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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주관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예술학과 현대미술학회 C.A.S. 후원 /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관람시간 / 12:00pm~07:00pm
온수공간 ONSU GONG-GAN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1길 74 (서교동 376-7번지) 2,3층 Tel. 070.7543.3767 www.onsu-gonggan.com
현시대의 이미지는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점차 중첩된다.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 또한 이리저리 얽혀 버린다. 그렇다면 세계의 이미지를 단단히 연결 짓는, 우리의 알레고리는 안전한가. 알레고리는 파편적이고 이질적인 대상들의 병치이다. A를 감지하고, B를 인식하는 일종의 도상이다. 그러나 이미지의 범람, 또 그것을 촉진하는 생산과 수용의 혼돈이 이미지의 알레고리를 위협한다. 알레고리가 연결하던, 이미지의 고리는 결국 너덜너덜해진다. ● 그 속에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상황은, 우리의 몸이 희미해진다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몸은 과거 우리의 현존을 증명하는 알레고리였다. 그러나 우리가 몸에 의해 그리고 몸을 근거로 공고히 지각하던 현존은, 점차 모호해지는 상황에 직면한다. 인간의 행동 양식은 몸에 대한 의존을 점차 거부한다. 실재하는 세상에서의 우리가, 가상에서도 살아 숨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 우리의 현존을 증명하는 몸은 가상 속에서 재현-변형되며 압축-팽창된다. 또는 완전히 다른 것을 표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존을 의심하지 않는다. 디지털화된 장소에서 살아 숨 쉼을 지각한다. 즉, '신체 이미지'는 신체를 대신하여 현존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 몸만이 우리의 현존을 증명하던 시기도 있었다. 인간은 이상화된 몸을, 정상으로 여겨지는 표준화된 몸의 형상을 염원했다. 오늘날 우리를 옭아매던 그것의 알레고리는 해체된다. 휘몰아치는 이미지의 범람, 또 너덜너덜해진 알레고리, 그 안에서 몸은 자유롭다. 그것을 표상하는 이미지 또한 그 안에 유영한다. ● 본 전시에서 작가들은 이미지 범람의 시대 속 신체의 아키비스트다. 이들은 여러 신체와 신체 이미지들을 모으고 조합하고 흩뿌린다. 불완전과 완전의 경계 속에서,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채 오로지 변이되는 몸의 알레고리, 지금의 이 상황을 읽는 무언가로 우리는 이 전시를 제시한다. ■ C.A.S. 2021
작가 김성연의 작업은 신체에 대한 고민으로 점철된다. 평면 작업에서부터 전시장 구석으로 시선을 옮기게 하는 설치 작업, 몸을 이용하는 퍼포먼스까지,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며 그가 탐구하고자 하는 바는 '신체'라는 용어로 명명되는 것의 본질과 그 가능성이다. ● 「Second Skin」과 「부서진 몸의 조각」은 보이지 않는 신체인 장기를 꺼내어 보여준다. 두 작업은 보유하고 있음에도 의식하지 못하고 행위하고 있음에도 자각하지 못했던 신체를 주목하게 만든다. 이들 작업은 보이는 방식에서도 관객의 움직임을 요구한다. 나에게서 분리되어 이미지로 존재하는 신체를 마주하거나, 나의 신체를 작동시키는 체험을 통해 그것의 정의와 기능에 대해 사고하게 된다. ● 「Hugging Session」과 「웨어러블 오브제」는 나의 신체에서 타인의 신체로 나아가며 신체의 범주를 정의하는 것을 시도한다. 두 인물의 옷이 연결되어 신체적인 접촉과 범주의 확장을 암시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나의 신체는 타인의 타자성을 보증할 수 있는 것으로 확장된다. 신체는 상호의 존재를 증거하는 협동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한편으로는 서로의 물리적인 경계를 침범하고 심리적인 불편함까지 야기하기도 한다. ● 이처럼 작가 김성연은 비가시적이었던 신체의 일부를 꺼내어 그것을 직면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타자와의 관계로까지 신체의 개입을 확장한다. 그의 신체는 행위의 주체 혹은 접촉의 경계라는 신체의 단선적인 해석으로부터 발전해가며 다층적으로 정의되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 장유진
