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lin Portrait 베를린 초상

김옥선展 / KIMOKSUN / 金玉善 / photography   2022_0513 ▶ 2022_0610 / 월요일 휴관

김옥선_BNP_8712ES_디지털 C 프린트_187.5×150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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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선 홈페이지_www.oksunkim.com               인스타그램_@oksunkim_tigerisland33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몸미술관 SPACEMOM MUSEUM OF ART 충북 청주시 흥덕구 서부로1205번길 183 제2전시장 Tel. +82.(0)43.236.6622 www.spacemom.org @_spacemom

그 사진들은 '뿌넝숴(不能說)'"책에 씌어진 얘기가 아니라 두 눈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 얘기하게나. 두 눈으로 보이는 그 광경이 무엇을 뜻하는지 온몸으로 말해보게나. 뿌넝숴. 뿌넝숴." 1) ● 이것은 김옥선의 「베를린 초상」(2018-2019)을 다시 읽는 과정에서 마주한 연 이은 실패의 기록이다. 처음에는 그 사진 속 여성들이 이야기를 시작할 것 같았다. 무표정해서 말을 붙이기는 좀 어렵지만, 그들의 옷차림과 머리 매무새, 방안의 물건들은 말문을 열기에 좋은 단서로 보였다. 그들은 50여 년 전 독일로 가서 지금까지 베를린에 살고 있는 전직 한인 간호사들이다. 언론이나 책을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국가가 특정 직군의 집단이주를 독려했던 드문 상황에서 그들의 삶과 이주 노동, 그리고 노동쟁의는 이야기 거리로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사진들이 갑자기 우물거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개성 강한 몇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인물들의 옷차림은 사는 곳을 추정하기 힘들만큼 평범했다. 한국의 전통 장식품이나 그림들도 사진 프레임에 의해 잘려 나가거나 초점 뒤로 흐릿하게 물러나 있다. 사진으로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김옥선은 왜 이렇게 선명한 단서들을 약화시켰을까? 내가 처음으로 본 김옥선의 작업은 「해피 투게더」였는데 그 사진들은 온통 단서로 가득 차 있고 공간을 분할하는 마디까지 선명해서 밤새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면 「베를린 초상」의 사진들은 말수가 적었다. 사진을 찍으며 주어진 단서를 줄여도 될 만큼 작가에게는 인물들의 이미지가 강렬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이야기를 열어놓기만 해도 이 덤덤한 사진들이 힘 있게 읽힐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2019년의 전시 《베를린 초상》(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분명 나는 그 사진들에 이끌렸지만 실패한 인터뷰어처럼, 실망한 관광객처럼 약해진 단서들 앞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2022년 이 사진들이 다시 전시되기로 했을 때, 그때 정박시키지 못했던 말들을 다시 꺼내 정리해보기로 했다.

김옥선_BNP_8708CH_디지털 C 프린트_152.5×121cm_2018 김옥선_BNP_8711JS_디지털 C 프린트_152.5×121cm_2018

「베를린 초상」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뉘어 촬영되었는데, 양쪽을 비교해보면 변화가 두드러진다. 첫 번째 「베를린 초상」(2017-2018)에는 벽에 걸린 그림,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들, 국기, 그들의 독일 배우자들까지 등장하여 '섞인' 삶에 대해 부지런히 말해주었다. 반면 두 번째 시리즈(2018-2019)에서는 말을 해줄 것 같은 사물들은 뒤로 물러나 있고, 강한 단서가 될 만한 액자는 프레임에 걸려 잘려 나간다. 그리고 2022년 두 번째 시리즈 중 일부를 다시 전시하게 되었을 때, 작가가 골라낸 사진에서는 '이주'의 단서들은 더 보이지 않았다. 간혹 한국의 전통 장식, 반가사유상 사진, 태극 부채, 개다리소반 등이 배경에 작게 드러나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인물과 사물은 특정한 지역색이나 드라마틱한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다.

