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이 쌓여 길이 되었다

구본주_나규환_박영균_전미영展   2021_0608 ▶ 2021_0831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21_0608_화요일_04:00pm

주최,주관 / 신동엽문학관 후원 / 신동엽기념사업회

관람시간 / 09: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신동엽문학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신동엽길 12 Tel. +82.(0)41.833.2725 www.shindongyeop.com

고대 북부여와 근대 동학과 자신의 가계사를 상상하며 시인이 걸었던 오래된 길 위로 발자국이 쌓여 길이 되었습니다. 부여 신동엽길의 아트 이정표를 넘어선 모든 이들이 시인 신동엽이 그리던 선사의 달빛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시회를 기획하였습니다. 4명의 작가와 함께 새롭게 여는 신동엽문학관에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 김형수_이영진

구본주_갑오농민전쟁3_브론즈_125×50×130cm_1995
구본주_칼춤_브론즈_25×15×15cm_1994

"발자국이 쌓여 길이 되었다!" 신동엽시인의 길 조성사업을 압축하는 말이다. 누군가 맨 처음 첫발을 뗀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겹쳐지고 겹쳐져서 길이 된다. 그래서 길이란 개인사의 기억은 물론 집단의 역사가 쌓이는 곳이다. 즉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쌓인 과거이고 또 미래를 향해 열린 통로다. 대지의 어딘가로부터 시작하여 지평 넘어 어딘가로 이어지는 「길」은 필연적으로 인생의 길이며 근원적으로 귀향의 길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발자국 위에 또다른 발자국이 끝없이 오버랩 되는 길은 결국 누군가가 걸어 들어간 입구이자 걸어 나온 출구다. 그래서 길은 서로를 향해 양쪽으로 열린 공간이다. ● 신동엽은 부여에서 태어나 고대의 북부여와 근대의 동학을 자신의 가게사와 함께 상상하며 성장했다. 20대에 6.25를 겪은 그는 군민방위군에 끌려가 죽을 때까지 지병으로 남은 병을 얻었다. 그것이 서른 아홉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 이유가 되었다. 더구나 그가 태어나고 자란 부여는 백제의 신화와 역사 그리고 동학과 분단의 비극이 깊은 심연처럼 고여 있는 땅이었다. 개인과 집단의 운명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이를 운명의 형식으로 받아들인 그의 문학적 공간에는 서사적 광활함과 실존적 기억이 뒤섞여 광활한 대지를 이루고 있다. 그의 등단작인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긴 이야기의 형식을 지니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더구나 서사시 「금강」이나 「껍데기는 가라」「진달래 산천」「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등 그의 대표적인 창작 목록은 반세기가 넘었음에도 여전히 우리가 견디고 있는 분단현실을 관통하는 힘찬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그가 치열하게 고민했던 분단 문제와 자본과 제도로부터 비롯된 억압적 현실 그리고 온전한 인간(전경인)에 대한 비전은 여전히 21세기가 고민하는 뜨거운 화두들이다. 따라서 「신동엽시인의 길」조성 프로젝트는 부여에서 시작되는 일이지만 지역의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 되어야 했다. 예술적 장식성이나 현란한 기술적 실험으로 버라이어티한 '보여주기'를 겨냥하기 보다 신동엽 시인의 정신에 도달하는 정서적 통로를 만들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였다. 더구나 부여는 하나의 행정구역을 지칭하는 이름이기 이전에 신화이고 역사다. 오래된 상징적 이미지와 풍부한 서사(신화와 역사)가 미완성으로 살아있는 곳이다. 거기에 산만한 도시로서의 현재와 낡은 주변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큰 에너지를 내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복합적인 층위를 어떻게 프로젝트에 녹여낼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업에 참여한 작가들은 부여를 걷고 또 걸으며 오래된 길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다. ● 그러나 이 공공프로젝트는 무엇을 상상하고 고민하든 행정의 엄격한 원칙과 규범을 지켜야 했다. 이 전제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행정의 보편 타당한 효율과 예술의 감동을 한 그릇에 담는 일은 싸우기는 하되 반드시 화해에 이르러야 하는 모순된 미션이었다.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시적 언어("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 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신동엽의 아내-인병선의 시 「생가」부분, 김형수의 시적 에피그램 「발자국이 쌓여 길이 되었다」와 회화를 통해 펼쳐지는 시각언어(박영균의 「궁궁을을」-남부여에서 북부여까지) 그리고 강한 물성으로 성격을 창조, 공간을 장악하는 입체 형상들(구본주의 「위기의식(쉿! 