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s Pro Toto (以偏例全)

2021_0414 ▶ 2021_0627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영헌_김진_김현식_박종규_서민정_전경표

주최,주관 / 시안미술관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30am~05:30pm / 월요일 휴관

시안미술관 cian art museum 경북 영천시 화산면 가래실로 364 본관 1,2,3 전시실, 별관 Tel. +82.(0)54.338.9391 www.cianmuseum.org

이번 전시회의 타이틀은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라보다는 뜻을 지닌 「Pars Pro Toto(以偏例全)」이다. 전체(全體)를 대표하는 일부(一部), 혹은 부분을 비추어 전체를 안다는 뜻의 라틴어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 중진으로 자리잡아가는 김영헌ㆍ김진ㆍ김현식ㆍ박종규ㆍ서민정ㆍ전경표의 작품 세계로 한국 현대미술이 나아가는 향방을 미리 바라보려는 의도에서 기획된 전시회이다. 시안미술관 김현민 학예연구실장의 주도 아래 기획된 이번 전시는 네 개의 전시장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단상을 비춰준다. 현재 예술가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어떠한 목적이나 방향성을 상실한 채, 다원주의적 예술의 자율성을 보장받으며 주의나 이념으로부터 탈피해 자기만의 세계에 대한 관점을 다양한 매체와 실험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 주목한 것은 작가들의 새로운 실험적 담론들이다. 그리고 참신한 담론들이 제시한 예술적 형식이다. 작가들은 우리나라에서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는 중진(重鎭)이기도 하다.

박종규_~Kreuze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각 228×182.5cm_2021

박종규 작가는 시안미술관, 대구미술관, 홍콩아트바젤, 뉴욕 아모리쇼에서의 개인전으로 그동안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뉴미디어 아티스트이다. 작가는 영상ㆍ설치ㆍ조각ㆍ회화 등 각 장르를 넘나들며 각종 미디어의 속성을 탐구한다. 특히 '노이즈'라는 현상에 주목한다. 노이즈는 정확한 정보 수용을 방해하는 장애물(ob-iectum)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장애물을 넘을 때 진전(progress)이 이루어진다. 박종규는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노이즈를 최대한 확대하여 이미지를 만들고 시트지로 출력해 캔버스에 앉힌다. 시트지는 파지티브(positive)면만 살아남고 네거티브(negative)면은 제거된다. 그 위에 붓질을 하고 다시 시트지를 제거한다. 결국 살아남은 최종의 물감 층은 본질적으로 네거티브이다. 따라서 네거티브는 부정적으로 들리지만, 그리고 부정을 뜻하지만, 반대로 찬연(燦然)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빚어낸다. 박종규 작가의 새로운 회화(뉴 페인팅)는 뉴미디어와 모더니즘 회화(미니멀 페인팅)의 변증적 투쟁에서 비롯된 것이며 선악(善惡)ㆍ호오(好惡)ㆍ고저(高低) 등 우리의 이분법[Cartesian ego]과 모더니즘이 지닌 위계적 사고[vertical values]에 대한 재고를 촉구한다.

김영헌_P1662 Electornic Nostalgia_캔버스에 유채_436×582cm_2016

김영헌 작가는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민초적인 혁필화(革筆畵, Rainbow Painting)의 기법으로 가장 혁신적이고 가장 엘리트적인 전자 자기장의(electronic) 세계를 그린다. 물결이나 파장을 연상시키는 선들은 부분적 섹션을 이루고 수많은 부분 섹션들은 전체의 그림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김영헌 작가는 설치미술로 1995년 중앙미술대전 그랑프리 수상한 이래 회화와 입체미술의 연관성을 모색해왔다. 김영헌 작가는 런던, 파리, 뉴욕, 홍콩 등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 기획전시의 초대를 받고 있으며 끊임없는 자기 혁신으로 실험적인 회화를 쏟아내고 있다. 세계는 존재(being)와 무(nothingness)로 이루어져있다. 모던의 사고에서는 존재만을 한정지어 다루어왔다. 하이데거 이후에는 무의 세계까지 다룬다. 무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할 수 있는 잠재성과 가능성을 가리킨다. 무의 세계는 대상적 세계(objective world)가 아니다. 그것은 확률적 세계(probabilistic world)이다. 작가가 그리는 전자 자기장의 세계는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 이후에 변화된 세계의 양상을 시각적 메타포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진보적인 생각을 가장 전통적인 수단을 차용하여 그린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다.

