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遠 : "逍遙와 隱逸의 시간

박세라展 / PARKSERA / 朴世羅 / painting   2021_0929 ▶ 2021_1005

박세라_영춘(迎春)_장지에 석채, 분채, 금박_45×53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0 Tel. +82.(0)2.735.3367 www.galleryh.online blog.naver.com/gallh

심원(心遠) : 소요와 은일의 시간1. 동양문예사에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쓰고 전원으로 돌아간 동진(東晉)의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陶潛])과 화폭에 '고요함[靜]'의 미학을 가장 잘 표현한 원대 화가 예찬(倪瓚)은 그 어떤 인물보다도 추앙을 받는다. 두 인물의 공통점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세속[권력·명예·재물·경쟁]과 거리둠이란 의미를 갖는 '은(隱)'이란 단어다. ● 도연명은 전원으로 돌아간 뒤 「음주(飮酒)」 20 수(首)를 읊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5수'다. 그 핵심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인경(人境)]'에서 살아도 마치 궁벽한 산속과 같이 한가롭고 조용한 탈속적 삶이 가능한 것은 바로 '세속으로부터 마음이 먼 상태[심원(心遠)]'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화가의 은자[화은(畵隱)]'로 추앙받는 예찬은 청비각(淸閟閣)을 짓고 신선처럼 사는데, 양안격수(兩岸隔水) 기법을 통해 화폭을 삼단으로 분할한 상태에서 '인적없는 정자[공정(空亭)]'를 중심으로 한 일기(逸氣)가 초초(草草)한 문기(文氣) 짙은 그림을 그린다. ● 두 인물이 지향한 문예정신과 회화철학을 하나로 융합해 화폭에 담으면 어떤 작품으로 나타날까? 박세라 작가가 [심원: 소요와 은일의 시간]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회는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회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박세라_쇄락(灑落)_장지에 석채, 분채, 금박_45×53cm_2021
박세라_소요(逍遙)_장지에 분채, 금박_60.6×72cm_2021
박세라_소하(銷夏)_광목에 아크릴채색_36×44cm_2017

2. 이번 전시는 여타 전시와 성격이 다른 점이 있다. '심원'이란 하나의 철학적 주제를 설정하고, 그 주제에 맞는 작품을 창작한 것이 그것이다. ● '대자연의 음악[천뢰(天籟)]', '깨끗하고 상쾌함[쇄락(灑落)]', '줄없는 거문고[무현금(無絃琴)]', '목청껏 소리쳐 노래함[(狂歌)]', '한가롭게 노님[소요(逍遙)]' 등을 비롯하여 작품 제목이 평범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의 제목이 의미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용어들에 담겨 있는 철학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특히 노장철학에 심도 있는 이해가 요구된다. 주제가 있는 전시회와 작품 제목의 철학성은 작가의 예술적 창작 역량과 동시에 학문적 깊이를 보여준다. ● 작가가 소요와 은일을 상징하는 자연물과 기물에 담고자 한 철학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단 장자(莊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연상시키는 나비가 눈에 들어온다. 나비는 사실상 작가를 의미하는 데, 나비가 '흰 나비'라는 점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흰색을 통해 맑음, 순수함, 탈속, 거속(去俗)을 상징하고 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심원 차원의 흰나비가 날개를 팔랑거리면서 한가롭고 여유롭게 노니는 자유로움을 통해 작가가 지향하는 소요와 은일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 소요와 은일을 추구하는 은사(隱士)를 상징하는 기물 중 하나는 '배'인데, 목적의식 없이 물 흐르는 데로 자유롭게 떠다니는 '노 없는 배'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밖에 도연명을 상징하는 '무현금'을 비롯하여,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구름', 관료적 삶을 살지 않기에 밤에 보름달을 희롱하고 바람을 쐬면서 흥얼거리는 쇄락적 정경[음풍농월(吟風弄月)]과 관련된 '보름달이 뜬 밤 이미지' 등도 모두 은일 지향적 삶의 상징물이다. ● 몇몇 작품에는 거문고의 청명한 소리가 우리 귀를 즐겁게 한다. [천뢰] 작품에서는 흰나비가 현을 퉁기고 있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대표 인물인 혜강(嵇康)은 금(琴)의 명수였는데, 혹 혜강이 즐겨 켰지만 죽은 다음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 '광릉산(廣陵散)'을 켜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광가] 작품을 보면, 어슴푸레한 저녁 대나무 밭 사이로 난 물에서 나비가 '노 없는 배'에서 호로병에 담긴 술을 다 마신 뒤 소리쳐 노래 부르는데, 얼마나 크게 노래를 부르는지 배에 놓인 황국(黃菊) 잎이 위로 흩날린다.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술을 좋아해 종종 술에 취했던 도연명의 삶에 기탁하여 그린 그림인데, 잠자고 있는 주변의 자연물을 모두 깨워버리는, 세속적인 예법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광기(狂氣)가 화면 가득하다. 그려내기 쉽지 않은 정경이다. ●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소요정신'을 통한 은일적 공간 표현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작가다. 이번 전시회는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 장자사상에 심취했던 작가가 이후 도연명과 예찬의 문예와 회화 세계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결과물인 셈이다. 과거 문인화가에게 요구되었던 사기(士氣)와 서권기(書卷氣)가 작품 전반에 가득 담겨 있다. 작가는 작품 전반에 걸쳐 한냉(寒冷)하면서 창윤(蒼潤)한 기운을 표현하고 있다. 한냉함과 창윤한 기운을 작품에 표현하는 것은 과거 뛰어난 문인화가들도 쉽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작가의 역량이 특히 돋보이는 대목이다.

