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dowland

제8회 아마도전시기획상展   2021_0312 ▶ 2021_0408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강동주_권현빈_김대환_김하나_오묘초_최하늘

기획 / 추성아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마도예술공간 AMADO ART SPACE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4길 8(한남동 683-31번지) Tel. +82.(0)2.790.1178 amadoart.org

Shadowland: 매체의 속성, 만듦새, 그리고 태도의 번안들 ● 이따금씩 밋밋해진 평면과 덩어리라는 매체의 관계가 서먹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두 세계의 규칙으로 유영하는 궤도는 서로 다른 축을 따라 평행하게 움직일 것 같지만 운명처럼 만나기도 한다. 물리적 형태의 반대 축에 있는 그림자처럼 공유된 것을 통해 동일한 궤적을 공유한다. 여기서 '미디엄'이라 불리는 매체는 미술사적 시·공간의 좌표에서 풍화와 침식의 영향으로 어딘가 움푹 파인 모양이 되었다. 예술 영역을 확보하고 지탱하는 '지지체'와 공간이라는 틀에는 시간과 장소의 그을음 같은 것이 묻어 있는데, 우리는 때때로 당연하기 때문에 이를 지나치기도 한다. 그렇지만 불쑥 나타난 서먹하게 느껴진 순간을 외면하지 않고 매체의 고유한 역할과 본성을 추적해야 한다. "매체는 기억"이라고 주장한 로절린드 크라우스(Rosalind E. Krauss, 1941-)는 매체의 고유한 정체성을 미술사적 의미에서 구현하고 보존하기 위해 '올드 미디엄(old medium)'을 절대적으로 고수하면서 기억을 돕는 새로운 규칙을 찾길 제안한다. 그러나 구전(舊傳)처럼 되어버린 규칙들은 올드 미디엄이 지닌 태도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이들에게 그림자처럼 느닷없이 나타나 자아를 인식하게 만들고, 줄기차게 끌고 다니다가 어딘가에 휩쓸리게도 한다. 어쩌면 매체가 갖고 있는 속성과 형식은, 타 영역에서 무차별적으로 참조되어 미학적 매체가 무의미해진 듯한 시대에 놓여,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기 위한 새로운 규칙으로 무대 위 그림자 역할을 맡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 전시 『Shadowland』는 드로잉, 회화, 조각이 매체로서 지닌 자립성을 그 재료와 형식의 조건에 의해 피동에서 능동으로, 종속에서 주도적으로 끌어당기다가 다시 귀속되는 그림자의 속성으로서 풀어내고, 아마도예술공간을 고립된 섬이자 축소된 영토로 가정하여 매체와 그림자의 무대로 만든다. 루이스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가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을 참조해 밝힌 "주체와 자신의 실재(the Real) 존재 조건과의 관계에 대한 상상적 재현"은 고유한 매체성에 대한 독립적 상상이 형식 탐구와 실재하는 방식에 의해 언제나 왜곡된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예술가가 통제하는 매체의 영역에서 상상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에는 스스로의 매체에 대한 욕망과 공허가 투영될 수 밖에 없다. 사전적으로 '그림자'는 물체가 빛을 가려서 그 뒷면에 드리워지는 그늘이고, 그림자로서 표면에 투사되는 상(狀)을 통해 물체는 떠내어지고(cast off) 함께 포개어진다. 다시 말해 모든 대상은 그림자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본래적 결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Shadowland』는 투사를 통해 인식되는 그림자를 '지지체(support)'라는 다양한 형태와 조건으로 바라본다. 이는 회화 혹은 조각이 스스로를 지탱하는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림자 앞을 지키는 페르소나일 수도 있다고 해석하며, 동시에 외부에서 필요한 적응 수단이자 떼어 놓을 수 없는 분신과 같은 그림자의 여러 얼굴을 통해 매체의 조건과 규칙을 새로이 찾으려 한다. ● 고유명사로 지칭한 '섀도우랜드(Shadowland)'는 매체의 평면성이 입체화되고, 입체가 평면화되는 상호적인 경계적 공간에서 매체 본질의 '뒤집기'를 시도한다. 재료의 조건에 필연적으로 달라붙고, 그로부터 탈락되고, 동기화되는 그림자는 매체 형식의 본질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연극적 수단과 장치로서의 '지지대(prop)'이기도 하다. 장뤼크 낭시(Jean-Luc Nancy, 1940-)가 "형상과 비(非)형상을, 무대와 비(非)무대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을 구분하고 그 복합성을 인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듯이, 매체의 속성과 조건을 물리적 공간으로 제한하지 않고, '물러섬(re-trait)'의 방식을 통해 주목한다. 우리는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비슷하면서도 낯선 모습을 잠시 물러나 바라보며 윤곽을 현재화해 볼 수 있다. 지금의 회화성과 조각성은 전통적 매체 형식의 범주 위에서 거리를 없앨 수 없는 것처럼 끊임없이 접촉하고, 사라지고, 다시 접촉하고, 사라지며 간격을 만들어내는 반복 속에 있다. 이 전시는 공간을 고립된 '섬'이라는 모양새로 상정했을 때, 흰 벽의 지배 미학을 통해 경험하는 중립의 효과와 상반되는 공간적 요소들에서 매체적 속성이 새롭게 갱신될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크라우스처럼 매체를 재료의 물성으로서만 이해하지 않고, 재료적 조건에서 도출해 스스로를 다시 규정하는 '재귀적 규칙(recursive rules)'을 매체의 자립성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회색지대에서 전통적인 미적 매체의 뒤섞임과 양가적 측면에 주목한 그 유효성을 상실하지 않고, 매체의 속성과 만듦새, 그리고 매체적 태도의 원초적이고 자급자족적인 동시대 매체 조건은 어떤 번안의 결과물일지 상상해보자.