김옥선_BNP_8708MS_디지털 C 프린트_100×80cm_2018 김옥선_BNP_8717GR_디지털 C 프린트_100×80cm_2018 김옥선_BNP_8713EK, 2018_디지털 C 프린트_126×100cm_2018

이런 정보의 절제와 관련하여 평론가들은 「베를린 초상」의 유형학적 성격을 자주 언급했다. 이필은 "베를린 한인 간호 여성들의 현재의 모습을 보는 우리에게 그들이 겪어온 질곡의 역사, 투쟁과 쟁취의 역사, 봉사와 헌신을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 사회적 다큐멘터리"로 규정했으며, 작가가 "정면성, 중립성, 무표정성의 형식"을 선택하여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고 포즈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유연한 유형학'이라 이름 붙였다. 2) 하지만 여기서 작가가 질곡의 역사, 투쟁의 역사를 전달하려고 했다면 왜 사진에서 단서들을 흐려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에 비해 문혜진은 차라리 김옥선의 사진에서 '기묘한 중간성'에 주목한다. 낸 골딘(Nan Goldine)과 다이앤 아버스(Diane Arbus)의 사이, 유형학과 다큐멘터리의 사이, 연출 사진과 다큐멘터리 사진의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김옥선의 타자성 연작은 베허 부부(the Bechers)의 유형학보다는 형식적으로 자유롭고,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의 작업처럼 전체를 아우르려는 아카이브적 욕망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유형을 규정하기에는 느슨하고 개별적이지만, 개인이라 말하기에는 추상적인 이 모호함이 김옥선 사진의 중요한 차별성이다." 3) 하지만 나는 이 '중간'이라는 모호한 위치에도 닻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베를린 초상」은 시대적 공통점을 가진, 무표정하게 정면을 향하는 인물들을 반복적으로 찍은 사진이라는 점에서 유형학적 사진들과 '결과적으로' 닮아 보이긴 하지만, 나는 그 사진들 어디에서도 피사체를 비교하여 묶어내고 반복을 통해 연구하려는 유형학적 의도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우 자연스럽게 무게중심은 다큐멘터리 쪽으로 기울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왜 점점 단서를 줄여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김옥선_BNP_8717GR_디지털 C 프린트_100×80cm_2018

어떤 이는 「베를린 초상」의 담담한 얼굴에서 "이질적이고 불안정한" 정서를 포착하기도 하고 4) , 또 다른 이는 노년의 숙명을 읽어 내기도 했지만 5) , 대부분의 필자들은 김옥선이 의도적으로 사진에서 감정을 제거했다고 보았으며 그에 따른 사진의 중립성과 객관성을 강조했다. 6) 그러나 나는 무표정한 얼굴에서 중립성과 객관성을 확인하는 것도 실패했다. 인물들은 대부분 평온하게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한없이 복잡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독해는 물론 작가의 전작에 의한 오염이자 또 하나의 실패이다. 김옥선은 소위 '평범한'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커플들(「해피 투게더」), 이방인의 삶(「함일의 배」, 「No Direction Home」), 이식된 나무들(「빛나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작가 자신의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는 대상들, 때로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대상들을 찍어왔다(사실, 나는 김옥선의 모든 사진을 「해피 투게더」와 분리해서 읽는 데 언제나 실패해왔다). 피사체들은 대체로 무표정했지만 보는 이들은 이미 작가가 피사체에 동화되었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무표정의 값을 '0'이 아니라 '빼기'로 보게 된다. 김옥선은 가만히 살아가기만 해도 버거운 자기장 안에 놓일 수밖에 없는 삶을 선택한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없애주기 위해 애쓴다. 그들(혹은 자신)의 감정을 지워주고 싶어 하는 김옥선의 감정이입은 그래서 조금도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피사체를 화면 가운데에 앉힌 전형적인 전신사진을 찍고 표정을 없애고 물건들을 프레임에 흐릿하게 걸쳐 두어도 그들에 대한 작가의 이끌림을 감추는 데 언제나 실패하는 이유이다. 김계원은 김옥선이 큰 이름 뒤에 가려진 것을 드러내려 한다고 했다. "「베를린 초상」은 그렇게 근대화의 역군, 인권투쟁 선구자, 1세대 이주노동자 등 크고 굵직한 역사의 이름 뒤에 가려졌던 일상의 장소, 신체의 시간 앞에 조용히 멈춰 선다." 7) 김옥선은 역사의 이름에 끌려가는 개인들의 삶을 담담한 시선 앞에 붙잡아 세워두기 위해 파도 위의 서퍼처럼 안간힘을 쓴다. 이렇게 보면 작가는 단서를 지우기만 한 것 같지는 않다. 때로는 프레임 속에 일부러 옮겨 놓거나 그냥 내버려둔 듯한 사물들도 보인다. 약간 어색한 위치에 놓인 꽃병과 라디오(「BNP_8712ES」), 지금 막 케이스에서 꺼내 놓은 듯한 기타(「BNP_8708MS」), 비어져 나온 스타킹 뒤꿈치 박음질 자국(「BNP_8717JL」) 등 사소해서 오히려 역사의 이름에 끌려가지 않을 단서들은 슬금슬금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거나 남아있다. ● 김옥선이 지우거나 남겨놓은 것을 보면 문득 우리가 얼마나 쉽게 타인들을 커다란 자석에 붙여왔는지 깨닫게 된다. 삶 전체를 순식간에 수동태로 만들어버리는 '파독 간호사'부터 '민족의 누이', '근대화의 역군', '역사의 희생자'라는 이름까지 쓸데없이 센 자석들이 붙어있다. 심지어는 그저 그들에 이끌려 기록한 김옥선의 사진도 다큐멘터리 사진에 붙을지, 유형학적 사진에 붙을지 선택하라고 한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비평과 해석의 행위이며, 모든 이미지의 언어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환원이다. 다만 그 자석들의 힘이 지나치게 커질 때 눈앞의 이미지는 힘을 잃는다. 그래서 김옥선은 자석을 떼 내거나 적어도 프레임 안에서는 한쪽 자석으로 끌려가지 않고 버티도록 안간힘을 쓴다. 표정을 지우고 사물을 밀어내고 프레임을 잘라내서 무거운 이름 없이도 긍정되는 상태를 만든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은 세상을 뒤집을 다큐멘터리도, 새로운 패턴을 찾아내는 유형학도 되지 않겠지만, 끌려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김옥선_베를린 초상展_스페이스몸미술관_2022
김옥선_BNP_8709CZ_디지털 C 프린트_187.5×150cm_2018
김옥선_BNP_8711AR_디지털 C 프린트_152.5×121cm_2018

