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기 입주작가 오픈스튜디오

권세진_김진기 2인展   2020_1211 ▶ 2020_1213

초대일시 / 2020_1211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창작공간 달 ART SPACE DAL 서울 성북구 창경궁로43길 41-6 Tel. 82.(0)2.742.5005 www.spacedal.com

서울 성북동에 자리한 창작공간 달에서 입주 작가들의 일년 동안의 결실을 선보이는 오픈스튜디오를 마련했습니다. 3기 입주작가 권세진, 김진기 작가님의 작업 공간에서 편안한 소통의 시간을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전은희

권세진_막(Skin)_캔버스에 먹지,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20
권세진_벽(Wall)_캔버스에 먹지, 아크릴채색_27.3×19cm_2020
권세진_이사(a move)_캔버스에 먹지, 아크릴채색_27.3×19cm_2020
권세진_유원지(Park)_캔버스에 먹지, 아크릴채색_40.9×53cm_2020

...경계에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다1) ● 우연과 필연, 실제와 관념에 대한 일련의 사고들은 그 해답을 찾기 힘든 인간의 숙명적 의문이다. 이에 대한 이분법적 또는 통합적 사고는 두 경우 모두 불가지론 또는 반대로 교조주의에 다다르게 만든다. 권세진의 작품 세계는 이 고전적이고 미묘한 철학적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 작가는 좁은 작업 공간에서도 대규모 사이즈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종이 또는 캔버스를 일정한 크기의 단위로 나눈 '그리드(grid)'를 고안해냈다. 잘린 그리드, 접힌 그리드는 작가에게 작업 도구(toolkit)가 되었고, 매일매일 각각의 모듈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이 작은 모듈을 채워나가는 일상적 수행의 결과 「가림막(Screen fence)」(2020), 「막(Skin)」(2020)과 같은 작품들이 탄생했다. 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조각내어 그리고 다시 잇던 임의 행위가, 이제는 작가에게 있어 공간적 제약을 벗어난 회화적 실험이자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style)이 되었다. 권세진의 '조각 그림'에는 인접한 모듈과의 연결성이 고려되더라도, 그날그날의 우연적 상황이 작업에 녹아든다. 캔버스 위에 먹과 먹선을 사용하는 방식은 그 재료 자체의 성격(캔버스의 직조 상태, 먹의 번짐 효과 등)과 작가의 손놀림(압력과 방향)에 따른 우연성을 보다 극명히 드러낸다. 이러한 우연성은 작가에 의해 선택된 오브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외부의 개입(빛, 대기, 바람, 사람의 손길 등)에 의해 변형되는 가림막의 주름, 벽의 얼룩, 물의 파동 등이 그것이다. 작업의 마지막은 '무엇을 그리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붓질 자체에 흥미를 느끼며 작업한 '분절된 조각 그림'들을 결합해서 일상에서 포착한 하나의 이미지로 선보인다. 작가는 개별적이면서 우연적인 작업들은 결국 원래부터 예정되었던 필연적인 것으로 돌아가게 만들면서, 우연과 필연은 실상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우연(randomness)이 겹쳐서 일상(ordinary)을 완성해 나가는 삶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 「밤(Midnight)」(2020)과 「유원지(Park)」(2020)) 풍경은 작가의 구체적 경험을 바탕으로 재현한 지난 작업(「밤 산책(Night walks)」(2018), 「둥둥(Float)」(2018) 등)의 연장선상에 있다. 작가는 때때로 강변의 오리배에 자신을 투영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품 속의 '읽히는 도상'은 사건의 흔적을 다루기에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관객으로 하여금 각자의 서사를 유발시킨다. 「파라솔(Parasol)」(2020), 「이사(a move)」(2020), 「사주풀이(Tarot)」(2020), 「공간(Space)」(2020) 등의 작업에서는 서사를 덮고 일종의 덜어내기(reduction)를 시도한다. 자재를 가린 파라솔, 작품을 가린 포장지, 인물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가려버린 천막은 작가에게 새로운 캔버스가 되었다. 나와 타인의 서사를 가리고 회화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작가의 탐색 과정이 「가림막」, 「막」, 「벽」과 같은 작품들로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지극히 추상으로 보이는 결과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작가의 다른 그 어떤 구상 작업보다도 계획적이고 세밀한 작업 과정을 거친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뭘 그린 것인지 모르길" 원하지만, "더 구체적인" 표현에 집중하는 회화적 실험을 통해 결국에는 '관념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이미지'를 완성한다. 이는 과도한 재현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관객을 배려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러한 장치를 통해 오히려 관념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양가적인 의미를 가진다. ● 권세진의 작품들은 일관되게 이러한 내면성과 외면성을 동시에 유발하는 오브제들을 다루어 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분법적 개념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축의 선상에서 어느 한 극값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성공적으로 추구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러한 이분법이 결국에는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의 차이이며 실상은 상보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그의 작품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도했든 아니든 작가의 순수하고 지속적인 '회화적 실험'은 결과적으로 이러한 인식론적 해답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으며, 반대로 그의 작품이 다양한 가치들 -흑(먹)과 백(캔버스)의 경계, 우연과 필연의 경계, 구상과 추상의 경계, 실제와 관념의 경계- 사이를 유연하게 오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 양정애

