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

시대의 눈: 해석된 달항아리展   2022_0603 ▶ 2022_0628 / 일요일 휴관

도상봉_개나리_캔버스에 유채_53×45.5cm_1975

초대일시 / 2022_0603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권현진_김덕용_도상봉_승지민_아트놈 이상협_이용순_이이남_이종기_정현숙 찰스장_최영욱_하태임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나우 GALLERY NOW 서울 강남구 언주로152길 16 (신사동 630-25번지) Tel. +82.(0)2.725.2930 gallery-now.com

1300도 가마에서 일어나는 때와 불의 조화, 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움이라 불리우는 이조백자 달항아리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오늘날의 수많은 작가들에게도 영감을 주고 한국적 조형미의 극치로 평가받고 그 있다. 그 달항아리를 너무나 좋아해서 "그의 심미안은 달항아리로 시작되었다"는 김환기화백은 그것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한국의 산천과 달, 매화, 여인들을 함께 그렸다. 그 이후 달항아리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하고 수많은 미술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무더운 여름 한 줄기 소나기를 내리고 저쪽 하늘에 다시 피어오른 눈 같은 뭉게구름과 큰 바다와 호수와 강가 겨울산과 바람을 생각하기도 한다."고 정양모 관장이 표현했던 백자대호 달항아리, 소박한 어깨에 당당한 굽, 둥근 팔각에서 오는 편안함, 거기에 풍만함과 준수함은 어떤 것도 품을 수 있는 군자의 마음을 지녔고, 시작 끝의 개념을 모두 함축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달항아리는 우리나라 고유의 정체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가장 평범하고 단순한, 기교를 부리지 않은 비정형의 형태가 품은 너그러움과 넉넉함이 한국민의 정서와 깊이 맞닿아 있다. 둥근 형태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에너지로 인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달항아리. 한국적 아름다움의 정수 달항아리, 이에 대한 현대적 시선을 가진 작가들은 달항아리를 어떻게 해석할까? 갤러리나우는 현재 화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작가들이 해석한 달항아리에 대한 시선을 살펴 보는 전시 『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_시대의 눈 : 해석된 달항아리』展을 마련했다. ● 갤러리나우는 2020, 2021년 2회에 걸쳐 『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전을 열어서 많은 관심을 받은 바 있다. (참여작가 : 강익중, 고영훈, 구본창, 김덕용, 김용진, 석철주, 최영욱, 신철, 김판기, 이용순, 오만철. 전병현...) 2022 세번째 『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_시대의 눈: 해석된 달항아리』展은 이 시대에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러작가들이 달항아리를 각각의 심미안으로 재해석한 작업들을 보여준다. 권현진, 김덕용, 아트놈, 이상협, 이용순, 이이남, 이종기, 정현숙, 챨스장, 최영욱, 하태임등 작가들에 의해 박물관에서 문화재로 있던 그 달항아리는 이 시대의 아티스트의 시선을 통해서 시대적이 해석이 더해져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재탄생 되는 자리이다. 아울러 자신의 호를 도천(陶泉·'도자기의 샘'이라는 뜻)으로 지을 만큼 도자기를 사랑했던 도상봉(1902~1977)의 작품도 볼 수 있다. ■ 이순심

많은 작가들이 달항아리를 소재로 작업을 하고 있다. 왜 작가들은 그토록 달항아리의 조형성에 매료되고 있는 것인가? 공통적인 이유는 흰색과 생김새에서 오는 감수성이다. 사실 달항아리 같은 순백자 항아리는 우리민족에게만 있어서 더욱 그러하기도 하다. 흰색은 전 세계 공통으로 하늘, 천상, 순결, 허공, 순종, 희생, 관대한 허용의 보편적 감수성을 지닌다. 느낌은 깨끗하고 자연스러우며 또 모든 색 중에 가장 순수하다. 하얀 웨딩드레스, 백의의 천사 간호사복, 수도원의 수도사복이 흰색이다. 천사도 백색 옷을 입고, 신선은 눈썹과 수염까지도 하얗다. 초월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천상에서 오는 빛의 색을 흰색으로 가름했다. '희다'는 중세 국어로 해를 뜻하는 단어로부터 파생된 단어다. 흰색은 다른 색을 생생하게 살려주고 풍성하게 감싸 안기에 미술관 벽면도 하얗다. ● 흰색은 이처럼 '색상'을 넘어 시대마다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됐다. 흰색의 역사는 빛으로 순수함을 담으려 했던 인간의 여정이다. 무색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흰색이 무색을 대신하면서 비움, 공허를 기표하기도 했다. 달항아리는 기물이라는 점에서 비움과 공허의 미덕은 존재자체의 의미이기도 하다. 흰색으로 그 존재의미를 더 극대화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생김새도 원이 아니라 둥그스름하다. 완벽한 원은 폐쇄적인 닫혀진 모습이다. 원에 가까운 둥그스럼은 열려진 구조다. 소통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규격화 된 형상보다 비정형의 모습에서 마음을 저울질 하고 생각을 시작하게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발동되는 지점으로 우리가 외부세계에 관여하는 기본 방식이기도 하다. 달항아리의 비정형이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유다. 양감을 더욱 풍부하게 부각시켜 준다. 달항아리가 내밀한 차원을 열리게 해주는 열린 구조라는 얘기다. 우리 감성의 보물창고가 열리는 것이다. 수화 김환기 작가는 "내 뜰에는 한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 (…) 달밤일 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으로 온통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촉감이 통한다. (…)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라고도 했다. ● 이런 자유의지와 상상력은 우리 오관에 날카로운 촉수를 만들어 준다. 최상급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것을 떠나 상상적인 것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달항아리가 열린 감성의 창고라는 찬사를 받는 지점이다. 주둥아리가 넓어 호흡하는 느낌을 주면서 표면이 사람 피부 같기도 하다. 야스퍼스는 모든 존재는 그 자체에 있어서 둥근 듯이 보인다고 했다. 반 고흐도 삶은 아마도 둥글 것 이라고 했다. 존재의 그 둥굶은 현상학적인 명상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곳이다. 빛 덩이 같은 달항아리 처럼 우리 자신을 응집시키고 외부적인 것이 없는 것으로 살아질 때 둥글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둥그스름한 달항아리는 하늘의 달이 되고, 그 풍경 속에 큰 평정이 있다. 좋은 상징물이다. 이런 해독의 임무는 예술에 있다.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도 이런 것일 게다. 목수가 대패를 통해 나무가 방출하는 기호에 민감해질 때에만 비로소 경지에 이르게 되는 이치와 같다. ■ 편완식

달항아리는 신비롭다.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조선 후기 1725-1751년 사이 26년 동안 왕실 도자기 제작처였던 경기도 광주 금사리 가마에서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200여 년이 지나서 수화 김환기의 그림과 글에 홀연히 나타났다. 그는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며 이 항아리에서 한국의 미에 눈을 떴노라 고백했다. 그가 본 달항아리는 그 중앙에서부터 균형이 일그러져 있어서 비율이 울퉁불퉁하여 항아리 주위를 돌아서 보면 항아리가 움직이는 듯한 착시가 생긴다. 게다가 표면에 발린 유약이 균등하지 않아 광택이 없는 속살이 느껴지기도 하고, 심지어 세월 속에서 묻은 때와 도자기에 스며든 여러 가지 얼룩 때문에 매우 가깝고 정겹게 느껴지는 것이다.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개관전으로 9점의 국보와 보물급 달항아리 전시가 열렸으며, 2011년 문화재청에서 백자대호를 공식적으로 달항아리라고 명명했다. ● 우리는 지난 수십년 동안 달항아리에 대해 넘쳐나는 찬사를 듣고 읽어왔다. 브리티쉬 뮤지엄 한국관에 있는 달항아리를 버나드 리치는 "자연스러운 무심함(natural unconsciousness)"이라고 했고, 최순우는 "어리숙하고 순진한 아름다움", 무심한 아름다움", "원의 어진 맛"때문에 "넉넉한 맏며느리같다"고 했다. 유홍준은 "한국미의 극치"라고도 했다. ■ 김웅기

