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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22 인영갤러리 전시지원 프로젝트 1
관람시간 / 11:00am~06:00pm
인영갤러리 INYOUNG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3-4 (경운동 66-3번지) 인영아트센터 Tel. +82.(0)2.722.8877 www.inyoungart.co.kr www.facebook.com/InyoungGallery
서구에서 예술은 아름다움을 선취해야 하는 매체였다. 이 기본 전제는 장구한 세월 동안 견지되었다.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는 진선미가 모두 혼융되어있는 신비한 사상으로, 아름다움을 뜻하는 칼로스(kallos)와 선함을 뜻하는 아가토스(agathos)의 합성어이다. 육체, 도덕, 정신의 덕(arete)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서구 예술의 역사는 칼로카가티아에서 하나의 요소들이 차츰 절연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정제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놀라운 기교와 상상력으로 펼쳐졌던 예술은 차츰 미추, 선악, 호오, 존비, 부귀의 이원적 가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매체 자체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매체의 본질을 묻는 예술게임을 가리켜 예술의 철학화(philosophizing art)라고 상찬한 사람들도 있지만, 이전 시대 선학의 예술가들이 선취했던 내용과 형식에 겹쳐서도 안 되며, 새로운 의제를 개발하여 보여주어야 하기에 예술창작은 더욱더 어려워진다. (엔트로피가 너무나 증가했다.)
우리 동아시아의 경우, 모더니즘을 수용했더라도 전통적 미의식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모더니즘의 공간에 녹여냈다. 우리 모더니즘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과정(process)의 예술이다. 과정은 창작의 수순이나 절차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의 누적을 뜻한다. 호흡, 수양, 정신성은 붓질하는 순간이 연출해내는 지극히 아름다운 시적 시간 속에서 예술가와 매체(물질)는 하나가 된다[主客無二]. 이러한 재창조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우리의 전통사상이 바로 문이재도론(文以載道論)이다. 문장을 쓸 때 반드시 도리[道]를 싣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글은 우리전통에서 무의미하다. 도리가 빠졌기 때문이다. 반대로 도리가 있으면 문장이 간결해도 오히려 환영 받는다. 그런데 이 문(文)은 단순히 글짓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문(文)은 예술을 뜻하며 나아가 예악형정(禮樂刑政)으로 설명되는 총체적 문물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도리[道]는 무엇인가? 공담(空談)을 벗어던지고 "사실에 임하여 스스로를 규율하며[實事自律]" "오로지 지상의 노력으로 쉬지 않고 인(仁)을 이룬다[唯自强不息, 以成其仁]."는 것이 바로 도리이다. 따라서 우리 전통에서 문(예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뜻하는 예악형정뿐만 아니라 사람과 자연(신)과의 관계[天人之際]까지 면밀히 고찰하는 사유체계이다.
서구의 전통은 매체(물질)의 본질을 극단으로까지 밀어붙이며, 동아시아의 전통은 사유(정신)의 과정을 집요하게 강요한다. 이 둘 사이에서 적절한 중화(中和)의 자리를 찾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예술이 탄생하리라 본다. 박인성 작가는 이 둘 사이의 적절한 중(中)과 화(和)의 문제를 고민해왔다. 그의 통찰은 모더니즘이라는 미완의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가장 최소화된 매체(물질)를 찾는 본질주의적 예술관(서구)에 예악형정이라는 인간의 문제를 어떻게 녹여낼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박인성의 통찰은 이렇다. 회화는 칼로카가티아에서 매체의 본질을 묻는 모더니즘으로 진화했다. 이 역사의 진실을 부정하는 일은 그릇되다. 이 진실을 부정했을 때, 등장하는 형식은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센세이셔널리즘(sensationalism)이며 또 하나는 스펙터클의 오용(spectacularism)이다. 이 역사의 흐름을 최대한 거역하지 않은 채,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것이 박인성 작가의 주요 의제였다.
박인성 작가는 예술은 일종의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림도 소통이고 시문학도 소통이다. 사진도 소통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통은 제한된다. 예술은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 없다. 따라서 상징형식이다. 상징형식으로 소통되는 것은 역시 시적 정신(poetic spirit)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박인성 작가는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을 주목한다. 니클라스 루만에 의하면, 소통의 특징은 선별(selection)에 있다. 그리고 선별은 다르게도 가능한 것이므로 우연적이다. 확률적이다. 그리고 선택적이다. 즉, 모든 가능한 것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없다. 인간은 모든 것을 동시에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통은 기본적으로 선별적이다. 그리고 모든 소통의 참여자는 선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술도 소통이라고 볼 때, 선별적이다. 회화나 사진이 많은 것을 담으려고 노력할수록 아우라는 상실된다.(식는다.) 회화나 사진이 최소한의 내용만 담을 때 아우라의 미묘한 효과가 뜨거워지지만 소통은 상징처럼 모호해진다. 박인성 작가는 이 두 사이에서 좁혀지지 않는 심연은 필름을 최대한 가공하지 않고 화면에 재구성하면서 시적 의미가 형성되며 그 틈새는 극적으로 메워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외시성(外視性) 없는 화면으로 상징언어를 구축하는 것이 「히든 서페이스」의 목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박인성 작가의 세계는 전위적이면서도 통섭적이다. 첫째, 붓질 없는 회화(painting without brushness)를 만들고자 한다. 둘째, 모더니즘의 대척점에 있는 그 이후 양상들, 즉, 센세이셔널리즘이나 스펙터클 없이 모더니즘을 극복하고자 한다. 셋째, 모더니즘의 본질주의에 동아시아의 문(文)의 개념을 통섭시키고자 했다. 사진의 본질은 현상을 재현하는 것이다. 사진은 외시성(外視性)의 숙명을 넘지 못한다. 회화의 본질 역시 재현이었던 적이 있다. 회화는 매체 자체를 탐구하면서 모더니즘으로 안착했다. 박인성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사진의 본질은 필름 자체에 있지 않을까? 구성과 배열의 의도를 갖고 필름을 캔버스나 액자에 고정하면 그것은 회화인가 사진인가? 그것은 필르미 페인팅(flimy-painting)인가 아니면 페인터리 필름(painterly film)인가? 박인성 작가는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면서 2차원 예술의 외투를 새 것으로 교체한다. 따라서 「히든 서페이스」에서 형상은 가려졌지만, 무수한 담론의 가능성이 새롭게 분출한다. ■ 이진명
Vol.20220315f | 박인성展 / PARKINSEONG / 朴寅成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