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墨, 쓰고 그리다

강미선展 / KANGMISUN / 姜美先 / painting   2021_1119 ▶ 2022_0206 / 월요일 휴관

강미선_금강경(金剛經)-지혜의 숲_ 한지에 수묵_350×2200cm_2021 / 금호미술관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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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료 / 5,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쓰고 그리다. - 강미선의 추성부(秋聲賦) ● 이번 금호미술관의 초대전은 강미선의 31번째 개인전이다. 1985년 첫 개인전 이후 그는 한국과 중국을 무대로 꾸준히 작업을 발표해 왔다. 이 작가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물론, 이미 강미선이라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잘 알고 있는 관람객도 모두 3층의 「금강경-지혜의 숲」(2021)을 시작으로 전시를 감상하길 바란다.

강미선_금강경(金剛經)-지혜의 숲_ 한지에 수묵_350×2200cm_2021 / 금호미술관 3층
강미선_금강경(金剛經)-지혜의 숲_부분 / 금호미술관 3층

쓰다. ● 3층에는 그가 처음으로 발표하는 글씨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오랜 중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한국의 서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강미선이 본 중국의 서법은 표현에 있어서 매우 자유로운 것이었다. 이를 통해 기존의 한국서예에서 벗어난 자신의 글씨를 쓸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 그의 '쓰기' 작업의 대표작은 『금강경』이다. 그의 글씨는 누구의 서체도 흉내 내지 않고, 멋도 부리지 않고, 어떠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정성스럽게 닥종이를 두드리고 겹겹이 붙여서 종이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글씨를 썼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듯 글씨를 지우기도 하고 덧입히기도 하며 각 글자마다 배경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화강암 바위에 오래전 새겨진 글씨처럼 보이는 각각의 담담함을 지닌 5149개의 글자다. ● 한 글자를 쓰기 위한 수고로움은 마치 일보일배(一步一拜)에 정진하는 수행자나, 사경(寫經)에 임하는 승려의 극진한 공력과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은 금은니(金銀泥)로 장식한 고려시대의 화려한 사경과는 다르다. 담담하게 씌어진 5149자가 모여서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아우라는 보는 사람을 경건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마치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가는 대중의 묵묵한 행보 앞에 숙연해지는 것과 같다. ● 금강경에 대해 "평범함 속의 진실이며, 평범함 속의 초월"이라고 표현한 남회근(南懷瑾, 1918~2012)의 말을 강미선은 이 작품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서예의 제법으로부터 벗어나 종이 바탕과 먹의 물성에 자신을 맡기고 잘 쓰고자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써내려간 행위는 일체의 생각과 법에 머물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는 금강경을 필사하는데 어울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작업을 대하는 이러한 자세는 이어지는 다른 작업들에도 일관되게 적용된다.

강미선_대미필담(우)_한지에 수묵_98×137cm_2021 / 금호미술관 3층
강미선_대미필담(좌)_한지에 수묵_98×137cm_2021 / 금호미술관 3층