저기 신동엽이 있다)」', 「미스터 리」, 나규환의 「바람의 경전」, 전미영의 「금강에 앉다」)이 어떻게 하나의 흐름 속에서 제 목소리를 내게 할 것인지 방법을 찾아야 했다. 특히 주민들과의 문제는 민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어서 헌신적인 지역 인사들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애초의 배치계획에 변화를 주어야 했다. 문학관의 담장 안으로 자리를 옮긴 작품들이 늘어났다. 콘텐츠의 과잉이 문학관의 조용하고 사색적인 동선을 깨뜨리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과 달리 오히려 하나의 흐름이 형성되었다. 누드 콘크리트가 딱딱하게 분할하던 무표정한 공간에 성격이 주어짐으로써 방문자들이 더 오래 머무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길이 대지의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는 통로이 듯 콘텐츠들이 또다른 동선(길)을 생산함으로써 신동엽시인에게 다가가는 일이 더 흥미로워졌다. ● 프로젝트의 방향은 긴 시간의 역사성(백제-동학)과 '지금 이곳'(부여-신동엽문학관)의 장소성을 동시에 상상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스토리텔링은 신동엽 문학관과 시인의 동산 사이 180m도로에 11개의 콘텐츠를 배치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신동엽의 작품세계와 작가적 생애에 내면화된 부여의 선사시대 신화는 물론 야학, 양장점, 우물, 동창생들, 형사, 기타, 암벽등반, 유년시절 등등 일상적 에피소드를 취재하고 인터뷰한 결과들이 더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견인하는 조각과 그림, 설치작품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문학적인 언어와 시각 이미지와 입체들을 시뮬레이션 해보았다. 중심을 이루는 주제와 오브제들 어느 것도 보조적인 것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우려야 했다. 각각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게 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견없이 서로를 이끌 수 있는 공통된 무엇이 필요했다. ● 신동엽시인의 정신과 생애가 놀랍도록 유사한 고 구본주와 그의 대표작 「갑오농민전쟁」이 떠올랐다. 평론가 이태호는 "상투를 튼 인물이 죽창을 든 채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갑오농민전쟁」은 작가 특유의 과장과 격렬한 감정표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작품이다. 인체의 보편적 비례를 뛰어넘어 과장된 크기의 발과 긴장된 근육, 뒤틀린 동세가 한데 어우러져 한 덩이의 몸체로 다시 태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 표현도 한국인인지 서양인인지 헷갈리는 우리 주변의 흔한 인물상이 아니며(전봉준의 얼굴 사진을 참조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인체와 옷(한복 바지)의 적절한 텍스처 변화 그리고 근육과 뼈의 과장된 표현은 '표현을 위한 표현'이 아니라 뚜렷이 작가의 역사 해석과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는 수작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 상찬 한바 있다.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과 구본주의 「갑오농민전쟁」은 시대와 장르와 장소를 초월해 동학을 둘러싼 서사의 하모니를 역동적으로 불러들이는 대작들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일이며 미학의 식민성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만의 고유한 미학을 실현코자 하는 작가적 고투, 그리고 부당하고 모순된 세계에 저항하는 치열성 등 작가론적 생애도 두 사람은 많이 닮아 있었다. 문학관 본체 왼쪽 모서리에 자리잡은 구본주의 「쉿! 저기 신동엽이 있다」는 군부독재시절 미술 운동과 관련, 수배 중이던 시절의 긴장과 굳건함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일제시대와 독재체제를 통과하면서 끊임없는 감시를 견뎌야 했던 신동엽과 구본주가 한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웅장한 불꽃들의 초혼제를 상상하게 한다. 신동엽 곁에 구본주를 세워 중심을 이루게 하는 일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중심이 잡히자 많은 문제가 한꺼번에 길을 찾기 시작했다. 곧은 소리가 곧은 소리를 부르듯 그의 아내이자 조각가인 전미영과 절친이었던 중견 화가 박영균, 구본주예술상을 수상한 젊은 작가 나규환이 청계천변 전태일기념관 작업을 끝내자마자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이들 역시 신동엽이나 구본주의 세계관이나 현실 의식을 뒤쫓는 뛰어난 예술가들이다. 이 한국 최고의 현장파견미술팀 구성원들은 강정마을, 대추리, 용산 등 뜨거운 사회적 이슈가 있는 현장이면 어디든 찾아가 '하청에 하청에 하청'을 마다하지 않고 재능을 기부하는 작가들이다.

