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의 깊이 The Deep Surface

윤종석展 / YOONJONGSEOK / 尹鍾錫 / painting   2021_0415 ▶ 2021_0514 / 일,월,공휴일 휴관

윤종석_비로소 보이는 것들 (1230)_캔버스에 종이, 아크릴채색_183×244cm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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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 / 호리아트스페이스 기획 / 아이프아트매니지먼트 후원 / 원메딕스인더스트리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공휴일 휴관

호리아트스페이스 HORIARTSPACE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80길 26 (청담동 95-4번지) 노아빌딩 3층 Tel. +82.(0)2.511.5482 www.horiartspace.com

아이프 라운지 AIF Lounge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80길 26 (청담동 95-4번지) 노아빌딩 4층 Tel. +82.(0)2.518.8026 www.aifnco.com

Blow by blow ● 권투가 인기 있는 시대는 저물었다. TV로 중계하던 권투 시합에서 일 분간 정해진 휴식 시간은 광고로 채워졌던 탓에, 시청자들은 브레이크타임을 제대로 볼 기회가 적었다. 그 시간도 경기의 한 부분이다. 링 코너에서 두 명의 세컨드는 자기 선수를 의자에 앉혀 열기를 식히고, 수분을 보충시키고, 상처도 얼른 조치하고, 작전이나 독려도 전한다. 종이 또 울리면 선수는 마우스피스를 물고 일어나 링 한복판으로 나아간다. 스스로 투지를 불태우는 모습은 권투라는 종목에서 내가 가장 매혹 받은 장면이다. 나는 여기, 전시에 임하는 화가 윤종석의 현재를 보며 그 모습을 떠올린다. 『표면의 깊이』는 모처럼 그가 본연의 작업 방식으로 돌아왔음을 알리고 있다. 그 방식이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물감을 주사기로 쏘아서 그림을 완성하는 점묘 기법이다. 방법은 여느 때와 같지만, 다르다. 작가는 최근까지 새로운 설정을 화폭에 옮기는 일을 차곡차곡 벌여 왔다. 작가는 이 모든 준비를 지난 전시와 이번 전시 사이에 생긴 얼마간의 시간 틈 안에서 마쳤으며, 이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복서처럼 새로운 라운드로 뛰어들었다.

윤종석_삶의 연속된 선택의 결과 (1127)_ 캔버스에 종이, 아크릴채색_183×244cm_2021
윤종석_공통분모 (0206)_캔버스에 종이, 아크릴채색_122×122cm_2021

화가를 권투 선수에 비유한 것은 내가 봐도 뭔가 감정 과잉 같긴 하다. 한 명의 구경꾼으로서, 이 글을 쓰는 나는 윤종석 작가가 준비해 온 작품을 봤고, 거기서 권투에 관한 생각을 떠올린 것 같다. 그 이야기는 아래에서 소개하고, 그보다 우선 신작은 윤종석 작가가 스스로 허용한 작업 개념의 범위 안에서 몇 차례 방법을 발전시키고 실험하고 수정하고 도약시킨 끝에 나온 결과다. 끝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못하지만, 그가 여기서 하나의 개념을 완벽하게 짜서 맞추었다는 점에서는 그 말이 어울린다. 작가가 어떤 궁극을 향하여 돌고 돌아서 이제 정리가 되는 시점이라고 해두자. 그가 처음에 명성을 얻게끔 했던 옷 연작을 떠나 선과 아크릴판 작업을 거쳤던 과정도 자기부정에 의한 단순한 탈주가 아니었던 게, 방향은 지금 이곳 『표면의 깊이』를 향해 있었다. 작가가 지금까지 거듭해 맞이한 등락의 순간은 그가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홀가분하게 만든 이유다. 그림에 등장한 모든 대상도 어찌 보면 풍선처럼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지 않나? ● 우리는 영화를 볼 때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라는 걸 시작이나 끝부분에 자막으로 띄운 걸 종종 본다. 이 언술이 고무줄 늘이기 식으로 쓰인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다. 만약 이 전시 공간이나 도록 어느 부분에 소설과 영화에서처럼 실재에 근거함을 문구로 적어 붙인다면, 관객들은 그림을 어떻게 볼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 공개된 작품들은 모두 생생한 여러 사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그림으로 모아놓은 사실(facts)은 더러는 이야기(stories)로, 사건(events)으로, 나아가서 역사(history) 혹은 인용(reference)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는, 주관과 객관 사이 어느 지점에 제각각 걸쳐진 대상이다. 당연히 관객인 우리는 그 모든 사실을 알 리 없다. 그렇다면 그의 회화는 그냥 떡밥 던지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한 화면 속에 두 가지 대상이 뜬금없이 아래위로 걸쳐져 있는 걸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건가?

