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나키즘이다: 회화의 해방, 몸의 자유 I AM ANARCHISM: EMANCIPATION OF PAINTING, LIBERATION OF BODY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2020_1101 ▶ 2020_1114 / 월요일 휴관

김상표_EROS2_캔버스에 유채_193.9×390.9cm_202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200912c | 김상표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20_1101_일요일_02: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삼례문화예술촌 모모미술관 momo art museum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역로 81-13 (후정리 247-1번지) Tel. 070.8915.8121 www.samnyecav.kr

생성하는 회화: 김상표 근작전의 회화성 ● 김상표의 개인전은 어느덧 7회에 이르렀다. 짧은 기간 안에 이뤄진 수많은 작업과 다수의 개인전은 이 바닥 안에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게다가 한번에 출품하는 작업이 100호 이상으로 100점을 넘는다는 건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는 보통의 회화 작업에선 공장형 양산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믿기지 않을 수 있지만, 그의 작업은 모두 화가 자신의 수작업이다. 역사상 어떤 화가도 이만큼의 양과 속도로 작업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작업이 이 바닥의 일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 전시장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우리의 눈길을 끄는 건 단연 100호 이상의 큰 화면들과 그 화면 안을 채우고 있는 기이한 형상들이다. 이 형상들은 얼핏 사람의 얼굴이나 신체 형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러한 인지적 형태라고 하기엔 심히 왜곡되고 일그러져 있어 사실상 얼굴이나 인체로 알아보기 힘든 것이 대부분이다. 어떤 것은 아예 인체라고 전혀 말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것들은 그저 단속적인 스트라이프 패턴들, 뒤범벅된 물감 패치, 강하고 빠른 신체적 행위를 암시하는 스트로크들, 그 붓질과 패턴들이 최소한의 일관성을 가지고 결합할 때 만드는 형태들이다. 아마도 김상표의 기존 작업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번 전시의 변화가 상당히 난처할 수도, 혹은 유의미한 변화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속도감 있는 팔의 넓은 스트로크로 만들어진 색채와 붓을 대신한 손을 이용한 작업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최소한 이전의 작업들에선 얼굴의 형상이 분명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번 작업에서 지각 가능한 형상이 사라져간다는 점을 알아본다면 화가를 잡고 있었던 균형 감각이나 봉인이 해제되었다는 점에서 일탈이나 폭주로 보일 수도, 혹은 같은 이유로 이제 자신을 억제하고 한계 지웠던 제약이 사라지면서 더욱 회화와 화가 자신의 순전한 세계로 진입했다는 느낌이 그것일 것이다. ● 이 변화가 무엇일지 규명하기 위해 우선 그의 그림들을 만날 때 우리에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을 추적해 가보자.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은 아무 생각 없이도 매일 매순간 우리에게 일어나는 인지 작용, 이것의 좌절이다. 우리는 이 대상들을 마주하면서 그것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식이나 개념 안에 포섭하고 싶어하고, 그것이 어렵다면 무엇으로라도 인지하고 싶어한다. 인지 행위가 좌절됨에도 우리는 이 그림들에서 가시적 외양, 인지적 도식, 개념적 형태 중 어느 것 하나로도 식별하기 힘들다. ● 여기엔 두 가지 요건이 작동하고 있다. 하나는 이성적 인간으로서 우리의 본성 때문이다. 그것이 진화의 결과물이건 선험적이건, 아니면 신경계의 정보 처리 기제와 프로그램의 탓이건, 우리는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들을 패턴화하고 도식화하고 개념화한다. 이것은 추상을 행하는 우리 지성의 힘이자 본성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증진해 온 지성의 기술이다. 그것은 명석판명한 것을 원한다. 이 그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우리가 가진 본성에만 기인한다면 그림 자신의 일을 심히 축소하는 것이다. ● 그림 자신이 하는 일이 바로 다른 하나의 요건인데, 그의 작업들은 개념과 도식을 허용하지 않는 선에서, 그렇다고 단순한 기하학적 패턴이나 형태들로도 환원되지 않는 '최소한의 패턴 혹은 게슈탈트', 달리 말해, 특정한 패턴이나 형태라고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만을 허용한다. 