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암 랩소디 Cheoram Rhapsody

류장복展 / RYUJANGBOK / 柳張馥 / painting   2021_0915 ▶ 2021_1009 / 일요일,추석연휴 휴관

류장복_남동_리넨에 유채_72.7×90.9cm_20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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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주)아트레온 주최 / 아트레온 아트센터 기획 / 아트레온 갤러리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추석연휴 휴관

아트레온 갤러리 Artreon Gallery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 129 (창천동 20-25번지) B1,2 Tel. +82.(0)2.364.8900 www.artreon.co.kr

그때, 탄광촌 철암을 들락거렸던 당시에는 향수 어린 집착이 컸다. 압축 근대화에 따른 희생에 대해 막연한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스러져가는 폐광촌에 막상 들어서니 연탄시대의 아련한 추억이 먼저 와락 달려들었다. ● 온통 검은 동네의 무거운 공기 속에 묵직한 사람의 살내음이 풍겨 났다. 열흘마다 서는 장터에서,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의 공부방에서, 앞마당 뒷마당 삼은 좁은 골목길에서, 뭉글뭉글 연기 피우는 산비탈의 판잣집 굴뚝에서, 검은 저탄장 너머 파란 하늘에서, 검은 물이 흘렀다는 철암천에서, 녹색 페인트가 벗겨져 벌겋게 녹슨 삼방동 철제 다리에서, 수십 개의 철로가 어지러이 지나가는 철암역에서, 철암로를 따라 다닥다닥 늘어선 상가의 빈집에서조차 짙은 살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어릴 적 서울의 미아리고개 넘어 변두리에 고여 있던 것들이었다. ● 풍경이 땅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광경이라면 풍광은 시공간을 점유한 흔들리는 빛 자체다. 철암은 그런 풍광으로 먼저 다가왔다. 흥청망청, 지나가는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활황기가 지나가고 연극이 끝난 무대처럼 덩그러니 남아있는 폐광촌 철암의 쾡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뼈를 앙상하게 드러낸 채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노쇠한 사자의 허허로운 눈초리를 닮았다. 철암의 쇠잔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연탄시대의 유년시절이 소환되었다.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와 포개졌고 도래하는 미래와 마주 서게 했다. ● 말로 다 못해 글로 쓰고 글로 다 못해 노래하듯이 사라지는 것들에게 경배의 잔을 든다. 이즈음 전에 없던 역병이 돌아 사람과 사람 사이가 뚝 끊어져 스산하기조차 한 여름 밤에 모기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던 고원의 여름 철암을 떠올리며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안주 삼아 지금.., 을 들이마신다. - 2021.8.14 ■ 류장복

류장복_가을철암_리넨에 유채, 아크릴채색_72.7×53cm_2017~20

1. 남동 ● 2003년 1월 4일 저녁 6시 남동다방.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다방인데 집기와 테이블, 난로까지 그대로 둔 채 비어있었다. 삐걱대는 목조건물의 2층에 간판도 아직 붙어있었다.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때 눈에 가득 들어찬 풍광의 고요함에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 허름한 양철지붕 위에 소복이 쌓인 새하얀 눈과 집집마다 물컥물컥 밥 짓는 연기를 토하던 T자형 연통과 골목길을 환하게 밝히는 수은가로등과 어둠을 숨 쉬는 뒷산의 무거운 어깻죽지와 기슭을 뚫고 지나가는 기찻길과 낮게 내려앉은 초저녁의 짙은 공기.. 이 모든 걸 아가미의 숨으로 깊게 들이마셨다. 지나는 길냥이가 설경의 눈이 되어 눈을 마주쳤다.

2. 가을 철암 ● 남동다리가 보이는 철암천 가장자리에 섰다. 쌔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다시 내쉬는 깊은 숨이 붓끝에 닿았다. 따가운 가을햇살 속에서 숨죽인 시간이 촘촘하게 흘러갔다. 우물의 구멍 난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의 폭포수를 맞는 듯했다. 찬란하게 부서지는 빛 알갱이 사이로 짙은 단풍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검은 땅을 뒤덮은 시원의 붉음이었다.