박세라_천뢰(天籟)_장지에 분채_45×53cm_2017
박세라_유선(遊仙)_장지에 분채, 은분_45.5×65cm_2019

3. 작가는 과거 문인화에서 취할 수 있는 다양한 형상과 주제를 자기화하는 창작태도를 보이고 있다. 과거 문인화가들은 이른바 사군자로 알려진 매·난·국·죽을 기본 화목으로 삼아 창작하곤 했는데, 작가의 대나무는 대부분 곧게 뻗어 하늘로 치켜 올라간 이른바 대나무 '능운(凌雲)'의 기운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 작가는 여러 작품에서 양안격수(兩岸隔水) 기법을 통해 화폭을 삼단으로 분할한 예찬의 화풍을 취하고, 아울러 무인(無人)의 '공정'을 통해 예찬이 지향한 일지청허(逸志淸虛)하고 청정(淸淨)한 삶을 화폭에 담고 있다. 그런데 예찬과 다른 점은 '공정'에 다양한 대나무를 그려 넣어 은일 지향적 삶을 사는 은사(隱士)의 탈속과 거속(去俗) 경향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전기(田琦) 등 많은 화가들이 예찬의 양안격수(兩岸隔水) 기법을 통해 작품에 임한 적은 있지만, '공정'에 대나무를 함께 그린 것은 작가의 신발상에 해당한다. ● 과거 '기교 운용을 통한 사물의 닮음[형사(形似)]'과 '작가가 지향하는 예술정신[신사(神似)]' 가운데 어떤 것에 중점을 두느냐 하는 것과 관련된 논의는 이제 '닮지 않음의 닮음[不似之似]'라는 관념으로 정착되었다. '불사지사'에서 '불사'는 신사적 요소로서 작가의 학문을 기반으로 한 예술창작 역량이고, '사'는 기교 운용과 관련된 재능[talant]에 해당한다. 작가가 예찬 화풍을 취하되 대나무를 통해 새로운 화격(畵格)을 창안한 것은 작가의 학문적 역량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제 작가는 사군자 및 산수라는 제한된 소재를 어떤 내용과 주제를 통해 조합하고 융합하느냐에 따라 우리 곁에서 멀어졌던 문인화도 오늘날 우리 곁에서 얼마든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최근 현대인의 삶과 관련하여 근대 규율사회에서 벗어나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성과사회' 혹은 뛰어난 능력이 도리어 자기 착취를 하게 한다는 '피로사회'로 규정하는 경우가 있다. [심원: 소요와 은일]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들이 감상자로 하여금 잠시나마 선유(仙遊)를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작품들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동시에 와간(臥看)하면서 한 작품씩 독화(讀畫)하는 것을 통해 작품에서 풍겨오는 '향기의 울림을 듣는[聽香]' 재미를 주는 이번 전시는 이 시대에 맞는 신문인화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박세라_추실(秋實)_장지에 분채, 금박_45.5×65cm_2021
박세라_휴한(休閑)_장지에 석채, 분채_45×53cm_2019

4. 작가는 박사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장자사상이 예술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가짐과 동시에 사공도(司空圖)가 말한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을 어떻게 작품 창작으로 연결시킬 것인가를 고민하였다고 한다. 그 흔적이 전시된 여러 작품에서 녹아들고 있다. '이십사품'의 용어를 들어 말하면, 「충담(沖澹)」의 "자연의 큰 기운을 들이마시고(飮之太和), 외로운 학과 더불어 난다(獨鶴與飛)", 「표일(飄逸)」의 "낙락하게 멀리 떠나려 하고(落落欲往), 도도하여 범인과 어울리지 않는다(矯矯不群)", 「전아(典雅)」의 "떨어지는 꽃잎은 말이 없고(花落無言), 사람이 담담하기가 국화와 같다(人澹如菊)" 등과 같은 정취가 담겨 있지만, 특히 「청기(淸奇)」의 "정신에서 예스럽고 기이한 것이 솟아나니(神出古異), 담담하여 다 거두지 못한다(淡不可收). 새벽달과 같은 듯(如月之曙), 가을 기운 같은 듯(如氣之秋)"하다는 시적 정취가 더욱 듬뿍 담겨 있다. 시의(詩意)를 회화화한 '화중유시(畵中有詩)'의 맛도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사공도 '이십사시품'을 하나의 예로 들면서 말한, '서예의 법[서법書法]' · '시의 품격[시품詩品]' · '그림의 정수[화수畵髓]'의 묘경은 동일하다는 것을 잊은 적이 없고, 이후 전시회는 사공도 '이십사시품'을 중심으로 한 창작품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이후 전시회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 조민환

Vol.20210929b | 박세라展 / PARKSERA / 朴世羅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