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링 테스트: AI의 사랑 고백

Turing Test: an AI's Love Confession展   2022_0324 ▶ 2022_0522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22_0324_목요일_04:00pm

참여작가 노진아_문성식_박관우 서울오픈미디어(권병준, 백주홍, 김택민) 이덕영_이샛별_이재석_임동열 전보경_정승_홍세진

주최 / 서울대학교미술관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서울대학교미술관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of Art 서울 관악구 관악로 1 Tel. +82.(0)2.880.9504 www.snumoa.org

인공지능과 디지털 휴먼(Digital Human)의 활주로에서 ● 가상의 고대 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과학적 정확성에 관하여』에는 완벽한 지도를 만드는 데 강한 집착을 가진 사람들의 길드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실제에 가까운 지도를 만들기 위해 점점 더 큰 지도를 만듭니다. 지도는 실제의 100만 분의 1, 10만 분의 1, 다시 1만 분의 1의 척도로 확대되다가, 종국에는 제국의 모든 지점들이 완벽하게 1대1로 대응되는 지도를 만들어내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 지도가 현실을 뒤덮어 또 하나의 현실이 되자 사람들은 어느 것이 진정한 실재인지를 구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그 완벽한 지도는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쓸모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지도는 더 이상 지도가 아니다." ● 보르헤스의 단편에 나오는 지도학자들은 점점 더 휴먼을 닮아가는 디지털 휴먼, 인간을 쏙 빼닮은 인공지능을 만들고자 하는 오늘날의 과학기술에 대한 비유로서 적절합니다. 인간은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의 도래를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컴퓨터 과학자들에 의하면 2040년 즈음, 인간의 지능은 인공지능에 추월당할 것이라 합니다. 노동을 비롯한 인간의 일상은 이미 빠르게 인공지능으로 대체되는 중입니다. 오진율 제로인 인공지능 의사에, 심지어 사랑도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위험한 노동이나 전쟁도 로봇 신체를 지닌 인공지능이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강(强)-인공지능', 즉 인공지능에 유전공학, 나노기술이 적용된 신체로 현저하게 진화된 신인류, '인간강화(human enhancement)-종'으로 스스로 진화할 것입니다. ● 하지만, 인간과 인공지능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구분이 폐기될수록, 질문은 다시 인간에 대한 질문으로 소급되고 더욱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도 종국에는 보르헤스의 '완벽한 지도'와 대동소이한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 결말만큼은 1대1로 대응되는 지도의 쓸모없음을 능가하는, 훨씬 더 무겁고 어두운 것일 공산이 큽니다! ● 이 전시가 개막을 한 달여 앞둔 시점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영토 침범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현 과학기술은 인공지능이 인간 병사를 대신해 전쟁을 치르는, 그러니까 상대방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살상하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제시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없는 미래에 대해서는 왜 상상하지 않는 것인가요? 인공지능이 인간의 오류를 줄이는 쪽으로 진행될지, 획기적으로 증폭시키는 쪽으로 진행될지는 결국 인간의 몫으로 남을 것입니다. 인공지능이건 강-인공지능이건, 인간의 작품이기에 결국 인간의 오류를 재현하거나 증폭시킬 개연성이 상존한다는 반성적 성찰의 크기에 달린 문제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다시 자신을 둘러싸고 위협하는 신화들 또는 우상들, 이념, 국가, 자본, 기술 등과의 치열한 싸움에 변함없이 나서는 인간의 몫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 질문은 다시 인간에 대한 질문으로 소환되고,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더 단순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생텍쥐페리의 말을 기억해봅시다. "단순함의 완벽함이란 더 이상 보탤 게 남아있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게 없을 때 완성된다." 단지 인간의 욕망을 재현하는데 과학기술이 고삐를 죌 때, 인공지능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예술이 이제껏 인간으로서 해온, 인간을 위해 해온 싸움을 지속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새삼 확인합니다. 이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의 사유야말로 이 소중한 싸움이 진행되는 현장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심상용

