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정교한 속도 The Most Sophisticated Movement

한지석展 / HANJISOC / 韓知錫 / painting   2022_0407 ▶ 2022_0614 / 일,공휴일 휴관

한지석_no.22-1_리넨에 유채_91×72cm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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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오픈스페이스 배 OPENSPACE BAE 부산시 중구 동광길 43 Tel. +82.(0)51.724.5201 www.spacebae.com

내가 어둠을 밝히니, 너도 세상을 밝게 비추어라 ● 작가 한지석의 『가장 정교한 속도』는 확증과 실험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그림을 채운 선명한 울트라마린 블루를 잊을 관람자는 없겠지만, 그 집합체는 훨씬 선명하다. 이러한 색의 향연 앞에서 관객은 무력해지나? 꼭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인지 체계는 차이를 잡아내려는 속성을 가진다. 작품 한 점을 볼 땐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던 실체가 여러 점을 보면 비로소 떠오른다. 배경이 형상을 잡아먹은 그림을 보며, 우리는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알 재간이 없다. 이미 아는 것과 파고 들어가 보아야 알 수 있는 것. 이게 단지 작품 감상자의 입장은 아니다. 한지석 작가는 자신이 능숙히 통제할 수 있게 된 산출물을 새로운 환경에서 펼치고자 시도한다. ● 전시는 각각의 이야기를 담은 연작 회화와 설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좀 더 정확하게 이것은 그림이 벽을 떠나 공간 가운데 놓이는 설치 작업이다. 특별한 제목 대신 오로지 일련번호만이 매겨진 그의 신작들은 온통 파란 단색의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취향을 따른다면, 하나의 대상을 시간이나 사건 경과에 의한 미묘한 변형으로 동선에 따라 주욱 배치할 법도 하다. 딴 사람 취향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나 같으면 그러겠다는 말이다. 그는 이러한 실없는 강박에 관심이 없다. 게다가 애당초 오픈스페이스 배의 공간도 그런 식의 현상학적 시계열을 실현할 조건도 아니다. 그는 작가다. 작가는 하나의 완결된 쇼를 보여주는 연출자가 아니라 더 큰 세계에 관한 전망을 프레임 속에 현현하는 주체다. 화가는 자신에서 떨어져 나온 개체 하나하나에 애착을 둔다. 그가 고집스럽게 제시하는 도상의 은밀함은 작품의 완성도를 통해 그림의 주변 공간을 점령한다.

한지석_no.22-7_ 리넨에 유채_190×150cm_2022
한지석_가장 정교한 속도展_오픈스페이스배_2022
한지석_no.22-5_리넨에 유채_53×45cm_2022
한지석_검은새_혼합재료_가변설치_2022

작품을 감싸는 색조는 작가적 생애 가운데 어느 지점에 우선순위로 떠오른 선택이었을 것이다. 현재와 같이 완전히 이행되기 전에는 다른 몇 가지 형식도 제시되었다. 영국 유학 기간에 틀을 갖추기 시작한 그리기 행위는 점점 자유로워졌다. 대신 그의 그림에는 내적인 규율과 외적인 완성 과정을 갖추어왔다. 표현 양식의 폭이 좁혀졌음에도 자유롭다는 건 그냥 하는 말장난이 아니다. 그의 회화는 자연과 인공물을 묘사하는 단계로부터 출발했다. 정확히는 미디어가 제공하는 대상을 이차적으로 관찰하고 선택한 이후에 따르는 묘사 단계다. 작가가 스스로 속박하는 세계의 조망은 그 어떤 곳이라도 투명하게 다가간다. 그는 장소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제한 이미지로 바꾸려 한다. 이것은 단순히 풍경의 어느 한 부분에 파란 색유리를 끼워서 보는 식의 유물론적 통제가 아니다. 그의 회화는 색과 구도로써 새로운 환영을 창조하리란 모더니즘의 과장된 웅변 또한 아니다. 그의 그림에는 일종의 망설임이 있다. 대상을 흡족히 재현하려는 의지와 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부딪힌 자국은 그렸다가 지우고 색을 덮은 듯한 이미지로 남았다. 망설이는 이미지는 거울처럼 그 자체를 대신하여 마주하는 관객의 자아를 비춘다. 작품의 첫 번째 관찰자인 작가에게 이 과정은 일종의 소명론을 구성했을지도 모른다. 가령 절대자의 계명과 같은 언술이다. '내가 어둠을 밝히니, 너도 세상을 밝게 비추어라.'

