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22_0528_토요일_06:00pm_탈영역우정국 2층 테라스
아티스트 토크 / 2022_0531_화요일_01:00pm~02:00pm 인스타그램 라이브 진행, 탈영역우정국 2층
참여작가 김우진_이원호_장한나_정민정_최희현_허윤희
협력 / 탈영역우정국 협찬 / AROCELL_BANTROME_Dr.sanicle_PRO-PAC 주최,기획 / 동덕여자대학교 큐레이터학과(@unsounded_mirror) 사진 / 홍철기
관람시간 / 01:00pm~07:00pm
탈영역우정국 POST TERRITORY UJEONGGUK 서울 마포구 독막로20길 42(구 창전동 우체국) 2층 Tel. +82.(0)2.336.8553 www.ujeongguk.com www.facebook.com/ujeongguk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握手)를모르는왼손잡이오 //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 나는지금(至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게요 //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 또꽤닮았소 /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이상, 「거울」(『가톨릭청년』(통권 5호), 가톨릭청년사, 1933) 전문.
동덕여자대학교 큐레이터학과 제22회 졸업 전시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마치 거울을 마주하는 것처럼 비추어주는 작품들과 함께 한다. 이 전시는 이상의 시 〈거울〉에서 출발한다. 그 시에는 거울 속의 자신과, 소통하지 못하는 '나'가 등장한다. 거울 속은 소리가 없고, 그곳의 '나'는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며,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거울 밖에 서 있는 우리는 거울에 비춰진 그들의 고통을 인지하면서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아픔을 외면하고 침묵한다. ●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된 이 전시는 거울 속의 세계에서 외부의 현실을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려준다. 허윤희는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멸종 위기 식물을 화폭에 담았다. 장한나는 자연에 버려진 후 돌처럼 변한 플라스틱을 지칭하는 '뉴 락'을 주제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 변화된 생태계를 드러냈다. 또한 정민정은 인간의 무관심 속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떠돌이 개의 시간을 사유한다. 이들은 모두 각자가 목도한 현실을 비추며, 들리지 않던 소리를 전달하고 있다. 또한 이 전시는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거울 속의 '나'가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낸다. 김우진은 표준어 중심의 사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져가는 제주 방언에 주목하며, 최희현은 철저히 인간 기준으로 제작된 인공물에 의해 죽어간 새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주류 기준의 사회에서 잊혀지는 것들을 소환하고 소통의 불균형이라는 문제를 들춰낸다. 마지막으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동시에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존재이기에, 타인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원호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등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려주면서 그 소리에 내포된 '거부'나 '경계'의 뉘앙스를 새삼 알아차리게 한다. ● 이 전시는 거울 너머의 현실을 바라보고자 한다. 소리가 들리지 않을지라도, 거울 속의 세상은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작품들이 비추는 현실은 다소 절망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시 속의 '나'가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있으며 진찰하지 못함에 섭섭해하는 감정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제대로 근심하고 진단할 때 비로소 타인과 소통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닫아 두었던 감각을 열고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을 의식하며, 거울 너머의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정민정은 잊혀진 공간에서 인간의 무관심으로 인해 스러져간 존재에 대해 애도한다. 전남 광주 월산동 일대를 산책하다 발견한 개의 유골을 수습하고 정성스레 닦아주며 'Puppy'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작가는 퍼피에게서 처음 발견했을 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어떠한 생명력도 느낄 수 없음을 알아차린다. 그대로 자연의 것으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하며 수습하던 도중, 퍼피를 터전 삼아 살아가고 있는 무수하고 다양한 생명을 발견하게 된다. 퍼피의 멈춰진 생명이 다른 생명에게로 이어져 갔음을 깨닫고 자연의 순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작품에 들어간 '0'은 순환의 의미를 갖고 있다. 퍼피가 태어나 살아가고 죽은 것, 유골을 안식처 삼아 생을 이어가는 많은 생명, 그 옆의 호박꽃처럼 살아가는 모든 것은 자연의 순리 안에 반복하며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시장 바닥에 설치된 밀랍가루와 퍼피의 유골은 둥근 '0'의 형태를 띠고 있다가 이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관람객의 발길에 의해 그 형태가 바뀌기도 한다. 또는, 존재를 인식해 퍼피와의 관계를 형성한 관람객은 허리를 굽혀가면서까지 퍼피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이처럼 '0'은 작가에 의해 발견되기 전, 관계 맺어지지 않았다는 기호로서 '없다'는 의미를 가지며, 작가와의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시작의 의미 또한 가지고 있다.
