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정원(Infinite Garden)

양희아展 / YANGHEEAH / 楊喜雅 / mixed media   2021_0423 ▶ 2021_0510

양희아_무한 정원 레시피(Recipe for infinite garden) : n의 리듬(N's rhythm)_ 2채널 영상_00:11:00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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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서울문화재단_서울시 기획 / 양희아

관람시간 / 12:00pm~07:00pm

온수공간 ONSU GONG-GAN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1길 74(서교동 376-7번지) Tel. 070.7543.3767 www.onsu-gonggan.com

현대물리학적 우주라는 알레고리-레시피로 요리하는 '아웃사이더 SF'의 맛 ● #1. "'아웃사이더 SF'가 규정하는 이 특정한 상상 체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실험과학이 이론을 전개할 수도 없고 대상을 구성할 수도 없도록 구조화된 —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탈구조화된 — 세계를 개념화해내는 것이다." (퀑탱 메이야수,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 중에서) ● #2. "명태 창난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北關)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백석, 시 「북관(北關)」 중에서) ● 양희아 작가의 전시 『무한 정원』에 설치된 영상은 두 개의 스크린으로 보여지는데, 정체불명의 두 가지 요리를 하는 장면의 대위법적 구조로 되어 있다. 어느 것이 주선율이고, 어느 것이 보조선율인지 알 수 없는 이 요리들은 마치 낯선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친 앞뒤의 거울 두 개처럼 서로 각을 비스듬히 형성한 채로 무한히 순간 순간(들)을 분할 대조시키면서 미끄러지는 느낌이다. 가만히 보면, 두 개의 별세계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일어나는 비인칭적인 사건을 드러내는 것 같다. 한쪽은 가로 세로 격자선처럼 짠 일종의 매트릭스 구도 위에 둥글게 만 경단 같은 것을 그 격자점 위에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설치한다. 다른쪽 영상은 '유머로서의 요리 SF'라고 할 만한 내용인데, 흡사 낯선 행성의 생명 흔적을 찾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케이크, 초콜릿 조각으로 쌓아 — 외계인 소행처럼 연출하는 듯 — 만든 구축물과 월면차[月面車]가 운행하기에는 도전적인 경사도를 지닌 밀가루 둔덕 위로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녹인 버터 용액을 부서놓는다. 그 어느 시점에는 이 요리의 클라이맥스에 무심한 듯 혹은 의도한 듯 인접한 다른 요리의 흐름이 순간 바뀐다. 즉 경단을 격자점이 아니라 그 격자의 내부 공허한 공간에 툭 위치시킨다. 아, 이것이 무슨 은유나 암시인 것처럼. ● 마치 두 개의 별(들)이 서로 돌고도는 듯한 작가의 요리 레시피는 대단히 도전적인데, 그 이유는 요리를 빙자하여 현대물리학이 지닌 (비)실험적이며 증명불가능한 성격을 슬쩍 풍자하면서 동시에 양자역학을 공부할 때면 느껴지는 그 신비로우면서도 절대모순적인 '과학의 진리성'을 타고가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사실 1925년 양자역학을 정상과학으로 끌어올린 막스 플랑크 시절부터 폴 디랙을 거쳐 현대의 초끈 이론이나 M 이론까지 이르는 동안 들리는 이야기는 "전세계의 물리학자들 중에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라는 것이다. 