권현진_VISUAL POETRY X MOON JAR_캔버스에 혼합재료_76×76cm×3_2022

이미지 탐험의 새 지평 : 보이지 않는 것의 가시화 - 1-1. 요약 ● 지난 세기의 중심 과제였던 근대주의에 의한 미술은 21세기를 맞아 재사유를 필요로 한다. 이전 세기의 미술에서 가령 추상화란 지각 가능한 자연 이미지를 제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환영을 배제한 2차원 평면으로 환원코자 했다는 데 뜻이 있다. 예컨대 몬드리앙은 보이는 자연의 외관을 수평수직의 형식으로, 그리고 말레비치는 플라톤적 절대형태로 각각 환원하였다. ● 이제 이러한 의미의 환원주의 미술은 그 기반 자체를 재고해야 할 때다. 21세기 미술은 재현과 서술, 그리고 환영을 지우고 비워나가는 20세기 패러다임의 연장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의 미술은 우리시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주창하는 시간과 공간의 여분차원(extra dimension)으로 눈을 돌려 이미지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방향에서 재고해야 한다. 그 방향은 추상회화의 원조인 칸딘스키와 몽드리앙 그리고 뉴욕 추상표현주의가 지향했던 가시적인 자연을 개념적인 것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던 것과는 어쩌면 정반대의 방향에서 해법(지표)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분으로 존재하는 불가시적 세계의 이미지를 가시세계의 것으로 불러들여 이것들을 현존세계의 이미지와 융합함으로써 이미지의 가능성을 확장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보이는 세계의 시⋅공간의 해체는 물론 재구축을 빌려 존재 가능한 세계의 이미지를 적극 창출할 필요가 있다. ●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21세기 미술이 다루어야 할 이미지란 추상과 구상의 구분을 초극해서 종래의 본질이나 형식 같은 관념적 요소로부터 이미지는 해방시켜야 한다. 이 과정에서 창발될 가상이 이미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1-2. 아이디어 면 ● 나의 근작들은 이전과 같은 자연의 이미지들에서 형식을 추출하는 의미에서의 추상이미지를 다루지 않는다. 자연의 내용들을 비워가는 추상화가 아니라 그 역의 맥락에서 용합과 혼성에 의한 추상이미지를 다룬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단 눈을 감고 잠시 동안 빛을 봤을 때 안구에 맺히는 가상의 환영들을 시각적 이미지로 그려내려는 데서 시작한다. 이는 과거의 추상적 사고를 역으로 추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를 빌려 끝없는 구축과 해체, 재구축을 통해 융합과 확장을 빌려 창출할 수 있는 이미지를 선호한다. 이 과정에서 처음 의도와는 다른 새로운 이미지가 창출되기도 하지만 더 많이 또 다른 시각적 무의식이 작동함으로써 새로운 낯선 이미지들이 발현되기를 기대한다. 빛의 흐름, 색의 흐름, 물감의 흐름 등 새로운 배열을 시도하며 혼합하고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캔버스 안의 것만이 아닌 캔버스 밖에서 움직이는 여분의 것들을 보다 선호하게 된다. 이런 데서 예기치 않은 가상이 창출되기를 기대하기 위함이다. ● 근작들에 등장하는 주 이미지들은 그럼으로써 가상의 추상 이미지들이 주를 이룬다. 이것들은 현대 양자물리학의 끈 이론이 시사하는 여분차원에서 영감을 받아 컴퓨터를 써서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것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끈이 아니라 브라이언 그린(B. Green) 같은 초끈이론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양자적 진동으로 이루어지는, 요컨대 눈으로 볼 수 없는 가상적 끈의 진동 패턴과 에너지를 동반하는 가상의 끈들의 연결을 상징한다. 이는 물방울과 같은 거품효과들을 만들어 시각적 착시 효과를 주려는 시도를 포함한다. 이 이미지들은 현실 이미지에서 추상한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추상적 사고로부터 출발하여 변형과 융합을 거쳐 만들어지는 가상의 이미지들이다. 다양한 형태로 변형하고 재배치하여 만들어진 우리 시대의 추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상의 이미지들은 여러 형태의 다원적 세계 속에 존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나의 추상적 가상이미지는 관람객들의 상상과 무의식을 자극하여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명력을 유발할 것으로 기대한다.

1-3. 소재와 방법 면 ● 가변적 추상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나의 시도는 입체회화작업과 미디어작업을 두루 병행하고 이들을 연계하고 융합함으로써 이미지의 경계를 확장하는 데 있다. 나의 「Visual Poetry」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입체회화작업은 변형 캔버스의 조작을 빌리기 위해 스테인리스 스틸에 굴곡을 주고 그 위에 색들을 칠하고 광택을 주어 고정된 평면에 유동적인 조각적 입체공간을 창출한다. 이는 평면의 2차원을 3차원의 복잡계로 확장하기 위함이다. ● 미디어작업은 영상이라는 매체적 특성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미지들을 계속해서 보고 있는 듯한 환영을 만들고자 하는 데 뜻이 있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추상적 이미지를 확장시켜 관람객들의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을 아울러 자극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미디어아트를 빌려 전통 이미지와 융합시키고 확장시켜 디지털 환경 안에서 아날로그 이미지를 수작업으로 담아내고자 하였다. 전통회화에서 보여주는 매체적 물질성과 테크놀로지를 융합하여 단지 기술과 예술의 결합이 아닌 예술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기반으로 미술의 확장성이 극대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 「Visual Poetry」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아직 보지 못한 것 까지도 볼 것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감각만이 아니라 감은 눈과 마음의 눈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각적 환상은 물론 캔버스 밖의 세계와 가상까지 보여주고자 한 작품이다. 나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환상은 단지 시각적 지각으로만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시각적 지각뿐만 아니라 촉각적 지각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의 원근법으로 그려진 공간만이 아니라 단일 시점으로 파악 될 수 없는 가변적이고 다양한 추상적 형태와 색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단순히 감각적 시각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다양한 시점으로 시각을 자극하기 위해 촉각을 포함한 공감각(共感覺, synesthesia)을 빌려서 인식되어야 한다.

1-4. 예상되는 결과 ● 나의 근작 「Visual Poetry」 시리즈는 이전 세기의 굳은 이미지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우리의 희망, 꿈, 비밀, 감정 등을 투영하는 거울이기를 기대한다. 색의 배열과 움직임에서 관람객들이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나 한편의 서정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배려하기 위함이다. ● 나의 근작들은 회화와 시라는 최소한 두 개의 장르의 융합을 시사한다. 시적 표현효과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해 채도를 최소 7~8도로 높이고 색의 농도가 강한 하이크롬 색상을 사용했다. 물감의 가변적 표면효과나 재료의 물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얼룩이 거품과 같은 표면효과를 유발해서 추상표현이미지를 극대화하였다. 그럼으로써 강한 자극을 만들고 표현효과를 증대시키고자 했다. 고채도의 색면과 함께 색면들 사이에서 부상되는 거품효과는 종래의 추상화가 보여주는 단조로움을 깨뜨림으로써 표현효과를 증대시키려는 데 의의가 있다. 신비로운 느낌과 함께 시적 환영과 환상이 동반되는 결과가 여기서 창출될 것이다. ● 이처럼 근작들은 본다는 것의 의의를 과거의 그것과 배타적 입장에서 접근했다. 칸딘스키가 추상화를 발견했을 때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봤듯이, 우리 시대 또한 기존의 회화에서 학습했던 추상화가 아닌 그 너머의 세계로 것에서 추상회화의 판을 궁구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추상 세계에서 떠나 이것들의 해체와 재배치를 빌려 오늘의 다원적 세계를 창출해야 한다. ■ 권현진

