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쓴다 용써 try try try

노승표展 / ROHSEUNGPYO / 盧昇杓 / painting   2020_1202 ▶ 2020_1216 / 월요일 휴관

노승표_용쓴다 용써 try try try展_더레퍼런스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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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표 홈페이지_rosna.modoo.at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더레퍼런스 THE REFERENCE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24길 44 Tel. 070.4150.3105 www.the-ref.kr

지속적인 흔들림 속에 머무르는 삶 ● 노승표의 개인전 『용쓴다 용써』는 작년 그가 참여한 단체전 『Double Think: 내가 틀렸을 때』에서 주제가 되었던 '인지부조화' 개념에 대하여 한층 더 깊게 고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의 고찰의 항해는 결국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자기 성찰과 고백이라는 목적지에 닻을 내린다. 그의 이전 작품들을 관류하는 하나의 커다란 맥락은 부조리한 사회 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조소였다. 그의 개인전 『도깨비를 봤다』(2015, 세종아트갤러리) 에서는 '도깨비'라는 허상의 존재를 이미지화하여, 표면적인 진실만을 믿는 인간의 얄팍한 믿음을 희화화한다. 또 다른 그의 개인전 『파울이냐 페어냐?』(2016, 합정지구)에서는 한국 사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아저씨'들의 부정한 행태와 소모적인 대립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포착한다. 물론 이전의 이 두 개인전들에서 보여준 표현 방법은 서로 다른 전략들로 구성되어 형식적 차이가 발견되지만, '도깨비', '아저씨' 등으로 투영하는 사회에 대한 노승표의 관찰자적인 시선은 동일하다. 그러나 이번 전시『용쓴다 용써』에서 그는 '청년 노승표' 자신이 동시대 사회, 문화, 시스템에서 겪어야만 하는 감정, 감각, 사고를 이미지로 형상화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시선을 거시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으로부터, 개인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으로 이동시킨다. 그러므로 이 전시는 청년 노승표의 가장 개인적인 서사를 담고 있다. ● 이 전시에서 노승표는 거의 모든 드로잉을 정사각형의 켄트지에 먹으로 그린다. 켄트지는 재질의 속성상 먹을 뱉어내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이러한 재료의 선택으로부터 작품 전반에 반목, 긴장, 경직, 경색의 서사가 이루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다. 대상 또한 강한 것과 약한 것, 강한 것과 강한 것, 약한 것과 약한 것 사이의 대립이 두드러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강한 것을 표상하는 이미지로 추정되는 몇 가지가 있는 데, 그 중의 하나가 화살이다. 단단하고 견고한 화살은, 경례를 표하는 청년에게 날아와 꽂히고, 청년은 고통으로 인해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꼿꼿하다. 또 다른 청년 역시 화살에 맞는다. 청년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선들은 청년의 통증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시각과 청각을 무력화 시키는 섬광탄의 빛 같다. 그러나 이 선들은 그림의 가장자리까지 뻗어나가지 못하고 경색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화살의 주체가 난폭한 사회의 메커니즘이냐 아니냐, 즉 강자의 주체가 무엇인지 명시하고 통찰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강자로부터의 폭력/억압과 약자의 대응 바로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상한 긴장감'의 감각이다. 청년은 화살을 맞고도 간지러운 듯 배를 잡고 웃는다. 청년은 폭력이라는 고통에 '결박'되어있지만, 동시에 웃음이라는 쾌의 감정으로 결박을 '해제'하고자 시도함으로써, 경색의 상황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러한 경색으로 대변되는 '정지 이미지'와 균열로 대변되는 '운동 이미지'의 대립으로 인한 '이상한 긴장감'은 이번 전시 전반을 관통하며, 다양한 '선' 표현으로 드러난다.

