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Layer 하얀 막

손지영展 / SONJIYOUNG / 孫池英 / painting.installation   2020_1103 ▶ 2020_1117 / 월요일 휴관

손지영_White Layer 하얀 막展_대구예술발전소_202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대구예술발전소 10기 입주작가 개인展

후원 / 대구문화재단_대구예술발전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 사전관람신청 필수

대구예술발전소 DAEGU ART FACTORY 대구시 중구 달성로22길 31-12 (수창동 58-2번지) Tel. +82.(0)53.430.1225~8 www.daeguartfactory.kr

손지영의 '하얀 막(White Layer)' ● 대구예술발전소의 손지영 개인전 『하얀 막(White Layer)』에 신작 3점이 전시된다. 회화 「다섯 장의 하얀 그림자」(2020)와 「그림자가 놓인 테이블」(2020) 그리고 설치작품 「블라인드」 (2020)가 그것이다. 손지영은 대구예술발전소의 제1전시실에 한가운데 파티션(partition)을 설치해 놓아 두 개의 전시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손지영은 첫 번째 전시공간에 2점의 평면작품을 설치한 반면, 두 번째 전시공간에 설치작품을 연출해 놓았다. ● 관객이 첫 번째 전시공간으로 들어서면 우선 다섯 점으로 이루어진 「다섯 장의 하얀 그림 자」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마치 3미터를 훌쩍 넘는 길이의 거대한 테이블 위에 있는 각종 사물을 그려놓은 정물화(靜物畵)처럼 보인다. 더욱이 다섯 점은 각각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되어 있어 테이블의 길이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단지 맨 왼쪽과 맨 오른쪽의 그림에 테이블의 끝부분이 그려져 있어 테이블 길이의 무한성은 차단하고 있다. ● 그런데 5점에 그려진 각각의 이미지들이 서로 닮아 보인다. 그것은 크기가 같은 5개의 캔버스에 같은 사물들을 그린 그림이다. 따라서 테이블의 길이는 65센티를 넘지 못한다. 흥미롭게도 화폭에 그려진 사물들은 시간차(時間差)를 두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차'는 캔버스에 그려진 사물들의 '그림자 이동'을 두고 한 말이다. 만약 관객이 시선을 왼쪽 그림에서 오른쪽 그림으로 옮겨 본다면, 캔버스에 그려진 사물들의 그림자가 왼쪽에서 시작하여 사물들의 뒤편을 거쳐 오른쪽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나는 지나가면서 그림자를 '캔버스에 그려진 사물들의 그림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손지영은 캔버스에 사물들을 그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그림자로 사물을 유추하도록 표현해 놓았을 뿐이다. 이를테면 그녀는 사물이 부재하는 그림자만 그려놓았다고 말이다. 따라서 나는 그림자로 사물을 상상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손지영의 「다섯 장의 하얀 그림자」에는 눈부신 '하얀 사물'들만 나타난다. ● 우리는 그림자를 흔히 '사물이 빛을 가리어 사물의 뒤에 나타나는 검은 그늘'이라고 말한다. 그런 까닭인지 그림자는 사물 '다음'에 등장하는 것으로 간주 된다. 그러나 손지영의 그림에 출현한 그림자는 사물의 '앞'에 등장한다. 따라서 손지영의 그림자는 부재하는 사물을 '보충-대리(supplement)'한다. 그렇다면 그림자는 단순히 부차적이고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동(受動)과 능동(能動)을 가능케 하는 움직임(動)이 아닌가? ● 그런데 그림자는 항상 빛을 전제한다. 따라서 빛과 그림자는 일종의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수 있겠다. 손지영은 보이지 않는 빛을 그리기 위해 그림자를 그려놓았다. 따라서 그녀는 보이는 사물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보이도록 그린다. 그런데 사물을 보이도록 하는 것은 바로 빛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리는 것은 사물들을 보이도록 하는 '하얀 빛'이 아닌가?

