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론

on Flora and Painting展   2021_0324 ▶ 2021_0411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21_0324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제민_허보리_신수진_이창남 김정선_이광호_이만나_한수정_이정은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_12:00pm~05:00pm / 월요일 휴관

통인화랑 TONGI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32(관훈동 16번지) 통인빌딩 B1,5층 Tel. +82.(0)2.735.9094 www.tongingallery.com

화(花)론 : 그림과 꽃 그리고 자본주의 ● 불황기에는 마르스크스주의가 인기라고 한다. 코로나로 생활경제는 최악을 갱신하는데도 나름 성실히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에게 연일 들리는 집값과 주가 폭등의 뉴스는 감당하기 힘든 상실감을 가져온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울분은 질병이 창궐중인 기형적 사회와 그 인프라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 이어진다. 150년 전 탈고한 매그넘 오퍼스 속에서 마르크스는 우리를 비웃는다.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 조차도 평생 스스로의 부르주아적 정신성을 탈피하지 못한 채 삶을 마무리했다. ● 『자본론 1』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노동이 창출하는 가치가 지본주의를 지탱한다고 논파한다. 원료(raw material)를 공장에서 가공하여 상품으로 만들어 팔 때, 생산 라인에서 노동자의 노동력과 시간을 투입함으로써 비로소 이전에는 없던 유용성과 수요의 가능성이 만들어져 '사용가치' 나 '교환가치'가 발생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노동을 통해 원료의 가격을 넘어서는 '잉여가치 surplus value'가 생산되고, 이 잉여가치의 축적이 자본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품의 가치를 결정할 때에는 대부분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 분 이상으로 일한 노동시간이 실질적 잉여가치로 환산이 되는 직설적 방식이 적용된다.1) ● 미술작품을 생각해 본다. 구조적으로는 미술작품 역시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과정(labor-process)에 견주어 볼 수 있다. 회화의 예를 들자면, 작가들은 물감, 캔버스, 용매 등 원료를 가지고 자신의 시간과 기술, 노력을 쏟아 부어 작품을 만들어낸다. 작품을 '하'거나 '그리는' 것이다. 미술작품을 마르크스적 '상품'으로 대입하여 생각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런데 여기서 잉여가치, 즉 작품의 가치를 가늠하고자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일반상품의 경우 원료에 노동력과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잉여가치가 생산되는 직설적인 가치의 증식을 예측할 수 있는 반면, 미술작품의 경우 이 예를 따를 수는 없다. 미술작품이 생성되는 과정에 투입되는 '노동력' 속에는 공산품을 생산하는 시간이나 기술, 숙련도와는 많이 다른 추상적 역량들이 응축되어 있으며, 이것이 잉여가치의 형성을 좌우하면서 '사용가치' 나 '교환가치'로 정의될 수 없는 그 너머의 궁극적 가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 가치들은 단순한 환금가치의 공식을 넘어 우리의 가슴과 오감, 두뇌 속에 담을 수 있고 느끼고 감사할 수 있는 초월적인 보상들이다. ● 이번 전시에 모인 작품들과 이에 담긴 작가들의 '노동'의 성격을 생각해본다. 이 작가들의 노동의 근간에는 적게 어림하더라도 20년, 대부분 30년 이상의 전문적인 화가로서의 기량과 경험이 담겨있다. 단순히 '전문적'이란 단어로 수식하기 부족한 이유는 이들이 동세대 최고역량의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 화업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이들은 이미 최단 5년에서 10년이상의 미술교육과정을 거쳤다. 질풍노도의 10대를 하루 종일 화실에서 불편한 의자에 걸터 앉아 허리를 세우고 팔을 뻗어 죽은 로마인들의 조각을 그리며 숱한 질타와 좌절을 달게 견뎌내 온 결과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연필 한 자루로 하얀 석고상을 하얀 도화지에 옮기는 것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처럼 불가능한 작업 같지만 이들은 이 난제를 수도 없이 풀며 수 백권의 스케치북을 메꿨고 점차 이들의 연필 끝에서 나오는 선은 정확도를 넘어 생명력이나 설득력, 자신감과 지혜까지도 머금게 되었을 것이다. ● 물리적인 내공은 이들을 빚어낸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아니 세계 어디에서도 화가로 살아가는 어려움을 무엇에 비할 수 있지. 