강동주_장마 (2020)_종이_40×48.5cm_2021
강동주_빗물 드로잉 #8 (2020),#9 (2020),#10 (2020),#11 (2020)_ 종이에 연필_76×56cm×4_2021

강동주의 '그리기'는 매체의 물리적 속성을 궁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기본에 충실한다. 가장 기초적인 매체적 태도는 흑연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드로잉의 상투적 형식에서 시작된다. 「빗물드로잉#1-15 (2020)(Rain Drawing #1-15 (2020)」(2021)시리즈는 비가 내리다 멈추기를 반복한, 정체된 2020년 장마의 기억을 신체–종이–관찰–그리기의 흐름을 따라 추적한다. 종이의 표면 위에 '장마'라는 비물질적이면서 파편화된 시간과 기후적 상황을 수집하고 서술하는 단계는, 작가가 통제 가능한 신체 반경과 그 움직임에 의해 종이의 크기를 결정하는 단계로 전개되고, 땅바닥에서 수행했던 「땅드로잉(Ground Drawing)」, 2015과 아스팔트드로잉(Asphalt Drawing)」(2013)을 허공으로 옮겨온다. 비가 오던 날, 창 밖에 종이를 내밀고 있을 때의 시·공간은 물기를 머금고 축 처진 종이의 형태 및 표면의 굴곡으로 기록되며 몸이 외부 환경에 영향을 주고 환경이 되는 반작용에 의해 종이의 상태에 의존하게 된다. 몸을 필연적인 지지체로 개입시킨 과정은 한번 변형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매체의 속성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입장을 취한다. 작가는 고립된 과거라는 표면의 굴곡을 따라 한시적인 이미지를 역추적해 그리기의 행위 이전에 재현과 기록의 당위성을 위한 기본 요소에 주목한다. 빗물 드로잉 시리즈는 변형된 물성의 형상과 표면을 떠내지 않고, '상태'를 개별적으로 관찰하며 이미지를 새로운 화면 위에 독해한다. 이같은 독해는 재현이라는 당위성을 모호하게 하여 형태의 축소된 다른 모양이자 지지체인 '선'이 곧 '면'이 되는 관찰에 주목한다. 분산된 시간의 맥락을 따라 공간에 흩어진 드로잉의 경계는 또 하나의 '배경'이 되어 목적을 실행하기 위한 동작과 파생된 가능성의 번안들로 기능한다.

