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기억 The Memory of Time

리일천展 / LEEILCHUN / 李日天 / photography   2020_1203 ▶ 2021_0221 / 월요일 휴관

리일천_The windows of the future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86×129cm_2015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광주시립미술관 GWANGJU MUSEUM OF ART 광주광역시 북구 하서로 52 본관 제5,6전시실 Tel. +82.(0)62.613.7100 artmuse.gwangju.go.kr

이번 전시는 광주지역에서 사진 작업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예술적 성과를 보이고 있는 지역사진가 리일천의 『시간의 기억』전입니다. ● 리일천은 자신만의 시각적 언어를 통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주제로 작품을 하고 있다.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1977년에 낸 『사진에 관하여(On Photography)』에서 사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진은 하나의 '문법'이자 '시각 언어'라고 하였다. 리일천 작가는 자신만의 시각 언어를 찾고자 30여 년 동안 전통적인 사진 기능의 한계를 확장하고자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 이번 전시는 '존재와 시간', '공간의 전위', '광주 미술인 100인'이라는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존재와 시간'섹션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사진의 본질적인 속성인 빛과 그림자를 통해 표현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공간의 전위'섹션에서는 공간을 바라보는 시점과 관점의 변화를 통해 공간을 재해석하는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 두 섹션에서 전시 된 작품은 이쿼벌런스(equivalence, 등가물) 작업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주관적 은유와 추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광주 미술인 100인'섹션에서는 2006년부터 미술 현장과 지역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광주 미술인의 내면의 인상을 담아낸 작품이 전시되었다. 광주 미술인 기록 작업은 광주미술의 역사를 남기고자 하는 작가의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작업이다. ● 이번 전시를 통해 리일천작가의 30여 년 동안의 작품 활동을 되새겨보고 광주 미술인의 발자취를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 광주시립미술관

리일천_The windows of the past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86×129cm_2015

거울에 담긴 혼돈리일천의 사진세계남쪽 바다의 임금을 숙(儵)이라 하고, 북쪽 바다의 임금을 홀(忽)이라 하며, 가운데 있던 임금을 혼돈(混沌)이라 한다. 숙과 홀이 혼돈의 땅에서 만날 때마다 혼돈이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길이 없을까 의논했다. "사람에게는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혼돈에게는 이런 구멍이 없으니 우리가 구멍을 뚫어 줍시다." 숙과 홀이 하루 한 구멍씩 뚫어주자 혼돈은 이레 만에 죽고 말았다. - 『장자(莊子)』 내편 「응제왕(應帝王)」 ●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진가는 카메라를 들고 세상을 바라본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카메라가 아니라 연필을 들고 세상을 바라보는 버릇이 들어 있다.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드가 ․ 춤 ․ 데생』에 "손에 연필을 쥐지 않고 하나의 사물을 보는 것과 그 사물을 그리면서 그것을 보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라고 썼다. ● 요컨대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문제이다. 오늘날 회화와 사진을 별개의 영역으로 취급하는 건 다소 객쩍은 것일 수도 있지만, 사진의 방법론은 회화의 방법론과 근본적인 의미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진은 태어난 지 아직 2백 년도 되지 않은 매체이고, 나머지 모든 세월 동안 인간은 카메라의 도움 없이 세상을 바라보고 붙잡으려 애써 왔다. 화가들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세부와 배경 모두를 손으로 일일이 그리고 칠해야 했다. 하지만 사진은 이 모두를 한 번에 해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은 기계적인 원리에 따라 세상을 담았지만, 그렇게 담는 모습은 미증유의 마술이었다. 덕분에 손으로 그려야 했을 때는 아무리 애써도 안 되었던 것들, 지레 포기해야 했던 것들을 사진은 붙들 수 있었다. 사진은 의지와 욕망을 키웠고, 진실에 대한 자신감을 내세웠다. 늘 문제는 진실이다. 과연 사진은 진실한가?

리일천_사랑의 기억(Memories of love)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65×110cm_2018
리일천_시간의 기억(Memory of time)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65×110cm_2018
리일천_하얀 기억 White memory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86×132cm_2013

단순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리일천이라는 사진가에게 진실이란 무엇일까? ● 「Float time III」(2016)에는 강바닥에 있었을 법한 커다란 돌이 하늘에 떠 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 마그리트(René Magritte)가 곧잘 구사했던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인가 보다. 사물을 원래 자리에서 벗어난 엉뚱한 곳에 놓아두어서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방식이다. 하지만 마그리트가 구사한 비교적 단순명료한 게임과 달리 리일천의 게임은 은근하고 의뭉스럽다. ● 정작 사진에 대해 리일천 자신은 명료한 진실을 추구하는 입장을 취한다. ● 본인의 생각으로는 사진가는 화가와 다른 정통적이고 순수한 작업방식을 사용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사진가는 셔터를 누르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 직설적이고 완전한 최종적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1) ● 말과는 달리 그의 사진들은 일견 관객을 속이려는 것 같다. 하지만 실은 관객이 지레 나자빠지거나 당혹스러워 할 뿐이다. 사진가는 그저 '속이는 척' 한다. 요컨대 그는 속이는 것과 속이지 않는 것, 감추는 것과 드러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국면 속에서 움직인다. ● 「Space that are float I, II」(2016)에서도 돌들이 하늘에 떠 있다. 이들 사진은 제리 율스만(Jerry Uelsmann)의 사진에 대한 리일천의 대답이다. 율스만은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합성하여 기이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진에는 하늘에 여인이 길게 누워 떠 있거나 태고(太古)의 조각돌이 거꾸로 떠 있고, 하늘이 마치 강물인 양 파문(波文)이 인다. ● 율스만의 사진이 너무 유명하다보니 하늘에 돌들이 떠 있는 리일천의 사진을 보면서도 '초현실적인 환영을 연출한 것이로구나'라고 단정하기 쉽다. 하지만 실은 돌들이 떠 있는 게 아니라 화면의 위아래가 뒤집혀 있다. 물에 비친 하늘이 화면 위쪽으로 가 있고, 하늘이 화면 아래쪽에 있다. 율스만은 화면을 인위적으로 조작했지만 리일천은 전혀 조작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를 바꿨을 뿐이다.