보는 세계, 그 너머를 찾아서 : 권현진 근작 『Visual Poetry』展 ● 컬러리스트 권현진은 2016년(박사학위전) 이후 지금까지 「불가시의 가시화」를 주제로 색채의 '하이크로마'(high chroma)와 '스푸마'(spuma)를 빌려 전적으로 색채로서만 가능한 원초의 세계를 다루어왔다. 그간 작가가 보여준 건 색채를 넘어 빛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데 있었다. 작가가 찾는 세계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형상의 세계가 아니라 색의 광휘와 연무(煙霧, mist)가 만들어내는 신비한 가상의 세계였다. 이 세계는 요컨대 탈근대 이후 세계의 작가들이 주목해온 '가상'(simulacres)의 세계를 색에 의한 탈형상으로 격상시키려는 데 궁극적 과제가 있었다. ● 작가는 이 세계를 우리가 결코 볼 수 없기에 비가시의 세계를 가시화하는 방법이자 수단이라 자임했다. 이를테면 일상의 세계를 서술하는 산문(散文)이 아니라 운문(韻文)으로 압축한 시(poetry)를 회화로 치환하는 지름길이라 확신했다. ● 작가가 이번에 내놓는 『Visual Poetry』는 그간의 탐구 결과를 고도로 숙성시킨 최근 버전이다. 종래의 그것이 작고 섬세한 수소의 물방울이 윤무(輪舞)하는 세계를 형상화했다면, 근작들은 강열한 색조들을 정방형 입체의 '하드에지'(hard edge) 표면을 채우거나 이를 균질한 크기의 사각형의 셀로 축소시켜 미소 사각들의 하드에지를 도열하거나 이를 미디어에 의해 유동하는 사각들의 조합구조를 시도한다. 작가는 근작들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 "나의 근작들은 단순한 구조가 계속해서 번복되는 순환성에 의해 움직이는 듯한 시각적 환영이 자아내는 착시효과를 빌림으로써 관객들이 꿈을 꾸거나 한편의 서정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갖도록 하였다. 가변적 추상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평면회화와 함께 3차원 정육면체의 표면과 미디어작업을 병행함으로써 이미지의 경계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해서 보는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이 아닌, 아직 보지 못 한 것까지도 볼 것으로 기대한다." (「작업노트, 2021」에서 번안) ● 이 언급에 의하면 근작들은 우리가 육안으로서 보다는 마음의 눈으로 즐기면서 볼 수 있는 시각의 환영을 창출하려는 데 뜻이 있다. 메를로-퐁티는 일찍이 이를 두고 이렇게 예견한 적이 있다. '회화의 깊이란 외적인 것에 대한 조망이거나 단순히 그것들과의 물리광학적 관계는 결코 아니다. 화가의 세계란 세계가 화가 쪽으로 겨냥하는 데서 화가로 하여금 세계를 그처럼 보도록 함으로써 화가를 탄생시킨다'(L'oeil et l'esprit, 1961, 69쪽). 그에 의하면 마음 안에서 작동하는 화가의 세계는 우리의 외부에 실재하는 세계와 달리 우리의 정신 안에서 구현되는 '자립적 형상의 스펙타클'(autofigurative spectacle)이다. 이 또한 권현진의 작품에도 잘 들어맞는다. 그녀의 마음에서 작동하는 고채도의 스펙타클이야말로 자립적인 환영임에 틀림없다. ● 필자는 이에 더하여 권현진이 창출하는 근작의 환영이란 지상의 그것을 넘어 천상의 그것을 불러오는 최상급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가 그리는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초월의 세계를 보게 하는 '팬태스마'(phantasma)의 그것이라 해서 족할 것이다. 그녀의 세계는 그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미지의 것을 보게 할 뿐만 아니라 듣게 하는 '팬텀뮤직'의 요동치는 운율을 느끼게 한다.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잠깐의 환영을 선사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일찍이 이를 일러 환영을 보게 한다는 뜻으로 '판타제인'(phantazein, to make phantom visible)을 연극을 비롯한 시의 본질이자 최상급으로 여겼다. 아니 '그처럼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necessarily to make it visible)는 데서 예술의 기원을 찾았다. 이 점에서 권현진의 근작들은 보는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위무(慰撫)하고 또 배려한다. 이는 굳이 그러한 선례를 우리 미술에서 찾자면 1960년대 청전(靑田)의 남화풍에서 형이상학적 비경을 보거나 1970년대 수화(樹話)의 조밀한 픽셀의 유동하는 하늘에서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설화를 들을 것만 같은 착각을 권현진의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선례는 색의 화려함 대신 무채색과 형상의 잔잔한 유동을 빌렸기에 권현진의 선례라 하기에는 궤가 다르다 하리라. ● 이러한 지적은 권현진의 근작들이 보여주는 것에 관한 한 너무 정태적이고 수동적인 면면이라면, 그녀의 세계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해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아서 단토(Athur Danto)가 전세기말 30년사(1970~1990s)의 격변기를 살았던 헤겔⋅비데마이어 같은 전위작가들의 세계를 가리켜 말한 다음의 언급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그들의 의도는 세계를 변혁하려는 데 있었다. 마치 기지의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란 미적인 간주곡(aesthetic interlude)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한 하나의 도덕적 모험(a moral adventure)의 산물이었다. 그러한 한, 그들은 미술의 역사상 충격적인 시대를 살았다. 그건 제도권의 관심에 대한 저항이자 보는 것의 역사에 대한 예견치 않았던 저항이었다." (Linda Weintraub, Art on the Edge and Over. Art Insights, Inc. 1996, 12~16쪽. Arthur Danto, Hegel⋅Biedemeier⋅The Intractably Avant-garde) ● 단토의 이러한 격한 언사는 그가 이보다 앞서 르네상스 이래 서구미술의 종언을 예견했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는 헤겔⋅비데마이어 여타 다루기 껄끄러웠던 당시의 전위작가들의 작품에서 미래 예술의 새 가능성을 보았다. '미술의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예술의 부활'을 보았던 것이다. 그가 보았던 세계는 기지의 세계를 연장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도래할 미래예술을 위한 도덕적 모험이었다. 이야말로 보는 것의 역사를 새로 시작하기 위해 기존의 미적 제도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 또한 권현진의 『Visual Poetry』가 시사하는 보다 적극적인 단면이 아닐 수 없다. ● 그녀의 작품은 따라서 상반된 두 개의 얼굴을 보여준다. 하나는 우리의 근현대 대가들의 전통을 잇는 미적 간주곡으로서의 그것이자 또 달리는 보는 것의 역사를 뒤집는, 그럼으로써 그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실험적 선점이자 이를 앞당기기 위한 도덕적 모험이 아닐까싶다. 작가는 적어도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기에 권현진은 한편으로는 온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인한 유동하는 이미지를 창출해 왔다. 작가는 선대의 그것을 계승하지만 달리는 경직된 조형의 세계를 해체한다. 아니 이를 위해 실재하는 형상의 세계를 전복함은 물론 그 너머를 보고자 색채의 강열한 고채도와 스푸마를 빌린다. 그럼으로써 누구나 즐거워할 색채의 팬태스마를 선사한다. ● 일찍이 권현진은 이를 멀리는 비잔틴 시대의 추상장식과 고딕시대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았고 가까이는 지금은 잊혀진 한국의 삼국시대를 전후로 강열했던 우리의 유채색 복식문화의 전통에서 21세기의 하이퍼 리얼의 색채회화를 재창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김복영

김덕용_현-우주를 품다_나무에 혼합재료, 자개_128×122cm_2022

태초 / 우리는 우주의 / 한 점이런가... // 玄의 한 점은 / 모체에서 생성되어 / 생명으로 존재하다가 / 다시 빛이 되어 / 한 점 제자리로 / 돌아간다. // 그 하나의 점은 / 심현의 공간에 / 영롱한 진주처럼 한톨의 / 씨앗으로 뿌려져 / 새로운 생명으로 움트고 / 다시 우리에게 따뜻한 감성으로 비춰 온다 // 점은 씨앗이고 / 씨앗은 생명이다 // 생명은 / 형체가 변할지라도 / 결코 소멸되지 않고 / 함께한 그들의 마음에 / 한 점으로 / 영원히 존재한다 ■ 김덕용

심현(深玄)을 향한 의경(意境) ● 언젠가 교외에 장만한 지인의 새 집에 초대받았을 때, 집주인은 하늘을 향해 뚫린 유리 천정을 자랑하며 밤마다 무수한 별들과 우주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하는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일상에서 별을 올려다 볼 기회를 잃고 사는 필자에게 그의 말은 단순한 자랑 그 이상이었다. 한옥에 살던 선인들은 외부의 풍경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되도록 창을 넓게 만들기도 하고 지붕창을 만들어 실내외를 하나로 통하게 하는 자연관을 구현했다. 이러한 차경(借景)의 방식은 단순히 자연을 받아들여 즐기는 차원을 넘어 내부 공간을 소박,단순화하면서 그 공간에 거주하는 인간의 내면을 비우기 위한 사유이기도 했다. ● 김덕용의 작품들은 인물이나 한복,달 항아리 등 전통적 요소들이 배치된 실내를 소재로 다루면서 부분적으로 창밖의 풍경들을 병치하는 방식을 보여 왔다. 근작에서는 과거의 작품과 달리,인물들은 보이지 않고 윤슬로 반짝이는 가없는 바다와 무수한 별들이 흩어진 밤하늘의 풍경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작품에는 실재 목재를 화면에 부착하여 형상화한 마루나 기둥,창,문 그리고 가구들이 등장하는 데, 명시적이진 않지만 전통 한옥의 공간을 염두에 둔 듯 실내와 외부를 자연스럽게 하나로 연결해 내고 있다. 그의 「차경(借景)」 연작은 내부 공간과 외부공간을 한 화면에 동시에 담아냄으로써 이러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실내 공간이 드러나 있지 않은 경우도 내부의 공간이 외부까지 확장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그가 기본적으로 가변성과 비움을 기본으로 하는 전통 건축의 공간관에 익숙함을 드러내고 있다. 근작에서는 건축적 요소의 비중이 약화되는 대신, 풍경 이미지가 강화되어 있다. 좁은 기둥들 사이로 넓게 펼쳐지는 바다나 밤하늘이 그것이다. 또 「심현(深玄)」 연작에서는 건축적 요소가 최소화되거나 배제된 채, 달 항아리와 같은 기물이나 풍경 그 자체만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의 시선과 관심이 점차 차경의 대상이 되는 외부의 요소들로 옮겨가고 있는 듯하다. ●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단골 소재인 인물이나 꽃,한복,자개 장롱,전통가옥 등의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감성을 표출하고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부드러움은 그의 의식 심층에 내재되어 있는 불안과 공포, 젊은 날 아픈 기억들의 승화된 것이다. 광주 5.18의 현장에서 경험한 죽음에 대한 극심한 불안과 공포, 적응하기 힘든 낯선 환경과 빈곤,고독과 싸워야했던 서울에서의 대학 시절, 청춘의 아픔과 방황을 극복할 수 있게 한 힘은 어머니의 사랑과 고향의 친구들이었다 한다. 그의 작품 속 따뜻함과 부드러움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 남도의 자연과 인간들에 대한 향수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그의 근작은 이러한 향수와 그리움을 정신적,형이상학적 차원으로 승화시켜내고 있다. 그의 「차경」이나 「심현」은 그가 추구하는 근원적인 세계,시원성에 관한 동경과 희구를 드러내고 있다. 차경의 대상이 되는 바다와 하늘(우주)은 그에게는 생명의 시원이 되며 회귀해야하는 본질적 세계인 것이다. 그는 이 세계를 바다의 심연에서 나고 자란 생명체인 자개의 단편들과 존재를 태우고 남은 재와 숯가루로 형상화 한다. 자개의 편린들로 형상화한 윤슬이나 별들의 반짝임 그리고 달(항아리)의 광채는 자연에 함축된 영겁의 흔적을 담고 있는 재료들에서 작가가 읽어낸 시원의 언어와 형상이다. 이러한 자각과 감수성을 통해 작가는 영속과 순환의 우주 안에서 하나의 작은 존재인 자신을 발견해 내고 있다. ● "태초 우리는 우주의 한 점이련가... 한줌의 형체는 하나의 점이되어 심현의 공간에 한 톨의 씨앗과 진주로 뿌려져 새로운 생명으로 움트고 다시 우리에게 따뜻한 감성으로 비춰온다." (작가 노트) ● 그의 작업 과정은 깊은 심현에 영속과 순환을 위한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심정의 발로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현실을 떠난 관념의 세계를 노닐지 않고, 치밀하고 정교하면서도 지난한 장인적 공력으로 현실과 마주한다. 자개를 자르거나 빻아 가루로 만들고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들어 안료와 섞어 원하는 색을 얻어낸다. 육체와 땀으로 물질에 부딪치며 그 물질에 정신과 혼을 넣어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 동양화론에선 이러한 작가의 주관적 정서와 객관적인 물상의 결합을 의경(意境)이라 한다. 의경은 작가의 사상이나 심미의식이 작가의 체험과 융합하여 그 정신과 기질을 드러내는 것이며, 작가의 주관적 심미의식을 작품상에 표현하는 것이다. 예술창작과정에서 의(意)의 개념은 작가가 객관 대상을 관조하고 내면에 융합시킨 주관적 평가와 아울러 예술적 사유에 의해 재창조되어 형성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또한 경(境)은 작가의 심미의식 속에 묘사되어 구체화된 풍경이나 사물을 가리키며 예술가가 객관사물에 대한 관찰과 체험을 통해 자연의 본연에 접근함을 의미한다. 즉, 단순한 객관의 묘사에 머무르는 것에서 벗어나 심미대상의 본질에 역점을 두어 그 정수를 취하는 것이다. ● 김덕용의 작품은 긴 여정을 통해 심현을 관조하는 단계에 이른 것 같다. 심현을 그 넓이를 측량할 수 없는 깊은 어둠의 세계로 피상적으로는 혼돈처럼 보이나 그 안에 빛과 생명을 담지하고 있는 근원적 세계라 할 때, 그는 인간이 나고 돌아갈 그 곳을 그리워하며 그 시각으로 사물과 인생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구사하는 이미지들은 단순히 시각적 대상으로서의 경물(景物)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본질에 관해 질문하는 통감각적 소산이며, 피상적으로 볼 때, 그의 화면은 사실적 묘사의 결과라기보다는 추상성을 가진 하나의 물성적 특성을 가진다. 물론, 그 물성은 서구 모더니즘이 추구하던 사물로서의 회화적 본질을 추구하는 차원과는 다른 것이다. 물질과의 정신적 교감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이며,몸 전체로 자연과 우주만물의 자체의 원리로 자연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려는 태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자개의 편린과 재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곳에 감추어진 우주의 빛과 어둠의 언어를 탐구하고 표출하는 그의 근작들에서 영속과 순환의 심현을 향한 의경의 세계를 보게 된다. ■ 김찬동