그리다. ● 2층에는 일상의 삶을 통해 마음에 담긴 사물들을 들여다보며 작품으로 풀어낸 「觀心」시리즈가 펼쳐진다. 그의 작업은 종이 바탕을 만드는 것보다 더 먼저, 하나의 사물이 작가의 마음에 자리 잡는 과정부터 시작한다. ● 가을이 되어가며 그의 작업실 마당 한구석의 백 년 된 감나무에서 덜 익은 감들이 거센 바람에 우수수 떨어졌다. 감사하게도 감물을 많이 만들 수 있어 「무언가(無言歌)」의 재료로 썼다. 끝내 가지에 붙어서 버틴 감들은 가을과 함께 익어가며 붉은 감이 되어 「관심(觀心)-감」 시리즈의 소재가 되었다. ● 마당의 파초도 남편의 지극 정성으로 겨울마다 실내로 옮기는 수고를 감내하고 고이고이 모셨더니 옆에 어린 파초 하나가 땅을 뚫고 솟아 올라왔다. 파초와의 시간들로 쌓인 마음을 들여다보며 「관심(觀心)-파초」를 제작했다. ● 이렇게 경복궁에서 만난 은행나무도, 부석사의 안양루도, 그의 정원을 쓸던 싸리 빗자루도 모두 그의 마음을 거쳐 투박한 종이 바탕 위에 얹힌다. 한동안 흙판 위에 그리고 구워내는 작업을 하였지만, 그때도 소재는 일상에서 만난 사물들이었다. 1층에는 소품의 작업들을 모아 조선시대 책가도처럼 펼쳐놓은 「서가도」가 전시되어 있다. 이렇게 걸어놓고 보니, 소재가 된 사물들이 조선 책가도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등장했던 기물들처럼 길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이 되어 흥미롭다. ● 강미선 작가는 1980년대, 20대의 시기에 수묵화 운동을 이끌었던 스승과 선배들의 열정적인 활동을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었고, 2000년대에는 민화를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수묵화 운동을 통해서는 수묵과 종이라는 재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함께 재료와 표현의 실험에 치중하게 될 때 만나는 한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민화 수업을 통해서는 삶과 함께하며 길상의 의미를 담아 감상자와 소통했던 전통 회화의 역할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충분히 하나의 작품으로도 볼 수 있는 정성껏 만든 바탕 화면을 완성된 작품으로 여기지 않고 위에 그의 마음에 고요히 담겨있는 이미지들을 얹는다. 그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석류나 연(蓮), 매화와 같은 이미지들은 전통 회화에서 길상의 이미지로도 많이 다루었던 소재다.

강미선_관심(觀心)-세심(洗心)_한지에 수묵_139×191cm_2021 / 금호미술관 2층

긋다. ● 이번 전시를 통해 강미선의 작업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은 '획(劃)'의 등장 때문이다. 관람객이 전시장 로비의 입구에서 만나는 한옥 시리즈의 대담한 선들은, 그동안 한옥을 다룰 때 기와지붕의 면을 실루엣처럼 표현했던 그의 작품세계에 변화가 있음을 암시한다. 강미선은 선으로 분출하고 싶은 욕구를 한옥의 기둥과 대들보, 서까래의 선에서 찾았다고 말한다. 이전 작품들에서 보였던 그의 운필은 주로 점을 찍거나, 갈필의 무수한 붓질로 바탕을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무수한 반복이 쌓이며, 획은 드러나지 않았다. 간혹 나뭇가지 표현이나 백묘로 그려진 기물에서 드러나기는 했으나 선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 많지는 않았다. 점들의 나열은 머뭇거림이다. 점이 연결되는 것은 방향과 의지를 갖는 움직임의 시작이다. 점의 나열과는 비교되지 않는, 선이라는 형태는 그래서 힘을 갖는다. '긋다'라는 행위가 내용을 갖게 되어 '쓰다'가 되며, 그것들의 시각적 결과물이 '선(線)'이다. 검은 먹선이 화면을 힘차게 가로지르며 기하학적으로 분할하고 있는 이번 한옥 시리즈는 그동안의 머뭇거림에 대한 마침표다. ● 이 한옥 시리즈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전시되어 있는 지하 1층은 '획'을 다룬다는 것과 '명상'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이미지들로 구성된 전시장 3면에 걸친 거대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전시의 시작인 3층과 연결된다. 3층에 전시되었던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신석(神釋)」의 구절도 다시 한번 등장한다. 한옥 시리즈를 지나 전시의 마지막 공간을 가득 채우는 「무언가(無言歌)」는 감물로 그려진 총 1430명의 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림 앞 기둥에 걸린 '관(觀)', '심(心)' 두 글자와 함께 공간 전체를 명상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종이바탕을 마련하고, 감물작업과 옻칠의 복잡한 공정을 거쳐 제작된 이 작품은 「금강경-지혜의 숲」과는 또 다른 울림을 느끼게 한다.