흔치 않은 선택에 대한 불안감과 소외감, 비일상적인 하루에 대한 타인들의 눈총과 포기 등 아마도 10대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을 소용돌이 치는 듯한 심리전은 화가들을 때로는 뒤흔들고 때로는 북돋우며 정신적으로 무장시켰을 법하다.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진실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들은 이집트시대 이래의 미술사를, 철학과 포스트모더니티, 그리고 색채학이나 질료에 대해 연구한다. 의사면허증이나 변호사자격증은 그들을 찾는 타인을 위한 것이지만 화가들에게 면허나 자격은 순전히 내적으로 충족되는 조건들이다. 국가고시라면 종이한장으로 귀결되지만 내적 간절함은 충족되기 어렵다. 이들이 캔버스에 임할 때 이런 조건들이 고스란히 배어나온다. 단순한 노동시간과 노동력의 공식 같은 척도로 이들의 예술작품의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까닭이다. ● 이번 전시에 모인 작품들은 모두 꽃과 자연을 표현하고 있다. 꽃은 로마시대부터 선호되던 가장오래된 회화의 소재중 하나이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도무스 등에서는2) 바닥과 벽을 꽃과 식물의 모자이크와 벽화로 장식했던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꽃그림은 동서고금 아름다움의 가장 간결한 표현이다. 르네상스에서는 꽃들은 장식의 의미를 넘어 상징과 암시의 결정체로 활용되었다. 크리스찬 전통을 이어 인물에 곁들여진 꽃들이 사랑, 순수, 절개 등 의미를 담게 되었고 플랑드르 같은 북유럽지역 정물화 속 만개한 꽃다발이나 시들어가는 봉우리들은 부패, 배신, 그리고 죽음과 교훈을 상기시키려는 메멘토 모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꽃술과 열매의 구조에 주목하면 성기나 성적 재생산, 생명의 잉태 등도 연관 지을 수 있다. 이런 역사적 조건들은 배경을 제공하는 동시에 꽃의 클리셰를 만들어내고 있다. ● 이 전시의 작가들은 꽃과 꽃그림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으나, 모든 것이 디지털 컨텐츠로 뒤덮인 이 시점에서 의식적으로 꽃이라는 화제畵題를 선택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꽃의 클리셰를 거부하고 있다. 이제 아름다움의 기준은 걸그룹이고 상징과 암시의 결정체는 에모지이지 않은가. 이들에게 꽃은 과거에 유래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흐릿한 기억의 일부이자 회화적 지속성의 구실이며 지극한 현실의 투영이다. 대리석만큼이나 영속성을 보장받는 캔버스라는 화면에 수십년의 내공을 가지고 그려낸 꽃그림은 한편으론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사실은 가장 신선한 반전의 오브제인 것이다. 벽면에 육박해가는 초대형TV 화면과 손바닥 속에 접혀 들어가는 스마트폰 화면 사이에서 벽에 걸린 예술가의 꽃그림 만이 우리 옆에 실존하는 이미지이다. 이 회화들은 우리와 이미지와의 원천적 관계를 상기시키고 화가의 눈과 손길 그리고 사상과 현재까지도 노출시키고 있다. ● 꽃그림의 소장은 하나의 경험이다. 작품이 집안으로 들어와 벽에 걸리는 순간 그 공간은 마른 물감 특유의 옅은 휘발성 향기로 채워질 것이다. 창의 위치나 조명, 벽의 구조에 따라 서서히 캔버스의 물리적 존재감이 떠오르게 될 것이며, 꽃의 이미지에로 눈이 갈 때쯤 비로소 화가의 역량은 캔버스의 존재감을 뚫고 그 자리에 각인될 것이다. 꽃의 모습은 화려하지만 애처롭고 위태로운 생명력을 표상하며 그 어떤 사진이나 영상과는 견줄 수 없는 소장가의 탁월한 안목을 지지할 것이다. 소장가들은 작품을 구입해 벽에 거는 행위를 통해 예술이라는 개념을 취득하게 된다. 소장의 행위 속에는 경제, 사회적 안정이 기반이 된 감성, 문화적 호기심과 지적 허영심이 포개어져 있다. 부인할 필요도 없이 예술의 흥망성쇠는 자본과 밀착되어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메디치라는 은행가가문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며 현대미술에서 역시 주요 미술관의 컬렉션은 굴지의 기업의 자본이 불가결하다. 마르크스의 예견처럼 자본의 운용에는 부작용이 뒤따른다. 하지만 축적된 자본만이 바라볼 수 있는 노동 너머의 가치는 일고一考의 중요성이 있다. 수많은 유한한 노동의 대가에 비해 꽃그림은 시대를 초월한 불변의 가치를 지탱할 것이다. ● 계몽주의가 300년이상 '핫' 했던 이유는 인간의 긍정적 발전가능성인 지식의 축적과 근면성실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여기에 방법을 제공했다. 농노農奴로 태어나 농노가 될 자식을 남기고 죽어가던 절망적 세계관에서 벗어난 것이다. 예술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내적 발전가능성을 자극한다. 배달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유튜브로 시간을 보내는 생활은 편리하지만 허탈할 것이다. 내 앞의 꽃그림은 나의 배를 채워주거나 웃음을 주지는 않을 지 모르지만 나를 허탈하게 방치하지 않는다. 사각형의 표면을 통해 일상을 아주 조금 초월한 곳에서 내가 생각하게 만들고, 곧이어 내가 속한 사회, 경제적 조건을 넘어선 형이상학적 고민을 추구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 잠재되어 있음을 깨닫게 할 것이다.