3. 울음 우는 사람 ● 살려주세요! 자식 잃은 어미아비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모여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뱉어낸 첫마디였다. 이게 다였다. 이미 잃은 자식의 목숨을 되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힘에 겨워 쉰 목소리로 반복해서 말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말을 뱉을 때마다 가없는 절박함이 전해졌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마지막 순간에 터져 나왔을 법한 외마디가 어미아비의 입에서 방언처럼 되풀이되었다. 살려주세요! 이처럼 생을 압축하는 말이 없다. 생존권과 행복추구권을 돌려달라고 주문을 외는 주술사의 신령한 모습을 그들 어미아비에게서 보는 듯했다.

류장복_울음 우는 사람_리넨에 유채_45.5×37.9cm_2019

4. 철암랩소디-겨울 ● 이따금씩 부는 칼바람에 나무가 운다. 허연 머리칼이 성성한 철암슈퍼 아저씨가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응달을 피해 어슬렁거린다. 옆집 흰둥이도 아슬랑거린다. 슬레이트 지붕 위로 얼어버린 눈이 반짝거린다. 하수구의 낙수가 거대한 고드름이 되어 번쩍거린다. 저만치 그늘 속에 무진댁이 보인다. ● 옥상에 홀로 망연한 처녀가 차라리 초연하다. 앞에 보이는 독일병원 건물이 단정하게 모던하다. 병원 옥상의 두 사람, 며느리와 시어미가 장독을 열고 동치미를 퍼 담는다. ● 선탄장을 따라 담장이 이어진다. 가로등 불빛 아래 쌓인 눈이 반질반질하다.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는 적막한 밤에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들린다. 사부작사부작, 노파가 길을 건넌다. 습해서 그런가, 가로등의 망우리가 점점 커진다. ● 철암천의 녹슨 철다리가 덩그렇다. 녹색 철다리가 물기 먹은 밤의 불빛에 번들거린다. 담벼락의 어둠 속에 엉킨 것들이 수상하다. 아름답다. 연탄갈빗집 아낙이 지나간다. ● 아침이다. 오르막 저편이 환해진다. 산등성에 잔설이 희끗희끗하다. 웅글뭉글 굴뚝의 연기가 유난히 하얗다. 전신줄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빈터의 건물 벽이 빈 캔버스처럼 반듯하다. 오래된 벽화가 반쯤은 벽에 스며들었다. 골뱅이피시방의 김씨가 가던 길을 멈추고 선다. 그림자가 벽을 타고 오른다. ● ".. 검은 탄가루 속에 푸르른 잎이 돋아나니 / 가지마라 가지마라 친구야 / 가지마라 가지마라 새들아 / 나 이곳에 살고 싶어" "... ... 아아, 그곳에는 / 아직도 남겨져야 할 것이 있었다. / 폐광촌 역사에는 / 아직도 쿵쿵 타올라야 할 것이 있었다." 철암역 갤러리의 방명록에 적혀 있었던 기원석, 기형도의 싯귀에서 철암의 쇠잔한 숨소리가 들린다.

류장복_철암랩소디-겨울_리넨에 유채, 아크릴채색_45.5×259.2cm_2018~20
류장복_철암랩소디-봄눈 내리는 밤_리넨에 유채_90.9×363.5cm_2018~20