그의 작업에 모종의 통일성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딱 그만큼의 것만 있다. 따라서 우리의 지성은 이 대상들이 최소한의 게슈탈트를 갖는 한에서 그것을 포섭할 도식과 개념을 작동시키려고 하지만, 그의 형태들은 개념으로 이어질 도식으로는 상승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성을 좌절하게 만든다. ●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최소한의 패턴과 인지 도식 사이에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라는 칸트의 아름다움 개념을 떠올리게 하지만, 우리는 이 작업들에서 형식적 쾌의 감정을 느끼거나, 타인의 동의를 얻거나 권하고 싶은 맘을 갖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지성과 감성 사이의 문제이긴 하나 아름다움의 문제는 아니다. 겨우 작가의 설명을 듣거나 제목을 통해, 이 작업들이 인물들이나 사물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 지식 안에서 이것들이 괴물, 외계 생명체, 혹은 고스트의 형상이 아니라 사람일 것이라고 안도할 뿐이다. 어쨌건, 그의 그림 앞에서 그의 그림을 대상화하고 그것이 어떤 것의 표상일 것이라고 하는 사고, 즉 표상적 사고는 멈춘다. 그의 대상들은 무엇으로도 되지 않는다. 최소한의 힌트, 최소한의 질서나 패턴을 남기지만, 왜 '무엇'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지. 무엇일 것 같지만, 무엇에는 이르지 않는 상태, 우리는 일단 이 문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 그의 작업은 표상적 절차와 사고를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어떤 재인 형태나 형식적 패턴도 허용하지 않는, 비표상적 회화, 이를테면, 리히터의 스퀴즈 페인팅과 같은 것이 되진 않는다. 그렇다고 보편과 토대, 혹은 삶과 우주의 추상적 구조에 경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추상 회화가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회화의 모티브가 알려주는 것처럼, 그것은 지극히 구체적인 것과 맞닿아 있다. 이를테면, 그의 작업은 「엑스니힐로」(무로부터), 「에로스」, 「타나토스」와 같은 작업을 제외하면, 대부분 특정한 인물이나 장면과 밀착하고 있다. 이를테면, 커트 코베인, 카산드라 베델, 김명주, 자신의 얼굴, 연주나 댄스 장면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 작업은 보통의 장르 구분으로 추상도 구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애매한 반추상이나 반구상 같은 것도 아니다. 표상적 회화는 아니지만, 전적으로 비표상적 회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추상도 구상도 아니다. 패턴이나 형태지만 도식도 개념으로 가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이런 부정성들 앞에서 키클롭스에게 "아무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오딧세우스를 떠올려야 하는가. ● 그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업은 어떤 예술적 장르의 틀, 예술계의 제도적 규약, 생산과 소비라는 경제적 메커니즘, 예술적, 미적 규범이나 조형의 원리, 개념적, 정보적, 윤리적, 철학적 이론들로부터도 완전하게 자유로운 데서 나온다고 말한 바 있다. 화가로서 전향하기 전 그의 삶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경영학 교수로서 그의 삶은 수많은 구조적 제약, 이론적 한정, 개념적 규정, 사회 경제적 조건들 속에 있었고, 그는 거기에 순응하며 살았다. 그는 회화 작업 앞에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어떤 것도 아닐 수 있다. 그는 규정을 거부한다. 규정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이지도 않다. 규정이 없는데 어떻게 반테제와 변증적 전개가 나오겠는가.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는 사실상 양식적 일관성이나 그 전개 과정을 보기 어렵다. 마치 그의 작업 전체를 둘러볼 때 우리는 무수한 파편들과 점, 순간들을 지나쳐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점 역시 그의 작업을 '규정'하려는 의도들을 쓸모없게 만든다. ● 그러나, 우리가 가진 일반적 틀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지적 나태함이거나 무책임함이다. 어디에 쉽사리 포섭되지 않는다는 말이 무의미를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사실 그의 작업은 비평가는 소용없고, 좋은 취향이나 미적 조화도 필요치 않다고 말했던 미래주의자들의 선언과 닮아 있다. 