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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광호展 / NAKWANGHO / 羅鑛浩 / painting.printing   2021_1118 ▶ 2021_1127 / 주말,공휴일 휴관

나광호_쉽게 그린 그림_리넨에 유채_227.3×181.8cm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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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광호 블로그_blog.naver.com/art36936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21 인천형예술인지원사업 중진예술인 2차년도 창작활동 지원사업 2020 인천형예술인지원사업 중진예술인 창작활동 지원 사업

후원 / 인천광역시_(재)인천문화재단 협찬 / 빛담은공방_삼성스크린재료_판화방 주최,주관 / 국립인천대학교 조형연구소_아트스페이스 인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주말,공휴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인 ART SPACE IN 인천시 연수구 아카데미로 119(송도동 12-1번지) 인천대학교 송도캠퍼스 교수회관(2호관) 1층 Tel. +82.(0)32.835.8560 finearts.inu.ac.kr

차이와 반복의 미학: 포스트-저자성(post-authorship)의 예술"첫 번째 반복은 같음의 반복이고 개념이나 재현의 동일성에 의해 설명된다. 두 번째 반복은 자신 안에 차이를 포괄하며 스스로 이념의 타자성 안에, 어떤 '간접적 현시(apprésentation)'의 다질성 안에 포괄된다. 첫 번째 반복은 개념의 결핍과 성립하는 부정적 반복이며, 두 번째 반복은 이념의 과잉에서 성립하는 긍정적 반복이다. (...) 첫 번째 반복은 생기가 없으나 두 번째 반복은 우리의 죽음과 삶들, 우리의 속박과 해방들, 악마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첫 번째 반복은 '헐벗은' 반복이지만, 두 번째 반복은 옷 입은 반복으로서, 스스로 복장을 하면서, 가면을 쓰면서, 스스로 위장하면서 자신을 형성해간다. 첫 번째 반복은 정확성을 특징으로 하지만, 두 번째 반복의 기준은 진정성(authenticité)에 있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12, pp.74-75.)

나광호_케이프 코트_리넨에 유채_227.3×181.8cm_2021

1. 헐벗은 반복을 넘어선 '옷 입은 반복', 그리고 '개념적 차이' ● 나광호의 작업을 질 들뢰즈(Gilles Deleuze)식으로 본다면 '옷 입은 반복'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에서 대가의 명화는 어린아이의 손으로 그려지고, 그 어린아이의 작품은 다시 작가의 손을 거쳐 작품으로 탄생한다. 하나의 명화가 반복의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복이 아니라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1968)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차이 그 자체'다. — 『차이와 반복』의 첫 장 제목이 바로 "차이 그 자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라는 서로 모순된 개념이 통합되고 뒤섞이는 지점에서 새로운 개념의 빗장을 열었다. 사실 반복된다는 것은 차이가 없다는 의미이고, 차이가 나는 것은 반복되었다고 할 수 없다. 두 개념은 모순 관계에 있다. 하지만 이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는 이 두 개념을 세분화하여 모순된 개념이 맞닿아 있는 지점으로 우리를 이끌어 놓았다. 바로 '헐벗은 반복'과 '옷 입은 반복'의 구분, '개념 없는 차이'와 '개념적 차이'의 구분. 들뢰즈가 빗장을 열어놓은 이 지점에 나는 나광호의 작업을 끌어다 놓는다.

나광호_앵그리교황 십세_리넨에 유채_162×130.3cm_2020

그의 작업 방식에 대한 평가는 긍·부정이 교차한다. 어떤 이는 "예술의 위계상 양극단(고급, 저급, 상위, 하위 등)에 존재하는 행위들을 끌어당겨서 경계를 없애고 뒤섞어 놓았"다거나(이추영), "혼성모방(pastiche)을 통해 예술계에 내재하는 권력 관계, 즉 패권의 작용과 반작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구나연)는 등의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회화'에서 드러나는 창작자 '나광호'만의 그 무엇(?)을 감지하기가 어렵다"(이추영)거나, "자신의 제자들이 그린 드로잉을 작업의 전면에 앉히고 마는 것이 과연 오리지널인가?"(홍경한), 혹은 "타인의 그리기 (...) 이에 기생하는 작업"(박영택)이라는 등 부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이러한 긍·부정의 평가는 '명화'와 '어린아이의 그림', 그리고 '현대 작가의 작품'이 지닌 위상의 낙차에 집중하느냐(긍정적 평가), 아니면 유일무이한 원본성을 지니지 못하는 '그리기의 반복'이라는 부정적 인식에 집중하느냐(부정적 평가)에 따라 달라지는 듯 보인다. 하지만 후자의 부정적 평가는 그의 반복 프로세스를 '헐벗은 반복'으로 보는 입장으로, 작업의 본령(本領)을 잘못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광호_미스터_리넨에 유채_194×112cm_2020

우리가 나광호의 작업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림을 그리는 주체들이 지닌 위상의 낙차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표현의 차이('개념적 차이')다. 이것이 바로 간접적 현시의 다질성 안에 있는 특이하고 독특한 자기 형성적 반복, 즉 진정성 있는 '옷 입은 반복'의 다른 이름이다. 그의 작업은 '반복에서 드러나는 차이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형성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작업 메커니즘은 '성인→아이→성인', 또는 '전문가(대가)→비전문가(아이)→전문가(작가 본인)', '미술제도권(명작)→비제도권(아이 작품)→미술제도권(작가 작품)', '패권의 작용(대가의 표현)→반작용(아이의 서툰 표현)→작용(현대 작가의 전문적인 표현)'이라는 위상의 연쇄적인 극단적 낙차 속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반복되어 그려진다. 이 과정에서 표현은 과잉 되고, 평이한 위상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고유한 표현의 차이가 형성된다. 따라서 들뢰즈가 '차이 그 자체'에 주목했던 것처럼, 우리는 반복이 아니라 위상의 낙차에서 존재하는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그 차이가 불러오는 작품의 질감이 바로 나광호 작업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나광호_카레 한 입 주세요 소화기_ 실크스크린, 아르쉬지에 아크릴채색_91×116.7cm_2020