김성연은 교차, 병치, 결합의 방식으로 '몸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검은 바다'는 그의 이미지가 탄생하는 지점이자 영상의 자막으로써 제공되는 '꿈의 텍스트'에서 1인칭 화자의 내러티브가 시작되는 공간이다. 그의 작업에서 텍스트로 전환된 무의식은 신체 이미지가 가진 일종의 상징체계를 해체하는 역전의 방식을 취한다. ● 현미경으로 확대된 작은 털과 표피. 그것은 기하학적 형태로 압축된 듯 나타난다. 우리와 끈끈하게 결합한 것들에 대한 마주침은 낯설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손과 전신이 일렁이며 김성연은 몸의 이미지, 즉 극소 부위와 외연의 움직임이 갖는 모종의 관계를 탐색한다. 꿈과 같은 무의식 단계에 진입하여 다소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들을 교차하거나 결합한다. ● 무의식에서 획득되는 내러티브는 무작위로 추출해낸 영화 장면을 소위 얼기설기 엮은 것과 같다. 그것이 암시하는 불완전한 개연성은 자아가 겪는 욕동과 자극이 만들어내는 일련의 기록들에 기대어 나타난다. 그동안 끈끈하게 결합되어 있던 몸의 일부는 이미지로써 분리된다. 그러나 그것이 지닌 내러티브와 유사하게, 몸의 이미지는 그것이 겪은 일련의 기록들을 재생한다. 이는 작가의 의도에 의하면 '분할과 연결'이다. 「검은 바다」가 제시하는 몸의 이미지는 그가 임의로 구분한 몸의 두 부류가 '분할과 연결'을 맺는 과정, 혹은 그것과 결부된 전체의 외연을 인지하려는 그의 시도이다. 즉, 무의식의 상황을 가정하여 그것이 겪어온 일련의 기록들을 탐색하는 '몸의 인지법'이다. ■ 유가영
이경주 작가의 회화 속 '영미'의 신체는 인간의 이상적인 신체와는 어긋나게 표현되어 관람자가 영미가 인간인지 인간이 아닌지 판단하는 것에 대해 혼돈을 야기한다. 영미의 신체가 사람들 인식 속의 이상적인 신체 규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영미를 보며 익숙하지 않은 불편함과 기이함을 느낄 수 있다. 이경주 작가는 익숙하지 않은, 소외상태에 있는 존재들을 회화를 통해 이미지로 구현해낸다. 유화의 특징적인 질감 탓에 영미에게서는 '애브젝트 abject 성' 이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더욱 극대화되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준다. ● 그로테스크한 대상은 사람들의 인식 체계에 침입하기 때문에 파괴적이다. 기존의 개념을 전복시키기 때문에 위험한 것으로 여겨진다. 위험한 것의 힘을 중화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격하시키는 것 밖에는 방도가 없다. 작가는 이러한 우스꽝스러움을 역 이용한다. 영미는 과장되고, 노골적이고, 상스럽게 표현된다. 관람객들은 이를 보며 불편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귀여움과 사랑스러움 또한 포착하게 된다. 좋아할만한 특성이 아닌 것이 좋아할만한 것이 되면서, 불편함에서 시각적 재미와 쾌감을 얻는다. ● 영미는 더 이상 소외된 타자의 위치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신체를 긍정하며 고정된 사고를 해체한다. 영미는 이렇듯 독자적인 신체를 관객들의 새로운 인식의 범주로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에 혁명적이다. 혐오스러운 동시에 매혹적인 이중성을 내포하게 된다. ■ 장명수
영미와 집요정은 어떤 모습인가. 영미는 웃고 있으며 집요정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들의 모습은 그로테스크(grotesque)한 형태에 숨김없는 감정 표현까지 더해져 이 세계에 이질적이다.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감정을 보이는 것이 이전처럼 자연스러운 자질로 여겨지지 않고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것과 동일시 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기피해야 하는 대상, 약함과 부끄러움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들을 내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종종 감정의 맹목적 힘, 울고 웃으며 화를 내는 등에 압도당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다양한 감정은 얼굴, 더 넓게 말하면 육체를 통해 드러난다. 