현재 세계의 작업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아카데미즘에 속하거나 상품화되었다고 할 때, 아니면 좋은 의미로 컨텐츠가 되었다고 보이도록 할 만큼 그의 작업은 아방가르드의 실천에 가깝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모든 제약과 규정의 예속을 벗어났다고 말하지만, 그의 작업에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그의 작업을 규정할 만큼의 규정성과 질서, 패턴이 있다. 이것들이 아마도 그의 작업을 우리의 지성 속에 담아내는 길을 만들 것이다. ● 그의 작업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 보면, 어떤 것을 그의 것으로 만드는 조건과 질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의 작업을 기술하려 할 때 이점을 빼놓는다면 어떤 것도 그의 작업을 충분하게 기술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작업들을 김상표의 것으로 만드는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다. 나는 이것을 수행자(修行者)적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수행성 안에서 그의 작업은 가히 생성하는 회화, 생성하는 이미지라고 불릴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철저히 이 수행성 안에서 모든 것이 기술되고 분석되어야만 한다. ● 여기서 수행자적이라는 것이 금욕주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회화는 구도자들과 같은 자기 탐구, 나아가 존재탐구의 수단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수행과 수련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하나의 탐구라고 말한다. 그의 탐구에는 구체적인 외부의 사태, 즉, 댄스와 공연, 구체적인 존재의 상태, 이를테면, 힘과 충동의 상태, 그리고 그 구체성에 개입하는 추상적 개념과 이념들, 예컨대, 에로스와 타나토스, 열반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 그의 회화를 규명하는 데 있어 더 중요한 것은 수행성遂行性이다. 모든 표상은 수행성과 별개의 것으로 다뤄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이미지는 누군가와 무엇이 언제 어떻게 했는지와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회화사에서 수행성은 물감의 물질성을 날 것으로 드러냈던 고흐, 색과 형태의 기본 모듈을 하나의 스트로크와 일치시켰던 세잔, 자동기술의 수행성을 거쳐, 폴록이나 드 쿠닝과 같은 액션 페인팅에서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퍼포먼스 부류의 작업에 이르러 중심이 됐고, 티라바니자의 참여미술이나 파레노의 전시에서 수행성은 작업의 본질적 부분이 된다. 그들의 작업이 수행성과 별개로 보일 수 없듯이, 김상표의 작업 역시 그렇다. 그러나 김상표의 것에는 이들과 다른 특이성이 있다. ● 무엇보다 그의 수행성에는 어떤 계획성도 없다. 그의 작업은 찰나의 모티프, 모종의 출발점으로부터 시작하지만, 대상의 객체성이나 그것으로부터 기인한 느낌은 회화의 출발점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대상이나 모티프, 아이디어는 그의 수행 안에 철저히 흡수된다. 그는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를 두고 수술용 장갑을 끼고서 캔버스 앞에 선다. 이내 검도 수련과도 같은 회화적 수행이 이어진다. 이 역시 비유가 아니다. 그는 진짜로 검도의 수행과 회화적 수행을 함께 한다. 그것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그의 스트로크는 검도가 그렇듯 매우 빠르며, 그림도 빠른 속도로 완성된다. 대번에 우리는 100호가 넘는 크기의 캔버스가 이 수행의 장소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작업 대부분은 검무의 한 무대가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육체적 수행력의 한계 안에서 이뤄지듯 한두 시간 남짓 안에 끝난다. 작업의 완성 여부는 몸이 스스로 말해준다. 이 행위는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정신과 몸의 에너지를 소진하는 순간, 그리고 그 행위로부터 예기치 않게 이미지가 스스로 형상성을 드러나는 순간 끝이 난다. 그것은 쥬이상스의 충동이고, 이 충동 안에서 이미지는 철저히 발생적으로 나타난다. ● 메를로퐁티는 세잔의 회화가 지각이 태어나는 순간과 과정에 대한 그림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김상표의 것은 이미지가 태어나는 순간 그 자체의 것이다. 그것은 마치 화이트헤드가 경험의 한 방울a drop of experience이라고 말하는 순간, 획기적epoch-making 순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생성 과정이면서 동시에 수행하는 존재의 생성 과정이다. 