강미선_서가도(書架圖)_ 한지에 수묵, 수묵채색_248×1376cm_2021 / 금호미술관 1층

추성부(秋聲賦) ● 강미선의 전시를 감상하며 '가을'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전시장까지 오는 길에서 만난 만추의 풍경과 그의 작품 속 감물의 갈색빛과 국화꽃과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붉은 감의 이미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시대적 도전에 반응하여 여러 실험과 표현 모색에 뜨거웠던 여름을 지나, 깊이 있는 발색과 숙연해지는 이미지와 경구들을 얻은 그의 작품 여정에서의 가을을 들여다 본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 천 년 전, 추성부(秋聲賦)를 지었던 구양수(歐陽修, 1007~1072)에게 가을은 탄식의 계절이었지만, 천 년 후, 강미선에게 가을은 이번 전시에서 두 번 언급되는 도연명의 시구 "縱浪大化中, 不喜亦不懼"처럼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타고 꾸준히 자신의 지경을 넓혀가며 여기까지 왔지만, 일희일비로 천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담담하고 충만한 시간인 것이다. ■ 왕신연

강미선_水墨, 쓰고 그리다_2021 / 금호미술관 B1

수묵의 정서와 한지의 조형 - 강미선의 근작에 대해 ● 80년대를 통하여 전개되었던 수묵화 운동은 전시대에 일어났던 일련의 동양화의 혁신 운동과는 그 유형을 달리한다. 이전의 운동이 전통적인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대적 회화로서의 형식을 회복하는데 경주되었다면 수묵화 운동은 동양화의 정신 회복을 주창하였다는 점에서 보다 근원적인 것을 추구하려는데 그 중심을 두었다는 점에서이다. 이상세계를 추구하려는 동양적 관념의 세계 즉 형식과 내용을 벗어나 수묵이란 질료를 통해 고유한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데서 앞선 어떤 혁신적 운동과도 차별화되었다는 것이다. 변혁이란 문맥에서 본다면 수묵화 운동 역시 앞선 혁신적 운동과 일정한 영향 관계를 가늠해볼 수도 있으나 동양화의 고유한 정체성을 추구한다는 열정에서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 80년대란 한 시대를 통해 이처럼 뜨거운 전개 양상을 보여준 운동은 일찍이 없었다. 이 운동은 특정한 그룹에 의한 통상적인 발표의 형식을 벗어나 무집단성을 띠면서 동시에 집중적인 게릴라 형식의 무대를 만들어갔다는 데서도 그 전례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운동은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그 열기가 식어갔다. 그러나 그 여진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 운동에 관계되었던 작가들이 개별단위로 운동의 정신을 이어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에 의한 방법이 개별로 분산되면서 이 운동을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계승해갔다. 강미선의 경우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작가로서의 데뷔와 성장에 있어 수묵화 운동과 관계되고 있음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 수묵화 운동에서 두드러진 조형적 특징은 필의(筆意)에 의한 자각과 수묵과 바탕으로서의 한지와의 관계에 대한 천착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필의가 내용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한지와의 관계는 형식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수묵화 운동에 참여하였던 작가들을 대별해보면 대체로 이 두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이 두 유형을 적절히 융화해가는 경향도 없지 않다. 강미선의 작품상의 특징을 어느 한 카테고리에 가둔다는 것은 모순이라 생각된다. 필의에 대한 방법적 추고도 간과할 수 없으며 수묵과 한지와의 관계 역시 두드러진다는 점에서이다. 그러나 초기에서 최근에 이른 그의 역정에서 보았을 때 필의를 중심으로 하는 내용성에서 보다 수묵과 바탕으로서의 한지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형식적 실험이 앞서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 수묵과 바탕의 한지와의 관계에 대한 조형적 실험은 비단 수묵화 운동에서만 엿보이는 것이 아니다. 7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단색화의 경향에서도 발견된다. 수묵화 운동과 단색화의 경향이 흥미롭게도 닮은 점이 적지 않다. 이는 일종의 시대적인 정신의 견인 현상이 아닌가 보인다. 결코 이 두 경향은 서로 영향을 주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한 시대 정신의 공유가 불러일으킨 독특한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 단색화 작가들 가운데 한지를 바탕으로 사용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는 것에 대해 그들이 동양화의 형식을 닮으려 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한지가 지닌 정서의 내면을 발견했다는 차원의 문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근대기에 활동했던 작가이자 미술사가인 윤희순은 "아마 세계에서 우리들만큼 종이와 친숙한 인종은 없을 것이다"라고 그의 「조선미술사 연구」에서 피력하고 있다. 우선 극동(한국, 중국, 일본) 3국만 하더라도 생활공간에 차지하는 종이의 비율만을 보면 단연 한국이 앞서고 있다. 지금은 생활공간의 변화로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전통공간에서의 종이의 사용처는 벽지, 창호지, 장판지 등 생활 공간 전체가 종이로 뒤덮여 있는 형국이다. 한국인은 요람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종이에 에워싸여진 공간에서 살다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인에게 있어 종이-한지는 단순한 물질로서 파악되는 것이 아닌 정서의 현전으로 파악해야 하는 이유이다.