김진_핑크는 없다 - There's no pink#16_캔버스에 유채_72.7×91cm_2017 김진_핑크는 없다 - There's no pink#40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2020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제목이다. 김진 작가는 핑크색의 정물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작가의 발언이다. "이것은 핑크색이 아니다." 도대체 아리송한 이 말을 무엇일까? 자본주의에 사는 사람들은 온갖 상품에 거짓 광택제와 인공색소와 감미료와 화학 향신료를 첨가한다. 우리의 눈과 혀끝과 코끝은 가짜에 마비된다. 우리의 피부는, 촉각은, 그리고 관능은 우리가 미처 만나볼 수 없는 비현실적 대중스타들에게 휩쓸려간다. 옛날에 진리는 발견하는 것이었다. 요새 진리는 제작되는 것이다. 많이 팔리고 재화가 넘실거릴 때까지 우리의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 욕망을 속여야 욕망은 더욱 불어난다. 핑크색은 욕망의 상징이다. 욕망의 실체는 그러나 없다. 그래서 "이것은 핑크색이 아니다." 김진 작가는 물신숭배, 인간소외, 환경의 변이 등에 대한 우려를 환상적인 핑크 회화로 대조시켜 우리시대의 불온한 분위기를 극화시킨다.

김현식_Who likes red?_나무 프레임, 에폭시 레진에 아크릴채색_54×54×7cm_2020

김현식 작가는 나무 프레임에 레진을 부어 오랫동안 단단히 굳힌 후 송곳으로 수많은 수직선을 그어 병치시킨다. 굳은 수평의 레진 표면 위로 수많은 마루(crest)와 골(trough)이 경이로운 규칙을 이룬다. 이 표면에 아크릴 물감을 칠하고 마루에 묻은 물감은 닦아낸다. 오로지 골속에만 물감이 남게 된다. 그 위에 다시 레진을 부어 오랫동안 굳힌다. 다시 송곳으로 마루와 골을 만들고 다른 색채의 아크릴 물감을 바른다. 물감을 닦고 또 다시 레진을 붓는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글로시한 회화의 표면 아래의 심연에서 수많은 층위의 선들이 깊이를 이루어 무한의 빛과 그림자를 발산하며 또 관람자의 시선을 한없이 그 심연 속으로 끌어들인다. 평면의 회화에 비로소 인간의 노동만으로 이루어진 3차원의 회화가 탄생했다. (렌티큘러 3차원 회화는 말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3차원이 될 수 없다.) 김현식 작가는 반복적인 육체의 수행과 시간의 흐름을 하나의 화면에 영속적으로 보존시킨다. 유한한 인간의 노동은 빛이라는 영구한 신성과 하나가 되어 그 숭고한 가치를 상기시킨다. 김현식 작가의 새로운 회화 방법론은 뉴욕과 브뤼셀, 런던, 파리 등 유럽의 주요 미술관에서 지대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에 전시하는 「미러(Mirror)」 연작은 원형 그릇에 레진과 아크릴 물감이 서로 켜켜이 쌓아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세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거울이라는 뜻을 지닌 영어 'mirror'는 라틴어 'mirari'에서 나온 것이다. 'mirari'는 눈부시고(remarkable) 경탄스럽다는(astonishing) 뜻을 지닌 'mīrus'에서 나온 것이다. 이 'mīrus'에서 기적을 뜻하는 'miracle'과 경탄을 뜻하는 'marvel'이 나왔다. 따라서 'mirror'는 놀라움의 결과로 펼쳐지는 '존경(ad-mira-tion)'을 뜻한다. 김현식은 모더니즘의 역사를 살다간 대가들을 경탄과 존경심으로 대했다. 이번 작품 연작은 작가가 예술과 사회에 드러낸 자기 고백이다. 동시에 모더니티의 대가들을 넘어서겠다는 자기 의지이기도 하다.

서민정_Incidental Parallel_마그넷 시트에 디지털 프린트, 설치_2021

서민정 작가는 유럽과 아시아 등지의 비엔날레와 미술관에서 초대받아온 대표적인 영상설치미술가이다. 「유물(The Remains)」과 「순간의 총체들」의 영상과 설치미술 연작으로 순간과 영속, 창조와 파괴,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변화와 불변이 서로 둘이 아님을 강력하게 역설해왔다. 작가는 "창조와 파괴는 다른 언어가 아니다. 하나의 단어라고 생각한다. 폭파하면서 확장되고 해체가 되면서 다른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발언한다. 실제 유물들(과거의 시간)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삶의 공간(현재의 시간)을 흰백의 순수로 표백시키면서, 또 표백된 공간을 파괴의 순간으로 정지시키면서, 우리의 가치관과 편협함을 고요하게 일갈(一喝)한다. 이번 설치작품은 2013년 참혹했던 시리아 내전을 다룬 것이다. 공군이 발포한 사린가스에 수많은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내전의 원인은 경제적, 지역적 갈등에 종파의 갈등이 점철된 것이라고 한다. 구멍 난 유럽 치즈(Emmental cheese)의 형상에 시리아 내전으로 희생당한 아이들 이미지가 중첩되어있다. 아이들은 내전으로부터 유럽 망명을 희망했을 것이다. 내전의 분열과 갈등으로 희생된 아이들은, 경제적 불평등으로 희생된 아이들은, 망명이 거절되어 희생당한 아이들은, 시신의 냄새를 연상시키며, 제 1세계 선진 유럽을 상징하는 치즈와 중첩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탄식과 회한을 느끼게 한다.