이 사진들에 적절한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김연수의 「뿌넝숴(不能說)」라는 소설이 있다. 한국전쟁에 중공군으로 참여했던 한 노인이 자신이 겪은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한국인 소설가에게 들려주면서 추임새처럼 반복하는 "뿌넝숴"라는 말은 결국은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소설 속 화자는 역사에 의해 충실히 기록되기 어려운 존재다. 그리고 그도 자신의 강렬한 경험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결국 소설가는 이 낯선 단어를 소리나는 대로 받아 적는다. "뿌넝숴"가 주는 느낌은 "말할 수 없음"이라고 풀어서 설명해버리면 이내 사라져버린다.

김옥선_BNP_8717JL_디지털 C 프린트_76×60cm_2018

「베를린 초상」에는 유형학, 중립성, 객관성 같은 이름보다 "뿌넝숴"가 어울린다. 그 사진에서는 미세하게 낯선 이미지가 계속 유지된다. 작가는 인물의 표정과 공간적 구도를 지우고, 한국적 사물들을 흐릿하게 뒤로 보내고 사소한 사물들을 남겨두지만 "말할 수 없다"고 단정 짓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 삶이 어떠했는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뿌넝숴"라고 나지막하게 따라해 볼 수는 있다. 카메라를 든 김옥선은 이미지의 낯선 발음을 지워버리지 않기 위해 애쓴다. 내 언어가 실패하고 김옥선의 사진이 애쓰는 자리의 이름은 그래서 '뿌넝숴'이다. ■ 안소현

* 각주 1) 김연수, 「뿌넝숴(不能說)」,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문학동네, 2016. 2) 이필, 「비가시성으로 남은 역사의 소환: 김옥선의 Berlin Portaits」, 2020.    * 문혜진의 글을 제외한 나머지 글들은 모두 oksunkim.com/articles에서 인용했음. 3) 문혜진, 「얼굴로, 그 얼굴, 얼굴」, 김옥선, 『Portraits』, 2021, 9-15쪽.    이 타자성 연작에에는 「Park Portraits」, 「Riverside Portraits」,    「No Direction Home」, 「Berlin Portraits」가 포함된다. 4) 김윤경, 「사진, 어떤 삶에 대한 경의」, 2019. 5) 김계원, 「김옥선, 베를린 초상」, 2019. 6) 권혁규, 「재촉 없는 호기심의 시선」, 2019. (『퍼블릭아트』, 2019, 6월호) 7) 김계원, 같은 글.

Vol.20220513h | 김옥선展 / KIMOKSUN / 金玉善 /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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