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599,850원

최종운_배철 2인展   2022_0507 ▶ 2022_0807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강원도_강원문화재단 주최,기획 / 대추무파인아트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대추무 파인아트 Daechumoo Fine Art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소목길 18-21 Tel. +82.(0)33.642.6708 www.daechumoo.com

당사자 - 유머리스트의 자기 – 재현 ● 대추무파인아트의 전시 《dB.599,850원》은 강릉시 소재 전투비행장 'K-18'의 영향권 안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이 당사자­수혜자인 '군소음보상법'에 대한 것이다. 당면한 쟁점에 대한 의식적이고 시각적인 재현에서 결정적인 것은 그/그녀가 그것을 어디서 보려고 하느냐 일 것이다. 문제의 영향권에서 멀리 있을수록 의식적이고 기계적인 관점이 작동할 것이고 가까울수록 문제는 볼 수 없는, 재현불가능한 어려움이 될 것이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나 작가는 강릉시민으로써 문제의 일부로써 지금 집행되고 있는 법의 대상으로써 상황에 연루되어 있고, 바로 그런 연루되어-있음으로서의 타율적/부분적 육체성을 기록, 재현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기획, 전시를 성취했다고 생각한다.

최종운_유연한 표류 Flexible floating_ 동파이프, 그물망, 와이어, 사운드, 라이팅_1750×300×1625cm(original)_2020

Ⅰ. 문제와 문제화 ● 1951년 대한민국의 첫-전투-비행부대로 창설된 '제18전투 비행단'은 강릉 공항과 함께 사용해왔던 활주로를 양양에 국제공항이 들어선 2002년 이후로는 독점 사용하며 국가주의적 기능을 이어가고 있다. 근 70년 이상을 휴전국 상태로 존재하는 한국에서 유사시 가장 빨리 전투기가 출격할 수 있는 군사 요충지인 K-18의 '가치'나 역할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반복과 망각에 기반한, 일종의 기계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시민의 일상과 이러한 휴전국 비행장의 굉음이 중첩된 지역에서 살아야 하는 강릉시민들에게서 발생한다. 하늘을 나는 전투기가 일으키는 소음은 일상의 무료함과 평화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심지어 일반인의 청력에 문제를 일으킬 만큼 무지막지한 '폭력'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보통 조용한 사무실의 소음이 50데시벨(dB)인데 비해 전투기가 일으키는 소음은 120데시벨(dB) 정도라고 한다. 80데시벨(dB) 이상의 소음에 계속 노출되면 청각 장애인이 될 수 있다고 하니, 비행장 근처 혹은 전투기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의 불안이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끊이지 않는 민원제기와 집단 소송들을 불사하는 시민들의 불만에 마침내 강릉시는 2020년 군소음보상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고 2022년 초 일정 자격과 기준에 근거하여 보상금을 차등지급하겠다는 결정을 시민들에게 고지했다.

최종운_THIS IS HOT(Edition AP)_동파이프, 조인트_19.5×139×5cm_2006
최종운_THIS IS HOT_Pink_아크릴, 네온_15×55×15cm_2014

나는 강릉시의 군소음보상법에 대해 인터넷으로 리서치를 하던 차에 '방안의 코끼리'란 비유를 떠올렸다. 문제가 너무 크고 복잡해서 해결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저 비유가 군사훈련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여전히 청력이 견딜 수 없는 소음을 이제는 행정적인/집단적인 불만제기의 채널 없이 견디게 된 시민들의 답답하고 불안한 감각에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수십 년을 살고 있는 시민들의 집과 일터를 에워싸고 저 위에서 일어나는 전쟁 시뮬레이션이 미시적으로 어떤 불안과 공포를 일으키는 지, 마비와 외면과 나름의 방어와 무력한 투항 사이에서 일상은 어떻게 불안에 잠식되는 지...... 보상금 지급은 당근 같은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당근의 역할, 당근의 가치는 분명히 있다. (거창한)평화주의자나 반전운동가의 시선에서 본다면 보상금 지급과 더불어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한 공론화를 포기하기로 예정된 시민들은 소시민, 대중, 침묵하는 다수일 것이다. '곧 있을 것 같은 북한의 침입'에 한국의 근대사가 얼마나 의지했고 지금도 의지하고 있는지를 안다면 휴전국 한국, 그것도 강릉의 시민으로 산다는 것의 복잡함이나 어려움을 쉽게 설명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최종운_This is Orchestra_quartet_ found objets, 모터, 아두이노, 코딩, mp3, 스피커, 적외선 센서_170×300×280cm_2019