그 신비로우면서도 절대모순적인 성격은 양자얽힘이라든가 양자터널이라든가 하는 초미시 세계의 형용하기 힘든 과학의 실재를 드러낸, 그것도 동시에 관철되는 방식으로 출현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술과 인문학에서는 몽테뉴나 백남준이 읊었던 '변덕스러운 고양이'로 은유되거나 레비-스트로스가 북미에서 수집한 "두 갈래의 길을 동시에 가는 남자" 같은 설화적 세계로 시사된 바 있지만, 이는 부분적인 것일 뿐이었다. ● 그런데 버터 용액을 그 밀가루로 만든 낯선 행성(?)의 표면 질감 위에 퍼부어 마치 빅뱅[Big Bang] 직전의 혼돈과 실제로 폭발이 일어난 이후의 초기 조건을 능청스럽게 연출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이를 거의 요리라는 감각, 즉 "모든 진리는 하나의 맛으로 맛보는 체험에 있다"(원효) 라는 '일미'[一味]의 감각에 충분히 젖어들어서 이러한 도발을 하는 것처럼 연출했다. 그러면서도 맛은 타이밍이듯 그 느낌은 우리가 아는 것과 시간적으로 합치하지 않는다. 기존의 예측가능한 결속이 끊어진 요리이다. 왜? 이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두 개의 스크린으로부터 유출되는 영상은 마치 밤하늘의 별(들)이 우리 눈에 보이는 1등급일 경우에 대체로 쌍성[雙星, binary star]인 것처럼 맛으로서는 종합되어 있지만, 그 맛이 합성되는 과정은 두 개의 별들이 서로가 두 마리 나비처럼 안고 돌아가는 순환적이면서도 무한적인 흐름이기 때문이다. ● 이 쌍성의 세계처럼 요리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형국인데, 거기서 더 분화하는 듯한 인상도 준다. 말하자면, 북두칠성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별인 미자르[Mizar]는 오랫동안 그 곁에 있는 알코르[Alcor]와 쌍성 관계에 놓여 있었는데, 알코르가 다시 알코르 A와 알코르 B로 자체적인 쌍성 관계임이 밝혀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자르 역시 미자르 A와 미자르 B임이 드러난다.(사실 미자르와 알코르라는 쌍성 관계는 로마와 아랍 그리고 중국에서 고대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처럼 쌍성 관계가 자체적인 2차 쌍성 관계로 분화되는 것을 알아챈 것은 한국의 샤먼들이었다.) 여기서 미자르 A는 다시 미자르 A1과 미자르 A2로 3차 쌍성 관계를 연출한다. 아아, 양희아 작가의 요리 레시피는 바로 이런 식의 대위법적 분열이 언제까지나 진행되는 듯한 아찔한 형국으로 이어진다고 할까. 두 개의 스크린에서 요리하는 서로간의 기대면서 끊임없이 예기치 않게 또는 생뚱하게 분화하는 과정이 대단히 유머러스한데, 어딘가 별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보듯 그 유머는 상당히 무리수적인 궤적으로 쉴새 없이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수다를 떠는 프랑스적인 타입이라 흥미롭다. 누군가에게는 취향저격인 것이 또 누군가에게는 취향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 따라서 관계미학적으로 그 요리의 맛을 직접 맛보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작가가 연출한 이 장면은 현재의 먹방 방송에 익숙해진 '맛보는 눈'의 감각으로도 기존의 요리에 탈합치한다는 것이 충분히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즉 이 '일미'라는 미각적 상상력을 통해서 (비)실험적이며 증명불가능해진 채로 개념적이며 수학적 개연성으로 접근해가는 현대물리학이 일종의 SF가 아닌가 하는 점과 나아가 이러한 요리 퍼포먼스와 그 영상으로 현대물리학이 더 이상 "실재에 대해 갖는 인식 가능성과 제어 가능성"(메이야수)을 닫힌 구조, 이미 알고 있는 구조로써 SF화하고 있다는 점을 무심한 듯 풍자하고 탈합치한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은근히 17세기 조르다노 브루노처럼 우리 앎의 바깥이자 선조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아웃사이더 SF'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사실 