승지민_Genesis of Life Ⅱ(Cell Division)_도자기에 상회기법_32×30cm_2021

생명을 품은 달항아리 ● "여성은 위대하다. 그 위대함은 생명을 잉태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은 위대하다. 나는 여성의 위대함을 사랑하고 동경하며 표현한다. 달항아리와 인체 토르소, 석류를 통해 나의 내면의 메세지를 발전시켜왔다. ● 동서양에서 모두 여성과 다산, 풍요로움을 뜻하는 석류. 그림이 그려지는 매체는 여성의 뒷모습 형상의 도자기 토르소 또는 달항아리이다. 이 두 매체는 모두 여성을 상징한다. 석류에 몰입하여 작업하는 중, 석류의 알갱이들이 생명의 기본단위인 세포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마 안에서 깨져 나온 달항아리가 더욱 강인한 여성의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위대한 생명력의 시작. 세포분열이다. ●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는 그 불룩한 형태가 풍만한 여성의 모습과 같아 생명을 품는 여성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매체일뿐더러, 동양의 음양陰陽 철학에서 달은 음陰, 즉 여성을 의미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달항아리는 여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입체 달항아리 작업에 이어 직접 만든 달항아리 모양의 평면 타일, 혹은 틀을 제작하여 만들어낸 둥근 부조 형태의 벽걸이 달항아리에 그림을 그리는 시도를 해 보고 있다. 우리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를 한국의 21세기 동시대성을 가진 예술로 승화하고자 한다. ■ 승지민

백자 토르소에 석류가 입혀졌을 때1. 승지민의 예술세계에서 최근에 보여주고 있는 작업은 포슬린페인팅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장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난해한 것이 아니다. 현대미술이 조형질서를 파괴하면서 오늘날에는 장르의 복합이 대세를 이루며 작품은 난해해지고 대중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런 혁신적인 조형사고가 오히려 우리에게 낯선 포슬린페인팅 같은 장르가 부각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현대미술의 한 성과이기도 하다. ● 현대미술의 조형질서 파괴는 본질적으로 '오일 온 캔버스(oil on canvas)'라는 틀을 무시하면서 그림이 액자 밖으로 뛰쳐나와 설치미술에로 치달리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도자기, 또는 도편(陶片)을 캔버스로 삼음으로써 기존의 '캔버스에 유채'가 갖지 못했던 또 다른 조형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포슬린페인팅이다. 포슬린페인팅은 우리가 보아온 도화(陶畵)와는 다르다. 도화는 도자기를 만들면서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유약을 입혀 문양 또는 그림이 도자기의 일부로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포슬린페인팅은 완성된 도자기를 마치 캔버스인양 바탕으로 삼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상회(上繪, overglaze)'기법이다. 이 상회기법은 중국, 일본, 유럽 도자기에서는 유행한 적이 있지만 우리나라 조선시대 도자기에서는 볼 수 없었다. 아마도 화려한 것을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순백자를 사랑하는 미감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승지민이 조선백자, 그 중에서도 달항아리를 포슬린페인팅의 바탕으로 삼게 된 것 또한 역설적이다. 달항아리의 색감과 형태미만 취하고 보면 그 자체로 훌륭한 질감의 캔버스(바탕)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점은 승지민이 즐겨 택하고 있는 토르소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르네상스 시대에 복고풍의 유행과 함께 발굴된 그리스 로마 조각상에는 머리와 팔다리가 없는 채로 발견된 작품이 많았다. 당시는 이를 불완전한 작품으로 수복의 대상이었지만 마이욜(Aristide Maillol, 1861~1944),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 같은 현대조각가는 토르소는 인체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형태미의 관점에서 그 자체만으로 완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승지민은 이것을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의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2. 승지민이 택하는 소재는 압도적으로 석류가 많다. 그에게 석류는 어떤 의미이고 관객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려는 것인가. 이것은 곧 승지민 작품세계의 주제에 관한 이야기로 된다. 현대미술에서 우리가 간혹 불만을 말하게 되는 것은 도대체 무얼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추상이냐 구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주제의식의 문제이다. 추상이라도 얼마든지 주제가 들어 있을 수 있다. 아니 들어 있어야 작품으로 성공한다. 구상의 경우는 주제가 바로 드러나는 것 같지만 단순히 소재의 선택에만 머물고, 인물화이건 풍경화이건 정물화이건 왜 그렸는지 하나의 주제로 승화하지 못하면 작품으로서는 실패하고 만다. ● 승지민의 경우 석류를 통해서 보여주는 주제의식은 아주 분명하다. 석류는 그 자체로 아름답기도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생명의 탄생, 다산을 상징하기 때문에 승지민으로서는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의 아름다운 능력을 표현하는 데 제격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전시회를 꾸미면서 자신있게 작가노트라는 형식으로 자신이 택하는 소재와 그 소재로 표현하는 주제를 명확하게 표명하였다. 2019년 LA 전시 때 승지민은 이렇게 말했다. ● 첫째, 여성성의 칭송입니다, 여성의 생명을 잉태하는 아름다운 능력을 표현합니다. 여성의 인체 형상의 도자기 위에 자연에서 생명이 탄생하는 모티브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둘째, 한국의 미를 재발견하려는 것입니다.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를 21세기 한국의 색감을 덧입혀 새로운 한국 현대미술 작품으로 변신을 시도합니다." 결국 승지민의 작품세계는 여성성과 한국미라는 두 가지 주제로 압축된다. 2020년 노블레스 전시에 와서는 이를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는데 여성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여성은 위대하다. 그 위대함은 생명을 잉태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 이를 위하여 승지민은 여성의 뒷모습 토르소에 석류를 그려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자 달항아리에도 똑같은 이유로 석류를 그려 넣었다.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은 오늘날 한국미의 아이콘이 될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백자 달항아리는 너그러운 형태미와 순구(純垢)하면서 질박한 색감, 그리고 손맛을 느끼게 해주는 어진 선맛에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승지민은 직설적으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 "목판에 붙이는 평면의 달항아리 도자기는 제가 직접 만들었는데, 자세히 보면 손맛이 있어요. 일본이나 중국의 도자기처럼 완벽한 대칭을 노리는 것과 달리 진짜 전통 달항아리는 삐뚤빼뚤한 구석이 있거든요." ● 이는 조선백자 달항아리의 형태미에 나타나는 '비정형, 비대칭의 미학'을 체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달항아리이기에 화가 김환기는 "차가운 사기그릇이면서 따스한 체감을 느끼게 해준다."고 하였고, 최순우 선생은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잘 생긴 종가집 맏며느리를 보는 듯한 흐뭇함이 있다."고 하였다. 승지민은 백자 달항아리에서 아름다움 못지않게 여성성에도 주목하였다. ● "조선백자 달항아리는 그 불룩한 형태가 풍만한 여성의 모습과 같아 생명을 품는 여성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매체일 뿐만 아니라 동양의 음양(陰陽) 철학에서 달은 음(陰), 여성을 의미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달항아리는 여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승지민이 추구하는 예술세계이다. 즉 토르소와 달항아리 형태의 백자 위에 석류를 그려서 여성성과 한국미를 드러내는 것이 예술적 주제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포슬린페인팅이라는 낯선 장르를 보면서도 바로 친숙하게 그의 예술세계에 공감하며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3. 승지민은 그의 예술이 포슬린페인팅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보여주는 것 못지않게 그의 예술적 이력도 독특하다. 그는 미술대학이 아니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출신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여성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가정주부로 살아가면서 학문에도 예술에도 매진할 수 없었는데 그래도 이 길을 버릴 수 없어 접하게 된 것이 포슬린아트였다고 한다. ● 승지민이 작가로서 활동한 것은 아주 특수한 분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데, 작가 경력상 예술가로서 데뷔한 것은 아무래도 2004년에 IPAT(International Porcelain Artists and Teachers)라는 국제 포슬린 작가협회의 비엔날레에서 은상을 수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IPAT가 이듬해인 2005년 리스본에서 개최한 제1회 도자기 페인팅 세계대회(1st World Convention of China Painting)에서 금상을 수상함으로써 작가로서 공인받은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승지민은 미술사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이 낯선 분야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2007년에 『포슬린페인팅』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 이후 승지민의 예술적 경력은 그의 이력서에 적혀 있는 바대로 여러 전시회에 초대되며 꾸준히 활동하였지만 아무래도 특수한 분야여서 국내 활동보다 국제전에 더 많이 초대되고 출품되었다. 이런 승지민의 예술활동에 하나의 전기가 생긴 것은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를 위한 시연회에서 주최 측의 의뢰를 받고 한국적 모티브인 달항아리에 민화의 문양을 그려 소개한 것에 크게 호응을 받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작업은 전에 없이 활발해졌다. ● 내가 승지민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2020년 1월, 노블레스 컬렉션 갤러리(Noblesse Collection Gallery)의 초대로 열린 그의 국내 첫 개인전에서였다. 『생명을 품은 달항아리』라는 부제대로 달항아리에 석류문양을 그려 넣고, 또 그가 즐겨 작업해 온 여체 토르소에 석류를 입힌 작품들이었는데 그 밝고 화사함이 감돌아 한 겨울인데도 전시장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석류의 형태미 요약도 도자기와 잘 어울리고 무엇보다 채색이 아주 강렬했다. ● 전시장을 한바퀴 돌아보면서 낱낱 작품을 감상하고서 나는 직업병을 어쩔 수 없어 디스플레이에서 여체 토르소 작품을 벽에다 걸지만 말고 전시장 가운데에 받침대를 놓고 엎어 있는 형태로 전시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의견과 백자 달항아리 작품은 벽면의 여백이 넓어야 더 전시 효과가 난다는 조언을 해주며 그의 작업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간 매스컴에 인터뷰한 것을 통해 작가의 속마음을 읽어 보았는데 그 중 두 가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 본래 포슬린페인팅에서는 그림에서 회화미를 취할 것인가, 장식미를 돋보이게 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둘 다 놓칠 수 없는 것인데 승지민은 아주 유효하게도 조선시대 민화에서 그 모티브와 아이디어를 얻어 매우 적절히 페인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는 사실적인 느낌을 주면서 생략과 왜곡을 통해 얻어내는 미적 효과이다. 그런데 승지민은 앞으로 더 단순화시켜 보고 싶다고 했다. ●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깊이에 집중하고, 기법 면에서는 오히려 디테일을 줄이려 해요. 디테일을 줄인다는 것은 한마디를 해도 깊이가 있는 사람처럼 되는 것이지요." ● 작업 과정에 벌써 인생이 이렇게 깊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일찍이 백자 달항아리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미학과 인생을 말하여 왔다. 한 애호가는 달항아리를 곁에 두고 살면서 인생을 달항아리처럼 살아야 한다는 종교하는 마음조차 일어났다고 했다. 승지민도 달항아리와 함께 작업하면서 고백조로 이렇게 말한 것이 있다. ● "달항아리 도자기를 초벌로 다섯 개 구우면 한두 개만 온전하고 나머지는 금이 가거나 깨져요. 목판에 붙인 뒤 금이 가면 난감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체도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도자기가 한번 갈라지면 계속 갈라지거든요. 그럼 그걸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진짜 금가루로 크랙 부분을 메웁니다.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으로, 상황에 맞게 작품을 바꾸는 것이 무척 만족스러워요. 'Life is Fragile!' 우리는 그런 존재예요. 완벽하지 않잖아요. 생명도 완벽하지 않죠. 작품을 거듭하며 저는 잘못된 것, 깨진 것을 붙여도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어요." ● 이런 체험적 예술론은 자신의 예술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관객들에게 예술이라는 것이 왜 인문정신의 발현인가를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작품 감상에서도 중요하다. 이는 그가 인문과학 출신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라 예술에 깊이 몰입했기 때문에 얻어낸 감성적 논리인 것이다. ● 나는 승지민이 포슬린페인팅뿐만 아니라 예술세계 전체가 이처럼 '깊이 있는 사람'이 보여주는 진중함, 그리고 백자 달항아리같은 세계로 나아가기를 바란다는 응원의 말을 남기고 전시장을 나왔다. 밖으로 나와 전시장을 뒤돌아보니 외벽의 진열장에 전시된 백자 달항아리의 석류가 저녁 조명을 받으며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 유홍준