영미와 집요정, 이경주 작가로부터 창조된 존재들은 '우리' 그 자체이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육체를 통해 부각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유의 형태를 가진 몸을 통해 표출된다. ● 그로테스크는 근본적으로 인간성을 해체하고 있다고 보여졌기에 부정되어왔다. 그의 작품들은 이를 뒤집는다. 역설적으로 '무서운 존재'들이 우리가 경시해왔던 감정의 힘, 공감과 상호주관성을 내재한 감정이입을 하도록 한다. '나'를 '타자'로 옮겨 그들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직접적으로 자각되는 타자의 육체를 실마리로 한다. 영미와 집요정은 일그러진 신체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있고 응시를 경험한다. 우리는 마치 그들이 대신하여 웃어주고 울어주고 있다는 착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바라보는 행위는 간접적 교류를 넘어 직접적인 감정교환이 이루어 지고 인식론적인 타자의 이해를 넘어서서 하나 되는 순간을 제공한다. ■ 강희조
「The Emotions of Tears」는 AI GAN에 의해 생성된 '눈물 흘리는 사람'이다. 인간의 표정 데이터를 학습한 AI를 통해 산출해낸 이미지로, 눈물 흘리는 사람의 대표적인 패턴으로 여겨지는 눈과 눈물이 생략되거나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앞에서 우리는 감정적 동요를 느끼게 된다. ● 이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과정에 대한 본원적인 질문을 끌어낸다. 우리는 타인의 표정에서 감정의 단서를 찾아내 해석, 소통한다. 감정은 다양한 표정, 제스처, 눈빛 등의 병치로 이루어진 알레고리인 것이다. 장윤영의 이미지에서 감정의 관습적 도상이던 코드들은 중첩되거나 감춰져 그 알레고리는 느슨해져 있다. ● 기계를 통해 분석, 전달되는 것은 계속해서 익숙해지는 흐름이다. 여기에서 장윤영은 쉽게 읽히던 감정의 알레고리만으로는 더 이상 전과 같은 정도의 이해를 얻을 수 없을지 모름을 시사한다. 공유할 수 있던 감정의 깊이가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존 역시 마찬가지다. AI 생성 이미지가 손쉽게 감정적 동요를 일으켰듯, 우리는 만져지는 신체 없이도 어려움 없이 서로의 현존을 인식한다. ● 이 시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이해, 만져지는 살과 공유되는 시공간에 대한 감각을 기계가 표상해낸 현존을 마주하는 일상에도 무사히 안착시키는 것이다. 몇몇 코드들로 분석된 감정, 접속 상태로 표상되는 우리의 현존이 어느새 무한하되 한없이 얕은 것이 되기 이전에 그것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 이민영
끝도 없이 세밀해지는 기계가 내 머리맡에 당연한 믿음으로 자리하는 동시대 생태 환경에서, 장윤영은 주체성을 가지고 일련의 기술과학적 활동을 통제하는 것 같아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범위는 점차 좁아지는 상황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 한정된 범주 안에서 인간은 때늦은 사유를 시작한다. 장윤영은 이러한 반추가 가능하도록 하는 인공적인 환경을 가장 첨단의 기술로 제공한다. ● 「GAIA」에 등장하는 저화질 픽셀의 캐릭터는 미국의 문학자이자 생태문화이론가인 스테이시 엘러이모가 통찰한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을 떠올리게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체를 넘나들고 구성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게임 속 인간의 형상을 한 캐릭터 역시 방사능, 분진, 오염된 먹거리, 독성물질이 축적되고 통과하는 생물학적 신체일 뿐만 아니라 산업 시스템, 권력 구조, 경제적 이권 다툼이 침투하는 물질적 실체다. 게임 내부에서 스러지고 부활하기를 반복하는 신체이자 실체는 대수롭지 않게 버튼을 클릭함으로써 발생하는 유해한 가스, 척박한 땅, 썩어버린 음식, 그리고 그 버튼을 클릭할 수 밖에 없도록 설계된 시스템, 클릭된 버튼에 의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사회적 체제가 맞물린 복잡한 네트워크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리서치 속 지극히 구체적인 숫자들은 게임 사용자인 내 몸 또한 격렬한 횡단의 거점이 아닌지 자꾸만 의심하게 만든다. ● 장윤영이 「GAIA」에서 치밀하게 설계한 이 불편한 부딪힘은 인간의 총체를 질문하게 한다. 이같은 내밀한 사유도 언제 물질화되어 다시 인간과 낯설게 마주하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 권홍은