김정선_마지막 눈 the last snow of the season_캔버스에 유채_34×53cm_2019
김정선_지금 여기 right here right now_캔버스에 유채_150×194cm_2021

기억산업(memory industry)에 대한 기대치가 치솟고 있다. 인간의 뇌가 감당하는 기억량의 슬픈 한계를 짐작한 메모리나 클라우드 산업의 눈부신 수직성장을 보면 우리의 기억에 대한 욕심과 막상 따르지 않는 육신의 한계,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이 가져온 결과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스마트폰 속 수천장의 사진을 하루 종일 들고 다니지만 정작 우리 자신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기억하는 장면은 얼마나 될까. 김정선의 화면 속 거대하게 확대된 꽃들은 기계적 기억이 아닌 우리의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기억을 되뇌게 한다. 땅바닥에 달라 붙은 먼지 낀 잡초 사이에 애써 변명하듯 솟아오르는 노란 민들레들을 고개를 꺾고 허리를 꺾어 바라보던 그 순간 작가를 지배한 생각과 그를 스쳐간 바람, 냄새, 소리, 습도, 그리고 감정상태야 말로 민들레 그림('지금 여기에1', 2018-9)의 주인이다. 몽롱한 시각은 오히려 그 외의 감각에 대한 선명함으로 대체되면서 오랜만에 나도 허리를 수그려 팔을 뻗어서 가는 꽃대를 꺾을 때의 질깃한 저항과 진액의 냄새, 끈끈함을 느끼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줄기 사이로 장난감 구슬이 보이는데 이는 작가가 저장해둔 자신만의 기억들일 것이다. '배꽃' (2016)에서 유난히 하얀 배꽃을 휘감는 파랗고 검은 배경은 잉크를 머금은 얼음처럼 투명하지만 깊고 견고하게 냉기와 아릿한 통증을 저장하고 기억한다. 그림은 대체될 수 없는 기억매체다.

김제민_무심한 풍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90.8cm_2020
김제민_무심한풍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먹_65×90.6cm_2021

잡초가 주인공인 슬랩스틱에서 상황이 추가된 파르스(farce)로 이어지던 김제민의 식물과의 교감은 그의 허를 찌르는 유머감각과 날 선 위트, 그리고 그 이면의 건조하고 어두운 심상을 풀어내 왔다. 뿌리 채 뽑힌 잡초가 작가의 자화상인 듯 감이 오기 시작한 후로는 웃어도 되는지 고민스러울 정도의 시니시즘이 독보적이었다. 개그나 상황이 강렬하긴 했지만 일회성의 장르라면 이를 뒷받침해온 그의 필력은 서서히 빛을 내기 시작해 아마도 쭉 같이 갈 수단이자 목적이 될 것이다. 얼핏 보기는 모노톤의 낙서화 같은 최근작들은 숲이라기 보다는 계속되는 테마인 잡초나 수풀들이 무성한 숲의 언저리나 도입부 또는 공터를 화면에 빽빽하게 근거리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무심한 풍경' (2021)은 무성한 잡초밭에 서서 시야를 가리는 키 큰 풀들 너머로 아련한 수목들을 조망하듯 펼쳐지는 화면이다. 화면 상단에는 옅은 수묵화 같이 농담이 느껴지면서 서정성을 풍기는 영역이 있는가 하면 바로 앞 중심부에는 작가 특유의 만화와 정밀묘사 사이정도 될 캐리커쳐적 선들이 돋보인다. 화법의 차이에 혼란을 느낄 수 있겠지만 혼돈 속에서도 이질감은 없다. 십 수년을 식물을 관찰하고 그려온 여유가 만들어낸 회화적 기술이다. 물감과 먹이 엉킨 한 켠에는 제법 명암이 드리워져서 기존의 드로잉에서는 무관하던 회화적 풍부함을 느끼게 한다. 처음으로 그의 화면에서 공간이 시작된다.