아트놈_달과 토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22

스마트한 자기유희, 아트놈의 ART-POP "혼성잡종의 예술학, 루이비통이 슈프림을 만났을 때" ● 친근하면서도 사랑스런 캐릭터들이 유명상표 혹은 신화적 모티브들과 어우러졌을 때, 우리는 미술에 대한 가치판단에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작품들은 강렬한 시각적 모티브들 속에서 유머러스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해학적이면서도 현상을 파고드는 아트놈 만의 독특한 시대 해석을 녹여낸다. 이질적인 가치가 우연과 필연의 무분별한 뒤섞임 속에 존재하는 '혼성잡종의 시대(The age of various hybrids)', 아트놈은 옳고 그름의 가치 역시 상황과 주제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왕이면 멋지게, 기왕이면 예술적으로!" ● 아트놈 작가의 새로운 시리즈를 나타내는 기본코드는 강력한 시각적 모티브, 전통 요소(신화 혹은 역사화)의 차용, 자기복제술과 유희(Funnyism), 혼성잡종 시대 속 간결함(평면화), 현실에 기반한 스토리텔링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고정된 의미체계를 해 집고 재해석하여 보기 좋게 만들어버리는 작가의 탁월함은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팝아트의 본질과 맞닿으면서도, 예술적 유희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기존의 팝아트와는 차별성을 갖는다. 21세기 혼성주체의 변화된 풍속도를 대변하듯, 아우라(Aura 혹은 권위)를 머금은 전통적인 도상들은 픽토그램(Pictogram)으로 연결된 루이비통(LOUIS VUITTON)과 슈프림(SUPREME)의 코드와 결합함으로써 밀레니엄 속 가상플랫폼에 등장하는 코스프레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작가는 고매한 전통미술이 갖는 순수성의 가치를 유머코드로 전환시킴과 동시에 '키치(Kitsch)' 자체를 신자유주의 속 문화그룹 안에 위치시킨다. ● 아트놈을 보면 미술대학을 다닌 적이 없지만 풍자와 창의적 규칙을 만들며 사회의 논란거리를 예술로 승화시킨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이 떠오른다. 재밌고 창의적인 아트놈의 위트는 '나'보다는 '우리', '꿈'보다는 '현실'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제지하지 못할 장난스런 행보들은 가벼운 현상 자체를 직관적으로 드러내기에 더욱 깊이가 있다. 부분보다는 전체를 먼저 본다는 그는 타고난 천재기질을 가졌다. 남들이 봤을 때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을 강조하는가 하면, 신화화된 캐릭터나 슈프림의 패턴들을 텍스트와 결합하는 이질적인 실험들을 감행한다. 아트놈에게 아트란 세상과 가장 재밌게 대화하는 방식이자 온전한 자신으로 살게 해주는 행복한 매개체인 것이다. 오늘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면, 지금 이 자리에 선 아트놈의 행보는 작품이 만들어진 오늘의 흔적이 아닐까. ● "나는 세상으로부터 한 발 짝 떨어져 있는 현실을 기록한다. 오늘을 외면하는 예술가는 천재소리는 들을지언정 오래갈 수 있는 동력은 탑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위트 있는 유머로 세상과 자신을 균형감 있게 직시하고 싶다." (아트놈 인터뷰 中)안현정

이상협_new icicle_은_20×20×20cm_2022

망치질이라는 기본적인 기법을 이용하여 금속이라는 물성이 반하여 한계에 도전하는 제작과정이 나의 작품세계의 중요한 축이다. 나는 우리나라 전통 도자의 기형을 금속으로 재현하면서, '기(器)'라는 절제된 형태 안에 한국적인 조형미라는 문화적 코드를 담아내고자 한다. 작품표면에 녹아 흘러내리는 듯 유연한 선과 작은 흔적들로 장식된 질감은 한국적인 문화코드의 기형 위에 새로운 변화를 담고자함이다. 작가로서 지속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둔다. 이 말은 여러 방향에서 해석할 수 있지만, 현재의 작업과 완성된 결과물이 다음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와 힘이 되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 이상협

