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ors of Time 시간에 색을 입히다.

윤정원展 / YOONJUNGWON / 尹晶湲 / painting   2022_0217 ▶ 2022_0227 / 월요일 휴관

윤정원_우리들의 시간_비단에 채색, 금박_249.6×200cm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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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2층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윤정원의 꽃 회화, 그을린 평면(들)1. 푸른색에 의한 종합 마음이 담기는 그림들이 있다. '마음'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지만 그린 이의 감각이, 느낌이, 정서가 화면에 응축되어 있어 담담히 보는 이를 그 앞으로 이끄는 그림. 딱히 구구절절한 사연을 이미지로 묘사한 것도 아니고, 억눌린 감정을 분출하듯이 물감을 흩뿌리거나 붓질을 드라마틱하게 구사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감상자의 시선을 붙들고 심리적인 자극을 준다. 그런 그림들은 대체로 시각적으로 매우 질서 있으며 우아하고 정적인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동시에 그런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를 배반하는 기이하고 균질하지 않은 특정 면모를 반드시 포함하고 있다. 마치 완벽하게 맞춘 것 같은 9999개의 퍼즐에 단 한 개의 조각이 부재하듯이, 완벽한 좌우대칭의 얼굴에서 왼쪽 볼에 난 작은 점을 지울 수 없듯이. 그렇게 마음이 담긴 그림에는 어떤 결여나 상실, 혹은 이질성이나 불협화음이 동반한다. 흥미롭게도 그래서 그런 그림은 작품을 보는 감상자의 마음을 오히려 붙잡고, 뭔지 모르게 신경이 쓰여 생각과 감각을 거기로 집중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윤정원_금빛 찬란한 날들_비단에 채색, 금박_159×129.2cm_2022
윤정원_내 몸은 보다시피 하나_비단에 채색_159×129cm_2021
윤정원_그해 늦여름 새벽_비단에 채색_200.5×127cm_2020

윤정원의 회화가 그에 속한다. 2004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니 올해로 작가 경력 18년에 이른 윤정원은 그간 '한국화'라는 큰 틀과 '비단에 채색', '장지에 먹, 채색', '비단에 채색, 금박'이라는 질료 면에서는 거의 일관된 흐름을 지켜왔다. 그런데 그 흐름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2014년을 전후로 깊은 단절이 있었던 것 같다. 우선 조형적인 변화가 두드러진다. 즉 먹색을 써서 화면 가득 커다란 국화꽃을 선묘하거나 반대로 온갖 화려한 색들을 써서 다양한 꽃, 새, 별을 묘사한 이전과는 달리, 2014년 이후로는 천연광물성 무기안료인 석청(石靑)을 써서 푸른색의 꽃을 무성하게 드러내는 식으로 표현이 압축됐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점은 작품이 풍기는 분위기, 그래서 감상자가 느끼는 심리적 지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의 그림들은 작가의 뛰어난 묘사력과 사람들이 애호하는 형상(예컨대 아름답게 만개한 색색의 꽃들, 금박 혹은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별들, 깃털까지 정교하게 그린 파랑새 등)이 어우러져 시각적으로 즐겁고 고운 화면을 창출했다. 대표적으로 2013년 작 「아름다운 날들」을 보라. 그런데 그 이후의 그림들에는 앞서의 미적 요소들이 모두 푸른색이라는 하나의 강력한 원칙에 복종함으로써 적당한 조형적 아름다움과 그에 의한 만족스런 감상의 구도를 넘어 어딘가 기이한 부분 혹은 특성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해서 감상자의 신경을 건드리되 회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로 이끄는 회화가 되었다. 물론 이때 신경을 건드린다는 뜻은 단순히 쾌/불쾌로는 정의할 수 없고 오히려 '의도치 않은 마음 씀'에 가깝다. 그리고 이끌림은 그림에 담긴 '마음에 반응하는 일'일 것이다. 가령 내가 처음 윤정원의 작업실에서 푸른색이 지배하는 그녀의 최근작들을 마주하자마자 예술적 탁월함이나 미학적 완결 대신 자기 해체와 파괴의 미적 충동을 떠올렸던 정황이 그렇다. 그럼, 푸른 꽃들로 화폭 전체가 꽉 찬 그녀의 그림들에 어떤 마음이, 어떻게 담겼고 가시적으로 드러났기에 나, 감상자로 하여금 그것에 교감하게 했을까? 어떻게 해서 스테레오타입의 '꽃그림'에서 벗어나 윤정원만의 '마음이 담긴 꽃 회화'가 되었을까?