한지석_no.22-2_리넨에 유채_112×145cm_2022
한지석_가장 정교한 속도展_오픈스페이스배_2022
한지석_no.21-7_리넨에 유채_120×150cm_2021
한지석_가장 정교한 속도展_오픈스페이스배_2022

그가 완성한 그림은 동이 트기 바로 전에 대지에 깔리는 여명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욕망을 감추는 밤의 어둠은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으로 비로소 물러난다. 이러한 경이로운 순간을 신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과거의 조형예술을 되짚어보면 그렇다. 예컨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성스러운 존재를 감싸고 있는 후광(aura)이나, 고딕 양식의 성당같이 어두운 건물로 투과되는 빛은 신의 권능을 상징하는 장치였지 않나. 예술의 역사에서 어둠은 밝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명제는 두 가지를 대비하는 식으로 곧잘 표현되었다. 하지만 밤과 아침은 명확한 경계가 없다. 한지석 작가는 후광이나 투과되는 빛 대신에, 머뭇머뭇하며 교차하는 새벽의 시점을 회화의 장에 끌어올렸다. 그는 그리려는 의지와 지우려는 의지를 하나의 예술적 자아 안에서 충돌시키면서 회화의 역사를 다시 쓰며, 좀 더 치밀한 관념을 미술에 초대한다. ● 그가 특허받은 권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의 세계조차 그 안에서 질서나 결과치와 같은 지표가 있어야 한다. 상징으로서 밝음과 어둠의 비율이 그의 작업에서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인 측정값으로 매겨지고, 이때 쓰이는 지표는 속도일 것이다. 전시 제목이 『가장 정교한 속도』이다. 작가가 제목을 지었다. 이렇게 이름을 붙인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러 개로 나뉜 전시공간 안에서 조금씩 면모를 다르게 등장하는 그의 작품은 영화에서 하나의 프레임을 길게 찍는 롱테이크 방식과 닮았다. 화가 한지석은 여명의 감흥이 주관적이란 걸 알고 정교한 의사소통 과정을 고안해왔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작품을 벽에 거는 대신, 지지대에 고정된 그림을 삼차원 영역으로 밀쳐낸 시도 또한 그렇다.

한지석_no.22-3_리넨에 유채_130×160cm_2022
한지석_no.21-3_리넨에 유채_120×90cm_2022
한지석_가장 정교한 속도展_오픈스페이스배_2022
한지석_no.22-4_리넨에 유채_72.7×60cm_2022
한지석_가장 정교한 속도展_오픈스페이스배_2022

소리 감지기를 달아 전시실에 인기척이 날 때 조명이 작동하는 설치는 이전부터 시도되었다. 2014년에 공개했던 『촉의 풍경』과 다음 해 전시에서 완성한 『silence please』가 그러한 인스톨레이션 작업이다. 작가는 촉의 풍경에서 소리 감지에 따라 강한 조명이 점멸하는 방식이 채택되어 '네가 다가오면, 나는 보여주마.' 조건 명제로 구성된 어둠과 밝음의 단절 형식을 만들었다. 사일런스 플리즈에서 어둠과 밝음은 0과 1의 디지털 비유보다 양적인 변화를 표현하는 아날로그 질서로 다가갔다. 이번에 선보인 『검은새(blackbird)』는 3탄인 셈이다. 양질전화의 선상에서 검은새는 음악과 만났다. ● 20세기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의 『검은 티티새 Le Merle Noi』의 음폭에 따라 조명등은 밝음의 정도가 변한다. 밝음과 어둠을 중재하는 그림은 새의 형상을 숨긴 작품이다. 새들을 레퍼런스 삼은 미술과 음악의 결합체는 전시공간 바깥에서 지저귀는 새들까지 포용하는 작업이 되었다. 작가가 작품을 구현하는 기술 개발에 관심을 두는 건 아니다. 조명 점멸 장치가 이브 클라인과 그를 찬양하던 시대 동안 여러 작가가 공유해 온 아이디어란 걸 우리는 안다. 한지석 작가는 기술의 발전만큼 적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현학적인 과장이나 위선 없이 본인이 거머쥔 작업 개념이 어디에서 왔으며,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알고,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의 설정을 이처럼 다양한 표현 양식에 매긴 것이다.

한지석_no.22-8_리넨에 유채_72.7×60cm_2022

그의 작품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람 형상이 있는 건 맞다. 아니면 '안 보여도 있는 거로 치자'는 양해를 전제해도 된다. 작가의 회화는 직설에서 망설임으로 세련미를 갖춰왔다. 그렇다면 이것은 지금 예술 안팎의 여러 일에 직접 목소리를 내지 않고, 다만 관심만을 두는 순수미술 작업의 중첩되고 비유된 지적 또는 미적 도피일 수 있나? 그의 그림에는 특정한 장소에 발을 딛고 본 것보다 그 현장을 매개한 이차적 목격이 더 많다. 오늘날 한 명의 미술가가 자신의 작업에 일상의 전부를 투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당장 급한 과업을 해소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한지석 작가는 이러한 속박을 초월적인 풍경으로 전망하고, 끝내 넘어서려 한다. 미술가에게 개인전은 사회의 존재구속으로부터 자기 현존의 일부를 되찾는 과정이다. 그는 부분적이지만 자신을 찾는 데 성공할까? 나로선 알 수 없다. 한지석 작가는 동시대 회화가 허용하는 형식 안에서 자신의 환희와 슬픔을 고백한다. 고백 과정에 겉멋이 없고 단단하다. 용기와 안식을 주는 작품이다. 우리에게 주는 만큼 작가도 가져갔으면 좋겠다. ■ 윤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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