이용순_백자달항아리_세라믹_55×48cm_2021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개인의 사소한 물건에서 생활의 큰 부분까지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만들며 자신과 주변 세계를 창조하고 구축해 왔다. 인간에게 만드는 손은 노동을 의미함과 동시에 지적사고의 발현이며, 우리 자신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주는 구체적 행위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개인의 삶에 만드는 일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즘 시대는 그야말로 기계와 거대 산업에 의한 공급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생산의 효율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적당히 쓸모 있는 물건들이 대량으로 공급되는 이 시대는 사람들에게서 창작과 자급의 기회를 빼앗고, 삶의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마저 공급하기에 이르렀다. 『삶의 수작』전은 산업과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도시민들이 일상에서 사라진 수작을 되찾기를 희망한다. 장인과 시각예술가, 디자이너들의 만들기를 통해 '손작업'에 대한 이해와 가치를 조명하고 결핍된 인간성의 회복과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향한 익숙하지만 그래서 신선한 관점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물건을 잘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솜씨가 좋아야 한다. 솜씨 좋은 손은 비범한 소질과 재주뿐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반복을 거듭한 경험의 축적에 의해 만들어진다. 경험의 축적은 일을 하는데 필요한 전문적인 지혜와 기술을 익게 하고, 제작자의 고상한 취미는 기교를 가지게 하여 물건을 아름답게 만든다. 또한 일에 대해 성실하고 근면한 자세를 지닌 사람이 좋은 물건을 탄생시킨다. 노력의 결실로 태어난 좋은 물건은 제작자에게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하고 일을 지속할 수 있는 동기와 애정을 부여한다. 이러한 동기와 애정을 토대로 만드는 일을 자신의 운명과도 같은 사명감으로 수행하는 사람, 특별히 장인이라고 부른다. 수작에 참여한 이용순은 백자 달항아리를 만드는 데 있어 뛰어난 솜씨를 지닌 우리시대의 장인이다. 이들이 만들고 있는 물건들은 원래 실생활에 쓰이던 아주 사소한 물건으로 출발했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들의 인생을 관통하는 높은 경지의 것으로 탄생하였다. 갤러리를 들어서면 다양한 크기의 백자 달항아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크고 둥근 선, 백설같이 하얗게 빛나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항아리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질박하고 인위적이지 않은 모습 그 자체로 자연임을 깨닫게 한다. 이용순은 고미술품 복원업에 종사해오다 백자에 매료되어 백자의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처음에 그저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으나 옛 백자의 색상과 모양뿐만 아니라 느낌까지 고스란히 재현하려다 보니 생기는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소지(흙)와 유약의 테스트뿐만 아니라 기벽의 두께, 전과 굽의 넓이와 높이, 기울기 등 형태에 대한 연구를 거듭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백의 태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직접 산에서 흙을 채취하고 불순물을 일일이 걸러내는 작업(수비)등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달 항아리는 백자 소지의 물성적 한계로 두 개의 큰 대접 형태를 아래위로 접합시켜 만드는데,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하는 일이므로 반듯한 모양을 이루는 것도 있지만 만드는 이의 손길에 따라 접합 부분의 이음선이 보이거나 어느 한 쪽이 살짝 기울어지는 것도 있다. 이용순의 백자 달항아리는 의도하지 않은 부정형의 무심한 듯 자연스러운 조형미와 그만의 여유로움을 잘 담아내고 있다. ■ 조지혜

이이남_달항아리 풍경 Landscape of Moon Jar_65인치 LED TV,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_90.5×152×15cm, 00:19:43_2009

고전회화와 인연을 맺어온 그간 작업을 통해 고전회화가 나에게 갖는 의미가 어떠한지 주목하였다.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여 성장하기까지 자연스럽게 접한 남도의 풍경과 회화(남종화)들이 감각적 세포에 스며들어 본능적으로 고전회화를 택했으리라 본다. 이러한 인연관계들을 되짚으며 대상을 풍경(Landscape)라 부르는 서구적 관점보다 '산수(山水)'라 칭하는 동양의 정신을 추구하여, 대상과 주체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로 자아를 성찰하고자 한다. 작가는 팬데믹 속에서 이성중심의 모더니즘에 한계를 경험하며 대상과 주체를 객관화하는 서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대상과 주체가 공존하는 동양적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였다. ■ 이이남

이종기_달항아리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100cm_2022

달항아리에 대한 담론은 시공간에 따라 끊임없는 해석의 변화가 있게 된다. 신화와 자연, 당대의 기술과 예술관을 품고 있는 역사적 사물인 도자기는 일상보다 더 집약된 소우주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미니멀과 간결함의 극치인 달항아리에 대한 담론은 달항아리를 보며 우리의 정신을 보는 것이고 결국 자신에 대한 성찰과, 물질보다는 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달항아리는 정신을 담고 있는 머리, 열정을 담고 있는 가슴, 무엇보다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림 그 자체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자족적인 소우주로서의 달항아리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이유이다. 또 하나의 축은 도자기 밖의 세계, 그러나 도자기만큼이나 오래되고, 그래서 사실과 환상이 반반씩 섞여 그 경계가 도자기처럼 깨지기 쉬운 그런 세계이다. 이 낯선 우주의 장면 안에 전통과 현대, 그리고 예술과 대중문화의 대화가 존립하고 있다. ● 백자 항아리에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였던 수화 김환기는 달항아리에서 우주를 보았다. 김환기의 우주 속에는 김환기가 보았던 달항아리가 있으나, 늘 영감과 아이디어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온 이종기는 달항아리에 달을 그린 유일한 작가이다. 그는 달항아리라는 우주로 달을 보냈고, 진짜 달을 투사하며 '달항아리의 달'이라는 언어적 유희를 즐긴다. 그리고 이종기의 인챈티드 화이트 시리즈의 흰색은 달항아리의 색이 되었다. ● 달항아리라는 우주에 투사된 것은 달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달항아리를 유영하고 있는 슈퍼맨을 본다. 이종기는 세계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변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작품에 한국의 문화적, 예술적 정체성을 담아왔다. 전통이 지닌 가능성과 가치를 믿는 그의 작품에서 슈퍼맨이라는 서양의 물질에 달항아리라는 하나의 오브제를 통해 동양의 정신이 들어가는 정신적 콜라주(collage)의 형성과 달항아리와 전통의 아름다움에 뿌리를 내리는 새로운 우리 자아의 구현을 보게 된다. ● 누구보다 동양의 정신을 나타내고자 했던 백남준의 「TV 부처」, 「Video 부처」(쾰른 현대 미술관 퍼포먼스)에서는 자신의 이미지를 투영한 TV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고 실시간으로 재생산한다. 참선하는 부처의 모습을 빌어 자화상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종기의 패러디 작품을 보면 내가 나를 봄인데 부처로서 달을 바라봄이다. 아직 나의 자아로 확립되지 않은 타자의 이미지로서 바라보며 스스로의 모습을 자아의 재확인으로써 보는 것이다. 거울에 반영되는 자신의 이미지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자아가 인식하는 자아의 모습이지만 타인이 투영되는 이미지는 자신의 모습과 익숙하지 않은 타자와 같은 다른 모습과 인상이다. 자아의 입장에서 분열되어 나온 하나의 타자이며 피드백으로 돌아오는 작품 자체가 바로 인간화된 예술로 해석된다. 작품 속을 자세히 보면 가부좌를 하고 달을 바라보는 부처의 등에 백남준 싸인이 보인다. ● 이종기의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관람객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미적체험이 가능하다. 다양한 미디어를 매개로 몰입 하고 사유하는 현대인은 각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가상의 세계에 진입할 것이다. 철학적 사유와 예술작품은 때로 복잡한 현대사회의 문화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늠자로서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이종기

이종기의 작품은 환상적이다. 이 환상적 무대에 어울리는 것은 만화적 인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화적 인물은 실제 장소의 환상화(enchanted)에 가세하지만 동시에 대조법을 통해 공간의 실재성(existent)이 강조되기도 한다. 이종기는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업그레이드된 우리 자신의 모습과 다시 발견하게 되는 우리의 이야기를 천진무구하게 들려주면서 담을 넘어 다른 세계로 나가는 경계에 다리를 놓아주고 있다. 단순한 듯 하지만 여러 범주를 끌어들이고 있는 이종기의 작품에서 동양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한 슈퍼맨은 길이 아닌 우주라는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저 멀리서 그냥 날아간다. 풍경이 어떻게 바뀌든 같은 포즈로 날아가는 슈퍼맨은 철저한 방관자로 나타난다. 슈퍼맨이 할 일이 없는 곳이 바로 유토피아이다. 또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처럼 슈퍼맨이래 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인 것이다. 한국적이고 서구적인 이질적 요소들이 섞여 들어갔음에도 묘하게 정겹고 재미있게 다가오는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누구나 마음이 열리면서 얼굴에 웃음을 짓게 되는데 어쩌면 심연의 깊은 곳에서 우리가 서로 공유하고 있는 정신적 DNA를 그가 가만히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그의 작품에서 하늘을 날고 있는 슈퍼맨이나 심슨은 미지의 세계에 직면한 호기심 가득한 등장인물이면서도 그들로 인해 현장은 의미의 장으로 변화하며 오래된 현장을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이끌어온다. 도자기와 만화적 캐릭터는 모두 기성의 이미지로부터 온 파생 실재다. 이종기는 창조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기보다는 기성의 것을 재배치함으로서 새롭게 탄생하여 생겨나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활용하는 작품은 예술작품이 삶은 아니라는 근본적 사실에 대한 현대예술의 각성과도 관련 있다. 캐스린 흄은 환상과 미메시스라는 두 가지 대립되는 사조를 설명하며 예술이 삶에 대해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새로움과 창조에 대한 기대는 줄어들지만, 소통과 독자의 몫은 커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시인 끌로델은 '나의 시구들 속에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물들을 재발견하게 하라'고 작가의 역할을 규정한 바 있다. ● 2차원 평면에 3차원의 현실을 담는 그림은 늘 양 차원 간의 길항작용이 벌어지는 마법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림 안으로 들어가서 그림 속 산야를 산보하고 나온다는 동양화에서의 상상력이나 그림 안으로 들어가서 영영 나오지 않았다는 저주받은 근대예술가의 신화를 아우르는 무대가 바로 그림이다. 그려진 도자기 안팎에 걸쳐있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종기의 작품은 그림의 틀에 대한 메타적 놀이를 한다는 점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전략과 비슷하다. 그것은 현실이나 환상이 아니라 그 모두를 포함하는 어떤 메타적 차원의 놀이를 말한다. 퍼트리샤 워는 메타 픽션에서 이러한 메타적 작품, 또는 비평이 리얼리티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준다고 말한다. 예술은 대안의 현실을 통해 현실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만화는 어떤 이야기를 향해 부산하게 움직이지만, 회화는 이미지를 시간과 함께 단일한 방향으로 흐르는 서사의 압박에서 해방시키고 여러 은유가 중첩된 장면으로 고정시킬 수 있다. ● 이종기의 작품은 작가 자신의 즐거움으로 추동되지만, 그 분위기를 전염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소통의 요건을 충족시킨다.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도상들, 편안하고 유쾌한 감성으로 충전된 그의 작품세계는 대중 친화적이다. 유쾌한 상황설정, 팝적인 색감, 익숙한 캐릭터까지, 작가의 감성에 맞고 대중과의 소통도 용이한 방식은 코로나로 우울한 이 시대를 위로한다. 작품 속에서 현실의 무거운 무게는 삭감되어 있다. 이종기 작품 속 캐릭터들과 또 다른 현실과의 만남은 비현실적인 설정들이 자연스러운 현실처럼 보이게 하는 힘이 있다. ● 옛 풍경에 대한 시선을 따스하게 유지하며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있었던 정신의 전통을 아름답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질문하는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는 이종기의 작품에서는 하늘과 땅이 동양화의 여백처럼 같은 색으로 처리되거나 등장인물이 움직이는 공간을 그들의 움직임을 방해할 만한 어떠한 저항도 없는 비어있는 공간으로 남겨둔다. 생사고락의 문제로 가득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로서 밝고 환하게 빛나는 이종기의 작품 세계는 인간의 희망이 만들어낸 또 다른 현실 세계이다. ■ 이선영