그는 "나에게 없는 구불구불하고 틀린 형태의 선, 그리기의 원형에 대한 모습과 미술사를 통해 훈련된 색채들과의 관계 맺기가 되는데, 이것이 회화성을 담보하고 다른 층위로 감각을 이동"시킨다고(작업노트) 말한다. 이것이 바로 위상의 낙차에서 오는 차이의 질감이며, 그의 작업을 특별하게 만드는 독특한 지점이다. 사실 나광호는 이미 이 지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예술과 장난, 가치의 높음과 낮음,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자 했다는 발언이나(작업노트),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Infandult (Infant+Adult; '아이'와 '성인'의 합성어)'와 'Amuseument (Amusement+Museum; '놀이'와 '미술관'의 합성어)'라는 극단에 위치한 단어를 하나로 묶은 개념을 제시했던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작업에서 위상의 낙차를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나광호_그래이색이야_리넨에 유채_89.4×130.3cm_2021

2. Post-authorship과 Post-originality ● 그렇다면 그의 '따라 그리기' 작업에서 주인은 누구인가? 다시 말해서 작품의 저자성, 이미지의 배타적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명화를 그린 원저작자에게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서툴게 따라 그린 어린아이에게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 서툰 아이의 그림을 세련된 작품으로 그려낸 작가에게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모두가 저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우리는 나광호가 선택한 명화를 최초의 고유한 원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말이 re와 presentation의 합성어로, '현재를 다시 현재화한다'는 의미라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명화 또한 그것이 그려질 때의 현실을 재현했기에 현재를 다시 현재화하는 '반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나광호_열린 창고_아르쉬지에 수채_80.5×120.5cm_2020
나광호_옥탑_아르쉬지에 수채_80.5×120.5cm_2020

사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떠올리면, '반복'이 대단히 특별한 방식이 아니다. 모더니즘을 떠받쳤던 일련의 생각들, 즉 작가는 ①독창적인 창조자이며, ②이런 독창적 창조자는 유일무이한 작품을 만들기 때문에 ③작품의 기원은 작가에게 있다는 생각을 타파하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은 기성품(반복생산) 변기를 작품으로 내놓거나(마르셀 뒤샹), 탈개성화 되고 대량화가 가능하게 만들거나(미니멀리스트), 원래 있던 사진 작품을 그대로 다시 찍거나(셰리 레빈[Sherrie Levin]), 반복적으로 찍은 상업적 이미지들을 한꺼번에 보여주곤 했다(앤디 워홀). 이로써 원저작자라는 배타적 소유권을 무너트리고, 모두가 '지금-여기'에서 저자인 동시에, 그 누구도 원저작자라고 할 수 없는 포스트-저자성과 포스트-원본성을 확립했다.

나광호_감나무_목판화_162×120cm_2021 (사진_이언정)

나광호 또한 같은 선상에 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질적으로 다른 국면에 있다. 위상의 낙차와 몇 겹의 재현과정은 앞서 언급한 전문가적 식견의 이미지 반복과는 표현의 형식상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의 반복은 탈개성화보다는 오히려 위계에 따른 개성적 표현이, 대량화보다는 차이를 지닌 오직 하나의 작품이, 그대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른 형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외재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용 미술(appropriation)' 양식을 띠고 있지만, 내재적으로는 모더니즘의 특성을 지닌 독특한 지점을 점유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지속 가능한 편집자로서의 역할"(작업노트)을 한다고 말했고, 그를 "3자의 존재"(이추영)라고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편집자도, 3자의 존재도 아닌, 확실한 저자성을 지닌 창작자다. 그는 어린이의 서툰 표현을 전문 시각 예술가가 사용하는 캔버스와 물감을 사용해 제도권 작품으로 탈바꿈시킨다. 이것은 '베껴 그리기'가 아니라, 새로운 재창조로, 어린아이의 그림과는 다른 미감을 우리에게 준다. 따라서 어린아이 그림을 따라 그린 그의 작업을 어린아이 그림에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으로 인식하는 것이 타당하다. —명작을 따라 그린 어린아이 그림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포스트-저자성과 포스트-원본성으로서 나광호의 작품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나광호_山房山_목판화_60×220cm_2021

근래 작가는 새로운 작업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아이들이 쓴 문구나 그림을 실크스크린 판화로 찍어(평면) 아이들이 다시 그 이미지들을 조합하여 입체조형물을 만들고(입체), 그 조형물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다시 실크스크린 판화로 찍은 후(평면), 그 위에 양감이 드러나도록 색을 칠해서 완성하는 작업(입체감 있는 평면)이다. 이 작업에서 대가의 명화는 사라지고, '평면→입체→평면→입체감 있는 평면'이라는 형식의 진동이 전면에 드러난다. 새로운 도전의 순간이다. 이러한 나광호의 새로운 시도는 미래의 그의 작업을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 안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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