구본주_노동_나무_45×45×35cm_1992
구본주_6월_브론즈_50×40×30cm_1995

그렇다고 이들이 즉흥적으로 전개되는 현장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는 작업에만 몰두하는 작가들은 아니다. 여러 현장에 벽화와 설치작품을 남긴 박영균이 신동엽시인의 길 프로젝트에서 보여준 대형 타일 작업은 그들의 진지한 작업이 어떻게 사람들을 감동으로 이끄는지 보여주었다. 박영균이 발견한 것은 금강의 부드럽고 유려한 곡선이다.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에서 그는 편안하지만 유장하게 흐르는 '백제의 선'을 찾아냈다. 날마다 아니 평생토록 금강을 보고 살던 백제인들은 전돌과 금동대향로와 치미에서 자신들의 내면에 스며든 눈부신 흐름(강)을 발견해 냈고 이를 형상화했다. 부여읍 내리에서 출토된 전돌에는 놀랍도록 유려한 '산수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눈부시게 휘돌아 나가는 강의 곡선은 우뚝 솟은산을 형상화 할 때도 그대로 물구비의 흐름을 이어가며 둥근 산봉우리를 탄생시켰다. 산수무늬의 봉우리 사이엔 소나무와 폭포, 집과 사람, 짐승 등 다양한 형상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박영균은 횡으로 흐르는 강과 산을 종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일어선 강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가 보였다. 한반도를 종으로 가로지르는 강들이 함께 일어나 흐름을 이어가더니 한강과 임진강과 대동강 두만강 압록강을 지나 천지를 넘어 아무르 강 위, 아득한 북 부여의 하늘로 흘러가고 있었다. 신동엽이 노래한 아사달 아사녀의 대지 즉 원본성의 세계가 거기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는 흰옷에 죽창을 든 동학교도들을 상상하며 작업과정을 동영상에 담아냈다. 박영균의 금강은 시공을 넘어 수천년 동안 끊이지 않고 생명의 시원으로 흘러가고 흘러오는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로, 세로 4m에 달하는 대형 타일 벽화 「궁궁을을」이 여주 도요지의 불꽃 속에서 탄생해 부여로 이동해 왔다. 화폭의 왼쪽에서 중심을 향해 날아드는 세 마리의 새가 굳이 삼족오가 아니어도 상관없었으며 천지 너머, 흥안령 너머 아무르 강을 따라 바이칼에 이르는 북부여의 하늘이 화폭 속으로 빨려들 듯 모여드는 것도 모두 자연스러워 보였다. '궁궁을을'은 매일 태어나는 대지, 개벽이었다. 이 작품은 문학관 입구 건너편 벽을 차지했다. 부여고등학교 물리 교사인 김대열선생이 자신의 집 담벼락을 단 한마디의 사족도 없이 캔버스로 내어 주었다. 통일운동가이기도 한 김 선생의 담벼락엔 그의 열망 대로 분단되지 않은 원본의 한반도가 아침마다 꿈틀거리게 되었다. 전미영은 문학관 정문 담벼락 밑에 아침 햇살에 금빛으로 빛나는 금강의 물 구비 셋을 설치했다. 브론즈로 제작된 황동벤치였다. 「금강 위에 앉다」란 이름표가 붙은 이 벤치는 길 건너편 「궁궁을을」의 흐름과 이어지도록 배치되었다. 박영균과 전미영의 작업 사이에 나있는 '길'은 신동엽이 생가에서 나와 노을 지는 언덕으로 오르던 그 산책길이었다. 실질적으로 이 프로젝트의 주인인 문학관 관장 김형수선생이 무심코 입을 열었다. 이 길은 신동엽의 "발자국이 쌓여 길이 되었다"고 했다. 언덕으로 오르는 신동엽과 그의 긴 그림자 그리고 밀납과 황동으로 주조한 활자가 나규환 작가에 의해 신동엽의 발자국 위에 새겨졌다. 신동엽 문학관은 한국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이다. 