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흔적을기록하다

박능생展 / PARKNUNGSAENG / 朴能生 / painting   2021_0625 ▶ 2021_0709 / 월요일 휴관

박능생_Spain-Granada_종이에 먹, 아크릴채색, 흙분_93×64cm_202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200606e | 박능생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가모갤러리 기획 / 화인조형연구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가모갤러리 GAMO GALLERY 서울 종로구 삼청로 96-1 Tel. +82.(0)2.733.6178 gamogallery8.blog.me

오랜 걸음 뒤에, 잠깐 열린 세계 ● 동시대 한국화를 많이 접한 관객들에게 『도시의 흔적을 기록하다』는 익숙한 장르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걸 한국화의 변용이라고 해두자. 박능생은 전통적인 산수화에 현재의 풍경을 끌어들인다. 그는 자기 인식의 지평이 얼마나 넓은가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발길과 시선이 닿은 곳을 그린다. 그곳들을 다 그리나? 그렇지는 않다. 이 거리의 산보자는 자신의 인상에 남은 장소를 화선지에 옮긴다. 작품을 보는데, 그림 속 공간이 어딘지 나는 정확히 모르겠다. 이유가 세 가지다. 뭣보다 내가 작가만큼 돌아다니지 않는다. 다음으론 그림에 장소를 나타내는 시그니처가 좀처럼 없다. 파리는 에펠탑, 뉴욕은 자유의 여신상 식으로 상징물이 그려져 있으면 좋은데, 그의 작품은 그런 게 드물다. 마지막으로 그 서구적인 경관을 아무리 변용된 산수화라 할지라도 수묵이니까 낯설게 보이는 건 당연하다. 비록 어딘지 알기 어렵다 하더라도 나는 그림 속 장소에 매혹당한다. 그곳은 낯섦과 낯익음이 겹쳐 있고, 욕망과 덧없음이 교차한다. 또한 그 공간은 시간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박능생_Spain-Granada_종이에 먹, 아크릴채색, 흙분_93×64cm_2021

여기에 한 가지 속박이 있다. 화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릴 수 있다. 그러나 박능생 작가는 오로지 자신의 예술적 순례지로 선택지를 좁히고, 그곳을 여러 번 다녔다. 이 과정에서 그가 품은 현실 인식과 몽환적 상상력이 하나가 되는 때와 장소만이 그림의 대상이 된다. 드넓은 세계와 창의력보다 작가가 좌표를 매긴 곳이 적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설정이 작가의 발목을 잡을 것 같지만, 꼭 나쁜 건 아니다. 스피노자가 인간 욕망을 코나투스(conatus)라는 긍정성의 발현으로 본 것처럼, 박능생은 어느 한 곳을 욕심이 다 채워질 때까지 그리고 또 그려왔다. 그는 자기를 끌어당긴 시공간을 거듭해서 작품으로 확정 지으면서 자신이 그곳에 홀렸다는 점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작가를 매혹한 이미지는 얕은 충동이 아니라, 한 예술가의 존재를 드러나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

박능생_Spain-Toledo_종이에 먹, 아크릴채색, 흙분_93×64cm_2021

작가의 존재를 널리 알린 대표작인 도시 실경은 코나투스의 결과다. 그 연작은 궁극적으로 큰 도시 전체를 화폭에 파노라마처럼 담으려는 시도였다. 작업의 동기라는 말보다 집착이란 표현이 맞겠다. 도시 풍경과 산수를 하나로 묶는 기획은 어떻게 실현되었을까? 조선 후기 풍속화와 진경산수화의 현대판 결합은 단순한 구성을 바탕으로 시작했다. 말이 단순하고 쉽지, 작가의 고생길은 그때부터 확 트였다. 작가는 한 도시를 둘러싸거나 군데군데 솟은 산에 올라갔다. 작가는 대전에서 그랬고, 서울과 부산도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완성하던 이야기를 상상하면 되겠다. 21세기에 왜 이런 그림이 나오는지 도무지 말이 안 되지만, 이게 또 한 편으로는 개념으로나 실체로나 말이 된다. 사서 하는 그 고생은 한 번의 쇼 이벤트로 끝날 수는 없으며, 작가의 계획은 몇 가지 진도를 함께 뽑고 있다. 멀리서 경관을 바라보던 시점이 다른 작품에서는 사람과 자동차와 상점으로 다가선다. 이게 재미있다. 원경이 어느 정도 실현하는 숭고와 장엄미가 근경으로 다가서며 르포르타주 또는 소시민적 서사에 집중된다. 이번에는 스페인 그라나나, 톨레도다.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뒤섞인 그곳의 감성은 독특한 구도와 색감으로 드러난다. 초록과 검붉음으로 표현한 수목은 이보다 강렬함을 양보한 건물과 윤곽으로만 제시되는 인물들과 섞여 있다. 이런 배치와 비율이 터져 나올 듯 말 듯한 정념을 감추고 있다.

