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gans without Bodies: Transplantaion

주영신展 / JOOYOUNGSHIN / 朱映信 / painting   2021_1011 ▶ 2021_1128

주영신_Organs without Bodies: Transplantaion展_ 이대서울병원 아트큐브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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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신 홈페이지_www.crinia.co.kr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ECA센터·이대서울병원 기획 공모展

관람시간 / 09:00am~06:00pm

이대서울병원 아트큐브 EUMC SEOUL ART CUBE 서울 강서구 공항대로 260 C관 2층 seoul.eumc.ac.kr

"신체 없는 기관들"과 균형 잡기_주영신 회화에 대한 단상 ● 내적 정신세계나 내면 감정을 자기 회화를 통해 밖으로 표출하고자 하는 화가들이 있다. 우리가 '표현주의자'라고 부르는 화가들 말이다. '표현'이란 "내심(內心)의 체험 내지 감정을 밖으로 발산하는 작용"(竹內敏雄 外, 1989)이라는 고전적 정의를 염두에 두면 표현주의자들은 내적인 어떤 것들을 밖으로 표출하는 예술가들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표현주의자들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밖으로 표출된 위대한 예술가의 절절한 감정들을 실감나게 체험한다.

주영신_Transplantatemutat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80cm_2021

하지만 내적세계를 밖으로 표출한 작업 가운데는 '표현주의'에 간단히 귀속시킬 수 없는 작업들도 존재한다. 주영신이 "신체 없는 기관들: 돌연변이(Organs without Bodies: mutate)"로 명명한 전시에 등장하는 작품들도 그 중 하나다.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내보인다"는 점에서 주영신의 회화는 표현주의 예술을 닮았다. 그런데 주영신의 작품 앞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내적인 것은 정신이나 감정과는 썩 다른 것이다. 그것들은 "말 그대로(literally)" 안에 있는 것들이다. 주영신 회화에서 이미지들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신체 내부의 기관 혹은 세포들을 지시한다. 이 화가의 작업노트를 인용하면 그것은 "나와 당신의 몸 속 안에 웅크리고 있는 내부의 것들을 의학적 기계의 힘을 빌려 외부로 끄집어낸 것들"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면 주영신은 표현주의적 태도를 취해 표현주의 예술과는 상이한 예술작품을 산출한다고 말할 수 있다. 표현주의를 유머러스하게 뒤틀고 있다고 말하면 어떨까?

주영신_Transplantatemutat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80cm_2021

이렇게 나는 주영신의 회화가 "표현주의 예술과는 상이하다"고 썼지만 이 판단을 곧 다시 취소해야 한다. 주영신의 회화에서는 '표현'이 여전히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길버트(Katherine E. Gilbert)와 쿤(Helmut Kuhn)의 『미학사』(1939)를 참조할 수 있다. 이 미학자들에 따르면 표현은 감정이입(empathy), 곧 "인간의 느낌이나 감정, 태도를 생명 없는 사물들에 투사하는"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어떤 사물에 스며들어 합쳐져 있는 감정상태는 그 사물을 관통하여 그 자신의 이미지를 주조한다"는 것이다. 길버트와 쿤의 관점에서 표현은 결국 "생명 없는 것에 활기를 불어넣는 일(animation of the lifeless)"에 해당한다. 이런 관점을 고려하며 다시 주영신의 회화에 접근하면 이 화가는 신체 내부의 장기(臟器)와 세포를 의학전공서나 해부학책의 일러스트레이션처럼 그리지 않았다.

주영신_Transplantatemutat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80cm_2021

일단 그 알록달록한 색채들을 말해야 한다. '핑크'가 유난히 두드러지지만 그 핑크는 실제 장기들의 핏빛과는 다른 것 같다. 정맥의 푸르스름한 빛깔을 연상시키는 파란색이 존재하지만 그 파란색은 정맥의 빛깔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색채를 주관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주영신은 징그럽다고 느낄만한 형상들을 징그럽지 않은 것으로-"예쁘게"라고 말해야 할까?- 변형시켰다. 신체 장기들의 형상 역시 해부학서의 도식을 따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몸에서 떨어져 나와 서로 엉키고 결합하여 기이한 형상들을 만들어낸다. 때때로 그 장기들은 해체된 형상들로 제시된다. 심지어는 거기에 식물이나 동물 이미지들이 덧붙는 일도 있다. 따라서 주영신의 회화에서 신체 장기와 세포 이미지들은 심미적, 주관적으로 변형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사물들-장기들과 세포들의 이미지-은 독특한 활기를 부여받는다. 주지하다시피 이런 종류의 심미적, 주관적 변형은 표현주의자들이 강조하는 '표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주영신_Transplantatemutat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100cm_2021