대추무파인아트의 공동대표이자 파트너인 김래현과 설희경 역시 강릉시 군소음보상금의 직접적인 수혜자들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 'dB.599,850원'은 보상금지급의 합리적 기준이었던 데시벨의 표기법인 디비(dB)와 설희경 기획자의 통장에 찍힌 보상금의 액수를 표식한 것이다. 보상의 합리적 기준인 디비(dB)와 그에 따라 한 사람에게 지급된 보상금의 표기에서 나는 '알고 느끼는' 개인의 물러섬, 반응하는 인간의 예민함의 말소를 읽는다. 그리고 그런 개인이나 인간이 사실은 관념적이고 기계적인 반작용에 의거해서 나타난다는 것에 대한 성찰 역시 감지한다. 혹은 무차별적 개인-시민의 자리를 표식하는 데서 멈춤으로써, 알고 느끼는 '나'를 재현의 장에서는 드러내지 않으려는 신중한 의도를 감지한다. 효율성과 합리성이 통치하는 '치안'의 무대를 중립적이고 탈-정치적인 세팅으로 채우는/반복하는 명민함에서 나는 어떤 명랑함을 읽는다. 문제 안에서 살지만 그 문제에 영향 받지 않는 장치나 스타일을 '갖고' 있기에 가까운 멈을 구사하는 사람의 생존법을. 호명되지만 그 호명에 온전히 예속되지는 않는 사람이 표식한 이중의식을. 해결가능한 부정의에 분노하는 자가 아니라 부정의와 함께 계속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아는 자의 가벼움을. 보상법을 둘러싼 '전체'에 대한 재현적/사실주의적 묘사나 도덕적 판단을 경계하면서, 상황에 연루된 구체적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흐릿하게 표식하면서 공적인 전시에 '또' 연루된 기획자 설희경이 "담론과 사유가 수반되는 기획"이라고 적었을 때, 그리고 이런 표식과 앎이 통상의 기획으로부터 어떻게 미끄러지면서 다른 시선, 자세를 나타내고 있는지를 감지할 때 대체로 방안의 코끼리와 함께 살아가도록 운명지워진 우리 포스트모던한 인간들은 이번 기획의 명랑과 가벼움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설희경 기획자는 "담론과 사유"란 문구를 반복한 인문학 옆에 해학(humor)를 초대해서, 본 전시가 "인문학적이고 해학적인" 전시였으면 한다는 바람을 드러낸다. 물론 유머는 친절한 설명 없이 저 전시 제목에서 하나의 형식으로 이미 작동하고 있다.

최종운_Beyound the horizon #1_Liquid industrial products_ 아크릴 케이스, 스틸 프레임, 베어링_55×75×50cm_2022