노승표_용쓴다 용써 try try try展_더레퍼런스_2020
노승표_용쓴다 용써 try try try展_더레퍼런스_2020

노승표의 드로잉은 오직 '흰' 종이 위에 '검은' 선들의 공모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검은 선'들은 노승표에게 인식되는 현실이 어둡다는 것을 추측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검은색을 캄캄한 어둠, 불순한 것, 혹은 죽음의 색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이 이뤄지는 공간은 한결같이 '어둠'이라고 볼 수 있다. 청년은 「농심 육개장 사발면」을 먹는다. 그리고 동시에 라면의 꼬불꼬불한 면은 청년의 눈물이 되어 흐른다. 한 그릇의 눈물의 라면에 매달려 있는 삶은 이미 처절하고 안타까운 어둠이다. 그러나 노승표는 그러한 어둠을 어둠의 색으로, 즉 어두운 현실의 비극적 상황을 오히려 전형적인 검은색으로 선제 포용함으로써 비극을 무력화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비극에 대한 면역력을 이식함으로써,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만한 일이나 사건의 분위기로 전환시킨다. 이러한 전략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있는 블랙유머의 코드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블랙유머를 통해 어두운 현실을 폭로하고 그것을 자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일종의 동종요법을 통해 블랙유머 코드를 시련으로부터 스스로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는 수동적인 저항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엎어진 「오뚜기 진라면 매운맛」 사이에서 꼿꼿이 서있는 젓가락처럼, 또 난데없이 「우르르쾅쾅」 떨어지는 벼락에 난타당하는 청년이 빳빳하게 치켜든 검지손가락처럼. ● 이러한 힘없는 저항 또는 자기방어의 기제는 그와 세상을 연결 혹은 단절하게 만드는 '창문'의 이미지를 통해 다시 한번 가시화된다. 「창문넘어 어렴풋이」 창문 바깥은 천둥번개와 폭풍우로 인해 어둡게 미쳐가는 산의 선들로 꿈틀거리는 불안과 위협의 세상이다. 여기서 창문 그리고 창문에 힘없이 붙여진 X자 테이프는 그를 이러한 어둠으로부터 비켜서서 살게 한다. 또 다른 창문에는 헐고 뜯겨진 모기장이 바깥의 벌레들로부터 그를 비켜서서 살게 한다. 여기서 노승표가 천둥번개와 나방과 같은 전혀 해롭지 않은 벌레들을 똑같이 공포와 재앙의 세상으로 응시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에 대응하는 최선의 전략이 허물어지기 쉽고, 불안한 존재의 경계들 뒤로 '비켜서 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마치 악물은 이빨 사이로 혼잣말로 자기만의 낙천적인 주문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것 같아 보여 씁쓸한 웃음을 자아낸다.

노승표_창문넘어 어렴풋이_켄트지에 먹_79×79cm_2020
노승표_아해봐아_압축스티로폼에 아크릴채색_27×27×40cm_2020

노승표의 작업에서 '판단유보'적인 성격은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왔고, 이번 전시에서도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 지난 전시를 잠시 되짚어보면, 『도깨비를 봤다』에서 그는 지금 보고 있는 대상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하기 애매한 순간들을 드로잉으로 또 아이소핑크 조각으로 제시했다. 『파울이냐 페어냐』에서도 마찬가지로, 대상을 부분적으로 클로즈업하고 극단적으로 크롭시켜 드로잉함으로써,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것의 매혹과 위험을 동시에 풀어냈다.하지만 이번 전시 『용쓴다 용써』에서 그는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발생한 질문들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스스로의 모순들을 의식하고, 판단유보를 넘어 자기 분열과 갈등에 봉쇄된다. 「손가락 끝으로 긁어 채듯이」에서는 돌이 날아가는 순간이 포착된다. 무엇을 맞히려고 던지는 돌팔매질인지, 아니면 돌팔매질로부터 맞기 직전의 순간인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된다. 그러나 이 작업에서 드러난 세 가지 손 동작과 더불어 추측해보면, 돌을 던지려거나 던졌거나 혹은 던져진 상황을 심판하려는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의도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승표는 이러한 상대적인 입장과 위치를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곧 어떤 위치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인지를 계산하게 하는 싸늘한 사회의 메커니즘이 자신의 일부가 되어 있음을 깨닫는 자기모순에 다다른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은 막다른 골목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고, 전환의 지점을 표시한다. 난폭한 사회 시스템으로부터의 돌팔매질과 화살로 인해 부상당한 햄릿은, 이제 스스로의 위치에 의해서 상황을 전치시키고 재구성한다. ● 이러한 변위의 책략은 이번 전시의 드로잉 개별 작품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드로잉과 드로잉 사이에서, 드로잉과 조각 사이에서 그리고 조각 개별 작품들 사이에서도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특별히 노승표는 조각을 '입체드로잉'으로 스스로 명명함으로써, 조각에 대한 태도를 드로잉에 대한 태도의 맥락에 상응하여 위치시킨다. 변위라는 견지에서, 이는 매체특정성의 재정의라는 거대한 담론에 대한 하나의 해명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이 전시에서 노승표가 강조하는 것은 지금까지 해왔던 '비판'의 주체와 대상에 대한 확신, 또는 판단 유보라는 정지적 사고로부터 벗어나, 상이한 시점과 이행의 지속적인 흔들림으로부터 구조화되는 '운동성' 그 자체이다.