윤정원_내 몸은 보다시피 하나_비단에 채색_159.5×129.5cm_2021
윤정원_내 몸은 보다시피 하나2_비단에 채색_159.5×129.5cm_2021
윤정원_내 몸은 보다시피 하나 B2_비단에 채색_159.5×129.5cm_2021

2. 그을린 평면과 그 이면의 세계 ● 윤정원의 그림 속 푸른 꽃은 국화가 첫 모델이었다. 작가에 따르면 자기부정이나 좌절감 같은 심리적 고통이 극심했던 시기가 있었고, 당시에 작업은 물론 일상생활조차 해나가기 힘겨웠다고 한다. 그때 유일하게 했던 일이 국화그리기였다. 알다시피 국화는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조문의 꽃, 영정 앞에 놓이는 애도의 꽃이 아닌가. 그리고 미술에서는 입시 동양화의 기초 중에서도 기초, 수많은 꽃잎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리다보면 손이 자동으로 움직이게 되는 소재다. 그런 국화를 작가는 시간을 견디고, 자신을 견디기 위해 매달려 그렸다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그 고통이 성과가 되어 2009-2010년, 윤정원이 「Sublime」이라 이름 붙인 무겁고 어두운 국화 연작이 나왔다. 마치 스스로를 죽이고, 또한 스스로를 애도하듯이. 그런데 이 시기를 거친 후 차츰 윤정원의 꽃그림은 푸른색으로 종합된다. 국화에 한정하지 않고 모란, 작약, 카네이션 등 다양한 꽃과 식물들이 수직으로 높이 솟는 구도의 그림들인데, 오직 색채만이 눈이 시릴 정도로 발색이 강한 청색에 응결되었다. 이러한 과정의 뒤를 밟다 보면 우리는 최근의 윤정원 회화가 어떻게 조형적인 테크닉의 우수성을 넘어 감상자의 마음을 이끄는 힘을 발휘하는지 파악하게 된다. 이를테면 한 인간의 마음이 겪은 심리적 행로의 우여곡절은 수다스러운 시각언어 대신 하나의 색을 취하게 했다. 그리고 그 색은 전통적으로 동서양 공히 정결함, 고귀함, 존엄, 하지만 그 이면에서 우울과 고독을 표상하는 파랑으로서 윤정원 그림들의 정서적 기제를 컨트롤 한다. ● 다음, 윤정원의 회화에서 푸른색과 더불어 특이성으로 작용하는 요소는 화면이 전체적으로 불에 그슬려서 크게 훼손되거나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난 것처럼 묘사된다는 점이다. 이 또한 자세히 보면 작가가 두 가지 양상으로 작업하는 것 같다. 첫 번째는 푸른 꽃들을 풍성하게 그린 비단 그림 한 폭이 불에 타다 만 것 같은 묘사다. 그런데 두 번째는 마치 두 겹의 비단 그림이 겹쳐져서 위쪽은 푸른색 꽃그림이 그을린 화면이고, 밑쪽에는 그 그을린 평면 틈새로 슬쩍슬쩍 다른 화면이 내비치듯 묘사된다. 특히 두 번째 묘사는 최근의 그림에 새롭게 등장하는 방식으로 보이는데, 이는 첫 번째 묘사 내용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간단하게는 하나의 그림이 불 탄 것처럼 그렸느냐, 두 개의 그림이 겹쳐진 것처럼 그렸느냐의 차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는 미장아빔(mise en abyme), 즉 '그림 속의 그림'으로 볼 수 있고 나아가 그 미학적 의미를 '현실과 그 너머 이상세계의 병치'로 해석 가능하다.