김진기_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잉크젯 프린트_112×194cm_2020
김진기_큐비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잉크젯 프린트_130×89cm_2020
김진기_충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잉크젯 프린트_73×91cm_2020
김진기_떠난 곳, 군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잉크젯 프린트_73×100cm_2020

Sunnyside up Egg ● 말하자면, 디터 크리그(Dieter Krieg)가 플렉시글라스에 아크릴로 그린 계란 프라이를 펼쳐 이런 그림이라고 했다. 손바닥만 한 프라이를 이 미터를 훌쩍 넘게 그린 그런 그림말이다. 써니사이드 업 에그를 골몰히 보는 관객 사진을 찾아봤다. 그러니까 계란 프라이 앞에 한참을 머무르고 있는 거다. 크리그의 계란 프라이는 어떤 그림을 원하는지에 대한 김진기의 답이면서도 그는 "그림을 잘 못 그린다고 써주세요."라고 당부했다. 쓰고 보니 잘 못 그리는 것과 잘못 그리는 것 사이 그 공백에 손가락을 비집어 넣어 괴롭혀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내 손에도 진무른 피, 으깨진 살이 닿더라도 의심 많은 도마처럼 불경스럽게 기어이 못 구멍을 헤집고 쑤셔보는 거다. 그는 마치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다가 만지작거리다 꺼내놓는 것이 자기 작업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를테면 「떠난 곳, 군산」(2020)은 짐작컨대 이력 상에 군산에서 머물던 2011년 사진의 소환이고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니?」(2020)는 2008-2012년에 제작된 「오빠 나 사랑해?」, 「오빠 나 안아줘」, 「오빤 내 계획에 없던 남자야」 등의 오빠 연작의 구도에 남녀 대신 마네킨으로의 덧씌움으로 볼 소지가 있다. 「AM 5:45」는 2010년 회식 릴레이의 2020년 판으로도 볼 수 있으며 「파도와 꽃」, 「충돌」은 주로 2018년부터 제작되고 있는 가족 그리고 자전적 사진의 회화적 재구성이다. 시작과 도출과 연결이 이루어졌으니까 이제 조합하면 되나? 그런데 「AM 5:45」의 밑이 되는 유흥업소 난장의 이미지 수집은 대략 4-5년 전에 멈췄다. 그 사이 나이를 먹었고 낮 밤이 흘렀다. 다행인지 낮 밤 거스무리만을 틈타 운신해서일까 일광 소독 없어 축축함이 가시지 않았고 물감 마름에 연이은 완성이란 말쑥함도 아직 더 기다려야만 할 것 같다. 미완이 아닌, 이건 고의성이 짙어 보이는데 무얼 회피하는지 본인은 심각한 사람이 아니고, 가볍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아니요, 심각하고 무겁습니다만. 가볍다는 말이 투명함을 담보하는 대신 경멸로 역전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에게 경멸은 유예의 수단인 듯하다. 저녁밥 먹으러 부르는 소리에도 아직 다 안 끝났다고, 공을, 없으면 모래라도 쥐어 놀이를 종료시키지 않는 애 같음이랄까. 대낮의 선생은 이처럼 그림을 붙든다. 잘 못그려도 괜찮은 게, 이렇게라도 놀지 않으면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 뺐을 수도 없고 빼앗기지도 않을 태세로 보인다. 이 놀이만 계속될 수 있다면 「큐비즘」도 쉬르레알리슴도 아무래도 좋다. 사실 어른의 술자리도 들여다보면 한없이 유치하지 않나. 따라서 애 같음에도 나름의 심각함과 진지함이 있다. 그리고 다시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니?」와 「큐비즘」의 마네킨을 본다. 홍보 마네킨(女)과 공사장 마네킨(男)의 "연극적 낯섦"을 "영화적 클리셰"로 번안한다는 이 작업들은 사회적 쟁점을 부러 추출하지 않더라도 괜찮은 유희다. 큐빅을 들고 있는 마네킨(女)에 입방체로 구성된 세계관을 주입한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달라질까. 놀이의 사회학도 말 만들기 나름이지만 말이 얼마나 사후적인지 생각해보면 그림의 관능이 지나간 자리 정돈은 결국 역사 서술처럼 그로부터 아무리 배운다 하더라도 뒤로 걷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이라고 작가 노트에 남기고 있는데 세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앞과 뒤로 논리 그리고 빌어먹을 논리에 대한 이죽거림으로 나뉜다. 비록  사실은 그러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다는 이 접속어의 위력은 강력하게 예술적이다. 문학이나 영화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다. 역능의 끝이 어디일지 모를 그이에게 응원을 보내고 감정을 이입하지 않던가. 좋을 말로 구성될 미술계는 차치하고 일단 그려보면. 붙이고 그리고 밀어내고 던지고 뿌리고. 못 이겨 살아보면, 잘 못그려도 살아보면, 잘못 지고 살아보는 것보다는 한 뼘 나으니까 계란 프라이도 나오고 골몰히 보는 이도 생기고 그이도 나와 사뭇 다르지 않고, 그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Viva La Vida! ■ 김현주

* 각주 1) 권세진 작업노트에서 인용 (출처: https://www.kwonsejin.com/2020-2)

Vol.20201211c | 3기 입주작가 오픈스튜디오-권세진_김진기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