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이상 '너머' 그 교차지대 '단아한풍경' The Elegant Scenery, intersecting beyond the rality and the ideals.

박영학展 / PARKYOUNGHAK / 朴榮鶴 / painting   2021_0604 ▶ 2021_0625 / 월요일 휴관

박영학_단아한 풍경展_스페이스몸미술관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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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학 인스타그램_@p_younghak

초대일시 / 2021_0604_금요일_06:00pm

후원 / 충청북도_충북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몸미술관 SPACEMOM MUSEUM OF ART 충북 청주시 흥덕구 서부로1205번길 183 제3전시장 Tel. +82.(0)43.236.6622 www.spacemom.org

박영학의 이해가능한 자연으로서의 풍경 ● 박영학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대략 십 오년 년 전 즈음인 것 같다. 그때도 그는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아니, 그가 전공한 한국화의 맥락에서 보면 산수화라고 해야 하나, 혹은 그가 동서양의 매체를 뒤섞어 쓰는 작가이므로 풍경화든 산수화이든 상관이 없다고 해야 할까. 회화 전공자들 가운데 전통 매체를 주전공으로 하고 나온, 대략 박영학과 동시대에 작품 활동을 했던 이들의 경우 자신을 둘러싼 울타리를 박차고 나갈 것인가 그 안에서 길을 모색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스승이라고 할 만한 이들의 작품과 면면을 죽 떠올려 보면 이러한 갈등은 당연하기도 하다. 박영학의 작품도 이 지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고, 울타리를 부수거나 그 안에 안전하게 머무르는 양단간의 선택을 유보하고 그 위에 걸터앉아 안쪽과 바깥쪽을 다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특이하게도 그런 포지션이 위태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박영학_단아한 풍경展_스페이스몸미술관_2021

종종 기이한 색채를 가미하기도 하지만, 그의 주된 화면은 목탄을 사용한 흑백이다. 그리고 숯 그 자체를 화면의 특정 부분들에 삽입하여 독특한 물성의 효과를 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수, 풍경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풍경 속에 있는 나무들이나 길들을 동물의 유려한 뿔 모양을 연상시키는 형태와 결합하여 생경함을 이끌어내기도 했던 이삼년 전의 작품들이 그 자신이 다듬어 온 화면의 패턴을 가장 격렬하게 깨뜨린 경우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박영학이 즐겨 일필휘지로 긋는 선들과 매우 잘 어울려 그것이 '풍경'이라 부르는데 있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산수, 혹은 풍경은 어디에나 있고 혹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것이다.

박영학_단아한풍경21-03_장지에 방해말(돌가루), 목탄, 숯_80×116cm_2021

그는 원근법을 사용한다. 가까이 있는 대상은 더 크게 보이고 멀리 있는 대상은 더 작게 보인다. 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것은 투시원근법이라, 정말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느낌이 든다. 그가 공들여 그리는 나무들 이외에 선으로만 남겨놓는 형태들은 산의 능선이거나 밭고랑 같은 것들인데, 그것에는 아무런 구체성이 없다. 밭고랑 이외에 넓은 선들이 실제로는 골프장의 지형이 만들어낸 선들이라는 것조차 작가로부터 듣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어떤 풍경을 그린 그림이거나 모든 것이 투명하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투명한 진술 자체가 이 시대에는 가장 진부한 방식이기에 그의 화면이 가진 애매함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만 투시원근법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혼란시키는 선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드는 다른 물질들, 그리고 화판의 형태를 사각이 아닌 다른 형태로 구성하는 현상들은 좀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박영학_단아한풍경21-16_장지에 방해말(돌가루), 목탄, 숯_80×116cm_2021

나는 사실 십오륙년 전에 그의 드로잉북을 보았다. 거기에는 여러 각도의 산의 풍경들이 있었고 그것은 인간이 일군 밭이나 울타리 등의 세부적인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완성된 그의 작품 속에는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 이외에 다른 것들, 거친 산세나 조각조각의 바위들이 가진 세부적인 음영 등은 별로 포함되지 않았고 실루엣으로서의 흰 산, 그리고 그와 흑백의 대비를 이루는 검은 나무들이 등장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인공적인 것을 아주 배제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인간이 일군 밭고랑과 심지어 우리나라의 산수와 개념적으로 대척되는 골프장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다. 물론 흰 선과 선 안의 백지로 말이다. 때로 그 사이에 검은 물질인 숱을 우겨 넣거나, 숱이 들어갈 만한 자리의 공간을 그대로 놔두어 화면 안의 공간과 이질적인 공간을 섞어두기도 한다.