정현숙_Before and After_캔버스에 유채, 자개_70×70cm_2022

우리의 전통양식 중에 나전칠기는 용도와 수요가 사라져가고 있다. 그 중에 우리에게 익숙한 자개는 가구의 장식 재료로 이용해왔으며 공예적인 요소로만 생각해왔다. 자개를 오브제로 사용하여 현대적 조형으로 재해석 하고자하는 작업이다. 여러 칼라를 입힌 자개를 넓이 1mm 안 밖으로 얇게 잘라 규칙적이거나 혹은, 불규칙적인 도형을 만들고 그로인해 만들어진 작은 공간에 스와로브스키 등 크리스탈을 부착하여 비구상적이며 장식적인 화면으로 보이게 했다. 그로 인한 반복성, 캔버스 밑색의 컬러와 자개컬러의 조화, 그리고 자개와 크리스탈로 인해 발생하는 빛을 표현한다. ● 구상작업으로는 조선시대의 달항아리와 초충도의 나비 등도, 도입하고 있다. 자개의 두께나 컬러도 다양하게 이용하며 자개의 뒷면에 색을 칠해 다양한 색의 자개를 만들어 작업하고 있다. 前(Before)과 後(after)라는 명제가 보여주듯이 과거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우리 앞에 되살아나는 시간성에 중점을 두었다. ● '달은 옛 달이로되,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로다.' 라는 당나라 시인인 두보의 시를 생각해본다. 전통적 재료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만 머물지 않고 미래에도 계속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역사에 빛을 더해본다. ■ 정현숙

전통적 양식과 현대적 조형-정현숙의 작품에 대하여 ● 나전칠기니 자개농이니 하는 안방 기물들에 대한 용도와 수요는 현대에 오면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항목의 하나가 되었다. 사라져가는 전통적 양식이 비단 나전칠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 안방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양식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안타갑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근래에 들어오면서 나전칠기의 방법을 현대적 조형으로 원용한 작가들이 눈에 띠는 것은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현숙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대체로 나전칠기의 방법을 현대적 조형으로 끌어들이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 접근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안방 문화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정서의 환기가 그 하나요, 나전칠기의 기술을 현대적 조형으로 전이시키는 일종의 재료의 재해석 내지는 재발견의 차원이 또 하나다. 정현숙은 어떻게 보면 이상의 두 측면을 아울러 지님으로써 그 독자의 위상을 견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우선 그는 전통적인 재료가 환기시키는 독특한 정서를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자개농이 화사하면서도 그윽한 내면의 향기를 머금고 있음은 다름 아닌 질료가 발하는 장식성에 기인되는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의 작품 속에는 과거의 문양이나 구성적 패턴을 구가하지는 않으나 질료 자체에서 나오는 독특한 장식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간결하면서도 단순한 패턴의 반복 속에서도 화사한 질료가 발하는 독특한 장식성이 화면 전체로 확대되면서 그윽한 반향을 자아내고 있다. 그가 구사하는 조형의 패턴이 한결같이 추상적, 기하학적 구조의 것임에도 유독 나비 문양은 가장 구체적인 형상으로 떠오르고 있음이 눈길을 끌게 한다. ● 형태와 구조상으로 몇 개의 대표적인 카테고리를 정리해보면, 그물망 같은 직조의 전면화, 원형 또는 원형의 반복, 사각 형태와 그것의 증식, 작은 띠의 집성화 현상, 또는 그것의 다양한 변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원형은 정방형의 화면에 가득히 채워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물망의 구형으로 화면을 채우는 것도 있다. 사각 속의 원이란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의 조합이라 할 수 있다. 원의 중심으로부터 예리한 화살촉들이 밀집된 형상으로 밖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마치 유지 우산을 펴 위에서 본 것 같은 바퀴살 모양의 원형이 화면에 가득 참으로써 시각적 충일을 일으키는 것도 있다. 원을 에워싼 그물망 조직이 출렁거리는 형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평면을 벗어난 입체화의 또 다른 변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 원에 이어 빈번히 구사되는 것은 사각의 패턴이다. 사각형을 안에서부터 밖으로 향하게 지속적으로 증식되어 나오게 한 반복 구조에서부터 단순한 사각의 작은 단위를 직조해나가는 형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겹치는 사각의 형태와 원과 사각형의 조합 또는 퍼즐처럼 엮어지는 사각의 형태 등이 있는가 하면 밀집된 색 띠의 구성 등 실로 다양한 변화의 양상이 펼쳐진다. ● 안방의 자개농에서 보던 현란한 아름다움이 연상되면서도 자개농의 문양이나 구성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만큼 현대적 감각에 의한 재해석의 새로운 양식을 만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양식이 자아내는 독특한 정서를 내장하면서 새로운 표현의 진폭을 보여주는 그의 화면은 전통의 현대화란 놀라운 방법의 획득에 다가가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제약이 따르면서도 그것을 극복해가면서 이룩한 성과는 그의 치열한 작가 정신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오광수

찰스장_해피하트 in 달항아리_캔버스에 스프레이 페인트_72.7×60.6cm_2022

대학시절 그래피티에 많은 영감을 받고 2년간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활동하다 졸업 후 호주, 캐나다 등을 여행하며, 원주민과 인디언 미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람들에게 기쁨, 희망, 용기를 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항상 예술이 무엇이고, 내가 작가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며, 즐겁게 작업을 하고 있다. 나에게 작업이란 나와 타인 그리고 이 세상을 알아가는 행위이자 즐거움이다. 작업 안에서 내 자신을 벗어버리고 자유롭게 표현 할 수 있다. 예술은 인간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며, 상상력을 만들어 주고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이다.

해피하트 ● 하트 캐릭터는 내 자신을 대변한다. 항상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둘러보고 살피며, 연약하고 때론 두려운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간다. 나도 한때 우울증과 대인 기피증을 경험한 적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랑의 힘으로 극복이 된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해피하트'들이 바이러스처럼 움직이며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모든 이들이 '해피하트' 이미지를 통해 행복한 에너지를 받아 웃음이 지어질 수 있길 소망한다. ■ 찰스장

