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what if

장윤정展 / JANGYOONJUNG / 張允禎 / painting   2021_1006 ▶ 2021_1010

장윤정_혹 what if展_학고재 아트센터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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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홈페이지_www.jeannetrouble.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협력기획 / 최정규 글 / 홍지석 디자인 / 서지희 사진 / 이도현

관람시간 / 10:00am~06:00pm

학고재 아트센터 Hakgojae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삼청로 48-4 Tel. +82.(0)2.720.1524~6 artcenter.hakgojae.com

정도(degree), 또는 적정선의 회화- 장윤정의 근작들 ● 장윤정이 2017년~2018년 무렵에 제작한 독특한 회화 작업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기로 하자. 당시 이 작가는 캔버스 가장자리에 종이 같은 것을 덧붙여 회화 공간을 확장하거나 캔버스 틀에 비정형의 작은 덩어리 같은 것들을 붙여 회화의 전체 윤곽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식으로 캔버스의 사각 프레임에 도전했다. 예컨대 〈Deep blue lake〉(2017)나 〈788%〉(2017), 〈833%〉(2017)에서 캔버스 위에는 색면과 색덩어리 형상, 그리고 붓과 물감의 흔적들이 부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면과 덩어리, 흔적들은 회화 내부, 그러니까 캔버스의 사각 프레임 안에만 머물지 않고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처럼 보인다. 장윤정이 캔버스에 덧붙인 것들, 곧 사각 프레임을 삐져나와 일렁이고 나풀대는 색면, 또는 색덩어리들의 끝자락들이 내 시야에 밀려 들어온다.

장윤정_혹 what if展_학고재 아트센터_2021
장윤정_651%_oil stick_캔버스에 유채_117×91cm_2021
장윤정_651%_oil stick_캔버스에 유채_117×91cm_2021_부분
장윤정_Edge Mirror Oval_종이에 오일파스텔_20×15cm_2021 장윤정_651%_캔버스에 오일스틱, 유채_117×91cm_2021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 일단 내 눈은 여기서 캔버스의 사각 프레임을 어떻게든 확인하려고 한다. 내 눈이 사각 프레임 안에서 회화를 바라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Deep blue lake〉나 〈788%〉 같은 작업들 앞에서 내 눈은 기어코 사각 프레임을 확보하고야 만다. 여기서 사각 프레임은 삐져나온 것들, 일렁이는 것들 때문에 잘 안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안 보이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잘 보인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 눈에 더 잘 보이는 것들은 사각 프레임보다는 삐져나온 것들, 일렁이는 실루엣들이다. 물론 그 삐져나온 것들이 보이는 순간에 내 눈은 다시금 사각 프레임을 더듬어 찾기 시작한다. 장윤정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캔버스는 더 이상 네모의 틀이 아닌 불명확한 틀"로 파생되지만 "물질적 충돌로 인해 오히려 캔버스 자체를 드러내는" 모순이 발생한다.

장윤정_455%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19_부분
장윤정_455% (1),(2)_캔버스에 유채_각 162×130cm_2019~21
장윤정_혹 what if展_학고재 아트센터_2021
장윤정_65.3%, 22.5%, 957%, 847%_캔버스에 유채_각 27.5×35cm_2021
장윤정_65.3%_캔버스에 유채_27.5×35cm_2021
장윤정_847%_캔버스에 유채_27.5×35cm_2021