5. 철암랩소디 - 봄눈 내리는 밤 ● 철암로, 밤이다. 물오른 춘삼월의 파릇한 기운이 완연한데 눈송이가 흩날린다. 마구 달라붙어 시야를 가리더니 어느새 길바닥에 소복하다. 늙은 개가 아랑곳하지 않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길을 건넌다. ● 눈송이가 삽시간에 차창을 뒤덮는다. 툭 건드린 윈도우 브러시가 쌓인 눈을 쓸어내리자 은밀한 남녀가 수상하다. 남자의 두꺼운 손이 여자의 얼굴을 감싼다. 입술과 입술이 이어지고 눈까풀이 닫힌다. 둘은 태극 문양처럼 서로의 나머지를 쫓는다. 외롭겠지. ● 술에 취한 큰 목소리가 봉화식당의 문틈으로 새어 나와 밤의 정적을 깨뜨린다. 한 사내가 황급히 뛰어간다. 작업복 차림에 흙 묻은 장화를 신고 있다. 무슨 일일까. 깊은 지하 갱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고가 탄광촌의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옥상에서 두 사람이 다툰다. ● 누군가 걸어내려 온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눈 덮인 보도를 조심조심 걷는다. 소폭의 갈지자걸음이다. 보아하니 술 취한 타지의 이방인 같다. ● 날짐승과 들짐승이 어둠을 활강한다. 하나같은 둘, 포식자와 먹잇감은 어떻게 이 밤을 동행하게 되었을까. 장화 신은 그 사내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허둥지둥 거렸나. ●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팡팡 꽃망울이 터진다. 휘날리는 눈송이가 벌처럼 달려든다. 겨울을 잊지 말라 한다. 매번 계절이 바뀌고 나서야 계절을 알아차린다. 다가오는 봄을 살갑게 맞으리라. ● 젊은 남녀가 돌아섰다가 다시 부둥켜안고 하나 됨을 반복한다. 누군가 그들을 창밖으로 지켜본다. 떠나보내고 맞이하는 가운데 서면 태생적인 단독성을 알게 되더라. 누구나 또 언제나 외롭다.

류장복_다시만남_리넨에 유채_654.3×90.9cm_2018
류장복_철암랩소디-심매도_리넨에 유채_90.9×363.5cm_2018~20

6. 다시 만남 ● 밤에 핀 앵두나무 꽃이 발광한다. 어스름한 달빛 사이로 날짐승과 들짐승이 자연의 순리를 비행한다. 나무 아래 지친 사내와 아낙이 서로의 넉넉한 품에 안긴다. ● 작년 이맘때 뒤뜰에 앵두나무 꽃이 활짝 필 무렵 남북정상이 만났다. 난리 통에 이산가족이 된 당신은 생중계로 떠들썩한 tv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득한 그때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는 돌진해오는 기차를 등 뒤에 놓고 육중한 철다리를 냅다 달려 남쪽으로 건너왔다. 이후 낯선 타향에서 살아낸 수십 년의 세월 또한 그렇게 관통했다. 그런 당신의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차라리 고요했다. ●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다반사지만 그래도 다시 만남은 기쁨이다. 더 나은 내일이 다시 만남의 오늘이 아닐까, 되풀이되는 기시감을 느낀다.

7. 철암랩소디-심매도 ● 백두대간 자락에 꾸역꾸역 모여 든 사람들이 탄광촌을 이루고 척박한 검은 땅에 납작 붙어 굽이굽이 살아온 철암에 펑펑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퍼져 나가면 봄이 왔다. ● 자연의 속살을 파헤치며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왔지만 석유에너지 시대를 맞아 안 팔린 탄이 산등성을 뒤덮고 탄을 실어 나르는 철마가 멈춰 서자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때도 눈보라 치고 매화가 향기를 토하면 봄이 달려왔다. ● 철암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가 사그라지는 탄광촌의 끝자락에 남아 주말 관광객의 호기심어린 눈망울을 붙들고 그렇게 또 그런대로 살아가는 요즘도 눈 내리고 매향이 진동하면 어느새 봄이 찾아왔다. ● 매화 향기 그윽한 3월의 탄광촌 철암에 함박눈이 내린다. 아이 주먹만 한 눈송이가 내린다. 산등성의 저탄장, 뼈대만 남은 선탄장, 길게 늘어선 선로의 열차, 철암로에 줄지은 슬래브 건물, 판잣집이 부산한 일상을 멈추고 숨죽여 고요하다. ■

Vol.20210915a | 류장복展 / RYUJANGBOK / 柳張馥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