노승표_용쓴다 용써 try try try展_더레퍼런스_2020
노승표_용쓴다 용써 try try try展_더레퍼런스_2020

청년 노승표의 현실은 온갖 우연하고 사소한 갈등과 대립들로 출렁이는 어두운 '선'들로 재현된다. 이 어두운 선이 이루는 캄캄한 어둠은 온몸을 찍어 누르는 중압감의 돌덩이로, 신경증적인 직선의 화살로, 그리고 정신분열증적 소음과 섬광의 벼락 등으로 직설적이면서 동시에 알레고리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노승표는 이 어둠을 더 이상 현상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그는 희미하게 웃어보이고, 테이프를 붙이고, 모기장을 친 창문 뒤에 비켜서서 주저해보고, 불이 난 창문 바깥에 매달려 발 끝까지 힘주어 버텨보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지하며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 주문을 외치며 중압감을 공중으로 띄워 떨쳐 보려 한다. 뿐만 아니라 나를 억압하던 단단하고 결코 깨뜨릴 수 없을 것 같던 시스템 혹은 나 스스로의 완벽함에 대한 결벽을 「아해봐아」 하고 입안 가득 넣고, 물고, 씹는다. 이는 가늘고 연약하며 흐물흐물한 상태로 「이겨낼 이에게 축복을」 바라는 청년이 한 손으로 간신히 돌을 붙잡고 있는 것과, 눈물의 「농심 육개장 사발면」을 애처롭게 먹는 것과는 상대적으로 능동적인 대응이다. 물론 언제나 시련에 혹사당하고, 힘없이 붕괴되거나 간신히 버텨내는 것만이 청년의 삶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능동적인 대응은 꽤나 반갑다. ● 그러나 이 전시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인간상으로의 변화를 통한 명랑 청년 극복 드라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 속에 존재하는 실패의 순간, 불투명성과 불확정성의 순간, 수 많은 중간 상태들 속에 존재하는 나,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나약함과 자기모순을 의식하는 '과도기적' 존재로 긍정하는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노승표는 삶의 문제에 집착하면서 동시에 그림을 그려야 하는 모순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삶을 떠날 수도, 그림을 포기할 수도 없기 때문에 비극이 생겨난다. 그림이 그에게 삶의 출구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삶과 그림의 사이의 괴리는 그를 끊임없이 '용쓰게'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용쓰고 용쓴' 흔적은 앞에서 언급한 전략들을 통하여 작업에 반영되었다. 더 이상 삶의 관찰자가 아닌 주체로서, 삶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갈등, 대립, 모순과 괴리의 시계추 같은 지속적인 흔들림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그 속에서 머물러야만 하는 노승표는 변위적 태도를 통해 끊임없이 헤매고, 움직이며, '용쓰기'를 제안한다. '용쓴다 용써'는 노승표 자신 그리고 지금도 각자의 위치에서 '용쓰는' 당신들 모두에게 전하는 조촐한 위로의 읊조림이다. ■ 이채원

Vol.20201219d | 노승표展 / ROHSEUNGPYO / 盧昇杓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