윤종석_내일을 위한 기념비 (1212)_캔버스에 종이, 아크릴채색_117×91cm_2021
윤종석_양면의 모호성 (1114)_캔버스에 종이, 아크릴채색_117×91cm_2021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라면 윤종석의 회화가 자기가 만든 층위 개념을 가져다가 겉과 속, 위와 아래에 틀을 잡은 사고작용의 표상이라고 말할 것 같다. 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라면 이 작품이 '나와 그것의 관계'로 잡아, 양자 간에 대화가 불가능한 탓에 독백의 국면으로 흐른 상황이라고 설명할 것 같다. 또 다른 예술철학의 견지에서, 아니면 멋 부리고 싶은 현학적 태도의 일부 비평 진영에서는 이것저것 섞어서 아무말대잔치를 벌일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걸 잘 모르는 나로서는 그냥 그러려니 넘기고 갈 것 같다. 단지 그림 속 상징에 자기 고민을 빗대어 설정한 작가의 정신적 깊이를 높이 바라볼 것 같다. 동시에 단서만 주고 친절한 설명에 인색한 그를 원망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무런 힌트가 없더라도 미술작품으로써 감상은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점을 찍어 그 색채의 단계로 윤곽을 잡은 그림이 한 편으로는 몽환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꿈 같은 환상의 이미지라면, 정신분석학? 누가 보더라도 즉물적인 그림 속 물건들의 이면에 뭐가 있을 거라는 의심은 엉뚱하게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 Jung)을 불러올지 모르겠다. 대중적 취향은 궁금증을 키우면서도 스포일러에 집착하는 양면성을 가진다. 이게 나쁘진 않다. 작가가 『표면의 깊이』를 설정한 원리를 안다고 하더라도 이 근작들의 의미가 얄팍해지지는 않는다.

윤종석_구도자 (1104)_캔버스에 종이, 아크릴채색_117×91cm_2021

다시 권투 이야기. "양면의 모호"를 보면, 빨간 권투글러브가 있고, 두 개의 별 모양이 그 뒤에 받침대로 서 있다. 이 그림은 작가가 어느 시장의 식당에서 봤던 권투 장갑과, 그것이 기억의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지난 시간의 상징을 합친 것이다. 모든 그림이 이런 식이다. 예컨대 작가의 눈에 튤립이 들어온 당일을 위키피디아로 검색해서 알아낸 프리다 칼로의 사망일은 그녀가 평생 의지해야 했던 척추 보호대로 상징화했다. 두 개의 텍스트가 –con-겹쳐지면, 맥락(context)이 되지 않나. 윤종석 작가는 본인의 신변을 둘러싸고 다가오는 개인 서사를 과거의 역사 속 서사와 잇는다. 무엇으로 이을까? 그림에서는 알기 쉽도록 끈이 등장한다. 그가 그려낸 인식의 노끈은 예컨대 더글라스 호프스태터(Douglas Hofstadter)가 생각한, 끝없이 순환하는 황금 노끈과 달리, 두 상징을 하나로 묶는(strike up) 단순명쾌함을 보여준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속에서 당일에 포착한 이미지와 역사에서 선택하여 메타포로 바꾸거나 기호로 숨긴 이미지의 조합이다. 작가의 주관과 공동체 역사의 객관이 합쳐진 경우의 수는 무한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했던 작업 개념의 "끝"이란 다름 아닌, 이 조합의 시도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끌어낼 조건이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윤종석_너는 묻고 나는 답하다 (0722)_ 캔버스에 종이, 아크릴채색_162×122cm_2021
윤종석_당신의 자리에 꽃이 피었습니다 (0713)_ 캔버스에 종이, 아크릴채색_182×182cm_2020

공과 사의 인식적 결합은 결코 관객들에게 단 하나의 의미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도대체 한 자연인이 강박적으로 세워 놓은 생각의 구성체를 우리가 왜 알아야 하며, 그의 회화로 현현하기 전부터 존재하던 그 사건의 시시비비, 실천의 당위성, 아름다움의 정당성 같은 진선미의 항목을 작가가 숟가락 얹듯 즉흥적으로 빌어 오는 게 아닌가 하는 불만도 제기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대답할 것이다. '내가 취하는 평범한 대상이 쌓이면 그게 곧 내 취향이 아닐까?'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 가운데 하필이면 그가 지목한 두 가지는 나머지 모든 것들과 구분이 들어간다. 과거로부터 건너온 이 구분이 작품을 둘러싼 생생한 현재를 만든다. 화면의 안팎에서 보여주는 색과 빛의 넘실댐은 작가적 탐색의 또 다른 외부효과다.

윤종석_표면의 깊이展_호리아트스페이스_2021
윤종석_표면의 깊이展_아이프 라운지_2021

누군들 안 그러겠냐마는, 작가는 자신이 이루어 온 기법에 관하여 일종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작가 윤종석을 다룬 수많은 필자의 해석 가운데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그가 행하는 점찍기는 그 하나하나의 분사를 통해 분명한 인식으로 대상을 확증한다. 이런 명료성은 그가 말하는 삶의 덧없음에 스스로 대항하여 싸우는 방편이 된다. 점묘법은 그를 붙잡고 있는 수많은 사실에 대해 과도하게 설명하고 표현하려는 자기 욕구를 자제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가 공간의 영역과 시간의 선상에서 마음껏 채굴한 이야기를 자유를 속박당한 채 점으로 풀어내어야 하는 역설은 곧 매혹이다. 이 역설로부터 선택되어 표면으로 끌어올린 상징의 형태는,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한 명의 작가가 이 세계의 모든 형상과 기억의 이면으로의 접근이다. ■ 윤규홍

Vol.20210415g | 윤종석展 / YOONJONGSEOK / 尹鍾錫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