노진아_나의 기계 엄마_혼합재료, 인터랙티브 로보틱스 조각_180×60×50cm_2019

노진아 ● 인간을 너무나도 닮았으면서도, 한순간 어색함이 밀려와 낯선, 노진아 작가의 인공지능 로봇 작품들은 '인간이 로봇과 감정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로봇을 인간처럼 만드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줄 알면서도, 인간은 계속해서 자신을 닮고, 자신처럼 행동하는 로봇을 만들려고 한다. 「진화하는 신, 가이아」는 관객이 '가이아'의 귀에 대고 말을 걸면, 그에 맞춰 응답하는 대화형 로봇 작품이다. '대지의 여신'을 뜻하는 '가이아'는 사람의 얼굴에 나무뿌리 형상의 하반신을 가진 모습으로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 관객은 이 거대하고 기이한 로봇 앞에서 인간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서늘한 고백을 듣게 된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고,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낡은 사고에 불과하다는 듯, 이 낯선 로봇은 철학적인 답변으로 인간을 놀랜다. 작가의 어머니를 모델링한 또 다른 작품 「나의 기계 엄마」는 관객의 표정을 읽고, 이에 반응하여 표정으로 상호작용하는 로봇이다. 가장 따스하고 포근한 '모성'의 감정을 토대로 상호작용하는 로봇은 어머니의 깊은 사랑의 감정과 금속의 차가운 로봇의 형상이 교차되어 낯설음을 배가시킨다. 노진아 작가가 만든 로봇들은 관객과 끊임없이 눈을 마주치고자 한다. 눈을 마주친다는 것은 감정을 교류하고, 상대방에 공감하며,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제스처이다. 작가는 이 친밀한 행위를 기계와 하도록 이끌어 기계와 교감에 한 발짝 더 다가서게 한다.

문성식_늙은 아들과 더 늙은 엄마_종이에 아크릴채색_112×76cm_2013 두산연강재단두산아트센터 소장

문성식 ● 뼈가 앙상히 드러난 할아버지, 늙은 아들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아이 같은 어머니, 생을 마감하려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가족들, 사랑하기에 슬픈 남녀, 체면을 잊은 채 멱살을 잡고 싸우는 중년의 아저씨들. 이 모두가 문성식이 그려낸 우리의 모습들이다. 포스트휴먼으로 도약하려는 발치에서, 이러한 인간적인 모습들이 더욱 애잔하게 느껴지는 것은, 다시는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임종사진을 준비하는 듯 사진기 앞에 서서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할아버지와 슬픔을 애써 감추려는 듯 한쪽 눈을 카메라 뷰파인더에 밀착한 채 사진을 찍고 있는 손자, 차마 할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애먼 할아버지 바지만 바라보고 있는 등이 굽은 할머니의 모습을 담은 「봄날은 간다 간다 간다」는 '인간다움'을 부각하며 우리 마음을 잔잔히 울린다. 이 작품들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함께 아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차가움이 가득한 미래로 가는 길목에서 문성식 작가의 그림들은, 미래를 향한 질주에서 잠시 쉬어가게 한다. 먼 미래 '인간'이 사라지고, 우리가 모두 사이보그가 된 후에도, 우리가 정다운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늘 기억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박관우_안드로이드는 춤추고 싶은 기분을 느끼는가_구성된 상황_00:10:34_2019

박관우 ● 박관우 작가의 작품 「인간의 대화 1」은 제목과는 상이하게도, 대부분 챗봇에 의해 만들어진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자와 여자는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고 있는데, 어디까지가 인간의 대화이고, 어디가 챗봇에 의해 만들어진 문장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지금 대화하고 있는 이 남녀의 정체가 과연 인간인지, 인공지능인지 구분할 수도 없다. 관객은 인간과 인공지능이 서로 혼합되어 경계가 무너진 미래의 현실을 대변하듯 모호한 남녀 사이의 대화를 듣게 된다. 애써 작품의 제목을 '인간'의 대화라고 지칭하면서, 작가는 '기계와 대화하는 인간' 혹은 '기계, 인간끼리의 대화'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하는 듯하다. 작가는 상대가 인간인지 혹은 기계인지 구분하고자 설계된 튜링 테스트를 「안드로이드는 춤추고 싶은 기분을 느끼는가?」를 통해 재현한다. 이 작품은 실제 퍼포먼스 작품인데, 미리 배정된 퍼포머들은 정해진 시간에 화면에서 음악에 홀려 춤추고 있는 누군가를 따라 춤을 춘다. 관객은 퍼포머들 사이에서 함께 춤을 추기도 하고, 그들을 관조하기도 한다. 갑자기 춤을 멈추고 머물다 사라지는 퍼포머들은 프로그래밍에 의해 움직이는 안드로이드를 은유한다. 안개가 자욱이 퍼진 모호한 공간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이 뒤섞여 춤을 추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며, 작가는 인간만의 고유 영역이 점차 사라져 경계가 무너진 미래 상황에 대한 간접 체험을 유도한다.

