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RE

황규민展 / HWANGKYUMIN / 黃圭民 / mixed media   2022_0504 ▶ 2022_0511

황규민_넝마 철학 조각가 RE:_캔버스에 유채_162.2×260.6cm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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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민 인스타그램_instagram.com/hwangkyuu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아트스페이스128 ARTSPACE128 대전 중구 중앙로112번길 46 2층 Tel. 070.7798.1280 www.artspace128.com @artspace128

out of academy art - 대학 미술 출구 및 우회로를 찾아서#1. 개성을 강조하고 남과 차별화된 창의성을 요구하는 작가상을 기르고 그로부터 전제된 일관성 있는 개념 및 양식의 작품 생산을 배양하려는 대학(과 대학원)에서의 미술 전공 과정. 양식적 새로움에 대한 경합의 무대를 위한 감각의 투여는 내게 어떤 동기보다는 피하고 싶은 어지러움을 준다. 또한 사회 실천적 미술, 예컨대 기후 위기, 생태적 위기나 불안, 경제적 탈성장 등의 거대한 사회적인 문제에 대응하는 비판이나 실천 행위 등이 미술과 관련해 볼 때 접점이 막연해진다. 한 편에 개인적인 소수성과 부정성을 천착하고 드러내면서 자기 정체성화하는 것 또한 왠지 몇 년의 틀 속에서 작가 주체성이 주입되는 것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과거의 나는 이렇게 예민했던가. 그때 생각 없이 즐기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위한 미학은 또 얼마나 냉혹하게 외면하게 되었나. 이 흐름 속에 미술 예술이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어떤 효능과 가치가 있을까. 구체적으로 느끼고 싶다. ● 막연하게 디자인을 전공했다가 회화로 편입한 대학/미술 전공 제도에 많은 피로감과 우울한 무기력감이 함께 했다. 이러한 감정들은 내 안에 있는 작가에 대한 욕망과 미련, 그로 인한 복잡한 감정인 듯하다. 다양한 동시대 미술의 성공 사례를 배우고 찾았지만, 그 성공과 나의 상황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격차 또한 엄습한다. 미술을 안 하면 그만이고 편할 것 같은데, 사회생활 또한 녹록지 않다. 휴학과 복학의 지난한 고민의 기간이 준 교훈이다. 그러나 졸업을 위해 무언가 해야만 한다. 두 가지 상반된 이유가 내 안에서 다툰다. 하나는 대학 전공 관련해 온 생활에 대한 아까움이다. 표현을 원활하게 하지 않았을 뿐, 미술과 예술에 대한 아무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민들이 산발적으로 깊었던 탓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그 번민의 시간들을 경유했음에도 이렇다 할만한 작품발표의 결정체들이 별로 없다는 상황이다. 작품은 누군가에게 구체적인 효능감을 주는 게 확인되지 않은 채 어정쩡한 짐이나 쓰레기가 될 것 같고, 이러한 의문이 향하는 곳은 도처에 많지만, 여전히 빈번하게 전시는 가동되는 현상에서 질문은 향할 바를 모른 채 안에서 맴돈다. 이 미술적 결정과 표현의 충동, 그리고 망설임과 미룸의 양가감정에서 자꾸만 안으로 침잠하고 퇴행하는 악순환을 끈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해야만 한다. 토하고 나오면 시들해지더라도. 현재를 써봐야겠다.

황규민_작가 연구_왁구 틀, 페인트_61.7×246.7cm_2022

#2. 나는 어쩌면 이 작품을 보러온 사람들을 부끄러운 모습으로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체 없음, 모방이라는 궁색한 양식 뒤에서. 이러한 모습들은 남을 빌어서 본 나의 자화상일 것이다. 나의 고민과 주제를 마치 누군가 먼저 맵시 있게 표현해버려서 할 일을 빼앗긴 심정일까, 아니면 그 작업을 봄으로써 비로소 생긴 나도 같은 고민을 했었다는 착각일까. 질투에 의한 기생과 불안에 기인한 위장술이란 말이 이 작업에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누군가의 작품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오마주인가, 참조인가, 모방인가, 반복인가. 주체와 자아의 향방은 숨겨지고 짐은 가벼워질까. 반복의 반복.

황규민_RE:RE:RE_아크릴 실, 레드파인 각재, 못_78.5×49×4.5cm_2022

#3. 아직 나에게 미술 안에서의 신념은 없다. 나의 삶을 투신할 만큼의 가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순수, 아카데미… 이런 것들과 거리를 두고 보는 요즘이다. '아, 이 쓸모없는 것들의 가치로움이여' 이 말을 되내이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올 것인가. ■ 리씨

