단 입니다. ● 작품에 나타나는 물건들의 원형은 일상용품 또는 자연 추출물 이런 원초적인 소재에서 선택하였다.나는 의식적으로 이 재료들을 뻣뻣하고 왜곡적인 효과로 표현했다. 이런 뻣뻣하고 왜곡적인느낌이 지금 시대의 나의 나이, 즉 나의 세대안에서 느낀 불안감이다. ● 그것들을 표현하는게 내가 정물을 통해 사람을 비유하는 균형점이다. ■ 김지희

윤연두_나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_종이에 수묵_124.5×112.1cm_2020

1. 자신이 가진 문제를 아는 사람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질문을 하고 답을 찾는다. 이 과정에서 어떠한 것이 답이 될지는 알지 못한다. 찾은 답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야하는 이유는 찾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 이 과정에서 답을 찾는 것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문제의 기인基因을 인식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디에서 오는가? 문제의 기인은 답을 찾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문제의 기인을 인지하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슬픔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답을 찾으려하지만, 답은 문제의 해결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하고 답을 찾는 과정 속에서 내가 느끼는 슬픔의 기인에 대해 아는 것이다. 직면한 문제를 명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찾아야한다.

윤연두_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그 곳에 있다_종이에 수묵_45×53cm_2020

2. '사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한 사람을 그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이고, 규정한다는 것은 그가 어떻게 있고,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여기서 어떻게 있는 것, 누구인지 아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이자, 존재의 근거가 된다. 사람은 자신과 닿아있는 모든 것들과 연관되어있다. 때문에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닿고 있는 세계 속에서 그를 이해해야한다. ● 한때 내게는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고, 외부의 감염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야 했다. 때문에 나는 격리되어있었다. 제한된 장소와 상황 속에서 나는 나의 세계를 잃었고, 현재의 기준이 되는 시간을 놓쳐, 존재의 기준을 잃었다. 나는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이후 나는 타자와의 관계성을 회복하며 나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나의 존재뿐만 아니라 나로서의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을 원하고, 그것이 필요했다. ● 내가 존재하는 것과 나로서 존재하는 것은 다르다. 나의 존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나로서의 나의 존재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반복해서, 끊임없이 내게 묻는 것뿐이었다.

윤연두_두 손과 귀_종이에 수묵_15×15cm_2020

나는 나, 자신인가? 앞선 '나'는 현재 여기에 있는 '나'이고, 후자의 '나, 자신'은 고유한 나의 존재이다. 내가 나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내가 가진 문제이다. 나는 질문을 하고 답을 찾는 과정을 통해 문제의 기인을 찾고 있다. ■ 윤연두

Vol.20201028g | 빙산의일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