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완결) (Complete) of (Each) (Each)

박준식展 / PARKJUNSIK / 朴俊植 / painting   2021_0313 ▶ 2021_0408 / 일,공휴일 휴관

박준식_러시안 룰렛을 하던 일탈자는 스스로 속죄하듯이 죽음을 택한다_캔버스에 혼합재료_53×40.9cm_202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박준식 인스타그램으로 갑니다.

박준식 그라폴리오_grafolio.naver.com/create_sik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오!재미동_(사)서울영상위원회_서울시

관람시간 / 11:00am~07:55pm / 일,공휴일 휴관

충무로영상센터 오!재미동 갤러리 미술동네 OHZEMIDONG GALLERY 서울 중구 퇴계로 지하 199 충무로역사내 Tel. +82.(0)2.777.0421 www.ohzemidong.co.kr

박준식의 회화라는 노동의 댓가 ● 박준식에게 그림 그리는 것은 온전한 의미에서의 노동이다. 흔히 노동이라고 하면 지긋지긋한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원래 노동은 자신을 실현하는 활동이다. 사람은 노동 하면서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고, 노동을 통해 능력을 신장시킨다. 그러나 이런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노동의 결과물은 자기 손을 벗어나서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고, 능력이 신장되기는 커녕 몸과 마음이 병들게 된다. 그래서 소외된 노동이란 말들을 하는 것이다. 즉 노동을 통한 자기실현의 기회를 박탈 당하기 때문에 소외된 노동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굴욕을 견디며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소외된 노동에 자신을 바친다.

박준식_연탄불이 타기 전에 죽거나 또는 성공하거나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오일파스텔_24.8×20.9cm_2020

박준식의 예술노동은 그 반대다. 그는 온전히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는 반복해서 그리고 그 위에 덧그리고 하여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 그림이 무엇을 표상하고 있고 무엇을 뜻하는지를 따지기 전에 그가 그림 앞에서 보낸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에 그의 그림 노동도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캔버스 앞에서 무작정 시간을 보내며 무언가를 그린다고 해서 소중한 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예술의 특성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것은 자기가 한 것을 또 다른 자아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성찰하는 시간이다.

박준식_통조림 2021_캔버스에 혼합재료_53×40.9cm_2021

밥아저씨의 그림과 화가의 그림이 다른 결정적인 이유는 전자는 아무 생각 없이 기능적으로 붓을 놀려서 빠른 시간 안에 그림 같이 보이는 것을 만들어내고 후자는 붓질 한 번 할 때 마다 과연 적절한 것인지, 그 다음 붓질은 어디에 어떤 형태로 해야 할지 생각하고 고민하기 때문이다. 한 번의 붓질은 그 전의 붓질에 대한 성찰이고 하나의 그림은 그 전의 그림에 대한 성찰이다. 그래서 예술가가 그린 그림에는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물감은 그냥 발라지는 것이 아니라 물감이 구현하게 될 재현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깊은 고민 속에 발라진다. 그래서 화가의 붓터치는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림에 대한 생각과 고민은 머리 속으로만 하는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손과 몸에까지 전달되어 물질적으로 실현된다. 그림 그린다는 행위는 머리 속에서부터 손끝과 신체의 모든 부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동원되는 총체적인 노동이다.

박준식_간판 밖으로_캔버스에 오일파스텔_48×39.4cm_2021

그림의 주제와 내용, 내러티브는 모두 그 노동 속에 녹아들어 가서 캔버스에 스며 있을 때 비로소 그림화된다. 나는 박준식이 학교 다닐 때 항상 복도 한 구석에 캔버스를 세워놓고 그림 그리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에 그가 어떤 노동을 하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끊임 없이 자기를 투여하여 그림을 실현하는 행위였다. 그림이 실현되가는 과정에서 자신도 실현됐다. 박준식은 농부가 꾸준히 매일 밭을 갈 듯이 그림을 그린다. 그의 그림은 그런 쌓임의 결과다.

박준식_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삶에 관하여_ 캔버스에 혼합재료_52.2×38.9cm_2021

사실 그의 그림에서는 표제가 아주 강한데, 그런 말들이 반복되는 그리기 노동을 통해 물감과 캔버스로 녹아들지 않는다면 겉도는 결과만 나올 것이다. 표제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을 분류해 보면 서술적인 것들,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것들, 시적인 것들, 풍자적인 것들, 즉물적인 것들 등이다. 작가의 작업을 평론가가 멋대로 분류하는 것은 좋은 습관은 아니지만 박준식이 그만큼 표제가 되는 언어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면 그 수 밖에 없다.