그는 한국 전통 건축에 내재된 공간적 특성을 현대 건축에 접목시켜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의 작품인 문학관 건물 앞에 신동엽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본래 초가가 있던 자리였다. 생가는 흙과 돌로 만든 담장이 둘러쌓고 있다. 생가 처마 밑엔 신동엽의 부인 인병선 여사의 시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신동엽과 인 여사의 이야기는 소설처럼 드라마틱하다. 이화여고3학년때 만나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여대생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신동엽의 가난한 시골집으로 살림을 살러 왔다. 마당엔 비가오면 물이 고여 연꽃이 피는 작은 방죽이 있었다고 한다. 인 여사는 오자 마자 호미를 들고 시어머니를 따라 밭일에 나설 만큼 대범하고 호방한 '고구려' 여인이었다. 그녀는 생가에서 불과 100m거리에 자리한 중앙시장 한 켠에 '이화양장점'을 차리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인 여사가 책임을 지기 시작한 생계 문제는 신동엽의 사후까지 일생을 통해 계속된 일이었다. 따라서 오늘의 신동엽문학관이 가능하게 된 것은 모두 인 여사의 헌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삶을 빼놓고 「신동엽 시인의 길」 조성 사업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스토리텔링을 시작할 때 맨 처음 떠오른 여성은 신동엽이 이상화한 부여 여인 아사녀 였다. 그 다음은 서사시 금강에 등장하는 주인공 신하늬의 운명의 여인 인진아 였다. 아사녀, 인진아, 인병선은 신동엽 시인의 여성성을 체현한 가장 극적인 캐릭터들이다. 더구나 인 여사는 살아 실존하는 인물로 검증 가능한 알리바이와 상징성이 맞닿아 있었다. 생가 마당 왼쪽에 우물이 있었는데 이 역시 인 여사와 관련된 오브제였다. 재봉틀 앞에 앉아 일하는 부여 여인 인병선을 상상할 것인지 물을 긷는 백제 여인 아사녀를 상상해 볼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판단은 전미영의 몫이 되었다. 전미영과 박영균은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거친 끝에 우물이 있던 자리의 담벼락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11쪽의 물빛 유리판을 설치하여 유리판 한 장 한장마다 인 여사의 싯구 "우리는 살다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 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를 새겨 넣기로 했다. 삶 혹은 산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감상이나 연민도 담기지 않은 담백한 싯구다. 말해진 부분 보다 말로 발화되지 않은 이야기가 더 많아 숨어 있는 그녀 내면의 호흡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전미영이 11장의 유리표면에 새긴 시, 깊은 우물물의 수면에 쓰여진 싯구는 드라마틱한 인병선의 삶이 응축되어 있다. 파도와 바다는 현상과 본질에 대한 존재의 메타포다. 일어났다 스러지는 파도는 생명의 바다에 찍어 놓는 해인은 존재와 시간의 찰나를 은유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존재는 물 위에 찍는 도장만큼이나 부질없다. 찰나 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허무는 존재의 근원에 내재된 피할 수 없는 생명의 속성이다. 그럼에도 이 허무와 당당하게 맞서는 인병선의 삶과 시는 장자적 잠언 못지않게 깊다.

