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일,월요일 휴관
스펙트럼 갤러리 SPECTRUM GALLERY 서울 용산구 회나무로32길 2-3 (이태원동 211-22번지) Tel. +82.(0)2.6397.2212 www.spectrumgallery.co.kr @spectrumgallery_official
분위기가 되는 그림 ● 곽수영 작가의 회화는 기억과 분위기를 다룬다. 그의 그림은 누구라도 한국의 도시 어디를 산책해 보았다면, 아니 이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보기만 했더라도 '아, 이 느낌!'이라고 여길 만한 지점을 선사한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가 섞인 무의지적 기억에서 매일 발생하는 여러 사건 중 일부를 채집해 화면 속에 투영"한다고 했다. 기억이 어떻게 '무의지적'일까? 작가 본인만의 기억이 아니거나 본인의 의지대로 형성된 기억이 아니라는 의미로 들린다. 과거와 현재가 섞였다는 것은 기억이 시간의 흐름 속에 있다는 말일 테다. 일상에서 마주한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쌓이고, 흐려지고, 왜곡되는 기억은 계속해서 변한다.
기억은 기록과 달라서 그 내용이 객관적이거나 영구적이지 않다. 기억의 이런 변화하는 속성은 우리가 살아가며 매 순간 지각하는 현실의 분위기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분위기(Atmosphäre)'라는 개념을 제안한 철학자 뵈메(Gernot Böhme, 1937~2022)에 따르면 그것은 "순전히 객관적인 것도 순전히 주관적인 것도 아니"며, "이성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에서 탈락된 것" 1) 이다. 현실(Wirklichkeit)에서 지각하는 대상을 주체, 지각되는 대상을 객체라 한다면, 분위기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사이현상(Zwischenphänomen)'이다. 거칠게 이해하자면, 현실을 전체 집합으로 둘 때 분위기는 확실한 개념 아래서 설명되는 모든 부분집합의 여집합 쯤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 따라서 그가 말한 분위기를 이해하려면 주객의 이분법 구도에서 벗어나, 지각의 주체와 그를 둘러싼 사람, 사물, 공간, 사건 등 지각의 객체가 매 순간 정서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 안에 있다는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분위기는 주체의 주관성으로 구성되는 동시에 객체의 특성과 상호작용하면서 산출된다. 주체와 객체가 어떠한 정서와 느낌을 수반하는 분위기를 서로 교환하며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분위기란 그 사이의 관계일 수 있다. 그리하여 뵈메는 분위기가 "관계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라는 소결에 이른다. 2)
우리가 현실에서 지각하는 다양한 사물과의 관계, 즉 그것과의 분위기를 기억하는 일은 곽수영 작가의 말처럼 무의지적일 수 밖에 없다. 정서와 느낌을 동반하는 분위기는 주체 일방의 의지나 의도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 작가는 무대 디자이너로 일한 경력이 있다. 그는 뮤직비디오나 광고 촬영 현장에서 쓰는 무대를 연출해 왔다고 한다. 가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그리고 때로는 그 공간을 채울 소품까지도 촬영현장이 요구한 콘셉트에 맞추어 제작했다고 한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된 디자인, 광고, 건축, 도시나 조경 계획 따위를 연출하는 행위를 '미적 노동(ästhetische Arbeit)'으로 부르며 이를 고찰할 새로운 미학이 필요하다는 뵈메의 생각을 작가의 경력에 포개어 본다.
전시 제목인 'Autofiction'은 작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는 자전적 소설이란 뜻이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다. 전시를 작가의 오토픽션이라 간주한다면 그림은 일견 허구적,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를 초현실적이라 평하기는 어렵다. 그의 그림은 무의식에 기반하거나 현실을 초월한 세계를 그린 게 아니다. 작가 그리고 그가 현실 속에서 경험한 사람, 사물, 공간들 간의 '사이현상'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작가가 기억 속에서 그것들과 주고받은 분위기, 나아가 파악하고 있는 그들과의 관계에 근거하기에 순전히 허구적이지는 않다.
이번 「잘라내기」 연작은 기존에 완성한 그림의 부분을 보고 새롭게 그렸다. 전체적인 구도나 형태가 이전 그림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다양한 사물의 모습이 그림의 근간이 된 전작과는 꽤 다르다. 기억을 채집해 완성한 그림들은 어느새 현실 속 사물이 되어 모종의 분위기와 관계성을 가지고 작가 앞에 섰다. 시간 안에서 변화한 작가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여기에 완성된 그림을 새로운 사물로서 경험한 관계를 다시 그려보는 일이 이번 연작에서 시도된 게 아닐까. ● 「교차로」를 보고는 통통 튕겨져 화면 밖으로 나가버릴 것만 같은 초록색 구체를 그린 이유를 작가에게 물었었다. 다른 대답보단 "장난치고 싶었다"는 그의 한마디, 그리고 이어 이 그림 어딘가에 '사랑'을 그려 두었다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그가 이전 그림과의 관계 속에서 쌓아온 느낌을, 분위기를 새로운 그림에 좀 더 돌려주고 싶어한다고 느껴져서다.
P.S 문장부호 작은 따옴표는 인용한 말 안에 있는 인용한 말을 나타내거나 마음 속으로 한 말을 적을 때 쓴다. 여기 인용한 '사랑'은 그림 안에서 찾은 그대로의 이미지를 인용한 것이다. 여러분은 그림에서 그것을 찾을 수 없다며 실망할 필요가 없는데, 감상하는 사이에 그것의 분위기를 품고 전시장을 나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박상은
* 각주 1) Gernot Böhme, Anthropologie in pragmatischer Hinsicht, S.199-200. 윤화숙, 「지각(aesthesis) 개념 확장을 통한 미학의 재정립: G.뵈메의 지각학(Aisthetik)을 중심으로」, 2012, pp.40-41 재인용. 2) Gernot Böhme, Aisthetik, S. 89, 윤화숙, p.43 재인용.
Vol.20220312a | 곽수영展 / KWAKSOOYOUNG / 郭水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