박능생_Spain-Toledo_종이에 먹, 아크릴채색, 흙분_93×64cm_2021

작가는 오늘날의 도시가 가진 양면적인 성격을 작품에 드러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언젠가 썼던 작업 수기에서 이런 성격을 혼란과 질서의 엉킴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그 말이 맞다. 나는 혼란 속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다고 보는 쪽이지만 말이다. 꼬불꼬불한 강과 계곡과 도로, 어지러운 간판과 자동차 행렬. 이 모든 것에는 이름이 붙어있고, 임자가 있고, 세금이 매겨지지 않나? 측량(과학)과 소유권(법)과 과세(행정)는 그것대로 이 세계를 이해하고 구분하고 통제하려는 제도적 합리성이다. 화가는 관찰과 그리기를 통해 예술이라는 또 다른 합리적 절차를 이뤄가는 존재다. 다만 예술의 합법칙은 대상을 따져서 분석하기보다는 그 상태가 주는 주관적 감흥을 온전히 보전하려는 성향이 짙다. 박능생이 자신의 구도 안에 경관을 포착하기 위해 길을 걷는 일을 사생이라고 부르는 게 합당하다. 누가 이걸 수행이라고 격을 치켜세운다면 본인이 달가워할지 난감해할지 모르겠다. 유람은 어떨까? 그 과정은 답사 혹은 사전 조사단계가 될 수도 있다. 작가는 자신이 선취한 조형 감각과 의지를 통해 새롭게 구성된 세계를 펼친다. 몇백 년 전 화가와 지금 화가가 같은 감각과 지식 체계를 가졌나? 그럴 리가. 박능생의 그림은 이제야 전모를 드러낸 과거다.

박능생_Spain-Toledo_종이에 먹, 아크릴채색, 흙분_93×64cm_2021

서양에서 1789년과 1812년에 각각 터진 큰 사건으로 말미암은 모더니티의 기획은 그런데도 일사불란할 수 없었다. 이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격차가 나타났고,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역설로 설명할 수 있는 탈근대로 이어졌다. 한 도시 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쑤셔 넣은 상황은 도시계획 입안자들의 실수도 아니고, 심미성의 퇴락도 아니다. 그것은 권력 획득을 둘러싼 보수와 진보의 다툼처럼 자연스러운 상황에 가깝다. 박능생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전망에서 평형 상태로 부를만한 무위를 재현한다. 건물의 반듯함이나 자동차의 날렵한 렌더링도 그의 그림 안에서는 무너진다. 보들레르와 벤야민과 버만이 차례대로 이야기했던 근대성의 흔들리는 그림자를 그 누구보다 은유적으로 잘 표현한 작가가 여기에 있다. ● 기법의 영역은 한 작가를 무턱대고 띄울 수 없다. 기교에 관한 칭찬이나 존경은 경쟁자의 등장 앞에서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평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코나투스적 의지에 따라 자기 야심을 쉼 없이 그림에 쏟아붓는 태도는 하나의 테크닉으로 집중된다. 박능생이 택한 재료와 기법은 당대에 감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제일 나은 방법이다. 순지가 아닌 화선지 위에 수묵과 아크릴과 황토가루를 상황에 맞게 채색하는 방법의 한 편에, 죽필이 있다. 대나무를 잘게 찢어 거친 붓질을 끌어내는 죽필은 작품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내가 볼 때 이것은 작가가 도시를 틀어쥐는 속도감 있는 힘을 표현한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회화의 격을 실험하고 있다. 어떤 그림에서는 일부러 형식적 완성도를 버리기도 하는데, 괜찮다. 그 빈 자리는 해학과 안빈낙도가 대신 채우니까. 그러나 그의 예술 형식이 가지는 필연성이 모든 걸 채울 수는 없다. 앞서 말한 속박의 역설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완벽한 지도가 존재하려면 지구를 한꺼번에 덮는 종이가 있어야 하듯이, 화가가 세상에서 따오는 그림도 부분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작가가 일종의 조급함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곳이 서울이 됐든 뉴욕이 됐든 톨레도가 됐던, 조망을 속히 완결하고 손을 떼고 싶다는 생각이 잘못된 건가? 다행히 그는 머뭇거리고 망설인다. 그의 작품은 일생에 걸쳐 거듭 탄생시키는 에튀드와 같은 것이다. 이 연습의 태도야말로 박능생의 작업 전체를 꿰뚫고 있는 견고한 축이다. ■ 윤규홍

Vol.20210625a | 박능생展 / PARKNUNGSAENG / 朴能生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