강미선_무언가(無言歌))_한지에 감물, 옻칠_260×3298cm_2021 / 금호미술관 B1

강미선의 작업은 지지체에 가해지는 일반적인 그리기의 과정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수제 한지이면서 작가는 이를 자신의 공정(工程)으로 또 하나의 작업을 진척시킨다. 공장(工匠)이 기술적으로 만든 한지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작업으로서 평면을 표면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평면을 표면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것은 단순한 기능적인 쓰임새로서의 평면이 아닌 독특한 표면의 창조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리기에 앞서 이루어지는 이 과정은 회화 일반의 차원에 못지않은 중요성이 확인되는 일이자 조형적 실현이란 과정에 상응되는 것이다. ● 여러 겹을 발라올린 한지의 표면은 일반적인 종이로서의 수용성의 기능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태어난다. 미세한 융기로 덮이는 표면은 일종의 전단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위에 이루어질 어떤 행위를 수용할 준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표상의 체계가 아닌 수묵과 한지의 만남이란 구조화는 단순한 바탕과 이 위에 가해지는 일정한 행위의 관계라기보다 하나의 실존으로 구현된다는 점에서 그 독자의 조형 전개가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로 본다면 이는 일반적 회화로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진행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다름없다. ● 완결되지 않고 진행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생명체이다. 단순히 기능적으로 만듦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으로서 말이다. 화면에 나타나는 풍경이나 정물이 일반적인 보는 행위로서 설명을 넘어 서서히 다가오는 어떤 기대감으로 설레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그가 내세운 《水墨, 쓰고 그리다》란 표제는 단순한 서화동원(書畵同源)의 형식의 환원을 기도한 것이 아니다. 바탕(지지체)과 이 위에 가해지는 수묵은 단순한 표상의 체계가 아니다. 바탕과 이 위에 가해지는 수묵은 행위와 물성의 만남이란 극적인 과정을 거처 그 고유의 존재로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설명을 앞질러 오는 존재감이다. 완결되지 않은 하나의 경향성이라 말할 수 있다. ● 화면은 더없이 내밀하다. 담묵에 의해 시술되는 표면은 부드럽고 아늑한 공간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안으로 가라앉으면서 한편으론 은밀히 밖으로 솟아오르는 경향으로 인해 더욱 구조적인 차원을 만든다. 담묵과 더불어 감물이나 옻물로 이루어지는 표면은 일종의 포화상태를 만들면서 표면에 풍부한 표정을 일구어낸다. 이 같은 복합적인 화면조성은 깊이로서의 구조에 상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잠식된다는 것은 화면의 구조적인 일체화를 높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속된 것을 가라앉히는 정신의 순화와도 대응된다. ● 또한 화면을 수묵으로 다독이는 작업은 화면의 숙성을 위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쩌면 이 숙성의 독특한 방법은 화면에서의 작업이란 한계를 벗어나 정신의 순화 과정에도 비유된다. 동양인들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는 행위에만 머물지 않고 그림과 글씨를 통해 부단히 정신의 경지를 추구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의도가 없다면 그것은 한갓 속된 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점이야말로 동양의 예술이 갖는 독특한 내면이다. 강미선의 작업은 이를 애초에 의식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가 추구한 방법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이면서 자신도 모르게 근원에 가 닿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미선_무언가(無言歌)_부분 / 금호미술관 B1