필자가 이렇게 쓰는 것조차도 양희아 작가의 이 영상 앞에서 이미 뭔가 SF적 최면술에 걸린 채 몽롱해진 변성의식 상태[Altered States of Consciousness]에서 지껄이는 불쉣이거나 또다른 파타피직스 즉 상상적 풍자과학의 자동기술일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는 탈합치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로 극도로 냉정하게 본다면, 이 영상이 사실은 무의미일 수도 있지만, 이 요리하는 맥락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할 수도 있다. 이처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가르며 고도의 허무주의적 우주를 항행한다는 것, 이것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 포섭된 채로 예술이 마땅히 암암리에 진행하고 있어야 할 내재적 비판(할 포스터, 김지원)을 망각한 흐름에서 일탈해버린 형국이다. 초콜릿 조각이 케이크 구축물 위에 놓여지다가 툭 떨어질 때, 마치 '웁쓰!'라고 하듯 혹은 마트 현금통이 특유의 음향을 발하듯 요리 SF의 능청스러운 연출이 일상의 작은 사건과 묶여지면서 과학주의적 요리의 '일미'를 현실의 감각과 합치하지 않게 연결하는 것은 데이터 사회(이광석)의 조건을 부러 벗어나는 물질론적 유머 아닌가. ● #3. "밤이라는 본질을 체험할 수 있다면, 그 정도의 물질적, 시간적 투자는 아깝지 않은 듯싶었다."(양희아 작가) ● 작가에게는 '밤이라는 본질'이 오랫동안 무의식 차원에서 감도는 느낌이다. 이 본질은 한자 화[化], 즉 "되다"라는 차원에 긴밀하다. 이 한자의 갑골문은 사람 인[人]이 하나는 똑바로, 또 하나는 거꾸로 마치 6과 9처럼 위치해 있다. 이는 남과 여의 에로틱한 연금술적 화합일 수도 있고, 한 사람이 전복되는 극단적인 변화일 수도 있다. 그에 대응하는 즉[卽] 역시 갑골문으로는 "잔칫상" 그림인데, 이는 "먹다"를 통한 "되다"이다. 이 '화'와 '즉'의 감흥[affect]은 양희아 작가에게 어둠이 지상에 깔리면서 밤이 오는 그 화학, 밤의 화학으로서 정립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밤은 일종의 빛과 어둠의 접경지대를 지나 무의식의 입구로 들어가는 것인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사회에 포섭된 채로 그 체제를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탈합치이자 탈결속의 물질인지 모른다. 밤은 후기자본주의 데이터 사회의 노동자가 휴식하고 충전할 시간이지만, 작가는 이 밤이 일으키는 혼돈의 레시피를 통해 몽상하고 글을 쓴다. 또는 작업을 한다. 거기에는 또한 본질을 맛보는 맛이 있다. ● 이처럼 내재적 비판이란 인지적 과정에서 모든 것이 포섭되었을 때, 비로소 일종의 무의식 차원에서 그냥 일어나는 요리의 맛 또는 밤의 화학 같은 것이 아닐까. 시인 백석은 저기 저 북관 즉 함경도 지방에 가서 동해에서 잡힌 명태젓의 발효와 다 쓰고 버린 고추의 속줄기 그리고 지천으로 널린 무 채소를 순간적으로 버무려서 '비벼 익힌 것'이란 레시피를 제출한 바 있는데, 양작가가 딱 그 짝이다. 단지 재료가 다를 뿐이고, 마지막은 고도의 허무주의적 우주로 내동댕이치듯 뜨거운 버터 용액으로 비비고 익힌다는 것이 다소 상이할 뿐. 이때 비로소 새로운 낯선 맛, 환원불가능한 시공의 맛이 느껴진다면? '아웃사이더 SF'는 그러나 화엄의 시제로 말하면, 미래미래세[未來未來世] 즉 "미래의 미래세"이다. 해석 가능성은 열려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거꾸로 과거과거세[過去過去世]로부터 찾아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닫힌 우주의 SF로서의 현대물리학 지식 내에서 재인식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태초와 아득한 미래는 두 개의 요리가 만드는 무한거울 같은 서로비춤 현상 속에서 그 실체를 어렴풋이 암시한다고 한다. ● 사실 작가가 이렇게 양자역학 너머로의 항행을 단지 부엌에서 요리하는 것 -- "남자는 파랑새를 찾아서 누더기 여행을 하고 여자는 부엌에서 요리하다가 일체를 