윤정원_잃어버린 하늘_비단에 채색_79.3×61cm_2021
윤정원_잃어버린 하늘2_비단에 채색_79.3×61cm_2021
윤정원_잃어버린 하늘3_비단에 채색_79.3×61cm_2021

이에 대해 논하기 전에 우선 작가의 의도를 존중하자. 윤정원은 철종어진(哲宗御眞)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불에 탄 화면을 처음 작업에 도입했다고 기억한다. 요컨대 윤정원의 그림은 실제로 화폭을 불에 태운 것이 아니라 불에 타다 만 그림처럼 화면의 군데군데에 그슬린 자국과 구멍을 세밀하게 그려 넣은 것인데, 그 아이디어를 조선왕조 제25대 왕인 철종(1831-1863)의 어진이 실제로 불에 타 파괴된 작품 상태로부터 얻었다는 것이다. 철종어진은 1861년 군복을 갖춰 입은 31세의 젊은 왕, 하지만 그로부터 채 몇 년 지나지 않아 병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조선 말기 불우한 왕의 초상이다. 게다가 6.25 한국전쟁 당시 보존을 위해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오히려 보관창고에 화재가 나서 현재는 그림의 1/3이 소실된 상태 그대로 복원된 비극적 서사가 있는 그림이다. 2006년 대한민국 보물 제1492호로 지정돼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고, 조선의 군사의례 등을 주제로 한 특별전을 통해 간간히 선보여 왔다. 2021년 1월부터 3월까지 열린 『조선 왕실 군사력의 상징, 군사의례』도 그 중 하나였는데, 나는 그 전시에서 처음 철종어진을 봤고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충격의 요소는 두 가지였다. 정확히 수직으로 불에 타들어가 사라져버린 어진의 부재한 화면이 그 하나고(두루마리 형태로 보관된 상태에서 왼쪽만 불에 탄 것이다), 활시위를 당길 때 썼다고 전해지는 암깍지를 낀 철종의 왼쪽 엄지손가락이 다른 하나였다. 완벽하게 소실되는 화(禍)를 피한 대신 마치 일부러 규칙에 따라 불에 태운 것처럼 자신의 일부가 사라진 그 왕의 초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멸, 파국, 비애, 유령, 덧없음, 절대적 상실 같은 단어에 연동된 감정을 들끓게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권위 있게 차려입은 의관과 무기들, 특히 손가락의 작은 깍지가 15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의 왕이었던 그림 속 인물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을 자극한다. 윤정원의 기억 속에는 암깍지에 대한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작가는 철종어진으로부터 애초 파괴와 상실을 은유하는 형상이자 조형언어로서만 불에 탄 자국을 재발견한 것 같다. 2014년 「아름다운 날들」과 2015-2017년에 집중적으로 그린 「잃어버린 하늘」 연작이 그에 해당하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당시 회화만이 아니라 공간 설치까지 시도했던 그 작업들에서 불에 탄 것처럼 묘사한 부분은 그 자체의 한 화면에서 끝났다. 그 이면에 또 다른 그림이 있을 가능성도 묘사하지 않았고, 불에 타 생긴 구멍으로 슬쩍 보이는 파랑새 같은 이상향의 표상도 그려 넣지 않았던 것이다.

윤정원_잃어버린 하늘4_비단에 채색_79.3×61cm_2021 윤정원_잃어버린 하늘5_비단에 채색_79.3×61cm_2021
윤정원_잃어버린 하늘6_비단에 채색_41×30cm_2021
윤정원_아름다운 이름들_한지에 연필_62.5×47.5cm_2021
윤정원_9x9 stories_비단에 채색_각 63.2×63.2cm_2021