호모폴리넬라는 다른 지구 구성 종과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종으로 진화했다. 이 지구에서 삶을지속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종과 함께 살기를 택했다. 게다가 그러한 진화의 이유는, 환경 문제 그리고 그것과 연결되는 식생활 루틴의 변화였다. 기존의 인류가 부과한 과업같은 것, 즉 지금의 인간이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고민하고 있는 부분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호모폴리넬라의 신체는 단지 인간의 몸만이 아니라 지구의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는 복합적인 신체로 인식될 수 있다. 그래서 호모폴리넬라라는 개체의 몸은 단순히 몸이 아니다. '다양한 물질의 창발적 효과'가 일어나는 공간 속/관계 속 '신체'가 된다. 호모 폴리넬라는 인간에서 진화한 생물체이지만, 과연 그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야기한다. '갖고 태어난' 것들에 대한 인위적 조작으로, (2022년의 기준에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능력을 갖추었으며, 그에 따라 흔히 인간이라 인식하던 외양과도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하나의 거대한 시대 흐름으로 국가의 주도 하에 진행되었다. 불가피하게 자발적인 세대 교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한 점에서도 호모폴리넬라의 몸은 기관으로서의 신체가 된다. 안과 바깥의 경계로써의 신체가 된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던 지구의 여러 담론들이 축적된 신체가 된다. ■ 문채원
벌써 2년째 전 세계를 마비시키는 바이러스. 예상치도 못한 순간 창궐한 COVID-19는 인간이 어려움 앞에서 얼마나 무자비해질 수 있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우리는 근거 없는 인종차별, 이에 따른 폭행, 버려진 마스크에 다리가 잘린 작은 새들을 목격했다. ● 얄루의 호모 폴리넬라 프로젝트는 우리가 겪은 이 팬데믹의 경험에서부터 본격화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이버펑크(cyberpunk)적 요소를 기반으로 비디오 맵핑이나 미디어 파사드 등 다양한 미디어 작업을 선보이는 얄루의 작업 중 2020년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호모 폴리넬라 프로젝트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얄루는 이번 전시에서 벽과 창문 이곳저곳을 부유하는 민달팽이와 해조류의 형상을 호모 폴리넬라 생태계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일종의 디오라마(diorama)로 정의한다. ● 얄루의 작업은 인간중심주의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시각을 탈피한다. 포스트휴먼의 모델로서 제시된 호모 폴리넬라는 신체에 대한 기존의 정의를 의문시하며 고전적 휴머니즘의 가정을 파기한다. 얄루는 고전적 '인간'의 범주에 들지 못하던 타자를 포스트휴먼의 몸 안으로 끌어들인다. ● 이러한 전회는 다가올 미래에 인류가 가져야 할 새로운 윤리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얄루가 제안하는 포스트휴먼―호모 폴리넬라―의 모습은 기존의 인간중심적이던 인류세의 시각을 상쾌하게 전환시킨다. 새로운 인간, 이것이 다가올 우리 지구 공동체의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 줄 희망의 실타래가 될지 모른다! ■ 김서영
□ 전시 연계 학술 세미나 - 「포스트 미디어 시대의 신체와 예술-'정동' 문제를 중심으로」 강연 -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 최소영 - 1월 7일 / 홍익대학교 종합강의동 UB101호
Vol.20220104c |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