신수진_On the Verge_캔버스에 혼합재료_140×145cm_2021
신수진_Yellow Breeze_캔버스에 혼합재료_100×58cm_2020

모든 생명체의 기본 전제는 재생산과 확산이다. 인간사회는 복잡해져서 이번 생이 마지막인양 욕망과 희로애락에 휘둘리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생물학적 사명을 망각하기 쉽다. 그에 비해 동식물의 삶은 심플한 만큼 목표가 뚜렷해서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일에 충실하다. 모래알 만한 꽃씨 하나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꽃잎이 솟은 다음 수백개의 씨앗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이번 생은 잘 산 것이다. 생산과 반복, 이를 통한 지속성이 자연의 핵심이라면 신수진이 추구하는 이미지는 이런 자연의 근원적 힘과 맞닿아 있다. 날카로운 집중력을 유지하면서 연필과 붓, 니들을 쉬지 않고 움직이는 행위를 통해 그 어느 씨앗에도 지지 않을 만큼의 수많은 꽃잎과 생의 단위들을 정연하게 생산한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연 속 작은 타원의 존재들을 재현하는 작가의 작업은 자연이 의도한 것처럼 끝이 없고 멈춰질 수 없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무한한 반복을 통해 결과를 집적해 나가는 데서만 얻을 수 있는 도덕적 만족감마저 느끼게 한다. 작업의 과정은 더 없이 현실적이지만 그 결과는 환영적이다. 한 곳에 중첩되거나 때로는 확산되면서 유기체적 가능성을 내포한 이미지들은 열정에 대한 감탄과 함께 작은 숭고를 불러일으킨다.

이광호_Untitled 1303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20
이광호_Untitled 4677_캔버스에 유채_140×130cm_2020

이광호의 캔버스를 마주하며 직시하고 서기가 머뭇거려진다면 그건 아마도 내가 정면에 서자마자 그의 화면 속 공기가 나의 공간으로 연결되어 버릴 것만 같은 현실감 때문일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이 공간과 저 평면 속 공간이, 분명 평면인데도 불구하고, 얼핏 동질적으로 느껴지면서 조금은 초현실적으로 거대 선인장의 존재감에 나의 감각이 압도당할 뻔한다. 이미지와 나의 감각, 시각과의 줄다리기 속에서 자꾸만 이미지의 설득력에 이끌려가려는 유혹에 휘말리는 것이다. 상상이 가겠지만 아무리 뛰어난 화가일지라도 공기를 그릴 수는 없다. 공기를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요소, 사물, 명암, 그림자 등 모든 부분을 탄탄하고 밀도 있게 그려 넣었을 때 비로소 그 사물이 실존의 근거를 얻게 되면서 서서히 사물 주변에 공간감, 그리스인이 말하는 에테르와 같은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마치 영원히 실을 뽑아 직물을 짜는 아라크네처럼 이광호의 붓 역시 쉴 새 없이 화면 속 공간감을 직조해 가는 것이다. 선인장 끝 섬뜩하게 앙증맞은 꽃봉우리들도 그 공간 속에서 호흡을 이어간다. 환영의 힘이다.