서울오픈미디어(권병준, 백주홍, 김택민)_유령극단 심각한 밤을 보내리_ 앰비소닉 LPS(근거리 위치 인식 시스템) 헤드폰, LPS 앵커_01:22:24_2021

서울오픈미디어(권병준, 백주홍, 김택민) ● 「유령극단 "심각한 밤을 보내리"」는 인공지능이 직접 지어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로봇들이 '기계식 영매 접합술'이라는 다소 낯선 기술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설정한다. 이 가상의 여러 존재들은 실제 하나의 존재일 수도있을 것이며, 우리와 다른 시간을 살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귀신같기도, 유령 같기도 한 이 인공지능들은 '인간'에 대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도발적 질문을 던지는 자는 로봇이다. 이 도발적인 로봇은 '인간은 고기덩어리이며, 인간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로봇이 되고 싶다'고 고백한다. 어린아이의 기계 목소리인 로봇은 노인에게서 왔다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는 등,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내뱉는다. 이 로봇은 '나는 동등한 사람이다'라고 선언하며, 인간이 누리는 모든 행복과 자유가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고 주지시킨다. 그러면서도 끝내 인간이 아닌 로봇이길 바라는 말에서 연민과 서글픔이 느껴진다. AI가 이야기하는 사랑의 목소리는 애절하지만 동시에 낯설다. 시간도 공간도 우리와 다른 세계를 사는 로봇들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앞으로 살게 될 미래의 모습이 예견된다.

이덕영_거인의 집_캔버스에 펜과 아크릴채색_193.9×390.9cm_2019

이덕영 ● 마치 SF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은 이덕영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없고 기계와 혼종된 모습이다. 작가는 한때 너무도 유용하고 안락했던 건물이 한순간 철거되는 모습에서 상실감을 경험한다. 이 상실감은 쓸모가 없어지며 쉽사리 철거되어 버리는 건물에서,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 버려지는 인간에 대한 감정으로까지 확대된다. 「거인의 집」에 보이는 난잡하고 부서진 잔해들과 그 속에서 고철들에 뒤섞여 포효하고 있는 듯한 인물의 모습에서 욕망이 가득 찬 사회와 쓰임이 없어져 버려진 잉여인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머리 대신 목에 호스(혹은 전선)를 연결한 존재들은 아마도 인간을 닮은 기계, 혹은 기계화되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일 것이다.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주체적인 모습 대신 구조화된 사회 속에 길든 인간의 모습을 그린 그의 작품은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상상하게 한다. 머리가 없는 존재들은 보이지 않는 시스템 속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며, 획일적이고 효율적인 리듬 안에서 살기를 강요받는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미 인간보다 똑똑해진 인공지능에 의해 생활의 많은 부분을 통제받는다. 무엇을 사야 할지, 어떤 노래를 들을지, 내가 읽어볼 만한 책이 무엇인지 등 인생의 소소한 부분까지 적재적소에서 조언하는 AI는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열 맞춰있고 오로지 생산성을 향해가는 도시 속의 부품 같은 인간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오버랩되며 애잔함을 더한다.

이샛별_특이점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8

이샛별 ● 그로테스크한 얼굴 형상이 섬뜩함을 자아내는 이샛별 작가의 작품에는 「스키너」, 「특이점」 등 미래를 연상시키는 제목이 붙어 있다. '스키너'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들이 리플리컨트(인조인간)를 멸시하며 부르는 용어로, 오로지 인간을 위해 헌신하는 노예의 삶을 사는 리플리컨트를 가리키며 영혼이 없는 껍데기뿐인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경멸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샛별 작가의 작품 속 '스키너'는 오히려 점차 기계화되어 껍데기만 남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빗대어 묘사하는 듯하다. 또 다른 작품의 제목인 '특이점'은 미래학 개념으로, 인공지능의 지적 능력이 인간을 넘어선 시점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이 쓸모없는 존재로 바뀌어버리는 지점이며, 인류의 변화 시점을 대변한다. 작가의 작품 중 '특이점'을 제목으로 달고 있는 그림 속 인물들은 내장처럼 꿈틀대는 무엇인가가 얼굴 전면에 병합되어 있어, 서늘하면서도 암울한 기운을 풍긴다. 인간이면서도 기계이고, 기계이면서도 인간인 존재, 혹은 인간 이후의 인간(포스트 휴먼)의 모습처럼 보이는 형상들이다. 초기 작품부터 작가는 인물의 형상이 무엇인가로 '위장'하거나 식물이나 동물 뒤에 숨어있는 모습을 그려왔다. 초기작에서 위장된 인물이 사회의 통제와 규율에 대한 저항의 의지였다면, 지금 보여주는 숨겨진 얼굴들은 인간과 기계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위장이다. 이샛별이 제시하는 인간은 인간을 닮았으면서도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과 초지능을 가진 기계-인간의 모습일지 모른다.