그것은 이미지 생성의 획기, 이미지 발생의 원자적 단위 같은 것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이 둘이 일치한다. 그래서 각각의 생성이 모두 고유하듯 그의 개별 작업들 모두 고유하다. 상대적 독창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각각의 사건들이라는 점에서 고유하다. 최근 그의 작업엔 어떤 일관된 방법도 없으며, 매 순간 그림과 그림은 달라진다. 이것은 이미지의 원자론이다. ● 그의 회화는 한 생성의 시간이 직접적인 것으로서 그 자신의 생성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매개되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한 생성의 순간에 어떤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것처럼, 직접적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그의 수행 안에 어떤 매개나 반성도 끼어들지 않게 한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 내내, 이미지가 태어나는 내내 그 수행을 멈추지 않으며 그림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 화가들은 대부분 회화의 기술적 단계마다, 전체 이미지의 부분마다 거리 두며 반성한다. 이들 모두는 특정한 기준에 따라 분석되고 평가된다. 이것은 화가가 회화나 이미지 자체는 물론,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 두는 행위다. 그들은 작업을 잠시 멈추고 지긋이 그림을 바라본다. 그들은 몸과 마음이 일치하는 육체적 수행으로부터 물러서서 시각과 정신이 되어 관조한다. 이러한 매개와 반성은 그림을 어쩔 수 없이 논변적discursive으로 만든다. 세잔이 빅투아르산 작업을 하나 완성하는 데 4년이나 걸렸다는 것, 매우 거친 행위들로 빠른 시간에 이뤄졌을 것 같은 드 쿠닝의 여성 연작이 1950-52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사실에는 수많은 지향과 그 지향에 따른 반성의 순간이 있다. 그들은 모던적 성찰성, 논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김상표의 것은 세잔의 빅투아르산 작업이 거의 같은 곳에서 그려진 것이라는 사실과 비슷한 맥락에 있다. 같은 장소에서도 자연의 스펙터클과 빛의 광휘는 매 순간 다채롭게 나타난다. 산이라는 영원한 개념, 수억 년에 걸쳐 형성되는 지형학적 구조, 인생, 몇 년에 걸친 회화 작업, 매 순간의 빛의 스펙터클 등은 각각 다른 시간적 층위에 있는 특이성이다. ● 김상표의 회화는 마지막의 시간성을 따른다. 그것은 그런 시간성의 층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성 자체이다. 작업의 시간에는 어떤 반성과 거리가 끼어들지 않는다. 그의 획기적 수행, 지속의 수행은 이런 분리와 매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수행 행위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미지를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에는 어떤 계획된 이미지나 아이디어, 미적 규범, 수용자의 반응 등이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고려된다면, 이미지는 화가 자신과 분리되고, 회화 자체와도 분리된다. 그의 수행은 분리와 판단력의 매개를 허용하지 않기에 실상 회화가 수행되는 순간에는 그 자신도 이미지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필자가 지적하는 부분에 대해 그제서야 자신의 그림의 어떤 부분과 특성을 자각했다. 되돌아보는 것은 수행이 멈추고 회화와 이미지로부터 멀어졌을 때의 일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회화에선 회화, 수행 행위, 이미지의 발생이 하나의 전체이며 이는 생성의 직접성과 획기의 순간 안에 있다. 그의 작업은 직접성의 수행이고 이 직접성이 바로 그의 회화를 '생성하는 회화'로 만든다. 그것은 생성의 메타포가 아니라 실재이다. ● 이 직접성의 시간성에서 속도는 그의 회화를 강도적인 것으로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회화는 이미지 앞에 이미지가 대응해야 할 어떤 표상도 가정하지 않기에 수행하는 각 스트로크의 속도 역시 재현과는 무관하다. 속도는 강도적인 것으로서 이미 벡터적인 것이다. 물론 이 벡터는 그의 팔의 회전력, 즉 토크와 그 궤적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들은 힘과 방향성을 동시에 가지며, 그의 캔버스는 이 무수한 스트로크 벡터들이 만드는 일종의 벡터장과 같은 것이 된다. 이 벡터장은 마치 들뢰즈의 다양체의 공간처럼 잠재적 장이면서 동시에 화가의 스트로크와 함께 현실화되며 하나의 발생적 과정 가운데 형상이 된다. 잠재적 벡터장은 김상표가 갖는 회화의 최초의 여건이나 느낌의 동기와 맞물리면서 그 직접성의 시간 동안 최소한의 형태나 패턴을 구성해 낸다. 