이만나_기둥 A Pillar_캔버스에 유채_145.5×112cm_2014
이만나_달밤 I_캔버스에 유채_97×130cm_2014

우리가 자연을 자연이라고 실감하는 것은 단편적 개체로서가 아닌 엄습하는 덩어리로 마주할 때가 아닐까. 아무리 풍성한 꽃꽂이도 또 단지내 가꿔 놓은 조경도 하나의 객관화된 단위로 다가온다면 인지가능하고 명명할 수 있는 꽃이고 관목이고 덤불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만나의 화면 속 인공적인 초록색의 테니스코트를 염탐하듯 내려다보며 울타리를 가리는 살아있는 것 같은 초록색 덩어리나, 그 뒤 포진하며 도려내어진 사각형의 코트 면적을 다시 잠식하려는 듯한 숲의 존재는 은근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지배적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또 '달밤' (2014)에서 어둠 속 어렴풋이 달빛에 비춰진 나름 당당한 모습의 건물을 그 보다 한참 위에서 굽어보며 양팔을 들고 에워싼 검은 초록빛 장벽 같은 숲은 내가 쉽게 명명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저항할 수도 없이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생명의 거대한 집합체이다. 그가 본능적으로 포착하는 도시와 공존하는 자연 또는 식물들의 혼돈과 혼돈 속에 내재된 에너지는 깊고 어두우며 무한하지만 결코 초조해 하거나 주장하지 않은 채 인간의 흥망성쇠를 방관한다. 우리는 자연을 가꾸고 보호하며 보존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자연은 가꾸어지거나 보호될 만한 만만한 대상은 아닌 것 같다.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이들은 형태를 바꾸며 반복되는 영속적인 조건에 더 가깝다.

이정은_엄마, 생일 축하해요_장지에 채색_70×97cm_2020
이정은_열매맺는 계절_장지에 채색_105×72cm_2020

그림이 그림이여야 하는 이유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면 이정은의 작품 같은 경우이다. 반들거리는 껍질을 자랑하는 탐스러운 붉은 사과 한 바구니와 한층 더 짙은 선홍빛깔의 열매를 단 남천가지. 시선이 머무르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도자기 화병과 그 표면에 수놓은 듯 그려진 그림 속 꽃그림, 그리고 화병을 받치고 있는 동서양의 화집들. 그 너머에는 뭔가에 홀린 듯 돌연 윗몸을 일으켜 세우며 경계를 시작하는 그림 같은(!) 갈색 고양이의 자태가 이 직사각형의 공간에 시간과 장소 그리고 온기를 불어넣는다. 이 모든 심미적 대상들이 각각 자신의 최고의 컨디션을 뽐내며 잘 짜여진 구도 속에서 동시에, 즉,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한 순간에 포착되는 것은 회화적 행운일 수 밖에 없다. 그림이 소중한 이유는 몇 번이라도 보고싶은 최애의 대상을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대로 화가의 눈과 손을 느끼며 음미할 수 있는 둘도 없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스크린이 접히고 말리고 하는 시대가 도래해도 화가가 한 잎 한 잎 촘촘히 그린 만개한 꽃그림을 소유하고 만끽하는 감각은 결코 대체될 수 없다. 사실적 이미지를 통해 지난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자유자재로 조합하거나 도록에 실린 국보급 도자기에 계절의 꽃을 꽂아 바라볼 수 있도록 연결하는 상상력은 비현실을 현실화하는 필력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그림을 즐길 능력을 기르는 것은 화가들의 이런 내공을 인지하는 과정이다.

이창남_A Plant_캔버스에 유채_27×27cm_2020

이창남의 회화에는 고유한, 특징적이면서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심리적 감각이 내재되어 있다. 단순히 노스텔지어나 슬픔, 또는 황홀감이 아니고 특유의 촉촉하고 우울한 복합적 감수성이다. 이런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오직 바랜 듯한 색감이나 겹친 붓자국들의 미묘한 흔들림만도, 화면의 투명함을 호소하는 흰 하이라이트 때문만도 아니다. 특징적 감각이 일관되는 것을 보면 분명 그의 내면에 잠재하는 어떤 성분에서 유래하는 것 같고, 그의 눈에 이 세상은 이런 황혼에 젖은 빛과 공기로 비춰지는게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 정도이다. 화가들은 수십년간 기술을 쌓고 고민을 누적시켜 발전한다지만, 타고난 감각은 누적의 원리가 아니라 스스로를 예민하게 지탱하며 군더더기를 에어내가는 세련洗鍊의 과정으로 지켜내어져야 한다. 재능을 갖고 태어난 화가들의 고충이다. 동양의 난초 답지 않게 활짝 여러 봉우리가 펼쳐진 모습 속에는 빛을 내다보면서도 어둠에 잠식된 가라앉을 듯한 먹먹함이 지배적이다. 지기만을 기다리는 만개한 꽃은 강렬한 죽음의 상징이다. 단지 아름답기만 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한수정_97peony_캔버스에 유채_65×80cm_2020
한수정_98peony_캔버스에 유채_65×80cm_2020