손지영_다섯개의 하얀그림자_캔버스에 유채_80.3×65.1cm×5_2020_부분

손지영의 '최초의 만찬(the first dinner)' ● 자, 이번에는 손지영의 「그림자가 놓인 테이블」을 보도록 하자. 그것은 4미터를 훌쩍 넘는 길이의 거대한 테이블 위에 있는 각종 사물을 그려놓은 정물화로 보인다. 난 손지영의 「그 림자가 놓인 테이블」을 보면서 문득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을 떠올렸다. 물론 그녀의 그림에는 예수와 열두 제자가 부재한다. 띠라서 나는 그것을 '최초의 만찬(the first dinner)'으로 부르고 싶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화면의 정중앙에 위치한 예수를 중심으로 원근법에 따라 그려져 있는 반면, 손지영의 '최초의 만찬'은 평평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손지영의 '최초의 만찬'에는 예수와 열두 제자뿐만 아니라 식탁의 배경, 즉 원근법으로 그려진 3면의 벽면과 3개의 유리창 그리고 격자천장도 부재한다. 더욱이 손지영의 '최초의 만찬' 중앙에 그려진 테이블보를 보면, 식탁 아래로 접힌 휘어진 천에 드리워진 사물의 그림자가 휘어진 천을 따라 휘어지게 그려지지 않고 평평하게 그려져 있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식탁에는 빵과 포도주 그리고 그릇과 잔이 그려져 있는 반면, 손지영의 '최초의 만찬'에는 과일이 담긴 그릇과 화병 그리고 잔과 접시 또한 전기 주전자 등 동시대 일상 사물들로 그려져 있다. 만약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인위적인 체계로 구성되었다면, 손지영의 '최초의 만찬'은 비체계적인 생활세계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 나는 지나가면서 손지영의 '최초의 만찬'이 평평하게 그려져 있다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평평한 그림자에서 나는 어떤 깊이감을 느낀다. 만약 관객이 그녀의 그림으로 한 걸음 들어가 본다면, 그것이 유화물감으로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손지영은 유화물감에 기름을 섞어 엷게 만들어 그림자를 여러 겹으로 그려놓았다. 말하자면 그녀는 그림자를 각기 다른 색으로 그리고 그 위에 흰색으로 지우고, 다시 다른 색으로 그리고 다시 흰색으로 지우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고 말이다. ● 만약 관객이 회색의 그림자를 세심하게 본다면, 관객은 그림자에서 희미하게나마 각기 다른 색이 배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평평한 회색의 그림자에서 깊이를 느끼게 하는 이유이다. 그 점은 겹겹이 층진 '하얀 피부'에서도 느껴진다. 마치 아무것도 그려놓은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여백은 단순히 '흰색'이 아니라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우윳빛 피부'로 드러난다. 따라서 '여백'은 텅 빔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치 공기처럼 충만하다.

손지영_다섯개의 하얀그림자_캔버스에 유채_80.3×65.1cm×5_2020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림자는 다양한 상징으로 열려있다. 혹자는 인간과 귀신을 그림자의 있고/없음으로 구분한다. 그것은 몸과 영혼 사이의 다른 자아를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 선조는 사람의 그림자를 밟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림자는 혼으로 상징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비가시적인 세계를 뜻한다. 그런데 비가시적 세계는 없음(Nothing)이 아니라 있음의 부재(absence)를 뜻한다. ● 나는 지나가면서 손지영의 「다섯 장의 하얀 그림자」와 「그림자가 놓인 테이블」을 일종의 '정물화'로 중얼거렸다. '정물화'는 움직이지 않는 정지한 사물을 그린 그림(靜物畵)을 뜻한다. 정물화는 영어로 '스틸 라이프(still-life)'로 표기되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정지된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물화는 프랑스어로 '죽은 자연'이라는 뜻인 '나튀르 모르트(nature morte)' 로 표기된다. ● 정물화를 언급할 때 대표적인 사례로 흔히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피테르 클라스(Pieter Claesz)가 그린 「바니타스 정물(Vanitas' still life)」(1630)을 든다. '바니타스(Vanitas)'는 라틴 어로 '헛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서구에서 정물화는 흔히 '허무한 삶'이나 '인생무상'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 된다. 그런 까닭인지 피테르 클라스는 정물화에 해골도 그려놓았다. 문득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떠오른다. ● 라틴어 메멘토(memento)는 '기억' '경고' 등을 뜻하고, 모리(mori)는 '죽음'을 뜻한다. 따라서 메멘토 모리는 '죽음의 경고' '해골'을 뜻한다. 결국 '죽음을 기억하라'는 격언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성찰, 즉 삶의 성찰을 뜻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빛과 그림자로 '하얀 사물'을 그려놓은 손지영의 '정물화'는 관객에게 '메멘토 룩스(memento lux)', 즉 눈으로 보이지 않는 '빛을 기억하라'고 당부하는 것일까?