여기엔 다양한 특이성들이 작용하고 있으며, 캔버스나 수술용 장갑의 질감, 그 평면성의 무대, 수많은 힘들의 접촉, 자유롭게 변형하는 손의 모양들, 물감의 물질적 질과 강도들의 특이성들이 어우러지며 벡터장을 일정한 형태나 패턴으로 구조화한다. 이것은 하나의 이미지 발생의 과정, 창발이다. 이미지는 스스로 창발한다. 이를테면, 장갑을 낀 손은 이 특이성과 힘들의 접촉 안에서 그가 의도하지 않을지언정 스스로 되기를 수행한다. 그의 손은 붓이라기보다 마치 밭고랑을 만드는 괭이 같은 농기구, 미장 작업을 하는 흙손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말 그대로 붓이 되기도 하며, 목도를 휘두르는 팔에 의해 목도가 되기도 한다. 이 손과 팔의 다양한 도구 되기becoming는 그가 붓이라는 회화적 제도와 도구로부터의 규정을 벗어나는 수단이기도 하며, 동시에 마치 밭고랑이나 활강의 흔적과 같은 패턴들을 만드는 특이성으로 작동한다. ● 그의 작업은 이 특이성들을 보존한 채, 또 다른 특이성, 즉 끌개들에 의해 최소한의 형태와 패턴으로 이끌린다. 그 끌개들은 최초의 모티브, 즉 인물이나 장면의 내재성(이를테면, 커트 코베인의 연주 장면에서 에너지의 운동들)일 수도, 그에 관한 화가 자신의 느낌들이나 관점일 수도, 그의 수많은 스트로크 안에 내재된 것일 수도, 또 그 캔버스와 만들어지고 있는 이미지들 안에 내재된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의 회화는 그것들의 재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끌개라는 말을 그의 작업이 재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의미에서, 몽드리앙의 추상도 여전히 재현이라는 의미에서 쓰고 있다. 벡터장을 소용돌이 모양으로 구조화하는 끌개를 생각해 보라. 그 끌개가 소용돌이 모양은 아니다. 그것은 힘들을 구조화하는 하나의 특이성일 뿐이지, 힘들의 외연적 외양이나 주어진 형상이 아니다. ● 이렇게 볼 때, 그의 회화는 생성하는 이미지의 수행이자 그 실재의 직접성이다. 그것은 동시에 그 자신을 매 순간 생성하고 창발하도록 만들고 싶은 화가의 욕망이다.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 그가 회화고 이미지이며, 회화와 이미지가 곧 그이다. 우리는 얼마나 나로 살고 있는가? 구조, 관계, 담론, 이념, 권력 등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조건이면서 애써 힘을 들이지 않는 순간, 우리를 우리가 아니게 만든다. 자칫하면 우리의 삶은 지루한 추상적 반복 속에 살고 만다. 김상표의 것은 우리가, 이미지가, 회화가 온전한 생성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김상표의 작업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Eros2」(2020)라고 이름 붙인 작업과 관련이 있다. 이 작업은 그의 회화에 대한 해석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작업들에선, 형상의 외양이 분명하건 아니면 일그러져서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어 최소한의 형태나 패턴이 있건 간에 형상figure은 있었고, 형상이 분명하게 자리한다는 점에서 배경ground도 있었다. 그러나 「에로스」 작업에선 이제 형태와 배경이라는 지각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가 와해되고 있다. 형태는 형태와 배경의 사이에서 부유한다. 어떤 형태는 교묘하게 배경 속에 숨어들어 쉽사리 분별해 낼 수 없으며, 또 다른 형태는 배경으로부터 나와 자신을 형태로 일부 드러낸다. 또 어떤 것은 배경이기도 하고 형태이기도 하다. 실상 다른 작업들이 이미 투쟁을 내포하고 있지만, 이 작업은 그 투쟁을 가시화한다. ● 그것은 배경 속에서 태어나려는 형태와 이미지의 힘, 그것을 배경으로 끌어 와해하고 해체하는 힘 간의 투쟁이다. 그 투쟁은 세계를 주체편으로 끌어들이려는 힘, 즉 에로스의 힘과 자연편으로 되돌아가려는 타나토스의 힘 간의 투쟁이다. 그것은 세계로부터 이미지를 추상하려는 지성의 힘과 의식 너머에 있는 순수한 힘들 사이의 정동적 분포 간의 투쟁이다. 그것은 벡터들로서 강도적인 것과 가시적인 외연적 형태들과의 투쟁이다. 형태는 리듬들로부터 태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단순한 벡터 패치들로 숨어들기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마치 들뢰즈가 말하는 다이어그램의 이중성이다. 그것은 카오스이면서 동시에 리듬과 질서의 배아가 된다. 그의 것엔 이 둘이 모두 함께 공존한다. 어떻게 보면, 그의 작업은 배경적 카오스와 최소한의 형태나 패턴의 질서로서 형상 사이에 있다. 화가는 어떤 것도 놓지 않으려는 듯 이 양극에서 부유한다. 이것은 심리적 갈등의 표현일 수도, 생성이 이미지로 출현하는지 다시금 세계로 잦아드는지의 문제일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현재의 김상표의 상태일 것이다. ● 어쨌건, 그는 존재와 생성의 일면에 서서 과격하게 다른 쪽을 공격하거나 부정하지도, 소박하게 한쪽만을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는 어쩌면 존재의 양극성의 사실 그 자체를 실현하고 싶어 한다. 원래 생성이 그러할 뿐이다. 그는 생성의 특정한 문턱, 혹은 위상 속에 있다. 그래서 그는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고 융합하고,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탐색한다. 설사 그것들이 겉보기에는 서로 충돌하더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생성의 사실이 그러할 뿐이고, 그의 회화가 이것을 따를 뿐이다. 이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수행의 행위들은 그 자체로 이 세계에 이질적이다. 이질성, 이것이 그의 회화가 갖는 궁극의 힘이다. ■ 조경진