리일천_Spatial extension - Ⅰ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86×120cm_2016
리일천_평면 공간 Ⅰ Flat Space Ⅰ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86×129cm_2018

19세기에 사진이 갓 등장했을 때 화가와 문인들은 사진을 폄하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사진이 거울과도 같은 명쾌함을 지니고 있지만 사고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이 말은 사진의 위상뿐 아니라 거울의 위상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한다. 리일천의 사진처럼 가치의 위계를 재고하게 하는 사진에서 거울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 예를 들어 율스만의 사진에서는 거울과, 거울에 비친 상은 각각 원본과 환영이다. 그러나 리일천의 사진에서 거울과, 거울에 비친 상은 등가물이다. 여기서 거울은 또 하나의 세계로서, 거울 밖의 세계에 대응하는 등가물이다. 리일천에게 '이퀴벌런트(Equivalent)'는 중요한 개념이다. '현실적 사물의 본래의 외적 이미지와 작가의 주관적인 내적 이미지라고 하는 이원적 욕구가 동시에 충족 되는 것'2) 이다. 「Space that are float I, II」(2016)에서 하늘과 물은 등가물이다. 거울에 '비친' 것이 아니라 '담긴' 것이다. 거울에 담긴 '혼돈'이다. ● 일견 리일천의 사진은 단순하다. 「Window of the future」(2015)는 푸른 하늘이 보이는 창을 안쪽에서 찍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멀쩡해 보인다며 그냥 지나갈 수는 없다. 푸른 하늘이 보이는 창이지만, 달리 보면 암흑 속에 떠 있는 직육면체로서, 그 한 면에는 하늘이 담겨 있다. 즉,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창의 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면서 동시에 앞쪽으로 돌출한 정육면체의 파란 한 면이다. ● 이런 방식을 「Gate-wormhole」(2015)에서도 보여준다. 어딘지 모를 천장에 난 창으로 빛이 내려온다. 천장과 창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기묘하다. 안쪽으로(위쪽으로) 움푹 들어간 것일까, 바깥쪽(앞쪽)으로 볼록한 것일까?

리일천_김영태 Kim Youngtae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00×150cm_2008
리일천_이돈흥 Lee Donheung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00×150cm_2009

리일천의 「Chaosmos - I」(2015)는 회화적인 사진이다. 화가가 오래 쓴 팔레트 위에 튜브 물감이 짓이겨지며 쌓인 모습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물감 덩어리라고 속아 넘어가기에는 뭔가가 부족하다. 아니, 정보가 너무 많다. 화면 위편에 물결이 일렁인다. 비 오는 날 바닥을 찍은 사진이로구나. 그러나 이렇게 파악하고 난 뒤에도, 평면 위에 얹힌 시간과 행위의 자취는 관객의 머릿속 한 구석에 들어앉는다. ● 「Chaosmos - III」(2015)은 색면(色面)으로 이루어진 추상화를 연상시킨다. 네덜란드 예술가 마우리츠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가 만든 「세 개의 세계」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세 개의 세계」는 나뭇잎이 떠 있는 물의 표면과 그 물 아래 있는 물고기를 묘사한 판화이다. 제목 그대로 세 개의 세계이다. 리일천의 사진에 비한다면 에셔의 세계는 단조로울 정도로 직설적이다. 리일천의 사진 속 세계는 안쪽으로 나뉘며 확장된다. 「Chaosmos - III」는 아마 비가 오는 날 길바닥을 찍은 것 같다. 바닥은 물이 고이는 곳과 고이지 않은 곳으로 나뉜다. 그리고 물이 고이는 곳에는 근처의 건물이 비친다. 물은 바닥을 둘로 나누고, 물에 비친 환영(幻影)이 물을 다시 둘로 나눈다. ● 리일천의 사진은 시선을, 발걸음을, 생각을 붙잡는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자꾸 뒤로 잡아당긴다.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꼬리인지 분명치 않은 존재, 방향 없이 작용하는 어떤 존재, 존재라기보다는 어떤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혼돈'이다. 『장자』에 암시된 것처럼 태초에 '혼돈'이 있었고, 세계 각지의 신화는 혼돈을 재료로 삼아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오딘(Odin)이 거인 이미르(Ymir)를 죽여 세상을 만들었고, 중국 신화에서는 거인 반고(盤古)가 죽어 그 몸이 세상을 이루었다. ● 『장자』에서 '숙'과 '홀'은 '혼돈'에게 구멍을 냈다. 분별하고 재단했다는 의미이다. 이 때문에 원초적인 잠재태로서의 혼돈은 죽었고, 세상은 질서와 체계에 따라 창조되었다. 이제 세계에는 방향이 생겼다. 비가역적인 시간에 실려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향을 뒤집거나 교란하며 혼돈을 상기시키는 흐름은 여전히 징후처럼 존재한다. 리일천의 사진은 그걸 끌어내어 보여준다. 그의 사진을 보며 관객은 그가 마련한 시간 속을 소요(逍遙)하게 된다. 그것은 비가역적인 시간 속에 암시된 가역적인 시간이다. ■ 이연식

* 각주 1) 리일천, 「'Chaosmos' 사진작품에 대한 연구」, 2019. 2) 리일천, 같은 글.

Vol.20201205i | 리일천展 / LEEILCHUN / 李日天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