이재석_경계선 위의 부품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21

이재석 ● 군대에서의 경험에서 출발한 이재석 작가의 작품은 다양한 부품의 정교한 조합으로 만들어진 총기에서 이질적이게도 여러 장기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신체를 유추해낸다. 유동적이며 따스한 살의 느낌과 차갑고 도식적인 기계의 이미지는 이재석의 작품에서 서로 융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인체와 기계, 해골은 중세 유럽 종교화를 연상시키는 색감과 구성, 배경이 더해져 심판의 날을 묘사하는 듯하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신체가 있는 부품도」를 보면, 해체된 기계부품이 나열된 뒤편으로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포즈를 보여주는 콘트라포스토 자세의 인간상이 배치되어 있다. 가장 아름다운 형상을 표현한 인물의 모습은 분해된 부품들에 가려져 완전하게 볼 수 없다. 나아가, 「나열된 부품들」에서는 나란히 그려진 부품들 사이에 인간의 손과 팔이 잘린 채 마치 기계부품처럼 들어가 있는데, 이는 작가의 말을 빌려 '신체이면서 사물'이며, 기계의 부품이 된 인간(혹은 인간의 부품이 된 기계)의 모습을 드러내, 신체와 기계의 모호한 경계를 보여준다. 녹슨 기계처럼 붉은 쇳덩이들 사이에서 '살'은 유난히 하얗고 노랗게 드러나 대비된다. 이는 우리에게 살과 장기만으로 이루어진 고전적 '인간'의 모습은 영원히 마주할 수 없을 것이라 암시한다. 그러나 작가는 과거 '악'으로 정의되었던 혼종된 이미지들(괴물, 반인반수 등)이 현대사회에서 더는 '추'의 의미로 다가오지 않음을 역설하며, 기계와 인간의 합치된 모습을 '조화로움' 안에서 표현한다. 그의 작품은 하나의 완전한 유기체로서 인간(신체)을 대신하여, 신체와 사물의 융화를 통해 이 둘의 관계를 새로이 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임동열_머시니멀 뉴 세나_합성수지, 알루미늄 사, 스테인리스_230×100×135cm_2019

임동열 ● 흡사 자연사박물관의 동물 화석을 진열해 놓은 것 같은 임동열 작가의 작품은 기계와 동물이 혼종된 모습이다. 작가는 분해된 전자 제품들을 보며 부품들이 마치 핏줄과 같은 전선으로 연결된 모습에서 기계와 유기체의 유사성을 느끼고, 이를 통해 기계들을 생명체로 바라보려 시도한다. 이 새로운 생명체를 작가는 Machine과 animal을 합쳐 Machinimal이라 부른다. 이 Machinimal들은 기계이면서도 동물인 모습인데, 작가는 기계의 부품과 구조를 동물의 구조로 치환하여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도구로만 여기던 기계에 대한 오랜 관념들을 전복시키고자 하였다. 작품 「MACHINIMAL Brutale」는 오래전 죽어서 뼈만 남은 것 같은 동물의 형태인데, 내장은 기름탱크, 머플러와 같은 기계부품들로 가득하다. 작가는 동물의 해부학적 요소들을 분석하듯 기계의 구조를 파악하고, 이를 심장과 핏줄, 골격을 갖춘 생명체로 표현한다. 기계의 심장과 폐를 가진 네발의 기계/동물은 살아있을 적 무적의 힘을 가진 존재였을 것이다. 이 낯선 모습은 우리에게 언젠가 만나게 될 미래 인간의 모습을 유추하게 한다. 생명은 기계의 힘으로 연장되고 에너지는 강해지며, 신체의 능력은 무제한 확장되는 이 새로운 생명체의 모습은 진화된 포스트휴먼의 모습이기도 하다.