나규환_아버지의 눈물_폴리코트_290×250×150cm_2014
나규환_마른 하늘에 물벼락_폴리코트, 철판, 페트병_190×150×150cm_2012
나규환_누명을 쓴 사람_브론즈, 철, 나무_120×20×20cm_2014

승효상이 설계한 신동엽 문학관은 두 개의 콘크리트 박스를 얹어 놓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건축 공간이 감추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지만 이 지면에선 '길'과 관련된 공간만 이야기해야 될 것 같다. 한마디로 문학관 건물은 '길'을 품은 '집'이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문학관 앞 도로는 아무 장애 없이 건물의 옥상까지 이어져 있다. 전시관과 수장고가 있는 지하에서 중정을 가운데 두고 나선형으로 계단을 밟고 올라가다 보면 옥상에 이르게 된다. 건물 내부 공간을 막힘없이 이어가는 복도(길)도 마찬가지다. 인사동의 '쌈지길'은 비좁은 골목길을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옥상까지 이어지도록 설계한 것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신동엽 문학관도 비슷한 방식으로 내외부가 설계되었다. 길과 건물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안팎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신동엽시인의 길 조성 프로젝트는 자연스럽게 옥상으로 이어졌다. 남녀 두개의 화장실과 본체의 거대한 벽면 사이로 꽤 넓은 계단이 위를 향한다. 본체 벽면의 왼쪽, 직각의 절벽을 이룬 모서리 끝에 구본주의 「위기의식」이 서 있다. 나무로 제작된 구본주의 이 작품은 야외 소장을 위해 아라리오 미술관에서 밀납으로 주조되어 브론즈로 캐스팅되었다. 따뜻한 남쪽에서 자라는 부드러운 재질의 알마시카 원목을 벌목용 엔진 톱으로 넓게 켜서 원재료로 준비했다. 엔진 톱으로 예리하고 힘차게 잡아가는 양복 주름이 겹쳐지며 거칠고 속도감 넘치는 마띠에르(질감)가 생겨났다. 이 거친 속도감은 건너편 어딘가를 꽤 뚫을 것처럼 응시하는 시선과 어울려 아찔한 긴박감을 불러온다. 숨바꼭질 하듯 납작하게 벽 모서리에 숨어 길 건너를 살피는 인물의 왼쪽 팔은 절벽처럼 직각으로 깎여 몸 전체가 감시자의 시선 앞으로 밀려나 노출되지 않도록 완강하게 버티는 기둥이 되어주고 있다. 문학관 본체 모서리가 연출하고 있는 긴장과 남자의 신체에서 태어난 수직의 매끄러움은 이 남자가 서 있는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 곳인지를 깨닫게 한다. 「눈치밥 30년」, 「미스터 리」에 등장하는 셀러리맨(도시 노동자)과 동일한 성격을 지니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그가 좀 두툼한 부조에 완벽한 입체로 형상화하고 있는 셀러리맨은 구겨진 양복과 넥타이를 맨 체 늘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 구본주는 자신의 존재를 임금으로 증명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장삼이사들의 생태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포착한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 약자 이자 대표적인 '을'들을 결코 허약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 비록 쫓기고 불안한 존재들이지만 그들은 강철처럼 강인한 뼈대와 박력이 넘치는 몸짓으로 딜리고 있는 세계의 주체들이다. 