손지영_그림자가 놓인 테이블_캔버스에 유채_112.2×436.5cm_2020

빛을 기억하라(memento lux)! ● 자, 마지막으로 손지영의 설치작품 「블라인드」를 보자. 그것은 서두에서 중얼거렸듯이 전시장 한가운데 설치된 파티션으로 만들어진 두 번째 전시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관객이 두 번째 전시공간으로 들어서면 어둠 속에서 묘(妙)한 빛을 발산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손지영의 설치작품 「블라인드」이다. 나는 이상야릇하고 신기하며 낯선 빛에 끌려 그녀의 작품으로 한 걸음 들어간다. ● 손지영의 「블라인드」는 폭 1미터 20센티와 길이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테이블 위에 거대한 천을 씌운 설치작품이다. 거대한 천은 결이 고운 시폰(chiffon) 소재의 백색 천이다. 시폰 소재는 원래 얇게 비치는 가벼운 직물인데, 손지영은 일반적인 천보다 약간 두꺼운 천을 사용했다. 와이? 손지영은 거대한 테이블 위에 다양한 사물들을 놓고 두꺼운 백색 천으로 덮었다. 따라서 천 아래에 있는 사물들을 은폐시키고자 한다. ● 그런데 손지영은 사물들과 함께 빛을 발하는 조명도 함께 설치해 놓았다. 물론 그녀는 천아래 조명을 설치해 사물들을 비추지만 정체를 완전히 폭로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그녀는천 아래 설치된 사물들의 일부 실루엣만 관객이 볼 수 있도록 조명을 설치해 놓았다고 말이 다. 따라서 관객은 빛이 발하는 거대한 천 밑에 있는 사물들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작품으로한 걸음 더 들어간다. ● 손지영은 천 밑에 조명을 설치했지만 천으로 덮어놓아 사물들이 반투명하게 드러날 뿐이다. 더욱이 천에 접촉한 사물들의 부분들만 검은 실루엣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천에 접촉하지 않은 사물들의 부분들은 마치 안개 속에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객이 천에 접촉한 사물들의 부분들을 본다면, 천 밑의 사물들이 세워져 있는 형태가 아니라 누워져 있는 형국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손지영_그림자가 놓인 테이블_캔버스에 유채_112.2×436.5cm_2020_부분

손지영의 「블라인드」는 천 아래에 각종 사물을 설치해 놓았다. 그 사물들은 그녀의 회화 「다섯 장의 하얀 그림자」와 「그림자가 놓인 테이블」에 그림자로 암시되는 사물들이다. 말하 자면 그것은 그릇과 화병 그리고 잔과 접시 또한 전기 주전자 등 동시대 일상 사물들이라고 말이다. 와이? 왜 손지영은 사물들을 '하얀 막(white layer)'으로 은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녀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 "나에게 있어서 빛은 진실을 드러내는 열쇠와 같다. 그렇게 빛은 무언가를 비춰내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내 작업에서 빛은 이렇게 숨겨지고 가리워진 것을 드러내는 통로로 사용 된다. 나는 물건들을 천으로 가리워 볼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 볼 수 없게 가려진 것들을 다시 빛을 통해 볼 수 있게 만든다. 이렇게 숨바꼭질하듯 숨김과 드러냄, 열림과 닫힘을 반복하며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만든다." ● 손지영의 설치작품 「블라인드」는 마치 사물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블라인드 (blind)는 흔히 햇빛을 가리거나 밖에서 건물 내부를 볼 수 없도록 설치하는 도구를 의미한 다. 그런데 블라인드가 형용사로 사용될 때는 '눈이 먼' '시각장애인'을 뜻한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눈이 먼' 시각장애인이다. 그렇 다면 손지영의 『하얀 막』은 우리의 '맹목적인 시각(blind seeing)'에 경고를 하는 것이란 말인가? 무슨 경고? 빛을 기억하라!■ 류병학

손지영_블라인드_조명, 천, 오브제, 나무_100×488×244cm_2020
손지영_블라인드_조명, 천, 오브제, 나무_100×488×244cm_2020_부분
손지영_블라인드_조명, 천, 오브제, 나무_100×488×244cm_2020_부분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일 때가 있다. 화려한 문장보다 한 단어의 의미가 더 잘 전달되기도 하고, 말이 많은 사람보다 말없는 사람의 생각이 더 잘 읽히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제외한 보이는 모든 것들을 그려본다. 하얀 막을 덮는다. 그 위에 다시 그린다. 그리고 또 다시 덮는다. 이것을 반복한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하얀 막 너머의 이미지를 바라본다. ■ 손지영

Vol.20201103c | 손지영展 / SONJIYOUNG / 孫池英 / pa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