김상표_아나키즘2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춤, 퍼포먼스 그리고 아나키즘 ● 그동안 '존재론적 물음으로서 얼굴성'이란 주제에 집중적으로 천착해왔던 나는 이제 신체성 전체로 회화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퍼포먼스 방식의 도발적인 그리기를 실험한다. 그래서 '나는 아나키즘이다: 회화의 해방, 몸의 자유'라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잡아 들었다. 이 주제는 중력의 악령에 사로잡힐 듯한 엄숙한 것이건만 '춤'이라는 경쾌한 이미지들을 가지고 풀어간다. 춤은 사회적 코드에 옭아매여져 왔던 우리의 몸을 완전히 해방시킬 수 있기에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다(바디우, 비미학, 110쪽). 그래서 니체 역시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라는 아름다운 정의를 춤에 헌사하지 않았던가? 이번 전시에서 나는 몸이전의 몸인 춤의 사유이미지를 빌어 회화에 가해졌던 기존의 규정들과 권력에 예속화된 몸을 철저히 해방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그것이 내용(주제)이든 형식(스타일)이든 예술에 대한 모든 정체성과 동일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예술의 아나키즘 전통과 맞닿아 있다.

김상표_아나키즘3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나는 창조적 무(creative nothing)이다 ● "리비도의 억압은 항상 리비도적으로 투자된 억압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리비도는 억압과정에서 절대적으로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예속화하는 도구가 된다. …. 더욱이 도덕적 금지, 특히 그의 육체에 등을 돌리는 금지는, 그 금지가 구속하려는 육체적 활동에 의해 유지된다(버틀러, 권력의 정신적 삶, 119쪽)." 예속이 주체를 생산하지만 예속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로 유지되는 리비도적 욕망과 몸(신체)에 기대어 주체의 해방이 시작된다. ● 경영과 철학의 모험을 거쳐 예술의 모험에 이르는 나의 궤적은 리비도적 욕망과 몸에 등을 돌렸던 '주체'인 나를 다시 '개인'으로 돌려세우는 과정이었다. 이 개인을 니체의 말로 표현하자면, 몸 그 자체인 자기(das Selbst)이다. 이러한 원초적 신체에 권력이 파고들어 타자(들)의 욕망을 기입한다. 그리하여 몸은 억압적,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에 의해 포획되어 수많은 자아들을 생산하며 자본주의적 편집증의 억압 속에서 여러 갈래로 분열된다. 자기라는 하나의 몸 속에 다양한 이율배반적 자아들이 또아리를 튼 것이다.

김상표_아나키즘4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이것들은 타율적으로 기입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제 자기의 일부를 구성하게 되었기에 한편으로는 나인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원초적 자기에 의해 생산된 것이 아니기에 내가 아니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권력의 개입뿐만 아니라 자아의 일정한 능동적 개입도 함께 작용하는, 이중적으로 엇물린 복잡한 과정을 경유해서 주체가 형성된다는 주장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니기도 한 수많은 자아의 흔적들, 이것들을 화가-되기의 과정에서 그리면서 지워가는 회화적 고투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기인 원초적 몸을 향한 아우성이었다. 억압적,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에 의해 강제되고 훈육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수많은 나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길들여지지 않고 야생적으로 남아 있는 몸인 자기(잠재적으로 또다른 수많은 나들)가, 서로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우기를 반복하는 장으로 내 회화는 불려 나와져 있다. 무엇보다 나는 '불합리와 무의미의 놀이 공' 같은 창조적 무의 공백상태에 이르기를 욕망한다.