임금노동자들에게 회사, 직장, 직업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하루하루는 언제라도 위기에 직면할 수 있는 절벽과도 같은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듯한 시스템의 억압은 쉬 떨치기 어렵다. 임금 노동자는 언제라도 해고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실직자란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구본주가 탄생시키는 인물들은 쫓기고 있으되 절망하거나 좌절하는 인물들이 아니다. 구본주는 이런 인물들 이야말로 「혁명은 단호한 것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변혁의 주체들로 인지하고 있다. 넥타이를 휘날리며 가랑이가 찢어져라 뛰고 있는 「미스터 리」들은 강인하고 단호한 결단력을 내재한 인물들이기도 한 것이다. 「위기의식」에 등장하는 사내 역시 그런 주체들 중 한 사람이자 서사시 금강의 주인공 신하늬를 빙의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 사내가 가진 내면의 힘을 표현하기 위해 구본주가 집중하고 있는 부분은 손이다. 손은 단단한 손가락 뼈의 질감과 손마디, 손바닥의 두툼하고 부드러운 질감 그리고 플라스틱 같이 매끄러운 손톱의 질감이 모여 있는 부위다. 손처럼 인물의 표정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부위도 많지 않다. 구본주는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인물의 성격을 찾아가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조각 칼을 다 동원하고 있다. 평칼, 창칼, 둥근칼, 아사도, 환도, 끌… 제 각각 다른 칼 맛을 살리기 위해 그는 일일이 손으로 매만지는 노동을 피하지 않는다. 손가락 마디를 이루는 뼈와 살과 손톱의 질감을 찾아가기 위해 온갖 칼을 사용한다. 손에 새겨진 다양한 칼의 흔적은 두툼한 노동의 질감과 노동자의 고단함을 정감 넘치게 살려내고 있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곡면의 굴곡이 특징인 얼굴과 넥타이의 질감은 '쇠로 쇠를 다듬어 가는' 줄과 사포 질로 완성해 갔다. 광대 뼈와 콧날, 강렬한 턱 선은 작은 면과 면이 만나면서 이루는 그 높낮이와 미세한 각도 또한 사포로 연마해 가며 입체감을 얻어내야 했다. 두께가 얇은 부조에 입체를 입히는 일은 입체가 입체의 상투성 속에 갇히지 않도록 변화를 주면서 주변 공간에 가장 적절한 성격을 배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려움은 인물이 가진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성격이 부조의 몸짓 전체에서 배어 나오도록 하는데 있는데 이는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 즉 진정성과 지향성이 바로 설 때만 가능한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일치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작업을 구본주는 기어이 완성시켜냈다. 재료의 딜레마에 대한 단호한 응전과 노동으로 단련된 완력 그리고 시대를 통찰해 내는 올바른 문제의식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는 신동엽의 단호함에 진정성의 빛을 더한 구본주의 칼이 이제 함께 절벽의 모서리를 감당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혹독했던 지난 겨울과 올 봄의 차이다. 신동엽시인의 길 조성은 신동엽과 구본주, 박영균만 참여 한 것은 아니다. 본래 '극장식 전개'를 염두에 두었던 만큼 '신동엽시인의 길'을 확장해 가는 공간 작업과 스토리텔링은 영하 15도가 넘는 혹한과 눈보라 속에서 비닐 막과 가스 난로를 설치해 가며 계속되었다.