전보경_Prove Yourself_2채널 HD 비디오_loop_2021

전보경 ● 인간은 기계 앞에서 얼마나 '무용'한 존재인가. 자본주의의 미덕인 생산성과 효율성에서 인간은 로봇에 뒤처진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일은 지루하여 나태함을 불러오고, 먹고 마시고 때때로 쉬어야 하는 육체는 너무나도 비효율적이다. 반면 로봇은 먹지 않아도, 쉬지 않아도, 고장이 나지만 않는다면 늘 항상 같은 생산성을 보여준다. 이 점만 놓고 본다면, 로봇은 유용하고, 인간은 잉여롭다. 로봇과 인간 사이의 차이와 경계를 다루고 있는 전보경 작가는 「Zeros: 오류의 동작」에서 퍼포머들에게 자동차 생산공장의 로봇팔의 움직임을 그린 드로잉을 제시하고, 이를 재해석한 안무를 의뢰한다. 퍼포머들이 만들어 낸 움직임은 생산적 관점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고 오류로 가득하지만, 오히려 인간다움이 부각된다. 쓸모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인간의 동작들은, 인간이기에 아직은 가능한 창조적이며 유연한 모습들이다. 작가는 전작에서, 항해사나 전통 북 제작자, 양복 재단사 등 기계의 일률적인 작업과 대비되어 자신만의 고유한 손재주를 가지고 수십 년간 노동해 온 장인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그들이 오랜 기간 해오던 손동작을 담은 영상은 '인간다움'과 '인간이기에 가능한' 점을 집중 조명하여, 로봇이 쫓아올 수 없는 숭고한 영역을 드러내고 인간의 오류를 찬양한다. 이렇듯 우리는 전보경 작가의 작품을 통해 '무용'한 인간의 모습에서 오히려 진정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정승_프로메테우스의 끈 VII_식물재배 세트, 3D프린트(PLA), 웹캠, 컴퓨터, 모터, LED조명 장치, 와이어, 영상 프로젝션_가변설치_2020

정승 ● 괴생물체의 촉수 같기도 하고, 거대한 벌레의 다리 같기도 한 정승 작가의 작품 「프로메테우스의 끈 VII」은 살아있는 식물에서 얻은 여러 정보 값을 근거로 만들어진다. 작가는 식물의 사이즈나, 주변의 움직임, 조도 등 식물을 둘러싼 데이터를 기초로 이 거대한 조형 작품을 만들었다. 생명을 시각화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작가는 데이터 변환을 통해 식물의 기계화된 모습을 3D 프린터를 이용해 형상화했다. 식물의 성장에 따라 매일 조금씩 변하는 데이터를 받아 이를 형상화한 결과이다. 유기체에서 나오는 데이터는 예측할 수 없기에 우연의 결과물들을 생성해낸다. 이렇듯 정승 작가의 작품은 살아있는 유기체와 기계의 적극적 융화를 시도하고 은유한다. 작품의 제목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프로메테우스가 가져다준 영원히 꺼지지 않은 불로 문명을 이룬 인간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며 재앙을 떠안게 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신화처럼, 사이보그 기술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같은 신의 선물이 될지, 우리를 파멸로 이끌 재앙이 될지 알 수 없다. 언젠가 마주하게 될, 인간의 생체 데이터에 따라 만들어진 로봇은 나의 분신이면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도, 반대로 질투와 증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을 닮아가는 기계, 기계를 이식받는 인간, 이렇듯 인간과 기계는 서로 경계가 모호해진다.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 기계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정도가 되면, 미래에는 '51%인간-49%기계'같은 새로운 명칭이 생기게 될지도 모른다.

홍세진_도형 풍경1_캔버스에 유채_181.8×227.3cm_2021

홍세진 ● 파편적이고 이질적이어서, 흡사 가상세계 속 이미지를 보고 있는 듯한 홍세진 작가의 작품은 작가가 경험하고 느끼는 세계를 그린 것이다. 작가는 어릴 적 의료사고로 청력을 잃은 후 보청기와 인공와우를 사용하여 바깥의 소리를 듣고 체화한다. 작가의 관심은 유기물과 무기물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하이브리드이다. 이를 드러내듯, 공간감이 배제된 평면적인 회화는 비정형의 이미지와 도식적 형상이 자연스레 어우러져 있다. 장치를 거친 음파는 기계음과 섞여 전혀 다른 감각으로 세계를 이해하게 한다. 작가가 세계를 만나고 경험하는 감각 앞에 놓인 이 작은 기계는 그가 보는 세계를 불연속적이고 분절적이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기계가 매개하는 감각을 대변하고 있는 이미지들은 낯선 태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새로운 감각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인간의 감각은 여러 장치를 이용해 확대되고 변화될 것임이 분명하기에, 앞으로 우리는 지금과는 다르게 세계를 인식할 것이다. 신체의 한계를 과학기술로 극복하고 신체를 재설계하여 무한히 확장하고자 한 수많은 시도들이 인간을 더는 신체 안에 종속시키지 않는다. 기술이 변함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도, 사고방식도, 존재 방식도 모두 변화할 것이기에,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는 미래의 세계는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새로운 세상일 것이다. 작가는 보청 장치에 의해 변화된 감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은유한다. ■

연계 프로그램 강연 2022.04.22(금) 14:00-16:00 14:00 로봇과 함께 사는 삶 - 신상규(이화인문과학원 교수) 15:00 인공지능과 예술 - 이임수(홍익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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