김상표_푸른난장5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회화의 해방 ● 예술이라는 통일체에서 하나의 부분으로만 머물러 있던 회화를 유기체적 억압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 또한 회화에 대해 이전에 선취되었던 모든 주의와 주장에 대한 판단중지를 요청한다. 새로움의 옷을 걸치고 있지만 자칫 이전의 주의와 주장들을 반복하고 마는 것에 대한 수행적 절박함 속에서 이 판단중지는 이루어진다. 결국 나름의 방식으로 미술사를 다시 쓰면서 자기 회화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는 한계 앞에서, 이러한 판단중지는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얼마나 역설적인 상황인가? ● 나의 아나코 회화는 다음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봄은 봄이 봄이다'라는 '봄의 나르시시즘' 상태에서 지각대상에 전염된 채 감응에 겨워 온 몸으로 춤을 추며 그 표현대상의 강도를 선과 색의 리듬으로 질료적 감각덩어리에 담아내는 복합적 사건이 나의 그림이다. 이때 나는 스스로 자기조직화하는 욕망기계인 몸으로서 그림, 음악, 춤이 모호하게 혼재된 사건을 만들어내는 리좀적 다양체이다. ● 나는 그림-사건을 겪는 과정에서 시각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포함하여 우주의 몸이 담고 있는 모든 감각에 관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나의 그림은 우주적 몸들의 힘과 쾌락을 통과시키는 이미지가 된다. 요컨대 이제 화폭 안팎의 연기의 망 속에서 발생한 그림-사건은 수많은 해석과 촉발을 기다리는 감각덩어리로서 몸(살)인 셈이다.

김상표_푸른난장3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9

그렇다면 수행성으로서의 화가-되기를 욕망했던 나는 회화를, 나의 삶을 진정 해방시키기에 이른 것인가? 들뢰즈의 입을 빌려 니체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예술은 회복시키지도, 진정시키지도, 승화시키지도, 사심을 없애지도 않으며, 욕망도, 충동도, 의지도 「중지시키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예술은 「권력의지의 자극제」, 「의욕의 흥분제」이다(들뢰즈, 니체와 철학, 185쪽)." 이러한 관점에서 조망해 볼 때, 나의 화가-되기는 삶의 활동성이자 힘에의 의지로서 타자의 긍정적 삶을 촉발시키는 창조의 미학이자 실존의 미학인 셈이다. ● 그런데 예술가에게 자신의 삶의 활동성은 가상(회화에서는 이미지)으로 결과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예술가에게 가상은 현실적인 것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선택, 수정, 증가, 긍정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예술은 거짓을 우월한 이상으로 고양시킨다(들뢰즈, 니체와 철학, 187쪽). 눈을 돌려보면 형이상학, 종교, 도덕, 과학, 이것들 또한 우리의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거짓말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결국 인간 자신은 실재, 진리, 본성의 일부이다(슈스터만, 삶의 미학, 322쪽). ● 니체와 들뢰즈의 목소리가 내게 위안을 준다. 이리하여 나의 화가-되기는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의 추구라는 오랜 중압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숨막혀 들어오는 허무주의 깊은 질병에서 살짝 비켜서서, 이제야 비로소 삶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창안하는 수행의 기쁨을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상표_푸른난장7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몸의 자유 ● 나는 그리기 대상의 형태와 구조를 미리 확정하는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 최초의 선을 긋고 색을 칠하면서 이것과 접속하는 다른 선과 색을 찾아간다. 연이어서 특정한 선과 색은 다른 수많은 선과 색들에 열린 채로 리좀적 접속을 계속한다. 서예필법과 검법이 녹아든 붓질과 열 손가락의 본능적인 할큄이 캔버스를 흩고 지나가는 가운데 선과 색이 얼기설기 얽혀서 불규칙한 흐름이 형성된다. 그러다가 이질적인 선과 색의 리듬들에 의해 형성된 패턴이 나의 공감각과 공명하는 어느 순간, 내 몸이 스스로 그리기를 멈춘다. 이처럼 리좀적 접속을 통해 도달하려는 목적지는 사전에 설정되어 있지 않고 과정을 통해서 늘 잠정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 동일성(재현)에 사로 잡힌 그림-기계인 화가는 사전에 의도되고 계획되고 프로그램화된, 하나의 코드화된 기계로서 관념에 예속된 노예이다. 이러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지식인인 나를, 그렇게 절규하는 나를 통해 회화 또한 동일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동일성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창조적 무의 상태에서 (어쩌면 사유와 하나된, 아니면 사유 이전의) 몸(살)의 감각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시시각각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선과 색으로 물들이며 그림-사건을 창안하는 과정이 수행성으로서 나의 화가-되기이다. 그렇기에 이것의 결과는 '회화 아닌 회화', '비회화의 회화'이다. ● 결과물 없는 결과이자, 몸에 기입된 권력을 지워가는 자기 극복의 과정이자, 차이와 다양성의 생성의 놀이이자, 원초적 생명으로 복귀하는 운동으로서, 다의적 의미들이 교차하는 지점이 나의 회화이다. 이러한 수행성으로서 화가-되기 과정을 통해 나의 몸은 무거운 짐을 벗는다. 재현에 포박되어 있는 그림-기계이기를 거부하고 수많은 변신을 거듭하는 삶의 기계임을 선포한다.