황규민_RE:RE展_아트스페이스128_2022

RE: 새로움 이후의 창작을 위한 시도 ● 예술에 관한 일반화 된 관념들이 몇 가지 있다. '항상 새로운 충격을 주어야 한다'라거나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들... 이러한 생각들은 예술을 개념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예술에 요구되는 가치가 무엇인지는 알게 해준다. 그래, 좋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구를 받는 예술이란 녀석은 대체 무엇일까? 예술에 관한 일반적인 관념은 흔하디 흔하게 자리잡혀 있다지만, 정작 예술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공백으로 남겨져 있기 마련이다. 예술 자체를 규정하는 데에는 언제나 어떤 곤란함이 뒤따르는 것이다. 그와 같은 곤경은 예술의 생산자인 예술가라 하더라도 쉽게 외면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바로 그 예술을 규정하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을 곤경으로 여기기보단 외려 창작의 원천으로 삼곤 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예술의 반-규정성이라 할 법한 특징을 미적 자율성의 알리바이로 여기는 것이다. ● 다시 한번 말하자면, 앞서 언급한 예술에 관한 요구들은 예술을 규정하기 위한 단서가 되진 못한다. 아니, 외려 그와 같은 생각들은 예술이라는 것이 애초에 규정될 수 없는 어떤 것, 끊임없이 정의되는 것을 벗어나는 반-규정으로서의 무언가라는 점을 시사할 따름이다. 그리고는 이러한 주장들까지도 이어지곤 한다. '예술의 의미는 쉽사리 규정될 수 없다'라거나 '예술은 가치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둥의 이야기들... 이 또한 오늘날 '새로움'이나 '창의성'을 요구하는 것 만큼이나 예술에 관한 상투적인 관념이 되었다. ● 황규민 작가의 전시 『RE:RE』는 앞서 언급한 예술(가)의 곤란함이 주된 바탕이 되어 있다. 그런데 독특한 점은 그가 예의 곤란함을 진짜로 곤란해하고 있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흔히 예술가들이 이같은 곤란함, 예술의 반-규정성을 미적 자율성의 알리바이가 여기며, 창작의 원천으로 전화되기 마련인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는 그런 예술가들의 평균적인 태조와는 정반대로 아니, 어쩌면 지극히 마땅하게도 '예술을 규정할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예술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구는 듯 보인다. 특히나 그가 이 전시를 만들게 된 계기로서 밝히는 이야기들은 거의 비명에 가까울 정도로 스스로 예술에 대한, 그리고 창작에 대해 느꼈던 불능감과 무기력을 실토하는 말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지금 이곳에 보이는 것처럼 일련의 창작을 행한 끝에 하나의 전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전시 『RE:RE』는 그가 호소한 창작에 대한 불능감과 무기력을 어떻게든 상대한 끝에 만들어낸 어떤 방증이자 결과물인 셈이다. 그는 그와 같은 불능감이 1차적으로는 지극히 사적인 증상으로 현상하지만, 또한 동시에 지극히 공적인 문제기도 하다는 점을 드러내려 한다.

황규민_RE:RE展_아트스페이스128_2022

작가는 『RE:RE』의 작업물들을 만들어내게 된 계기를 꾀나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야기는 우선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가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지독한 무기력증에 빠져있었으며 더이상 창작을 할 수 없었던 상태에 달해있었다'고... 그런 와중 그는 우연히 어떤 오픈 스튜디오를 방문하였다가 한 작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현재 상태가 단순히 개인적인 의욕이나 동기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 작가 또한 자신과 비슷한 고민이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겪었던 증상은 오늘날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공통의 조건에서 비롯되는 공적인 증상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가 더이상 창작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과 달리 그 작가는 줄곧 작품을 생산해왔음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단순하지만, 놀라운 생각을 하나 하게 된다. 그 작가의 작업을 자신이 다시 한번 반복해보자고. 그의 과거 작업이 지금 자신과 같은 공통의 고민을 공유하고 있었다면, 더욱이 그 고민이 여전히 유효한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작품이 상대했던 문제가 여전히 유효함에도 불구,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새로운 작업으로 넘어가게 만드는 어떤 관성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그는 그 작가의 작업을 자기 나름대로 반복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그는 오늘날 예술에서 관습화된 새로움에 대해서,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일련의 곤경을 여타의 예술가들처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거부하고자는 의지를 보인다. ● "아름다움은 이제 새로움과 거의 자웅동체인 듯하다.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옷의 만남, 새로운 것은 무조건 적인 가치일까... 그러나 새로움이 가득하고 이러한 시스템이 돌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가치들은 점점 더 퇴색되었다. 인간에게로의 기여를 검토할 여유를 주지 않는 거대한 경쟁구조. 이러한 지금까지의 역사속 과정에서 미라는 관념으로부터 선한 것은 거세되어 소멸되었다. 우리는 앞으로 인간적인 규모를 회복해야 하며 따라서 미술은 이제 다시 선한 것을 아름다움에 포함시켜야만 한다. ● 그러므로 새로운 것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시대의 예술가들은 사유하여야 하고 여유로운 사고를 사회의 치유와 복원에 쏟아야 한다. 우리들은 다른방향의 이상사회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리혁종. 근대박물관 No.3 「the NEW」 "...새로운 것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03.12.11.) ■ 안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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