박준식_아무도 모르는 심연의 찌꺼기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잉크_45.5×53cm_2019

서술적 제목은 작품의 제목과 그림에 묘사된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다. '오직 직구 승부!!!', '러시안 룰렛을 하던 일탈자는 스스로 속죄하듯이 죽음을 택한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삶에 관하여' 같은 표제가 붙은 그림들은 표제에 묘사된 상황을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 서술이라고는 하지만 언어와 캔버스에 발라진 물감은 완전히 다른 표상의 층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 경우 서술이라기 보다는 그림 속에 묘사된 내용이 표제와 부분적으로 일치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박준식_뻐꾸기 둥지에서의 삶을 마친 뒤에_ 캔버스에 혼합재료_72.7×53cm_2021

시적인 제목은 제목 자체도 시적이지만 그림 속에 묘사된 내용도 시적이며, 표제와 그림은 살짝 어긋난 상태에서 만난다. '어느 미성년의 마지막 수업' 같은 제목이 그 경우다. 이 경우 그림은 '어느 미성년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언어의 일부 혹은 다른 층위를 가리키고 있어서 그 비거나 어긋난 부분에 대해 보는 이로 하여금 풍부한 상상을 하게 해준다. 상징적, 은유적 제목은 제목 자체가 다른 층위의 의미를 지칭하는 경우다. 이 경우도 시적인 제목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해준다. '난 곡예사가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심연의 찌꺼기', '뻐꾸기 둥지에서의 삶을 마친 뒤에', '연탄불이 타기 전에 죽거나 또는 성공하거나' 같은 것이 그것들이다. 이 경우 제목 만으로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해준다.

박준식_난 곡예사가 아니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잉크_41.1×26cm_2019

'난 곡예사가 아니다'의 경우 각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일매일의 위기와 스트레스를 곡예하듯이 간신히 버텨내야 하는 사회인들의 상황을 지칭한다고 볼 수도 있고, 카프카의 소설 『단식광대』가 단식하는 재주 밖에 없는 광대를 빗대어 인간의 절망적인 실존에 대해 말하고 있듯이 곡예사라는 독특한 인간유형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기회라고 볼 수도 있다. 풍자적인 제목들도 무척 흥미롭다. '21세기 이상적인 현대인', '개나 소나 "내가 예수다"라고 떠드는 미친 세상'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런 제목은 말 할 것도 없이 세상이나 인간을 풍자하는 것들이다.

박준식_보다 가속되어 가는 가혹한 미래에 나부끼며_ 캔버스에 혼합재료_41.6×52.9cm_2021

그러나 박준식이 붙인 제목들 중에서 내가 가장 흥미로워 하는 것은 즉물적인 것들이다. '통조림', '고기와 지혜를 위하여', '비오는 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걸어갔다', '틀니 사냥', '상처입은 비닐과 그의 뼈' 같은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든 제목들이 그림으로 하여금 말 하게 하거나 설명하는 등 언어적 층위가 두드러진다면 즉물적인 제목들은 물질이나 사물 그 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사실 말하게 한다기 보다는 사물의 존재감 자체를 들이밀 뿐이다. 위에 예로 든 현란한 제목의 유형들이 언어와 그림의 관계를 다채롭게 엮어내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들을 탐색하게 한다면, 즉물적인 제목들은 사물로 하여금 말 없이 말하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매력이 보는 이로 하여금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해준다.

박준식_아즈라엘을 환대하며_캔버스에 혼합재료_53.3×40.2cm_2021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수많은 붓질의 노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오늘날 무엇이든 터치 몇 번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이렇게 많은 붓터치를 가하여 그림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분명히 시대를 거스르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거짓된 과학기술과 마케팅술이 거짓된 미래를 약속하면서 인간이 이제껏 쌓아온 의미 있는 성과들을 낡고 못 쓰는 것처럼 치부해버리는 세상에서 캔버스에 무수한 붓자국을 남기는 행위는 그 자체로 귀한 일이다. ● 박준식의 그림에 나타나는 내용들은 전부 그 무수한 붓질들에 녹아 있다. 따라서 설사 표제가 분명하고 쉬워 보인다고 해도 그 수많은 붓질들의 의미를 모두 해석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박준식의 붓질들은 계속해서 탐색하고 해석해내야 하는 깊은 동굴 같은 것이다. 그 속의 샘은 결코 마르지 않을 것이다. ■ 이영준

Vol.20210313b | 박준식展 / PARKJUNSIK / 朴俊植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