깨닫는다"(나카자와 신이치) -- 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으로부터 요즘의 고정된 성역할을 경계하는 면을 잠시 괄호로 묶을 수 있다면,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아까도 말한 '일미' 즉 하나의 맛이란 것은 과거과거세부터 현재의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다시 미래의 세가지 시제 그리고 그 극단으로서 미래미래세까지 이르는 총 9가지의 시간 관념 위에 한가지 시제를 더 더한 화엄의 십세[十世]가 깃든 시간의 맛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과거에는 이러한 요리뿐만 아니라 "부처의 목 베기"라는 다분히 선정적이면서도 근본적인 행위가 있었는데, 이는 부처라는 인간의 미래와 그 부처의 결말로서의 파괴라는 또다른 미래가 합쳐진 것으로서 철학자 푸코나 르포르 같은 이들이 프랑스 혁명의 단두대에 잘린 왕의 머리통이 구르고굴러서 광장의 인민들에게 그 '체현된 신의 권력'을 무한복제해서 나눈다는 관념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 양희아 작가의 설치는 이 과거과거세의 행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화엄의 십세[十世]라는, 마치 11차원의 M 이론의 과거 형태처럼 보이는 고차원의 세계를 엿보는 크리스탈 같은 것이다. 중간 중간의 투명한 결정체들은 저렴해 보이지만, 역시 유머로서의 마녀의 크리스탈 수정구슬일 수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곡선을 구부리고 다시 자체의 곡선을 되감는 선으로 상하가 연결되는데, 그 과정은 복소수 체계이다. 즉 무리수와 허수 — 즉 제곱해서 음수가 되는 수 — 가 개입하는 복소공간으로서의 선이다. 이것이 당연한 것이 양자역학은 이 복소공간의 연출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 물질에 대한 반물질이 기본적으로 전제되기 때문이다. 오목한 반사면은 관람자를 물구나무 선 도상으로 비추며, 그에 충실히 응할 경우에 그 물구나무 선 도상은 커팅엣지의 면 가진 크리스탈이 닿아서 허공에 스펙트럼으로 뿌려진다. 이 역시 은근한 연출. 또한 둥근 투명은 나타남, 비춤, 뿌려짐이라는 사태를 머금기도 하고 뒤로 섬광을 감싸서 응축시키기도 하는데, 대범하게 말해서 독일적인 엄격함보다는 뭔가 남부유럽의 개방적인 분위기, 특히 프로방스 지방 스타일 같다. 천천히 돌고 있는 구름 같은 모바일의 조건 아래에서. 그 크리스탈의 빛은 이론상 직진하는 솔리톤[soliton], 즉 레이저처럼 거리와 상관없이 흐트러지지 않는 무량광명[無量光明, Immeasurable, or infinite light]이다. 우주의 가장자리까지 나아간다는 빛의 조건 아래에서 이러한 설치의 얼개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三世] 각각에 다시 과거 현재 미래를 부여한 구세[九世] 그리고 그 구세를 감각하고 인지하는 마음 또는 맛이라는 차원이 더하여져 십세[十世, ten dimensions]의 차원을 예정하고 있다. 빛은 십세의 차원을 가로지르는 셈이다. 시인 김수영은 이를 처음 본 글라디올러스 꽃을 보고 '구라중화'[九羅重花] 즉 "꽃 속에서 거듭 거듭 꽃을 피운다" 라고 노래했다. ● 이 크리스탈 감각은 다시 작가가 인공으로 만든 광물질 구조물과 커팅엣지의 '서슬'을 드러내는 암석 조각에서 재확인된다. 자연 안에서 냉정하면서도 잔혹한 자연, 비밀스런 자연은 이러한 구세 십세의 고차원과 연결될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 광물질과 암석은 이 현상의 매개체 같은 성격이라고 보여진다. 휘석이나 감람석 같은 불투명한 돌을 종교적 제의나 기도 같은 행위의 대상물로 삼았던 것은 과거과거세의 일로서 결은 거의 비슷한 바가 있는데, 이제 양희아 작가는 그러한 결정질 구조를 단박에 지하에서 알아차리는 노발리스의 「파란꽃」에 나오는 보석 광부처럼 물질 스스로의 요청과 목소리를 드러내도록 설치하고 있다. 즉 물질은 살아있다. 양자역학을 따르면, 입자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파동의 생명성을 갖고, 동시에 물질은 파동의 과정들을 통해서 입자의 발견 가능성을 이미 예정하고 있다. 