권현빈_Moonbeam(front)_석회석_150×63×3cm×2_2021
권현빈_Moonbeam(back)_한지에 먹_150×210cm_2021

권현빈의 돌 조각과 탁본은 조각적 물성을 위한 시간과 매체, 신체의 조건 이면에 필연적으로 그리기의 형식이 그림자처럼 동등하게 따라온다. 루시 리파드(Lucy R. Lippard, 1937-)가 "현대미술은 고대의 이미지에서 영감과 시각적 형식을 따왔다"고 했듯이, 권현빈은 완전히 다른 형식으로 해체시킬 수 없는 돌이라는 재료 자체에 내재한 어떤 장소와 시간에 대한 감각을 복원한다. 그 의미가 독해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매력은 작가에게 오히려 오랜 세월 살아남아 불멸성을 시사하며, 문화적 괴리 가운데에서 매체에 대한 새로운 규칙으로 작동되게 한다. 그의 규칙은 표면 위에 새김, 마찰, 끌기, 쪼개기의 방식을 통해 조각이 점점 평면적이고 작아진다는 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미 세팅된 조각의 물성과 조건의 한계 안에서 경계의 자유를 탐구한다. 「Moonbeam(front)」(2021)은 직관적으로 물질 또는 이미지로서 물성이 촉발한 힘을 감지한 결과물이고, 흙 그 자체로 만들어진 커다란 골조로서 자기 패턴을 갖고 있다. 작가는 구름을, 빛을, 수면을, 시간의 형태를 이미지의 지지체 삼아 시간의 경험을 드로잉의 방식으로 제안한다. 그의 형태에 대한 해결책은 고정되지 않은 돌 조각을 다시 땅의 표면에 내려 놓는 것이다. 스트로나크 선돌(Stronach Stone)의 나선이 파편적으로 조각된 거석 문화를 표방한 기다란 돌 조각들은 바닥과 허공을 이어주는 역할보다 그림자로 인식될 수 있도록 바닥 위에 펼쳐진다. 달 표면의 앞뒤를 표방하는 돌의 표면 위에 한지를 올려 놓고 뭉친 면사포에 먹을 찍어 꾹꾹 누른 「Moonbeam (back)」(2021)은 물감을 이용한 소조적 발상이면서 신체–재료의 속성–조각 그 자체의 유대, 그리고 반복적 행동과 형상이 감지되는 작가의 또 다른 의식 같은 것이다. 이처럼 촉각과 기억의 구조를 덜어내고 다시 쌓는 태도는 달의 뒷면이라 할 수 있는 탁본 드로잉을 끝으로 돌의 성질과 덩어리와 표면을 향한 이미지를 '추측(speculation)'하면서 지질학적 시간을 압축한다. 흙과 돌을 모슬린을 댄 커다란 종이 위에 모아 두들기고, 문지르고, 스며들게 한 미셸 스튜어트(Michelle Stuart, 1933-)의 달에 관한 드로잉-구조물과 유사한 권현빈의 예술적 의도는 물성의 덩어리와 윤곽을 위해 매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에 내재한 기술적 기능을 간파하고 재조직함으로써 작가의 의도가 채택한 매체의 본질 내에서 최대한 공명하게끔 한다.

김대환_1.아파렌시스와 미소 핑-퐁_초경석고_ 7.7×15.3×1cm×34_2021
김대환_A.아파렌시스와 미소 핑-퐁_알루미늄_ 7.7×15.3×0.01cm×34_2021_부분

조각을 매체로 "휴먼의 만듦새를 살피는" 김대환은 인간과 닮은 것들이 그들과 닮은 것들을 만드는 행위에서 파생된 만들기의 여러 지점과 맥락에 주목한다.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만들기'는, 우리가 마음 속에 기념의 대상을 각인하고 기록하는 것처럼, 조각에서 '떠내는' 주조(casting)의 방식과 같다. 손이라는 신체적 도구에서 시작된 조각에 대한 작가의 관성은, 신체에 대해 물질적 애착을 드러내기보다 '나'라는 대상을 운영하기 위해 인류의 원생에서 나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소재로서 기원적 인류의 최초였던 아파렌시스 '루시(Lucy)'를 선택한다. 한때 최초의 타이틀로 소비되었던 루시는 긴 시간 지구에 의해 화석화된 뼛조각을 통해 사연을 추측하고, 추론하며, 무대화하는 고고학적 태도와 더불어, 조각적으로 원형을 떠내는 형식적 제스처와 유사하다. 흙으로 빚은 매체라는 고대적(archaic) 취향으로 조각을 대하는 작가는 여러 각도에서 연출된 루시의 표정에 주목하고, 대상을 인식하는 포토그래메트리(Photogrammetry) 개념을 작업의 근간으로 가져온다. 정지된 대상을 다각도에서 포착한 이미지 데이터를 조각적으로 구현하는 기술적 지지체는 역설적으로 이미지 데이터와 입체화된 최종 데이터 모두가 캐스팅 방식을 내포하는 '종합적 적용성(total availability)'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한다. 결과적으로 작가가 루시를 '떠내는' 상상의 축에 습작으로 묘사한 34개의 알루미늄 판 「A. 아파렌시스와 미소 핑-퐁(Smile ping-pong with A. Afarensis)」(2021)과 이를 다시 떠낸 초경석고부조 「1. 아파렌시스와 미소 핑-퐁(Smile ping-pong with 1. Afarensis)」(2021)은 포토그래메트리 개념으로 동선을 구축함으로써 매체를 신체와 의식의 확장으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화석화된 정적인 사연과 시간을 추측한 여러 단계의 원형은 무색해지고, 그림자처럼 다양한 가능성의 좌표들이 발생하면서 실시간으로 지각된 매체의 개념들이 동일선상에 놓이게 된다.

