옅,틈,조각

전은진展 / JEONEUNJIN / 全은珍 / painting   2020_1112 ▶ 2020_1118 / 일,월요일 휴관

전은진_깊은, 건너 06_리넨에 유채_130.3×162.2cm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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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 / 문화체육관광부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관 / 북구예술창작소_소금나루 작은미술관 후원 / 국민체육진흥공단

관람시간 / 예약제 관람_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일,월요일 휴관

소금나루 작은미술관 울산 북구 중리11길 2 북구예술창작소 Tel. +82.(0)52.289.8169 cafe.naver.com/bukguart

얕고 옅은 관계를 위한, 덜 그린 풍경화 ● 변하지 않는 것을 찾거나 그런 게 있다고 믿는 것은 인간의 인간다움(정의가능성?) 중 가장 고상한 지분을 차지해왔고, 이전만큼 힘은 갖지 않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사회적 교육(훈육?)과 진정성의 이데올로기 등등을 통해 계속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만물은 유전한다, 오직 변화만이 영원하니, 같은 문구는 다시 인간을 '동물'로 돌려보내는, 인간을 세계 밖의 존재가 아니라 세계 안의 존재로 재위치시키는 언명이겠죠. 뭐 변화 앞에서 생각하는 인간이 느끼는 공포나 혐오를 이해 못할 것도 아닌 듯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의 시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연속적 동일성으로 단언하려는 것은 생각의 고집이겠죠. 그런 고집이 어제와 오늘을 같은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해서 과거·현재·미래라는 텅 빈 시간을 관리·통제하는 반-역사적인 인간을 만들어낸 것일 테고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다는 것은 그렇기에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느끼고 감각하는 인간이 증인일 텐데요. 자신이 자신의 안에 있지 않고 바깥에 있다는, 나와 나의 동일성(정체성)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즉 나와 나는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 역시 사유의 한 방식일 것입니다. 자신의 이중성이나 분열을 겪는 자는 끝내 자신을 놓지 않으려는 것이고, 그렇게 분열을 아는 것은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성찰적이라는 이야기니까요. 자신이 동물을 위시한 생태계의 일부임을 느끼면서 아는 사람은 그래서 기존의 앎에서 실패하거나 기존의 앎의 공허를 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전은진 작가에게 진입하기 위해서인데요. 작가는 본질에 대한 탐구가 바깥을 맴도는 것이 되고 겉이 속인 것을 알게 되었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주변 여러 요소들"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바깥이고 본질은 주변이고 속은 겉이더라고 말합니다. 사람과 깊고 진정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불가능을 이야기하는 것이잖아요? 진정한 우정이나 사랑이란 얕고 옅은 관계를 관계의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빠지고 주장하는 환상이라는 것이기도 하고요. 때문에 작가는 "혼자 있기를 선택"한 사람입니다. 만약 옅고 얕은 것이 관계의 '실체'라면, 사람은 안에 있지 않고 동물처럼 바깥에 있다면, 오직 변화만이 영원하다면, 지금 여기에 있을 뿐인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지금여기'들'의 시간성에 충실해야합니다. 좋은 관계와 나쁜 관계, 진정한 나와 그렇지 않은 나의 구분을 극복하(려)는 것이고 혼자서도 관계를 '창안(invent)'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전은진_깊은, 건너 07_리넨에 유채_130.3×387.8cm_2020
전은진_깊은, 건너 04_리넨에 유채_53×72.7cm_2020
전은진_고갯길_종이에 유채_각 50×50cm_2020
전은진_흐들_리넨에 유채_91×91cm_2020

작가는 1년 씩 입주하는 지방의 레지던시 건물 근처 풍경을 자신의 '환경'으로 지정하고 "식물과 친교를 쌓는" 것을 고립의 대가인바 고독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창안하려고 합니다. 식물과 친교를 쌓는 일, 보통은 자연친화적이고 생태주의적인 삶으로 미화되죠. 전은진 작가의 식물과의 우정은 단지 도피나 낭만적 대안은 아닌 듯합니다. 오래 그림그리기를 지속하려는 작가가 작년에 입주했던 고성 레지던시를 거쳐 올해 울산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은 '친족'이라고 불러도 좋은 소수의 작가들과 공동거주하면서 그림에 몰두하려는 정서적 '경제적' 효율성을 고려한 전략으로 보입니다. 공간을 함께 쓰는 작가들을 제외한다면 한적하고 무료한 곳이 작가들이 입주한 공간입니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곳, 그리 사람이 많지는 않은 곳에서 고요하고 한가하게 걷고 보는 일이 일상일 겁니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인간'론'을 식물과의 친교를 소재로 풍경화 형식으로 구체화하려고 합니다. ● 화가로서 풍경이나 식물을 착취하거나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온당한 관계를 맺겠다는 결심을 한 작가의 풍경은 분명 다르겠죠? 대상화하지 않기, 공감·동일시로 타자화하지 않기는 포스트모던 다원주의를 배운 사람들의 이론적 태도이기도 하죠. 작가는 자신의 경험에서 그런 '윤리'를 체화했습니다. 나의 고독이나 자만심이나 우월감을 방증하면서 물러나는 풍경을 그리지 않기, 말입니다. 줄곧 그림을 그려온 작가, '전업 작가'이지만 천천히 오래 작업하려는 작가, 되고 안 되고 보다 더 좋은 관계를 형상화하는 데 고심하는 작가, 회화라는 매체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갖고 있는 화가, '전통적인' 매체에 대한 반발심과 자신의 "색칠하는 행동"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회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는 작가가 회화를 다루는 방식, 보는 대상과의 "친교"를 중시하는 화가가 풍경화를 그리는 방식이 궁금해집니다. "내가 본 것이 나"라고 말하는 이 화가의 화면을 잘 바라봐야합니다.