박영균_대한문 앞 꽃밭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820cm_2014~8

건물 2층 전체는 공원처럼 열린 공간이다. 컨테이너를 연상시키는 3개의 콘크리트 박스가 1층의 기능과 연동되어 2m 높이로 솟구쳐 있다. 나규환의 「바람의 경전」은 가장 오른쪽을 차지하고 있는 직사각형의 벽면 두개를 이용하고 있다. '기타 치는 신동엽'을 상상하기 위한 스토리텔링이 시작됐다. 옥상 왼쪽 난간을 점유한 구조물과 그 지붕에 솟아 있는 송수신 안테나를 올려다 보던 나규환은 곧 대도시의 옥탑 방과 티벳 사원의 하늘을 수놓던 룽따를 떠올렸다. 높은 산동네 옥탑 방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탁 트인 전망과 오색 깃발에 경전을 적어 줄에 묶어 놓고 티벳 고원의 바람을 맞이하는 경전들, 바람이 전하는 이 소식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힘을 지닌다고 믿는다. 티벳의 이 이야기가 나규환을 사로잡았다. 신동엽의 정신과 티벳의 경전이 나규환에겐 다르지 않았다. 안테나를 타고 전해지는 신동엽의 기타 소리는 바람의 경전처럼 세상 속으로 흘러가는 소리다. "나와 같이 목마른 사람들에게 옥탑 방 마루에 앉아 기타를 치는 신동엽의 노래 소리를 듣게 하자" 한 순간에 기타를 치는 시인과 옥탑 방과 안테나 그리고 룽따가 하나의 네러티브에 통합되었다. 나규환은 생가 마루를 브론즈로 캐스팅했다. 선명한 나무의 무늬와 질감을 살린 마루를 직사각형의 두 면에 설치하고 옆쪽 면엔 스테인리스 창을 배치해 옥탑 방을 완성했다. 기타 치는 신동엽을 이 공간의 어디에 앉혀야 할까? 그가 앉을 자리와 크기와 재료를 찾아가기 위해 두 번이나 흙 작업을 했으나 시뮬레이션의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규환이 상상한 기타 치는 신동엽은 저항 시인의 강렬한 면모보다 서정 자체에 깊이 녹아 든 '시인의 몸'이었다.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신동엽의 몸'을 얻기 위해 나규환이 떠올린 것은 흑연 덩어리인 연필이었다. 입체의 존재감이 공간을 장악하는 조각의 존재감에 비해 연필화는 흑백의 선으로 주변의 공간에 스며들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공간을 나누는 힘이 뚜렷한 입체가 나을지 반입체의 부조가 더 적절할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웠다. 안테나와 콘크리트벽과 직각을 이루는 마루 등의 주변 요소에 적절한 고부조와 중부조를 선택했다. 얇은 강철판으로 종이접기를 하듯 작업하기로 결심했다. 뒤쪽을 벽이 가리는 공간에는 부조가 육면체의 입체보다 의사 전달에 더 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시인을 묘사하기 위해 선택한 주재료는 자연에서 온 재료인 철이었다. 얇은12mm의 철강판 위에 빛의 선으로 입체를 구현되려면 철판을 두드리고 구부리고 잘라내고 이어 붙이는 집요한 노동이 필수적이다. 불로 잘라내는(그리는) 흑백의 단면들은 어떤 각도를 유지하느냐에 따라 선의 두께를 통해 양감이 결정된다. 45도로 기울게 자르면 90도로 자르는 선의 면적이 두꺼워져 굵고 어둠의 검은 선이 태어난다. 연필화의 흰 선은 지우개로 지우면 되지만 강판 작업에선 면과 면 사이를 띄워 빛이 새어 나오게 해주면 된다. 결국 나규환의 선은 그것이 흑색 선이든 백색의 선이든 모두 불이 지나간 흔적일 수밖에 없었다. 불의 흔적이 남긴 기타와 신동엽과 바람과 룽따, 나규환은 강판 전체를 21개의 조각으로 나누었다. 얼굴과 머리와 목과 다리와 발과 코드를 짚어가는 손과 기타 그리고 와이셔츠의 카라 등등 잘라낸 조각들의 틈새 각도를 살짝 비틀어 그림자를 만드는데 따라 드로잉이 완성되어갔다. 틈새가 벌어져 공간이 보이면 흰 선이 가까워지면 검은 선이 만들어졌다. 다음의 문제는 인체를 표현하는 각 면들이 가져야 할 굴곡 즉 높낮이와 기울기였다. 음영이 지는 부분과 입체감이 발생하는 부위를 강판 위에 붙여 가며 질감을 입체적으로 느껴지게 해야 했다. 절묘한 각도를 조율하는 구부리기 공정이 필요했다. 