최희현은 이미지의 허구성과 현실이 맞닿는 지점에 주목해왔다. 현실을 닮은 그림과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 세계 사이, '과연 어떤 것이 이미지고, 어떤 것이 현실인지'에 대한 인식의 괴리는 인류 역사에서, 특히 미술사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버드세이버 보고서〉 연작의 주제인 '버드세이버' 또한 허구의 이미지와 현실이 맞닿는 경계 지점에 있는 요소다. 새의 모습을 본 따 그린 스티커 '버드세이버'를 우연히 도로에서 발견한 최희현은 '버드세이버'가 그동안 본인이 탐구해 왔던 '이미지와 현실이 맞닿는 지점'에 대한 은유적인 사회현상이라고 보고 〈버드세이버 보고서〉 연작을 제작하게 되었다. ● 작품은 야생 조류의 폐사 사건을 막기 위해 '버드세이버'를 고안해 부착하는데도 폐사 사건이 지속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그 원인을 분석하고 다양한 해결 방안을 시도한다. 그는 일련의 탐구 과정을 6·70년대 비디오 아트 풍으로 유머러스하게 풀어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인간과 달리 눈이 머리 측면에 달려 있는 새의 신체적 특성상 전방 거리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전방 구조물 인식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를 통해 '버드세이버'가 비인간의 생존을 위한 물건임에도 철저히 인간의 시선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드러내며, 인간이 직접 새가 되지 않는 이상 새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현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와 그 영원한 간극을 깨닫게 한다. 동시에 그는 이미지와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장면들을 구성함으로써 우리가 '이미지'라는 차원을 어떻게 사유해왔는지에 대해 질문하며, 다른 시각에서 현실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허윤희는 2008년부터 매일 나뭇잎 하나를 그리고 그날의 단상을 쓰는 활동을 시작으로 직접 전국 각지의 산을 돌아다니며 식물을 탐사하며 배우던 중, 한국 고유의 꽃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을 멸종 위기로 내몬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식물 자생지는 오염되고 희귀하거나 약효가 있는 식물은 무분별하게 채취되어 팔려 나간다. 그렇게 사라져가는 작은 존재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허윤희는 2020년부터 식물을 주제로 한 작업을 심화하여 〈사라져 가는 얼굴들〉 연작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 작가는 인간에 의해 스러져가는 꽃을 그려내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변화하는 것들과 이에 대한 인간의 영향과 책임을 되돌아보게 한다. 나아가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서 지구 위에서 사는 생명들의 공생에 관해 함께 이야기하길 희망한다.〈사라져 가는 얼굴들〉연작을 통해 멸종 위기에 처한 한국 고유의 꽃이 지닌 고요하고 단아한 아름다움, 자연에 대한 경외감에서 그치지 않고, 작가 스스로 사라져가는 식물들을 탐구하고 그려내면서 느꼈던 자연에 대한 소중함과 생태계 파괴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을 공유한다. 그리고 지구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닌 수많은 생명들의 터전임을 생각해 보길 촉구한다. 우리 생명체는 모두 지구의 평등한 주인이자, 공동체로 묶여 연결된 존재이다. 그렇기에 작은 꽃의 멸종은 그들만의 멸종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들의 이기심, 탐욕만 추구하여 다른 생명체의 파괴를 일삼는다면 우리들의 초상도 〈사라져 가는 얼굴들〉의 한 폭에 그려지게 될 것이다.