김하나_아름다운 직업 14-1_캔버스에 유채_170×170cm_2021 김하나_아름다운 직업 14-2_캔버스에 유채_13×280×6.6cm_2021
김하나_그라운드 3_캔버스에 유채, 오일파스텔_181.8×227.3cm_2021

장소를 시간의 거리감에 대한 공간의 은유로서 지각하는 김하나는 자신이 딛고 적응해야 할 낯선 곳의 가장자리를 지지대로 인식하며 회화의 권한 영역으로 끌고 들어온다. 자신이 가장 가까이 체화할 수 있는 프레임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다시 회화적 프레임 안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경험적인 시·공간이 뒷받침되어야 화면 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처럼,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1934-)이 지적한 "일상의 이미지가 침투하는 상태"는 그린버그식 예술적 자율성에서 벗어난 현재의 회화적 의미를 지탱해준다. 「아름다운 직업(Beau Travail)」(2021)과 「그라운드(Ground)」(2021) 시리즈는 작업실 주변을 배회했던 걸음의 지지대인 땅을 인지하는 표면과 구조들이다. 이들은 회화를 구성하고 있던 화면의 가장자리와 표면, 물성을 신체의 언어로 수용해 과정을 구축하기 위한 여러 단계를 통과하는 회화적 지지체의 모습들을 해체하고 직조한다. 작가가 평면성과 재료를 독립적인 영역으로 지시하려는 시도는 땅의 모습을 한 겹씩 다지는 것처럼, 조각적 회화와 회화적 조각의 절묘한 경계를 제시한다. 그는 하늘, 땅, 빙하, 해수면, 빛과 같은 비물질적인 덩어리와 선의 부분과 전체, 그리고 주변을 매체의 물성을 통해 직관적으로 다룸으로써 화면의 앞과 뒤를 적극적으로 보여 준다. 여기서 발생하는 매체의 역할과 위치의 전복은 가장 밑에 깔려있는 것이 뒤인지, 뒤가 앞인지 회화의 형식에서 바라봤던 기준점이 모호해지면서 순수 형식을 넘어선 원시적 관계와 새로운 규칙으로 전유된다. 이러한 태도는 회화적 매체가 갖는 조각성과 회화적 경계의 확장성, 그리고 작가에게 매 순간 다르게 주어지는 공간의 구조에 따라 회화의 프레임을 변형시켜 매체의 내적 영역보다 외적 영역이 그림자 역할을 해내며 발생하는 규칙에 의해 회화적 선택을 결정하게끔 한다.

오묘초_벗어나고 거스르는_나무, 스틸_가변설치_2021 오묘초_구멍(특히 신체의)_나무, 스테인리스 바퀴_ 230×130×4cm_2021
오묘초_2/4_나무_103×70×4cm_2021 오묘초_1/3_나무, 스틸_103×100×4cm_2021 오묘초_구멍(특히 신체의)_나무, 스테인리스 바퀴_230×130×4cm_2021