Ⅱ. 들뢰즈의 유머 ● 나는 아주 간단하게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불친절하게 설명하고 지나가는 아이러니와 유머의 차이를 인용함으로써, "인문학적이고 해학적인" 방법에 근거한 본 전시의 미적 전략에 더 집중하려고 한다. 들뢰즈는 소크라테스의 변증술,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칸트의 비판처럼 철학사의 '대가들'이 근본개혁적으로 제시한 원칙을 아이러니를 통해 설명한다. 즉 들뢰즈는 기존의 인식론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그것의 시효에 종언을 고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이들 철학자들을 아이러니스트라고 호명함으로써, 수사학적 용어로 기성의 근엄한 철학에 대한 우회적 개입을 시도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아이러니는 기존 원칙들을 고수하는 이들 위로 "상승하는", 말하자면 기존 믿음 체계의 시대 착오성을 폭로하면서 자신의 "우월함"/도래를 고지하는 철학적 방법이다. 아이러니스트는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기존의 원칙이나 체계를 따르고 신봉하는 이들의 한계나 무지를 드러냄으로써 웃음을 유발한다. 아이러니스트는 고매한 자이다. 그리고 상승이 아닌 "하강"의 방식으로, 즉 기존 원칙에 대한 복종을 통해 그 원칙을 전복하고 조롱하는 방법이 유머이다. 유머는 폭악한 원칙을 넘어서는 더 우월한 관점 없이, 그 원칙의 요구와 명령에 충실함으로써 원칙의 지배력에서 자유로워지는 이상한 방법이다. 아이러니가 새로운 원칙을 제시하는 혁명가의 방법이라면 유머는 주어진 원칙을 고수하는 비겁자의 방식이다. 들뢰즈는 이를 "허위로 복종하는 영혼이 법칙을 회피할 수 있고 법칙이 금지하는 것으로 간주된 쾌락들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머는 도덕적/인식론적 원칙을 따르거나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없는 "쾌락", 즉 그 원칙들에 의해 처음부터 바깥으로 쫓겨난 쾌락을 음미하려는 방법이다. 유머는 도덕적 세계에는 없는 쾌락을 갖고 그 세계를 횡단하는 자들의 가벼움에 대한 것이다. 원칙을 지키거나 거부하는 것은 도덕적 인간의 방식이고 원칙을 웃으며 따르는 것은 쾌락적 인간의 생존법이다. 허위로 복종하면서, 원칙의 지지자들로 계산되고 호명되면서 그/그녀는 계속 산다. 들뢰즈는 별 설명 없이 그런 사례로 "절차를 어김없이 따르는" 준법 투쟁이나 "철저한 복종을 통해 조롱의 효과를 낳는 마조히스트들의 행동들"을 거론한다.1) 준법 투쟁은 투쟁하는 자와 법을 지키는 자란 상호이질적인 자리가 충돌하는 현장이다. 그것은 저항과 순응, 자의식과 무지가 중첩된 장면이다. 법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통해 법에 대한 조롱의 효과를 낳는 마조히스트들이나 준법 투쟁가들은 모순과 모호성을 현시함으로써 우리와 적,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자리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도덕과 원칙의 세계에 불안을 초래한다. 적도 아군도 아닌, 내부의 외부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도덕과 원칙이 포섭할 수 없는 존재들, 자리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안에 영영 안이 될 수 없는 밖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증언이다. 아이러니스트의 관점에서는 이미 투항한 자들인 이들의 이러한 실천이야말로 불온하고 미적인 실천이다. 아이러니스트가 일견 영웅으로 철학사에 등재되는 것과 달리 유머리스트는 이미 시시하고 평범해서 눈에 잘 안 보이는 존재들이다. 아니 유머리스트는 소수라서 눈에 안 띄인다. 아이러니스트가 원칙에 원칙으로 맞선다면, 유머리스트는 지금-여기에서 자기만의 쾌락을 발견하는 자들이다. 저 위에서 혹은 밖에서 굽어보거나 구경하는 게 아닌 이 안에서 함께 구르고 움직이고 감각하고 슬며시 웃는 자들이 유머를 체현한다. 유머는 상황에 갇힌 당사자들에게서 일어나고, 방 안의 문제인바 코끼리랑도 노는 자들의 생존법이다.

배철_Untitled_혼합재료_가변설치_2022

Ⅲ. 유머에 우울을 더해서 ● 강릉 기반의 지역 작가 배철은 설희경 기획자의 전시 제목을 듣고 "그 돈이면 에어팟 두 개를 살 수 있겠군"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흰 색의 무선 이어폰 에어팟 두 개를 살 수 있는 돈이 60만원에서 150원이 모자라는 보상금에 대한 배철 작가의 해석이었다. 교환가치가 통치하는 자본주의에 충실한 보상금 지급방식에의 충실성을 통해 배철 작가는 에어팟이란 시각적 이미지를 획득했다. 바깥을 차단하고 지금 보고 있는 핸드폰 '속' 인터넷의 이미지와 소리에 자신을 가두는 문화적 풍경을 압축하고 반복하는 방식과 전투기의 소음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배철 작가의 사적인/은유적인 방식이 결합해서 유머러스한 무대가 가시화된다.