그런데 이 작가가 진정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캔버스의 사각 프레임일까? 아니면 삐져나온 일렁이는 것들인가? 이 작가의 작업노트에는 '루틴에 대한 일탈행위'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여기서 '일탈'이라는 단어가 내 눈길을 끄는데 왜냐하면 '일탈'은 수사학자들이 즐겨 쓰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수사학자들에 따르면 일상적 말하기와 구별되는 특별한 말하기, 곧 문체는 '표준으로부터의 일탈'을 통해 창출된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파격과 일탈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탈은 무작정의 일탈이면 곤란하다는 것이 수사학자들의 입장이다. 무작정 벗어나는 것들을 주목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탈의 환원'을 말했는데 이것은 일탈한 것들이 결국 표준으로 포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장윤정의 작업을 관찰하면 이 작가는 일탈(덧붙은 것들, 삐져나온 것들)을 통해 루틴(사각 프레임)을 뒤흔들고 깨트리지만, 루틴 자체를 붕괴시키지는 않는(유지하는) 수준에서 그렇게 하는 것 같다. 당시 장윤정의 회화에서는 루틴과 일탈 가운데 어느 한쪽이 우세를 점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면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장윤정_Not a Square_캔버스에 오일파스텔, 유채_22.7×16cm_2020
장윤정_Basketweave Stitch_종이에 오일파스텔, 스티커_20×15cm_2021
장윤정_19%_캔버스에 유채_46×27.5cm_2021
장윤정_Docking_종이에 오일파스텔_20×15cm_2021
장윤정_16%_캔버스에 유채_22.2×22.4cm_2020

2018년 이후 장윤정은 캔버스에 뭔가를 직접 덧붙이는 방식으로 회화 공간을 변형, 확장하는 실험을 멈추고 대신 그 자신이 '씹던 껌(캔버스 꼬리표)'이나 '해시태그', 또는 '혹'으로 명명한 또 다른 실험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캔버스에 그린 이미지들, 곧 평면회화 안에 자리한 요소들이 조각으로 나타나 평면회화와 상호작용하는 작업들이 그것이다. 화면 속에 있던 물렁한 색덩어리 이미지가 물질적인 색덩어리, 즉 말 그대로 색덩어리 조각으로 변해 평면회화와 나란히 공존하는 작업들이다. 색면과 얼룩들로 채워진 회화 옆에, 또는 위에 그 색면, 얼룩과 유사하지만 근본적으로 상이한 자그마한(씹던 껌처럼 생긴) 덩어리 입체물을 만들어 놓아두는 것만으로도 관객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고, 그들의 지각-인지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이 작업들은 일러준다. 그런데 그 파장과 영향의 정도, 또는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 때때로 이 덩어리들은 더 크게 확대되어 벽에서 떨어진 회화 자체를 지탱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이 작업들은 다음의 질문, 곧 "회화의 일관성을 뒤흔들고 파괴하는 이질적인 것들은 어느 정도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 또는 "우리의 지각은 어느 정도까지 일탈을 감내하거나 포용하면서 루틴, 곧 질서를 확보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촉발한다.

장윤정_혹 what if展_학고재 아트센터_2021
장윤정_혹 what if展_학고재 아트센터_2021
장윤정_혹 what if展_학고재 아트센터_2021

장윤정의 작업이 추구하는 것은 혹시 '적정선'이 아닐까? 우리는 통상 "적절하다"라거나 "적당하다"는 말로 이상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 이 말들은 장윤정 작업이 지향하는 수준을 나타내는데 참으로 제격이다. 이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빈번히 퍼센트(%) 수치를 할당한 제목을 붙이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최근 이 작가의 관심사는 디지털 환경에서의 이미지 확대와 축소이다. 핸드폰을 들고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 하면서 지도나 사진 이미지들을 확대하거나 축소할 때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지나치게 확대할 경우 그것은 온전한 지도나 사진이미지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지점에서 그것은 아마도 그림-추상회화-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진짜로 추상회화로 보이는 순간에 그것은 본래적 의미를 상실한다. 그러면 우리는 지도나 사진이미지가 그림처럼 보이게 되는 바로 그 지점을 포착할 수 있을까? 또는 지도와 사진이미지가 자신의 본래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회화처럼 보이는 지점을 결정할 수 있을까? 찾았다! 〈16%〉(2020)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거기서 바다와 땅을 만났을 때 나는 이렇게 외쳤다. 하지만 한동안 그 그림을 바라보다가 나는 또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아닌가? ■ 홍지석

Vol.20211010h | 장윤정展 / JANGYOONJUNG / 張允禎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