평면에 입체를 새기는 일은 연필 역할을 하는 강철과 망치와 불로 이루어진다. 기타와 얼굴과 다리 등등의 입체는 이렇게 탄생했다. 기타를 치며 코드를 짚는 신동엽의 손가락은 락커들의 수화 사인처럼 검지와 새끼 손가락이 펼쳐져 있다. '사랑해!'라고 외치고 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많은 관람객들이 양말을 신겨주고 싶어했던 맨발은 대지와의 교감을 상징하기 위해서 발가락까지 다 노출시켰다. 안테나 위의 하늘과 맨발 밑의 대지까지 관통하는 시인의 노래가 룽따의 경전처럼 세상 속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 나규환과 신동엽이 옥상에 펼쳐 놓은 시와 조각의 콜라보 무대, 밤이면 별이 뜨는 그곳에서 두 사람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전미영_당신 잘 지내나요_인화지, 자석, 철판, 천_450×600×300cm_2010
전미영_그리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_OHP, 유리, 아크릴_30×21×6cm_2020

신동엽과 기타를 함께 상상하는 일은 좀 생소한 듯 하지만 이는 저항 시인 특유의 무겁고 강렬한 이미지 탓 일뿐 신동엽은 음악과 연극 등 타장르의 예술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은 1994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동학백주년기념작'으로 처음 무대에 올려진 뒤 2005년 평양 봉화예술극장에서 공연됨으로써 남북 모두에서 공연된 첫 가극이 되었다. 두번의 공연은 모두 문호근의 연출에 의해 가극의 형식으로 남북의 관객을 만났다. 그후 11년만인 2016년 12월 성남아트센터에서 연출가 김규종과 음악감독에 의해 창작뮤지컬로 공연된 바 있다. 신동엽은 1968년 5월 서울 드라마센터 무대에서 오퍼레테 「석가탑」을 무대에 올린 바도 있는데 그는 당시 명성여고( 현: 동국대학교 사범대학부속 여자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석가탑」의 대본을 썼다. 당시 서울여상 음악교사 였던 백병동이 작곡에 참여해 이를 완성했다. 신동엽은 석가탑이 무대에 오른 뒤 10개월 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39살로 짧은 생애를 배웅한 것은 시와 음악과 연극이 한 몸을 이룬 오페라테였다. 신동엽은 시가 특정한 형식(시집)의 협소함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60년대 시극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다른 장르와의 공동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 그는 그가 사랑한 부여 사람은 물론 공동체 전체의 '쟁기꾼'들과 함께 대지를 일구어 나가고자 했다. 그의 시와 사상은 이미 세상의 넓고 깊은 곳으로 바람처럼 퍼져나갔다. ● 나규환의 작품 건너편 벽 구조물엔 전미영의 「별밭에서」가 자리를 잡았다. 별, 달, 태양, 씨앗, 바람, 나뭇잎, 연꽃, 이슬, 책, 촛불, 바람, 찻잔, 표주박 등이 벽면을 별처럼 수놓았다. 신동엽의 생가에 모여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던 13명의 "야화" 동인들은 생가 마루에 앉아 별 밭을 바라보며 까마득한 북부여의 하늘을 상상했을 것이다. 거기 우주가 보이지 않았을까. ● 시인 신동엽 길 조성의 처음과 끝은 이정표의 열린 문이 장식했다. 입구이자 출구인 길의 양방향성을 위해 프레임만 존재하는 '열린 문'을 설치했다. 문의 상단엔 구본주의 「미스터 리」가 있는 힘을 다해 내달리며 통과중이다. 문의 안과 밖, 이곳과 저곳, 시간과 공간, 신화와 역사, 차수성의 세계와 원수성의 세계, 문명의 블랙박스 속을 달리는 모든 「미스터 리」들이 이 문을 넘어 신동엽이 그리던 선사의 달빛에 이르기를. ■ 이영진

Vol.20210608d | 발자국이 쌓여 길이 되었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