배철_TGIF 1_디지털 프린트_70×46cm_2022
배철_TGIF 2_디지털 프린트_52×52cm_2022

작가는 에어팟을 낀 자기 자신을 찍은 사진 작업을 통해 일견 SNS의 사진연출을 흉내내고, 한결같이 에어팟을 낀 사람들로 채워진 한국의 동시대 문화를 호출하고, 강릉시민인 자신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자기-희화화를 실연한다. 가령 종교화에 등장하는 예수의 자리에 에어팟을 낀 자신을 놓거나 헐리우드 영화의 광고 포스터에 나올법한 전투기 조종사의 포즈를 흉내내면서 작가는 초월적 의미나 남성성의 재현을 반복하고 조롱한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의미'를 반복하는/강화하는 예수의 자리에 들어선 작가, 에어팟을 낀 채 말초적인 쾌락을 즐기는 동시대인 혹은 보상금으로 에어팟을 마련한 강릉시민이 보고 있는 것은 전투기이다. 작가는 종교적 도상을 차용해서 직면한 물리적 고통과 그 고통의 상징적/문화적 무의미를 표식한다. 자본과 결탁한 기독교 문화에 대한 이러한 패러디, 모호한 인용에 대해 작가는 "자본이 영생의 위치"를 장악한 문화에 대한 개인적 해석이라고 표현했다. 혹은 아래 땅에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일상은 개의치 않는 헐리우드 남성 영웅을 패러디함으로써 작가는 역시 자본의 얼굴을 한 군대 남성 신화 역시 소환한다. 작가는 보상법을 더 넓은 외연, 즉 종교화된 자본주의나 군국주의적 남성성과 연결하면서도 성인이나 남성을 흉내내는 어설픈 자신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진지함이나 우울함을 중화시킨다. 거칠고 투박하게 연출된 사진에 붙은 제목 'TGIF'는 주5일 근무자들이 금요일에 느끼는 해방감의 줄임말인 TGIF를 트위터-구글-아이폰-페이스북을 가리키는, 삶과 경험을 즐길만한 이미지로 환원시키는 매체들의 약칭으로 전유함으로써 '너머'가 부재하는 동시대 문화적 조건을 표식한다. 의식은 깨어 있지만, 문제는 보이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힘도 분노도 결여된, 그러므로 분노의 '대상'도 제시할 '대안'도 없는 사람은 달리 할 게 없으므로 논다. 무력한 채로 깨어 있는 자신을 즐길 대상으로 만든다. 작가는 자본의 승리와 마비된 감각이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인터넷 문화와 바깥이 없는 갇힌 세계를 그 자체 즐거운 곳으로 경험하는 경험 방식과 계속 예술가의 정체성을 갖고 작업을 하지만 그걸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자기자신에 대해,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의 연출된 사진을 보자마자 웃었던 나의 반응이 그의 작업 의도에 대한 '옳은' 반응이었는지, 혹은 '속은' 것인지는 모호하다. 작가는 바깥이 없는, 의지와 의도를 갖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이 세계를 우울증자의 시선과 유머리스트의 전략으로 횡단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배철_TGIF 3_디지털 프린트_32×80cm_2022

전시장 1층에 설치된 '솟아오르는 철골과 시멘트'로 만든 구조물인 《무제》는 dB의 표준 스펙트럼을 시각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콩크리트 위에 철근을 꽂아 굳힌 구조물에서 우리는 미적 노동이나 사유의 구현으로서의 예술의 기미나 낌새는 볼 수 없다. 마감처리, 미적 개입이 거의 없는 조잡하고 흉물스런 가설물이 전부이다. 철골 위에 인위적으로 붙여 놓은 몇 점의 덩어리 중 '읽을' 수 있는 것은 한때 인기를 끌었던 방송 프로그램 '가족 오락관'의 대표적 코너 「고요 속의 외침」의 일부 이미지이다. 연예인들이 헤드폰을 끼고 상대가 목청껏 외치는 단어를 기이하게 반복하면서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프로그램을 작가는 이번 현안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연결했다. 우울한 예술가 배철은 TV 프로그램을 "정신병원의 환자들을 제어하려는 교화 프로그램"으로 읽었고, 보상법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역시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개돼지민중'의 세상에서, 그들과 별 다르지 않아 보이는 자신에 대해 별 불만을 느끼지 않으면서, '예술'을 계속 하는, 그만두지 않는/않을 작가의 예민한 자의식은 작품 《무제》의 뒤편, 전시장 벽에 오려 붙여진 "죽은 아이 이미지"가 떠안고 있다. 작가가 이번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이미지"였다고 고백한 이 이미지는 너무 작고 흐릿해서 볼 수도 읽을 수도 없는 이미지이다. 이미 이미지이고, 굳이 눈에 보여서 읽으려 한다면 죽은 아이 같고 누워있는 사람 같고 소년 같고 소녀 같고 예수 같은 흑백의 긁어온 이미지, 이미지가 편재하는 세상에서 역시 이미지인, TGIF에서 차용한 '죽음'을 가리키며 떨고 있는 이미지.

배철_Shit_디지털 프린트_각 12.5×17.7cm_2022

오늘날 예술은 자본의 맥락에서 더 신성한, 더 비싼 물신으로써 전례 없는 상종가를 치고 있다. 그것은 예술의 의도였거나 예기치 않은 불행이었거나 횡재였다. 그러므로 예술의 흐릿한 전략도 만만치 않게 자생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시시하고 밋밋하게 투항하고 공모하는 듯 보이는 작업들이 남들(관객이나 주류 예술계?) 눈에 띄지 않기를 그러면서도 예술로서 생존할 수는 있기를 바라면서 사라지지 않음의 가능성을 타진한다고 생각한다. 가늘고 길게, 비겁하고 유약하게 남으려는 것들에 대해 이번 전시의 기획과 전시의 작업이 일별할 수 있게 해준 것 같다고 나는 마음에 들었다고 마지막으로 쓴다. ■ 양효실

* 각주 1)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번역, 민음사, 2010, pp.33~34 참조.

Vol.20220507g | dB.599,850원-최종운_배철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