오묘초는 표면을 재단하는 원형 틀에서 조형적·조각적 발견을 탐구해 완전히 다른 구조체를 독해하고 건축적으로 확장한다. 종이를 재단하기 위해 제작된 판형 '토마손(도무송, トムソン加工, Thomson)'은 가장 평면적인 것을 제작하기 위한 원형이자 잔여물이다. 작가에게 토마손 판의 구멍들은 어떤 논리에 의해 미학적 혹은 형식적으로 매체의 지지체로서 화면 위에 풀어야 할 숙제와 같다. 한번 사용하고 버려진, 일회성의 제작된 기성품 조각은 패턴이 있는 납작한 부조판과 유사해 종이 위에 형상을 납작하게 떠내는 캐스팅 기법을 연상케 한다. 반대로 이미 어딘가로부터 주조된 조각이기도 하다. 이처럼 평면인지, 조각인지, 떠내기 위한 원형일지, 떠내어진 복제품일지 그 정체성과 기능을 모호하게 하는 토마손은 이중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벗어나고거스르는(deviate, against)」(2021)은 도무송의 원판 위에 박힌 칼날을 해체하고, 프레임의 구멍을 채우고, 배경이 되는 나무판 표면을 사포로 매끈하게 갈고 닦는 꽤나 지난한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작가의 세심한 관찰과 탐구에 의해 한 겹, 두 겹 장막을 쳐가면서 사각형의 작은 세계를 구성하게 된 지지체들은 도무송 본연의 모습을 숨기고 완전히 새로운 부조 조각으로 구현된다. 흩어지면서 모이는 이 구조체는 거대한 벽 「구멍(특히 신체의)(Ori·fice)」(2021)으로 확장되어 토마손 판의 뒷면을 전면적으로 구사한다. 이와 같은 평면-조각에서 건축 조각으로의 확장은 건축물에서 개보수를 하는 과정에서 남겨진 잔여물이 기능을 상실했을 때 조각의 자아로 전복되는 현상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프레임을 숨기고 동시에 노출시키며 프레임 안에 속박된 형태를 장악함으로써 아카세가와 겐페이(赤瀬川 原平, 1937-2014)가 언급한 '초예술 토마손'을 실천한다. 초예술 토마손은 누군가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우리 앞에 나타난 새로운 선들이 공간으로 확장되어 마치 그 풍경에 놓인 모서리, 바닥, 창문의 그리드의 일부에서 발췌된 듯 구조적이고 건축적인 조각의 이면으로 확장된다.

최하늘_그래_차라리 그렇게 감정에 호소해!_ 에코보드_220×140×110cm_2020 최하늘_문제를 삼지 않으면 불안해?_ 에코보드_200×70×100cm_2020
최하늘_안아 줘: 넌 완벽한 사람이고_스티로폼_ 180×45×60cm_2020 최하늘_안아 줄게: 난 너에게 맞춰진 사람이야_ 스티로폼_190×70×110cm_2020