전경표_Untitled_주철, 스틸_60×55×46cm, 21.9×6.3×4.8cm_2019

전경표 작가는 입방체 스티로폼의 예리한 각을 완만하게 깎아서 거푸집을 만들고 다시 주조한 조각을 발표해왔다. 단독으로 설치되거나 두세 개가 집단으로 설치되어 무겁고 외로운 존재감을 발산시킨다. 스티로폼이라는 밝고 가벼운 첫 번째 존재, 즉 원형상(Urbild)은 주물로 주조된 무겁고 고독한 모상(Abbild)과 형용모순을 이룬다. 서구 철학에서 원형상은 무거운 진리에 해당하고 모상은 가벼운 존재자로 여겨왔다. 전경표는 형용모순(Oxymoron)의 전략으로, 즉 가벼운 바위나 무거운 깃털, 둥그런 네모와 같은 언어도단의 현상을, 시각 영역에 끌어내 조형미술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가벼운 무쇠와 무거운 스티로폼이라는 형용모순의 전략으로 조각의 역사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동안 조각은 조형언어의 한계 속에서 한정되어왔다. 부피, 질감, 양감, 무게, 비례, 균제 등이 그렇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론의 한계나 언어습관의 한계를 단 한마디로 표현해낸 작가는 일찍이 없었다. 하이데거는 존재적인 것(ontic)과 존재론적인 것(ontologic)을 구분한다. 전자는 사물을 대상화시켜 분석하는 것이다. 과학주의적인 태도가 그것이다. 대상을 분석하여 과학과 기술 속에 가두는 태도가 그것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사물을 대상에서 사물과 사물들의 관계로 승격시켜 무수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대우하는 관점이다. 존재론적 철학의 태도가 그것에 속한다. 그동안 우리의 조각은 특정 대상을 나타내거나 표상한 것이다. 전경표 작가는 우리의 인식 방법에 따라서 수많은 가능성으로 열리게 되는 존재론적 비밀을 우리의 눈앞에 현시해낸다.

우리의 예술계 역시 글로벌주의와 정보사회, 극도로 분화된 첨예한 자본주의의 위력에 잠식된 지 이미 오래다. 우리 역시 상업적 선정주의나 과거 회귀적인 리모더니즘, 미디어를 통한 스펙터클의 의도적 확대, 미디어를 통한 의도적 번잡화 등이 그간의 세태였다. 그 세태는 사람들의 뇌리를 잠식해왔다. 그러나 예술가의 능력은 시적(詩的) 능력에 있고 예술의 본질은 시(詩)에 있다. 그리고 예술의 기적은 과거로부터 창신(創新)할 때 눈앞에 어렵싸리 현실화된다. 창신(創新)의 정신 역시 시적 정신과 상궤(常軌)를 함께한다. 시를 한마디로 말하면 "사무사(思無邪)"이다. 생각함에 일말의 사특함도 없다는 뜻이다. 도덕적 순결에서 가장 강렬한 울림이 퍼진다. 여기 모인 여섯 작가들은 최소한 시적 정신으로부터 사회에 이야기를 던지며 시적 능력에서 출발한 도덕적 울림을 현실화시키고자 노력한다. 노이즈(주변부)의 찬연함을 예견하는 박종규 작가도 시적이며, 노동으로부터 형이상학적 심연을 들어 올리는 김현식 작가의 시적 능력도 뛰어나다. 시리아 소년들의 시신을 자기 몸처럼 아파하는 서민정 작가의 세계나 김진 작가가 물신화된 현실의 뒤편에서 발견해내는 정신의 아름다운 불씨는,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예술에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해준다.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보이는 세계의 진리를 역추적해내는 김영헌 작가의 능력도 시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전경표 작가는 가벼운 바위나 무거운 깃털, 둥그런 네모와 같은 언어도단의 현상을 우리의 원초적 본질로 파악한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거꾸로 그 불완전한 모습 때문에 신성을 알게 된다. 부분에서 나아가 전체를 안다는 것[pars pro toto]은 불완전한 인간의 예술로 감히 완선(完善)한 신을 찾아 헤맸던 우리 인간의 이룰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그 프로젝트의 이야기는 끝을 맺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신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예술과 예술가는 위대한 것이다. 더구나 우리의 작가들은 훨씬 예민하되 건강하며 세계 전체를 껴안는 포용력도 지니고 있다. ■ 이진명

Vol.20210414i | Pars Pro Toto (以偏例全)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