가령, 중력이란 힘이 파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 입자를 찾아왔고, 21세기 어느날 드디어 '중력자'[gravity particle]이 발견되었던 것처럼. ● 이렇듯 양희아 작가는 양자역학을 충분히 무의식과 감각으로 체화한 상태이며, 그것은 좀 있다가 얘기하겠지만 그 스스로 특이한 형태의 스터디와 대화를 진행해왔기 때문이다. 자, 그런데 이 결정질 구조를 가진 크리스탈은 저기 저 『무한 정원』 전시장에 내걸린 그림들처럼 시간의 평면 즉 5차원 시공에서는 어떻게 될까. 그때 크리스탈은 결정질의 액체 상태, 마치 수은과 같은 액체 금속처럼 플로이드로서 시간 위를 흐르는 물질이 되지 않을까. 2004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프랭크 윌첵은 타임-크리스탈[Time-Crystal]이란 또다른 SF적 발상을 제안했는데, 시간의 유리 평면 위로 홈이 파이지 않은 상태에서 흐르는 크리스탈, 마치 시간의 괴물처럼 길게 살별의 꼬리를 끄는 듯한 크리스탈을 이미지화했다. 양희아 작가의 저 그림들, 커팅엣지된 '서슬'의 면이 날카롭게 단층선으로 꺾이면서도 어떤 흐름의 선상을 연속적 이미지로 특유의 붓질 속에서 물질적 체현 시킨다. 이는 지금까지 '아웃사이더 SF'의 전략을 일관되게 유지해왔다고 믿는, 이 의미와 무의미 사이로 난 소로[小路]를 따라 온 이의 몽상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습곡의 곡선과 단층의 불연속으로 되어 있지만, 평면이 단순하게 2차원이 아니라 시간 차원을 포괄하는 현대물리학적 평면, 즉 시간의 평면으로서 5차원을 능청스럽게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감각하지 못한 채 눈으로 음미해야 할지 모른다. 아니, 이것이 좀더 작가의 사실이자 물리학적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예술의 부림, 술수에 가깝다고 본다. ● 작가는 몇 해 동안 SNS에 오픈채팅방을 개설하고, "현대물리학을 아는 이여, 오시오" 라는 취지로 지나가는 물리학 덕후, 그 익명의 존자들을 낚시해왔다. 세상에는 뜻밖에 양자역학의 덕질을 하는 작가도 있지만, 그에 상응하듯 남몰래 덕후생활로서의 아마추어 물리학도가 암약해오고 있었다. 이들 사이의 대화는 전시장에 「북향」이란 두툼한 문건으로 인쇄되어 전시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거의 일방적으로 물리덕후들이 자신의 현대물리학 지식을 작가에게 시전하고 가르치는 타입이다. 사실 여기에는 작가가 물리학을 모른다는 짐짓 수동적 태도가 한몫 하는 것 같지만, 그러한 스탠스 자체가 현대물리학의 남성성을 풍자하는 일종의 플라톤 대화편 같은 변증법적 과정에 다름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과거과거세의 플라톤이 쓴 그 희곡집을 보면, 현자 소크라테스가 일방적으로 인과론적 논리의 대화를 주도하고 상대방은 세상의 실재 세계가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도권 아래에서 그저 묵묵히 "네" "아무렴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럽죠" 등등의 후렴구만 추임새처럼 날리고 있다. 하지만 아득한 시간이 흘러서 그 추임새 넣던 수많은 '예스' 안에 사실은 상대주의적 세계, 후기구조주의적 세계, 양자역학적 세계가 촘촘하게 여며져 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 양희아 작가 역시 마찬가지로 그러한 변증법의 세계 속에서 대화를 묵시적으로 주도당하고 있는 꼴이고, 그러한 상하의 담화적 권력 관계를 여과없이 보여주는 과정에서 "과학은 남성이 선호한다"라는 오래된 편견을 역으로 은근 풍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작가는 이 '아웃사이더 SF'의 일관구도를 무한 정원의 수학적 우주라는 틀로 짜면서 탈합치하는 요리 SF의 영상으로 대폭발을 일으키지만, 그러한 탈결속화된 폭발의 명장면을 완전범죄처럼 연출하는 과정에서 일말의 실마리를 남겨두었다고 본다. 미래미래세에서 오는 명탐정을 위하여. 