전은진_막막_리넨에 유채_91×91cm_2020
전은진_흰뜬별_리넨에 유채_116.8×91cm_2020
전은진_옅,틈,조각展_소금나루 작은미술관_2020
전은진_옅,틈,조각展_소금나루 작은미술관_2020
전은진_옅,틈,조각展_소금나루 작은미술관_2020

이번 「울산북구예술창작소」 입주작가 보고전에 작가는 지난 1년 간 자신이 보고 그린 풍경화들을 제출했어요. 멀리 보이는 풍경도 있고 클로즈업 기법으로 밀착된 부분-풍경(조각)도 있습니다. 일견 수채화처럼 보입니다. 그리다 만 그림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수채화도 계속 그리고 있는 것 같고, 풍경을 그릴 때 "수채화처럼"을 읊조리기도 한다고도 들었습니다. 아마추어처럼 그린 것입니다. 회화라면 진력이 날 법한 화가가 전문가주의, 완성, 회화성과 같은 배운 개념들, 정신적 회화를 안 그리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강가의 나무들이나 풀, 들판의 식물들이 재현적으로 그려진 것 같기도 하고, 한 번의 붓질들로만 면을 채운 것 같습니다. 저채도의 물감들은 싱싱하게 빛을 발하는 전원이나 핍진성의 생동감과 같은 자연의 '본질'을 그리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도적 선택 같기도 합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작가의 회화는 밑그림, 드로잉, 초벌그림으로 보입니다. 더 그려지기를, 더 안정적이기를, 더 알아볼 수 있기를, 더 망막에 올라오기를 제가 익숙하게 보아온 풍경화 상투형이 요구하기도 합니다. 가로로 세로로 반복적으로 작게 그어진 붓질들이 면을 채우고 풍경이 되고 알아볼만한 대상이 됩니다. 물론 보고 그린 것일 겁니다. 북구 창작소 근처, 작가가 매일 들어가고 걷고 움직이는 장소가 소재이니까요. 셀 수도 있을 것처럼 눈에 보이는 붓질 사이에서 물감이 졸졸 시냇물처럼 흐르는 부분도 있습니다. 물감이 두텁게 올라가고 여러 번 붓칠을 반복함으로써 견고한 이미지나 형상을 만들어내는 기법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덜 그리려는, 회화의 초입부에서 멈추려는, 풍경의 가장 감각적인/시각적인 순간에서 머무르려는 작가의 결과, 성취, 증거입니다. ● 화폭의 질감을 감출만큼 안착되지 않은 물감의 옅고 얕은 존재감이어서, 수정과 덧바르기와 견고한 올리기가 없는 회화여서, 수채화 같은 그림이어서, '겉'들의 수렴으로서의 회화여서, 저는 작가의 삶의 태도가 회화적으로 번역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화가들이란 자신이 간파한 삶의 감각적 진실을 번역하기 충분한 형식, 매체, 수사를 계속 '연마'하는 사람이잖아요. 점점 가벼워지고 비우고 최소화하면서 말이죠. 오래전 캔버스의 이차원의 평면은 회화를 재현에서 추상으로 진보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데, 회화와 밑그림, 전문가와 아마추어, 예술가와 초심자의 경계를 갖고 놀려고 하는 전은진 작가의 붓질과 중력을 따라 흐르는 물감 사이로 보이는 캔버스-표면을 놓고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어요. 자기부정을 통한 진보의 모더니즘 회화가 발견한 '본질'은 캔버스의 평면에 충실하는 것이었겠지만, 자기가 이미 바깥임을 아는 작가가 거의 덮지 않아서 노출된 표면은 붓질로서 매체와 맺는 관계, 보이는 풍경이자 그 안에서 함께 존재하는 자연과의 관계의 결과이기도 한 것 같고요. 작가는 "색칠하는 행동"으로서의 회화를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진지한 행위보다는 일회적 수행에 가까운 작가의 풍경화는 삶과 예술, 일상과 예술 사이에 위치한 "행동"인거죠. 그러니까 이 회화는 곧 작가 전은진의 삶의 태도를 글자그대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죠. 아마 자연 풍경이 아니어도 인간이 '주제'여도 그럴 것 같습니다. 『옅, 틈, 조각』이라고 제목을 붙였던 데, 이런 저의 글이 아니어도 이미 제목과 작가의 그리기만으로도 자족적인 '맑은' 전시인 듯 보입니다. ■ 양효실

Vol.20201112g | 전은진展 / JEONEUNJIN / 全은珍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