그림자는 드러나지 않는 열등한 부분, 그래서 감추어진 측면과 같아 본래적인 결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최하늘은 돌출된 부분과 파인 부분의 퍼즐을 끼워 맞추듯이, 원형과 부산물이 조각가의 손에 기억되어 과정에서 불필요했던 버려진 것들을 재수용하는 조각적 태도에 주목한다. 초기에 진행했던 「일필휘지조각_큰 풍경」(2015)의 방법론에서 착안한 연인조각은 풍경이 아닌 절대지지체이자 완전체가 될 수 있는 동등한 조각의 상태와 재료에 대한 조각가의 입장을 소환한다. 불현듯 어떤 풍경으로 다가왔던 절삭한 '부산물'들에 대한 작가의 애착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재료에 대해 구원적 태도를 취하게 하고, 버려진 재료를 조각과 동등한 관계로 바라보는 위치에서 출발하게끔 한다. 예컨대, 르네상스 조각에서에서 대상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드로잉에서부터 독창적인 교량으로 깎아내는 방식은 조각이라는 것을 구원하기 위한 태도의 일부였다. 조각사(史)와 동행해왔던 작가는 조각의 위상에 대한 구원과 더불어, 쓰레기가 된 부산물까지 구원하며 오늘의 조각을 갱신하려 한다. 「안아줘: 넌 완벽한 사람이고(A perfect Bottom for me)」(2020), 「안아줄게: 난 너에게 맞춰진 사람이야(A perfect Top for you)」, (2020)는모체가되는하나의물성에서나와두개의대상으로번식해짝을이룬다. 마주 보는 두 개의 전신상은 태초에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빚었듯이, 조각적으로 선행된 덩어리에서 탈각된 부산물을 모아 짝을 이루는 유사 조각으로 탄생한다. 제목에서 "안아 줘"와 "안아 줄게"는, 서로에게 그림자이면서 분신이 되어주고 버려진 것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조각의 개체가 서로를 지지체로 삼듯이 완벽한 배경이 된다. 이처럼 부산물 조각에 힘을 실어주는 작가의 태도는 원재료의 양감과 평면적인 두 개의 상반된 정체성을 노출시키므로 쌓고 구축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매체의 물리적인 속성을 받아들이기 전에 보유하고 있던 구조를 직관적으로 추적해 나가는 조각의 과정은 그 자체로서 형식 안에 그림자가 되어, 작가의 의지보다 주어진 조건에 따라 재료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작가의 사려 싶은 애정은 '연인'이라는 관계의 연장선으로 하나의 재료 즉, 하나의 성(性)에서 발생한 둘을 '기억하는' 기념비적인 조각의 태도를 관통한다. 다소 경직된 「그래, 차라리 그렇게 감정에 호소해!(Stop being so stubborn)」(2020)와 「문제를 삼지 않으면 불안해?(I'm gonna punch you in your face)」(2020)는 공통의 면적을 통해 새로운 구조체를 분리하면서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날이 선 의구심의 감정을 공유한다. 덩어리로부터 덜어내며 다시 귀속되는 은밀한 하얀 스티로폼의 조각적 속성과 달리, 검정 나무 조각은 평면성을 보유한 면을 잘라내면서 구축한 교차점들로 생긴 드로잉의 선적인 지점이 구조 전체를 지탱한다. 이처럼 흑과 백의 상반된 두 쌍의 조각은 해체를 통해 해체를 다시 소조하고, 빈 공간들을 구조화하는 양가적인 조각의 속성을 병행한다.

Shadowland-제8회 아마도전시기획상展_아마도예술공간_2021 (사진_조준용)
Shadowland-제8회 아마도전시기획상展_아마도예술공간_2021 (사진_조준용)
Shadowland-제8회 아마도전시기획상展_아마도예술공간_2021 (사진_조준용)
Shadowland-제8회 아마도전시기획상展_아마도예술공간_2021 (사진_조준용)
Shadowland-제8회 아마도전시기획상展_아마도예술공간_2021 (사진_조준용)

전시 『Shadowland』는 매체를 그것의 내부(매체)와 외부(기술, 규칙, 조건) 모두로부터 기술하는 것이다. 반(半)그린버그적 저항의 당위성이 소진된 시대의 매체에 관한 담론은 저항의 부정성을 하나의 추진력으로 수렴하면서 예술을 공고히 하지만, 전시는 이러한 형식 이론의 회고적인 주장을 앞세우기보다 '자기번역가'로 바라본 작가의 독립적인 매체 언어에 집중한다. 『Shadowland』에서 여섯 명의 작가는 스스로 외면했던 자기 내면의 충동이나 생각을 외부 세계로 투사하려는 시도를 그림자의 속성을 빌어, 각각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지점보다 자신의 그림자가 자연스레 따라오듯이 매체의 그림자에 끌려가면서 발생하는 우연성과 조건들에 의해 생성되는 형식과 번안되는 새로운 규칙을 실천한다. 매체적 번안의 형태는 가장 기초적 단계에서 시작되어 상반된 좌표에 위치한 매체의 양가적 특성과 인간의 원초적 이미지를 각인하고, 주조하는 여러 태도, 그리고 부산물까지 구원해낸다. 매체의 본질과 형식, 태도에서 나타나는 여러 경계는 하나의 덩어리로 따라오지만 동일시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호기롭게 어느 역할을 부각시키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조건에 의해 종속되기도 하는 양날의 칼과 같다. 『Shadowland』에서 제안하는 것은 과거의 형식적 태도로 동시대의 예술 형식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라는 미학적 모순으로부터 복합적으로 축적된 규칙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일 수도 있고, 결코 특정될 수 없는 함몰이자 주름 같은 것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과거에 대한 향수 속에서 폐기나 수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으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마주하는 매체 탐구로서 다시금 각자의 소소한 규칙을 발견하고 더듬어 나가며 마주할 가능성의 어딘가에 있을 질문에 대한 것이다. ■ 추성아

Vol.20210314a | Shadowland-제8회 아마도전시기획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