확대된 꽃과 그 주변부의 묘사를 통해 한수정은 현실과 허구의 공간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우리의 시선을 기만하다. 두 눈이 캔버스위의 '그려진' 면적을 따라가면서 환영으로 인식할 채비를 하는 것을, 칼로 도려낸 듯한 흰 빈터들이 석고의 단면처럼 차갑고 납작한 평면에서 튕겨내듯 반사한다. 꽃 이름을 단서로 시각과 지각이 연동되어 로르샤흐의 얼룩을 읽듯 이미지를 마무리 지으려 하는데 순백색 토끼나 고래? 새우? 날개를 펼친 닭? 들이 자꾸만 방해하는 것이다. 시선은 꽃의 깊은 수술과 암술사이, 꽃과 이파리 사이의 어둡고 아늑해 보이는 공간으로 다녀오고 싶은데 불편하게 유기체적 형태를 한 면적들이 눈치 없게도 이를 방해한다. 환영에 대한 고질적인 의심이며 현실과 비현실에 대한 눈감을 수 없고 그치지 않는 각성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패턴들은 고집스럽지만 너무도 솔직하다. 캔버스란 원래 그런 곳이다. 빠져들고 싶을 만큼 잘 그려진 환영이 있는가 하면 똑같은 좌표 아래에는 팔림세스트(palimpsest)처럼 항상 백지로 되돌려지는, 화가들의 원죄(Original Sin) 같은 근원적 평면성(Original Flatness)이 잠재하는 것이다.

허보리_고기리1_캔버스에 유채_130×97cm_2020
허보리_능내역1_캔버스에 유채_130×97cm_2020

오랜 미술의 역사를 생각할 때, 익숙한 회화장르에서 익숙함을 앗아가는 능력은 값진 재능이다. 아무리 포스트모던이다, 미술사에 새로운 것은 더 이상 없다, 자포자기한 듯 말해도 과거의 답습이나 심화만으로는 (대중의 사랑은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비평적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작품이기는 힘들다. 허보리의 꽃그림들은 꽃을 주제로 삼고는 있지만 '꽃그림'이라 부르기에는 진화된 새로운 지점을 찾아 나선다. '능래역 1'(2020)과 '고기리 1'(2020) 모두 지역명이 제목이지만 화면은 '흐드러지게'라고 표현하는 것을 기다리는 듯한 꽃과 이파리들로 꽉 채워져 있다. 작가의 붓질은 그러나 이들이 꽃-다움이나 줄기-스러움을 애써 인식하지 않는 것처럼 무심하거나 무던하다. 무엇보다 붓놀림의 속도감때문에 꽃그림 특유의 매만지는 듯한 애착이 배제되어 있어 상쾌하다. 굳이 꽃의 생물학적 조건이나 또는 인문학적 상징, 그로 인한 감상적 영역에 접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홀가분하면서, 내 감정의 자유를 허락하는 '의미의 공백'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회화적으로는 원근이 억제되고 공간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색감 위주의 패턴이나 추상화과정으로 단순화 될법도 한데, 화면을 종횡무진하게 달리고 뻗고 호흡하는 에너지의 기세 때문에 결국 '흐드러지게' 핀 꽃그림임이 드러난다. 새롭게 발견된 익숙하지 않은 꽃그림이 반갑다. ■ 정신영

* 각주 1) 마르크스의 표현에 따르면 C'=c+v+s, 즉, 생산물가치=불변자본(constant capital)+가변자본(variable capital)+잉여가치(surplus value). 자본론 1, 제3편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참조. p280 2) Domus Romana. 고대로마 상류층의 주거양식. 실내정원과 주택이 완비된 형태로, 벽면과 바닥에 빈틈없이 장식된 회화와 화려한 모자이크가 특징.

Vol.20210324c | 화론(on Flora and Painting)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