그가 다루는 소재는 비근한 일상의 사물들이다. 생활 주변에 산재하는 대상들 예컨대 생활기물로서 접시, 대접, 잔, 병 등의 식기류와 과일, 전통적인 가옥의 구조, 기와지붕, 돌담, 그리고 화초 등 하나같이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이외에 문인화의 소재나 산수화는 동양화의 기본적인 화제들이다. 다소 특이하다면 최근에 다루기 시작한 불상과 불경(佛經) 등이다. 이 같은 소재의 범주만 본다면 대단히 평범한 것들로 오늘날 일반적인 회화의 소재로서는 결코 선호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특별한 소재, 기이한 소재의 발굴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오늘의 풍토에서 본다면 시대 감각이 뒤처진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그의 화면을 통해 등장하는 이들 소재는 익히 알려진 것임에도 전혀 다른 존재로서 다가온다. 평범한 것들이 평범하지 않고 새롭게 보인다는 것은 작가의 소재에 대한 각별한 애정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으며 또 한편 그 특유의 구조적인 화면형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독특한 구조의 형성에 투입됨으로써 대상들은 일상적인 관념이나 시각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 사물들은 조심스럽게 아니 담담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서서히 걷히는 운무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과 같이 기다림을 내장하고 있다. 아니 기다림을 통해 마침내 다가오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 그의 화면을 보면서 문득 청대(靑代)의 화가 대희(戴熙)의 화론에 언급된 "수정월잠(水定月湛)을 떠올린다. 물이 고요하면 달이 잠긴다는 것인데 그가 그리는 대상들이 한결같이 고요한 물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이다. 화면 전체로 침투된 담묵의 포화상태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현상이라고나 할까.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대상은 현실의 소재이면서 현실을 부단히 초극하고 있다. 통상적인 시각의 차원을 벗어나 또 다른 차원을 만들어낸다. ● 동양인들은 하늘에 떠 있는 달보다 물속에 잠겨있는 달을 더 탐닉한다. 고답적인 심미안이라고나 할까. 하늘에 뜬 달은 현실이지만 물속에 잠긴 달은 현실을 벗어나 자신의 심경을 반영해주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늘에 뜬 달보다 더욱 고요함을 지닌 물속의 달을 닮으려는 염원으로서 말이다. ● 또 하나 그의 화면이 지니는 특이한 구조는 전체이면서 하나인 세계, 하나이면서 전체인 세계를 지향하는 점이다. 어쩌면 이 점은 그의 화면형성이 보여주는 구조적인 특성에 상응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작은 화면에 그려진 불상이 수없이 이어지면서 일종의 천불상을 연상시키는데 작은 단위의 화면에 그려진 불상이 반복되면서 거대한 화면을 만든다. 불상은 각기 하나하나 독립적이지만 수없이 반복되면서 전체가 된다. 그것은 하나일 수도 있고 수많은 것일 수도 있다. 불교의 세계에서 말하는 존재의 현전, 즉 하나는 수많은 전체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하나로 환원되는 세계로서 말이다. ● 산수의 소재나 화훼의 그림들도 개별로 이루어지면서 병풍 형식이나 책가도와 같은 연결구조로 등장한다. 이는 일종의 연작개념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본다. 하나하나 떼어내어도 무방하고 연결되어 거대한 화폭으로 구성되어도 어색함이 없다. 이 같은 구조는 연작을 한 화면으로 구조화시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역시 그가 지향하는 조형의 차원이 개별로서의 완성보다 전체를 향한 경향성의 한 단면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전체 속에서 개별이 의미가 있고 개별을 통한 전체에 이르려는 염원이야말로 그가 바라는 세계 그가 꿈꾸는 세계의 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단순히 본다는 일반적인 시방식이 아닌 심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된다. ■ 오광수

Vol.20211123f | 강미선展 / KANGMISUN / 姜美先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