박영학_단아한풍경21-15_장지에 방해말(돌가루), 목탄, 숯_80×80cm_2021

여기서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다시 시작된다. 그는 풍경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단지 암시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풍경 속에는 한 사람의 인간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의 풍경은 인간이 남겨두었거나 인간이 내버려둔 것, 혹은 인간의 어떤 행위를 임시하는 그것이다. 그의 풍경은 자연 그대로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상향을 그린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이상향이 이렇게 간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상향이라면 그곳에서 숭고함을 느끼건 아름다움을 느끼건 간에 정주하여 머물고 싶은 피난처 같은 느낌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가 그려내는 풍경은 인간과 자연이 상호간에 협약을 맺은 현재의 시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 협약을 아직은 너그럽게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박영학_단아한풍경21-12_장지에 방해말(돌가루), 목탄, 숯_116×80cm_2021

자연을 인간이 착취하고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대 이전 동양인의 사고는 아니었다. 자연은 인간을 포함하여 거대한 흐름과 법칙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과거 동양인들의 사고였으며, 인간중심주의와 과학기술로 자연으로부터 무한의 자원을 얻어내고 그 질서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서구의 질서가 동양을 지배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드넓으면서 간간이 굴곡진 광활한 언덕이 있는 나라의 스포츠인 골프를 즐기기 위해서, 우리는 산도 깎고 평지의 생김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살아가기 위해서 산 밑에 실개천 앞에 집을 지어 그 집들이 모여 마을을 만들던 것도 이제는 과거의 일이다. 그렇게 만들어졌던 마을들은 이제 더 이상 살 곳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자연이 인간의 발 아래로 들어와 마을이 만들어지고 도시가 만들어지고 거기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현재 실제의 인간 중심적인 풍경이 그렇다는 것이다.

박영학_단아한풍경20-04_장지에 방해말(돌가루), 목탄, 숯_80×80cm_2020

인간중심적인 풍경이라, 이것을 인간화된 풍경이라 일컬어야 할 것인가, 하고 그는 자신의 풍경화 속에서 묻고 있다. 사람이라고는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는 그 풍경 속에서 그는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묻고 있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전혀 전투적이지 않다. 그는 단지 생략을 통해서, 그리고 풍경의 안에 어떤 공기도 불어넣지 않음으로써 관객의 앞으로 질문을 던져 놓는다. 그는 자신의 풍경을, 어떤 현상에 대한 거부도 아니고 인정도 아니고 직접적이지도 않고 강렬하지도 않게 보여주고 있다.

박영학_단아한풍경20-02_장지에 방해말(돌가루), 목탄, 숯_80×80cm_2020

그러나 이마저 없다면 인간은 더 이상 어디에 정주하겠는가, 하고 그는 묻고 있는 것 같다. 그는 태연하게 산도 그리고, 그리지 않음으로써 하늘과 물도 만들고, 그 위에 인간이 씨앗을 심는 밭도 만들고, 눈에 걸리는 골프장의 선도 만든다. 옛 그림들과 비슷해서 친근감이 있고 난해하지 않아서 쉽게 접근이 가능하며, 현실 풍경 같기도 하면서 이상향의 냄새도 나는, 절묘한 경계선에 있는 박영학의 풍경은 작가 자신의 입장에서, 그리고 관객의 입장에서 '이 정도면 이해 가능한' 풍경이 아닐까 묻는 것 같다. 태풍이 지나가거나 타는 듯한 햇살이 내리쬐거나 습하거나 건조하거나 바람이 불거나 단풍이 지거나, 그러한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을 관객의 몫으로 두고, 단지 자연의 것과 인공의 것으로, 그렇게 인간과 더불어 그저 존재하는 현재의 자연을 이해 가능한 정도로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이 박영학의 풍경이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라고 묻고 싶어지는 지점이다. ■ 이윤희

Vol.20210605h | 박영학展 / PARKYOUNGHAK / 朴榮鶴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