김상표_푸른난장10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여기서 나의 그림그리기의 정치적 효과가 발생한다. 감상-주체에게도 원초적 신체를 떠올리게 하면서 그(그녀)를 감각과 사유의 무정부적 상태로 만든다. 원초적 몸(신체)에 배태된 아나키즘적 리비도의 떨림을 경험함으로 인해 그(그녀)의 견고했던 정체성은 해체되고 말 위험에 처한다. 그렇다면 너와 나, 우리는 몸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을까? ● 스피노자, 니체, 들뢰즈에 의존해서 나의 수행성으로서 화가-되기를 좀더 해명해보자.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알지 못한다. 에티카 3부의 증명2에서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사람들이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혹은 그것의 본성에 대한 유일한 고찰로부터 무엇을 연역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며, 그들이 정신의 인도 없이 스스로 생산할 수 있으리라 단 한 번도 생각할 수 없었을 무수한 것들이, 그 본성의 유일한 법칙들로부터 생겨남을 경험으로 확인하고 있음을 이미 보여주었다(들뢰즈, 니체와 철학, 85쪽에서 재인용)." ● 내가 수행성으로서 화가-되기를 실연하는 과정에서 몸의 적극적 힘들은 정말로 신체를 하나의 자기 자신으로 만들고, 그 힘에의 의지는 자신을 우월하고 경이로운 것으로 만들어낸다. 신체가 품은 창조적 무의 변신의 힘, 즉 조형적 힘이 디오니소스적 권력의 활동성으로 드러나게 된다. 니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너의 작은 이성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일 뿐이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52쪽)." 요컨대 관념(혹은 의식)에 대한 신체의 고귀함과 우월성이 고스란히 담긴 자리에 나의 예술활동으로서 그림-사건의 흔적이 배어 있다.

김상표_무용수1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9

자,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 주체화, 의미화, 유기화를 거부하는 구조적 장으로서 그림-사건이지금 나를, 너를, 우리를 매끄러운 공간으로 초대하여 환대한다. 우리는 코드화된 감각과 사유에서 해방되어 감각할 수 없던 것을 감각할 수 있게 되고 사유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을 사유해야만 하는 곳에 이르게 된다. ● 하지만 창조적 무의 무한한 기쁨은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알지 못하는 상태, 빛과 어두움 그마저의 구분조차 도래하기 이전의 세계와 함께 주어진다. 원초적 불안정성으로서의 애매함과 모호함이 그것이다. 그곳에서는 우리의 고유성이 와해되고 신체의 무정부성만이 난무한다. 그야말로 무법과 혼돈의 경계이다. 우리는 갈 곳 잃어 울부짖는 한 마리 짐승으로, 의미의 세계를 상실한 태초의 한 인간으로, 어쩌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단독자인 신으로 고독하게 서 있다.

김상표_디오니소스춤1_캔버스에 유채_162.2×260.6cm_2019

자,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수행성으로서 화가-되기를 통해 나는 한편으로는 세계에 저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를 긍정함으로써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고 싶다. 이런 점에서 나의 화가-되기는 저항과 자기형성의 특수한 존재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예술로서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 나의 미학적 윤리인 셈이다. ● 우리의 삶을 규범화하는 권력관계들의 촘촘한 그물망이 교차하는 장소가 우리의 몸이다. 이것을 문제화하고 나와 타자의 예술적 주체성을 생산하는 미적 방안들을 창안하는 과정 그 자체가 나의 예술활동이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예술활동은 '기쁨의 저항' 형식으로서 나의 삶의 존재방식이 될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자유로운 정신으로 즐거운 학문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자, 이 사람을 보라! 나만의 고유한 아나코 예술의 스타일과 주제들을 채굴해가면서 나의 몰락은 시작된다. ■ 김상표

Vol.20201102d |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