그런데 다시금 묘한 뒤틀림을 말해야 한다. 앞서 나는 색채와 형상들이 "주관적으로 변형됐다"고 했지만 "변형됐다"고 단언하기에는 그것들은 실제의 장기와 세포들을 꽤 닮았다. 주영신은 작업노트에서 이렇게 -다소 짓궂게- 기술했다. "이것들은 원래의 것처럼 사실적이지 않다. 결국 신체의 장기이지만 신체에 뿌리를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완전히 신체 내부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아니다" 이런 까닭에 주영신의 회화를 '표현' 또는 '표현주의'와 연결하는 접근은 또 다시 난관에 봉착한다. 여기에 더해 "화가의 주관화하는 손길에 의해 활기를 얻게 됐다"고 말하기에 주영신 회화의 사물 이미지들은 이미 그 자체 활기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점을 말해야겠다. 그 장기들, 세포들의 이미지는 '생명 없는 사물들'로 보이기보다는 처음부터 '생명을 지닌 활기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표현이란 "생명 없는 것에 활기를 불어넣는 일"이라는 길버트와 쿤의 설명을 주영신의 작업에 곧장 적용할 수 없다. 오히려 화가의 주관화하는 손길에 의해 "생명 없는 것이 활기를 갖게 됐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 손길에 의해 "하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변형됐다"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주영신_Transplantatemutat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100cm_2017

지금까지의 서술에서 나는 주영신이 '표현' 개념, 또는 '표현주의자'의 태도를 취해 그와는 다른 어떤 것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을 애써 강조했다. 물론 "그와는 다른 어떤 것"을 말할 때의 나는 불안하기 그지없다. 다름을 강조할 때는 같음이, 같음을 강조할 때는 다름이 눈에 들어오는 까닭이다. 어쩌면 이것이 주영신 회화의 독특한 어법일 수도 있겠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작가는 생명-자연을 모방하면서 그것을 변형시킨다. 이로써 캔버스 위에 그려진 기관들은 생물학적인 것이지만 또한 "단순한 생물학적 의미 이상의 것"(작업노트)이 된다. 이 시점에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음과 같은 발언 곧 "예술은 자연이 끝내지 못한 것을 완성하면서 ...그것을 모방한다"(생명학)는 발언을 인용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이 테크네(Technē)라 칭한 예술은 자연을 모방할 뿐만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며 그것을 완성할 것을 추구했다. 당시 예술가들은 자연의 모방뿐만 아니라 그 변형 또한 중시했던 것이다.

주영신_Transplantatemutat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0cm_2021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예술가의 창조란 주어진 자연에 개입하여 그것을 모방하고 변형하여 제2의 자연, 보다 "완벽한 자연"을 제작하는 일에 해당한다. 내가 보기에 신체의 장기와 세포들을 해체하여 예술적으로 재조립, 재구성하고 거기에 식물과 동물 이미지까지 -일종의 이종교배 방식으로-덧붙여 얻은 주영신의 유사-키메라들(pseudo-chimera)은 이런 유형의 창조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즉 주영신의 이미지들은 지금까지 자연이 만들어내지 못한, 또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자연 사물들'로 보인다. 그 새로운 '자연 사물들'은 완벽한 자연, 아니면 적어도 완전한 평형상태(equilibrium)를 열망하는 창조주 예술가의 염원을 담지한다. 이 작가의 작업노트에는 "어지러움을 이겨내고 곧게 서는" 문제, 곧 '균형잡기'에 관한 매우 인상적인 발언이 실려 있다.

주영신_Transplantatemutat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40cm_2020

우주는 필요한 에너지를 생성시키고,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멸시킴으로써 일종의 균형을 유지한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나의 모든 부분들은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그 결과 몸과 정신의 균형, 곧 생물학적으로 바로 서려는 몸 자체의 균형을 위해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내기도 하며 생물학적 물질을 소멸시키기도 한다.

주영신_Transplantatemutat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21

지금까지의 관찰에 따르면 주영신은 생명(자연)을 분해-재조합하는 식으로 자신이 "나름의 균형"으로 모종의 평형상태를 추구한다. 앞서 나는 주영신이 한글 번역 없이 영문으로 제시한 전시제목 "Organs without Bodies: mutate"를 "신체 없는 기관들: 돌연변이"로 번역했는데 'mutate'를 '돌연변이'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변형'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주영신의 '신체 없는 기관들'이 내 눈에 한편으로 아름답게 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돌연변이나 괴물처럼 낯설고 기괴해 보인다는 점은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주영신_Transplantatemutate_3D 프린트_85×62.1×2.3cm_2021
주영신_Transplantatemutate_나무패널에 아크릴채색, 누에고치_72×49.5×10cm_2021

이 시점부터 그 "신체 없는 기관들" 앞에서 균형잡기는 작가만의 과제가 아니라 내게 부과된 몫이 된다. 미적인 것이 유발하는 쾌(快)와 추한 것이 유발하는 불쾌(不快) 가운데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물론 나는 이 질문에 간단히 답할 수 없다. 차라리 미결정의 상태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 미결정의 상태에서 나는 묘한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불명료한 즐거움에 사로잡힌다. ■ 홍지석

Vol.20211011h | 주영신展 / JOOYOUNGSHIN / 朱映信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