그것이 이 「북향」 속에서 마치 SF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지구상의 쥐를 "쥐라고 알려졌지만, 실상으로는 초지능적인 범차원적인 존재로서 지구를 계획, 설계하였다" 라고 소개하듯이, 이러한 수동적 종합이나 일방적으로 교육당하는 듯한 스탠스에는 고도의 차원적인 헤아림이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 자세한 전모는 미래미래세의 탐정에게 맡겨야 할 터이지만 말이다. 좌우간 양희아 작가의 이 『무한 정원』 전시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현대물리학을 경이로워 하면서 교양과학 수준에서 재현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그 핵심이 되는 양자역학과 놀면서도 그에 탈합치하는 뜻밖의 요리 레시피 — 이것이 "직접 맛볼 수 없는" 현대물리학의 최대 약점일 줄이야 —를 통해 '아웃사이더 SF'의 서막을 열고 있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의미와 무의미 그 사이의 쌍성(들)이 밤하늘에 떠서 비벼지고 있는 트왈라이트 존에서 ■ 김남수

『무한 정원』은 삶을 통한 직관으로부터 출발하여 우주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안 보이는 것과 못 보는 것에 대한 것, 현실 세계에서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가는 다양한 가능성들을 탐구하는 전시이다. ● 현실세계에 집착으로 편향된 시야로 경쟁하는 현재의 삶 속에서 간과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언어로 인식하기 이전의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측면, 무한 대로 뻗어 나가는 시간과 공간 그곳에서의 수수께끼 같은 질문들과 같은 것 일지도 모른다. ● 나와는 다른 타인과의 관계가 결코 단절 된 것이 아니듯, 시간과 공간 또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더 나아가 나와 똑같은 존재가 또 다른 차원에서 존재할 수도 있다. 우리의 세계는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다. ● 무한한,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시간과 공간에서 인간은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가진 자연 안에 한 존재고, 절대적 고독을 지닌다. 자연과 인간은 우주 안에서 여러 물리법칙과 시간과 공간 속 무한히 상호 연결되어 있는 영역 속에서 위치되어진다. 그리고 끊임없이 소멸과 생성한다. 반짝이는, 반짝거리는 ● 반짝인다고 다 반짝거리는 것은 아니다. 있다가 사라지고 사라지다 떠다니고 떠다니다 흘러가고 조용해지고 하나씩 하나씩 소멸되어 먼지처럼 작아지다. 그것은 그것만으로도 존재하고 있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만 같은, 아무도 없을 것만 같은, 아무도 기억 못할 것만 같은 밀착된 공기로만 남아있지는 않는다. ● 사라져 간다 점점 더 허물어져가는 생성의 작은 힘들이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고 공기 중에서 빠져나갈 때 그 인고의 시간을 지닌 작고 작은 것들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만 어느 순간 응집력이 떨어져 천천히 분산될 때 까지 숱한 시간들을 함께 하다가 어느새 자기 차례가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놓기 시작한다. 허물어진다 모든 게 흩어져 휘날리고 조금은 빠르게 조금은 느리게 움직임들이 바뀌어가고 방향도 한 곳으로 모였다가 흩어졌다가를 반복하면서 멀리서 춤을 춘다. 춤을 추며 흘러간다. 시작도 그랬고 끝도 그랬었던 것처럼 언제나 그렇고 그런 무대였던 것처럼 화려한 시작도 시간도 활짝 핀 목련 꽃이 어느 순간 추하게 바닥에 떨어져 처절히 널브러져 있는 그 상태 그 순간을 기억한다, 떨어진다, 하락한다. ■ 양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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