김우진은 권력이 불특정 다수에게 미치는 방식과 그 영향을 탐구해왔다. 그는 작품에서 동아시아권 국가들에 남아 있는 군국주의의 잔재 '국민체조'나, 표준어와 방언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관계 등, 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과 이를 무의식적으로 체화한 불특정 다수의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어 받아쓰기 시험_다음을 듣고 따라 쓰세요〉 역시 표준어와 방언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와 권력관계를 조명하면서, 그로 인해 어떤 가치가 소멸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다. ● 이 작품은 작가가 대만 어학연수 시절에 겪었던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원래 대만은 중국 남부에서 넘어온 지역어를 포함, 그 지역의 다양한 토착 언어를 사용하던 나라였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만다린 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만의 언어사(史)를 알게 된 김우진은 한국어 역시도 단일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국내 방언 중에서도 제주어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작업을 시작한다. ● 〈한국어 받아쓰기 시험_다음을 듣고 따라 쓰세요〉는 제주어 구사자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기 평가 형식으로 편집하여, 표준어 구사자인 '나'가 그 내용을 받아 적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할머니가 구사하는 제주어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작품의 중간중간 등장하는 쌓인 모래들은 제주어를 비롯한 연약한 가치들을, 모래를 파헤치는 손은 자신도 모르게 권력의 폭력성을 내재한 불특정 다수를 상징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그동안 '한국어는 단일어'라고 믿어 왔던 우리의 사고에 균열을 내며, 권력에 의해 연약한 가치가 사라져가는 현실을 드러낸다.
2022년. 바야흐로 인간으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고 변화하는 인류세의 시대이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은 너무나 거대하고, 상투적으로만 느껴져서 피부에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장한나의 '뉴 락(New rock)'은 변해가는 환경을 자각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깨달음의 계기로서 다가간다. 뉴 락은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가 오랜 시간 동안 바다를 떠돌다가 바위 틈 사이에 끼여 마치 돌처럼 변화한 물체를 뜻한다. 이 암석화된 플라스틱은 겉으로 보기에 전혀 인공물로 보이지 않으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연 속에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바로 이 조화로운 어울림을 다양한 풍경으로 강조한다. ● 마치 바닷속의 한 풍경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신생태계〉는 신비로운 광경을 자아내며 시선을 집중시킨다. 관객들은 홀린 듯 수조로 다가가지만, 그 안에는 물과 모래, 그리고 뉴 락뿐이다. 이 작품에서 뉴 락은 마치 실제로 해저에 존재하는 암석처럼 자연환경과 완벽히 어우러져 있다. 〈뉴 락 연구자의 방〉 또한, 뉴 락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연구실의 풍경으로 드러낸다. 책상 위에 놓인 뉴 락의 표본들, 벽에 걸린 사진과 드로잉들은 뉴 락이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자 실제 존재하는 물질임을 주장한다. 전시장 곳곳에 써 붙인 글을 보면 각기 다른 뉴 락을 채집한 기록으로, 자연과 플라스틱이 융합된 풍경에 현실성을 더한다. ● 뉴 락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아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상의 한 풍경이다. 이 풍경은 플라스틱을 소비하는 개인, 기업과 국가의 욕망이 만들어낸 현상이자, 자연의 포용력이 완성한 결과이다.
이원호는 우리 일상에서 익숙했던 대상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당연하게도 다가왔던 익숙함이 그의 작품 세계를 통해 우리에게 낯섦을 주고, 이는 더 나아가 불쾌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기존 작품 〈너만 괜찮다면 나는 괜찮아〉를 변형해 '괜찮아요'라는 말을 조명한다. 사방을 둘러싼 8개의 스피커 유닛에서 '괜찮아요'라는 말이 퍼져 나온다. 이는 일상에서 주로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스스로 괜찮은 상태임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거나 타인이 상처받을까 우려되어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원호의 작업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작가는 말이 담고 있는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여러 날에 걸쳐 작업을 녹음한다. 작가의 '괜찮아요'는 소근대는 조용한 소리에서부터 고함을 지르는 듯한 큰 소리까지 다양하다. 관람객은 스피커 중앙에 서서 전후좌우로 괜찮다는 말을 듣게 되며, 점차 격앙되며 커지는 목소리에서 거부당하는 불쾌감을 느끼며 이내 '괜찮아요'라는 말이 배려를 가장한 배제 언어임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이렇듯 배려 언어로 익숙했던 '괜찮아요'라는 말의 이면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영역 안으로 들어오려는 타인을 배제하고자 발화된 말임을 조명한다. 또한 이 배제 언어는 보이지 않았던 서로 간의 경계를 조명한다. ■ 동덕여자대학교 큐레이터학과 기획팀
Vol.20220528c |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