그러던 것이 작업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에서, 특히 최근 1-2년 동안 변화가 생겼다. 앞서 내가 '두 번째 묘사'라고 칭한 미장아빔의 형식이 그것이다. 요컨대 윤정원의 최근작들에는 하나의 평면이 아니라 두 개의 평면이 가상적으로 존재한다. 실제로 두 개의 그림이 겹쳐졌다는 뜻이 아니라, 묘사를 통해 그림 속에 그림이, 앞의 그림 이면에 또 다른 그림이 겹친 듯 한 환영을 유발한다는 말이다. 나는 무엇보다 이 변화에 주목하고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왜냐하면 윤정원의 작품들이 마음을 담은 그림이라고 했을 때, 그 마음은 벽에 갇힌 세계, 벼랑 끝에 몰린 자아, 불에 까맣게 타버려서 끔찍하게 파괴된 존재에서 멈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벽이라 생각했던 면이 다른 이면 공간으로 열리는 세계, 우울한 청색을 유토피아적 꿈의 파랑새로 반전시키는 자아, 그을림으로써 폭력적인 소멸 대신 해체와 재탄생의 기회를 획득하는 존재의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어야만 그림은 보는 이의 시선을 오래 붙잡고, 마음에 깃들고, 스스로를 사랑받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윤정원_Colors of Time 시간에 색을 입히다.展_금호미술관_2022
윤정원_Colors of Time 시간에 색을 입히다.展_금호미술관_2022
윤정원_Colors of Time 시간에 색을 입히다.展_금호미술관_2022
윤정원_Colors of Time 시간에 색을 입히다.展_금호미술관_2022

3. 동시대 미술, 거스르는 마음 ● 서두에 쓴 '마음이 담기는 그림들이 있다'는 진술은 곧 모든 그림에 마음이 담기는 것은 아니라는 뜻을 내포한다. 우리의 통속적인 생각은 얼핏 세상의 모든 미술작품이 그것을 창작한 미술가의 주관성, 혹은 속 깊은 내면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넘겨짚는다. 하지만 누대에 걸친 미술사를 딛고 동시대에 나타나는 많은 현대미술 작품들, 소위 컨템포러리 아트(contemporary art)는 그런 통념과는 거리가 있다. 마치 연구실의 학자들이 그러듯이, 예술가가 갈고닦은 지적 훈련과 비판적 사고 과정, 혹은 해당 장르의 전체 맥락에서 최신 경향이나 스타일, 개념이나 모티프를 주도면밀하게 탐색한 결과들이 작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현대미술이 이지적인 분야가 되었다는 뜻이고, 창작자의 주관적 감상이나 사적인 서사가 '우세한 예술 레토릭'의 후원 없이 날 것으로 나타나기에는 미술계의 거대 시스템이 막강하다는 의미다. 국제비엔날레나 대규모 아트페어에 나오는 다양한 출신의 수많은 작품들이 몇 개의 주제, 유형, 양식, 패턴, 테크닉, 미디어로 분류 가능한 집단 유사성을 보이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현대미술 작품들이 그러는 만큼 감상자의 입장에서도 예전에 흔히 썼던 수사인 '내 마음을 울리는 작품'이라든가 '알 수 없이 끌리는 그림' 대신 'SNS에서 한창 뜬 스타일의 미술' 혹은 '아트 바젤, 프리즈, 키아프에 나왔거나 소더비, 크리스티, 서울옥션에서 낙찰된 경향의 회화'를 기준으로 작품을 본다. 이러한 동시대 미술의 주도적인 메커니즘에 회화(painting)가 특히 취약한 이유는 거의 모든 존재와 사건이 '그림(pictures)'으로 출현, 유통, 향유되기 때문이다. 미술의 울타리 안팎에서 그림들이 넘쳐나고, '미술'이라는 화려한 관(官)을 빌린 그림들이 사랑받기 때문이다. 마음 대신 취향이, 감식안 대신 '좋아요'의 양적 평가가 더 선호된다. 개인적 경험조차도 연예계처럼 '흥행하는 세계관'으로 가공될 때만 필요한 것이 된다. ● 윤정원의 푸른 꽃 그림들, 특히 가장 최근에 완성한 작품으로 금박 배경을 한 푸른 꽃 그림은 보자마자 탄성이 나올 정도로 매혹적이다. 청색과 금색의 시각적 대비 효과가 강렬한데다가 정교하게 묘사된 커다란 꽃무더기까지 겹쳐지니 아름다움을 향한 감상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매혹과 만족의 경험이 소셜 네트워크 소통 속 그림의 휘발성과는 다른 불편한 끈질김이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윤정원의 회화는 감상자에게 지적인 이해를 요구하지 않지만, 장식적인 취향과 피상적 관심 또한 거스르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의미다. ■ 강수미

Vol.20220220c | 윤정원展 / YOONJUNGWON / 尹晶湲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