최영욱_Karma 20191-17_캔버스에 혼합재료_135×120cm_2019

기억의 이미지 ● 나의 그림은 기억의 이미지화, 소통의 매개체다 .기억은 특정 이미지를 형성하고, 이미지를 통해 기억은 표출된다. '지각과 경험의 울타리'(기억)에 근거해 어떤 의도가 시도되고 감정이 표출되고 소재나 재료, 색감이 선택되고 이것은 어떤 이미지를 만들게 된다.결국 내가 표현한 이미지는 내 삶의 기억, 내 삶의 이야기들이다. 나는 내 그림속에 내 삶의 이야기들을 펼쳐 내고 있는 것이다 ● 하지만 내 그림을 보는 다른 이들은 내 그림속에서 본인의 이야기와 기억을 끄집어 낼 것이다. 나의 기억이라는 것이 다른 이의 기억과 연결되며 그 관계에서 보편적 인간의 모습이 그려지게 되는 것이다.'내 삶'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게 되니 결국 보편적 인간을 표현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 작품을 보는 것은 나의 내부로 잠행해 들어가는 동시에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 자신의 속으로들어가 보는 것이 된다. 내 자신을 돌아보며 나를 찾는 과정이다 '나'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닫게 되고 그 과정에서 '소통'이 이루어진다. 나의 그림은 결국 그 '소통'을 위한 매개체다. 소통은 단순한 현재의 언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 나와 너를 잇는 소통의 매개체가 바로 내가 표현한 기억의 이미지들이다. 내 그림에 보이는 달 항아리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다. 나는 달항아리라는 이미지를 소통의 매개체로 선택했다. 달항아리와 조용히 만나본 적이 있는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지만 많은 것을 품고 있는, 지극히 단순해 보이지만 극도로 세련된 그 피조물을 먹먹히 보고 있노라면 그건 이미 내 안에 들어와 내가 되어 버렸다.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가를 그는 이미 나에게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달항아리 그리는 작가로 안다 하지만 나는 달항아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달항아리처럼 살고 싶은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다 그 안에 내 삶의 이야기를 풀었고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담았고 찾았다. 내가 그린 'karma는 선에 그 의미가 담겨있다.그 선은 도자기의 빙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우리의 인생길이다.갈라지면서 이어지듯 만났다 헤어지고 비슷한 듯하며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하나로 아우러진다. 우리의 의지를 초월하는 어떤 운명안에 삶의 질곡과 애환, 웃음과 울음, 그리고 결국엔 그런 것들을 다 아우르는 어떤 기운... 꾸밈없고 단순한 형태와 색감은 우리 마음 밑바닥의 측은지심 같다.우리는 본디 착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나. ● 이렇듯 도자기는 내 삶의 기억들의 이미지고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의 달항아리는 말이다. 내가 그 안에 기억을 넣어주면서 그것은 단순한 도자기가 아니라 우리의 기억이 되었다. 여러 선과 흔적은 시공을 초월한 암호이고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더듬어 그 암호를 풀어나간다. 나의 그림을 바라보며 한 기억을 떠올려 그 안으로 들어가 보라 그 속에 착한 인간의 존재가 있다. 그 안에서 삶의 이야기를 찾는 여정을 시작해보기 바란다. 그 안에서 우린 만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삶의 이야기를 그렸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최영욱

인생의 한 축도로서의 달항아리 그림Ⅰ. 달항아리는 배가 불룩하니 둥근 모습이 꼭 달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마치 정월 대보름날 어두운 밤하늘에 둥두렷이 떠오른 보름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 둥글던 보름달도 시간이 지나면 한 귀퉁이가 조금씩 이지러지면서 비대칭적인 형태를 띠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좌우의 비례가 같지 않은 달의 통통한 몸에 대한 연상작용이 항아리에 유감(有感)돼 달항아리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한쪽이 약간 이지러진 조선 달항아리의 품새는 완벽하게 둥근 모양새인 일본이나 중국 도자기와는 사뭇 다른 형태미를 보여준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의 도자기가 채색 도자기인 반면, 조선의 도자기는 백자가 주류를 이룬다. 그 어수룩하면서도 후덕한 품이 꼭 흰옷 입은 조선의 여인네를 닮았다.    최영욱은 몇 년째 조선의 달항아리를 그리고 있다. 캔버스에 꽉 차게 그린 달항아리의 모습은 얼핏 보면 극사실 기법으로 재현해 놓은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극사실의 범주에 집어넣는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객관적 묘사를 통한 극사실 계열이 아니라 오히려 주관적인 편에 속한다. 다만 형식만 구상적 양식을 빌리고 있을 뿐이다. 그의 작품을 극사실 회화의 범주에 편입시키는데 동원되는 유일한 '비평적 기준(critical criteria)'이 바로 빙열인데, 이는 도자기 표면에 자디잘게 갈라진 유약의 균열에 대한 묘사가 마치 실제의 빙열을 묘사한 것으로 오해한 데서 오는 비평적 오류인 것이다.  

Ⅱ. 그렇다면 최영욱의 작품에 등장하는 빙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는 과연 무슨 생각에서 그처럼 치밀한 균열을 달항아리의 표면에 그리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그의 초기작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나는 1996년, 그의 두 번째 개인전에 부쳐 서문을 쓴 적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잠시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1996년, 두 번째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 역시 주조는 흰색과 회색이었다. 흰색이나 회색의 바탕에 새, 의자, 사람, 나무, 풀꽃, 피아노, 포도 등등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물들이 희미한 형태로 나타나 있었다. 그 그림들의 내용은 마치 작가가 사물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감성적이었고 나직한 톤의 목소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최영욱의 작품과 만나는 것은 결국 그의 내부로 잠행해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생소한 한 개체의 전언을 통해 구체적인 질량과 부피를 가진 한 인간의 내면을 이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작가가 완성한 한 벌의 그림은 한 개체에 대한 이해의 통로이자 접근의 단초이다. 거기에 그려진 형상과 기호, 상징들은 내면읽기에 꼭 필요한 독해의 자료들이다." ● 이 인용문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최영욱은 독백형의 작가이다. 그것은 그의 체질인 것 같다. 그의 이러한 체질에 기반을 둔 창작 태도는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흰색 또는 희색조의 바탕에 사물을 그려 넣는 일은 다시 말해 체험을 응축해 기호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런 기호화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며, 그 자신 혹은 사회에 대해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 것일까?

Ⅲ. 이 문제를 살펴보기 전에 일단 우리는 최영욱의 작품 제목이 「Karma」란 사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말의 '연(緣)', 혹은 불교식으로 말해 '업(業)'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인간의 생에 대한 비유이다. 인간과 인간 간의 실타래처럼 얽인 인연이 업을 낳고 그 업이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것이 불교식 연기설의 골자이다. 최영욱이 달항아리의 표면에 숱한 균열을 가는 실선으로 연결시키는 행위의 이면에는 이러한 연기설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잠시 작가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 ● "그 달항아리 안에 일일이 선을 그었는데 그건 도자기의 빙열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만났다 헤어지고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는 우리의 인생길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내 그림의 제목은 'Karma'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의도한 데로만 가지 않고 어떤 운명 같은 것이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나는 그 운명, 업, 연(緣)을 선으로 표현했다. 그 선을 긋는 지루하고 긴 시간들이 나의 연을 생각하는 시간들이었다." ● 최영욱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대부분의 한국 단색화(Dansaekhwa) 작가들이 그런 것처럼 일종의 수행과도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캔버스에 유백색 혹은 다양한 뉘앙스의 흰색으로 여러 번에 걸쳐 바탕을 칠하고, 그렇게 조성된 바탕 위에 약간 도드라지게 달항아리의 형태를 만든 다음, 그 안에 무수한 실선을 그어 빙열을 표현하는 그 지난한 행위를 해명할 방법이 없다. 그의 작화 행위는 구도의 몸짓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해방의 몸부림이다. 그것은 어떤 극점을 향해 나아가는 해탈의 몸짓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며 보다 인간적이다. 그가 그림에 투여하는 도저한 시간과 화면을 마주할 때 직면하는 갖가지 상념들은 그의 행위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임을 말해 준다. 그는 단지 예술가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위는 예술적 행위이며 도의 획득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유백색으로 말끔하게 조성된 달항아리의 표면에 무수한 실선으로 균열을 그리는 행위는 따라서 인생에 대한 은유이며 일종의 기호인 셈이다. 그것들은 축약된 암호와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것들을 해독하기 위해 상상력이 필요하며, 감정이입적으로 자기화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것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리좀적(rhizomatic) 구조를 지닌다. 참으로 왕성한 번식력이 아닐 수 없다.

Ⅳ. 철저히 아날로그 방식에 의존하는 최영욱의 그림이 디지털 문명의 존재방식인 리좀적 양상을 보여준다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아바타』의 주인공 제이크가 "거대한 나무 하나에 1조 그루의 나무가 속해 있다."고 말한 것처럼, 최영욱의 그림 속에 그려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실선들의 증식은 페이스북(facebook)의 보이지 않는 선들의 연결을 연상시킨다. 사이버 상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9억 명에 달하는 프로파일의 연결망은 마치 최영욱의 균열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가상이지만 현실이기도 하다. 페이스북에서의 만남은 현실화되기도 한다. 사이버 상에 올라온 어떤 의견에 대해 '좋아요(like)'를 누르는 행위는 분명 현실적인 행위이다. 거기에도 분명 다양한 감정이 수반된다. 즐거움, 환호, 사랑, 분노, 질투, 증오가 존재한다. 그렇게 수반된 다양한 감정들을 통해 페이스북의 친구들(friends)은 물리적 경계가 없는 사이버 세계에서 서로 소통을 시도한다. 거기에는 피부색, 종교, 인종적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상호 합의하에 친구가 되면 비록 어느 정도 언어의 장벽은 있을지언정 소통이 시도되는 것이다. 그것은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다. 실제로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각종 정보는 실시간으로 물처럼 그렇게 흘러간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탁월한 비유이다.

Ⅴ. 최영욱은 자신의 그림이 소통의 매개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림을 그린 창작자와 이를 감상하는 감상자가 존재하는 예술의 형식은 그 자체 상호 소통(interactive communication)의 가능성을 내장한다. 상호작용은 직접적인 감응방식에 의한 미디어 아트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최영욱과 같은 철저한 아날로그 방식의 회화에서도 가능하다. 가령, 최영욱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가는 실선을 그어 서로 연결시킬 때, 그 문법을 독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관람자는 거기에 자신의 인생을 투사할 것이다. 그는 말한다. ●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내 그림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떠 올리고 그 자신 속에 얽혀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를(소통) 나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 "그것은 우리의 인생길이다. 도자기의 빙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갈라지면서 이어지고, 끊겼다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는 선처럼 우리의 인생도 만났다 헤어지고 비슷한 듯 하며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하나로 아우러진다." ● 인생의 한 축도로서의 달항아리의 빙열은 그러나 그 자체 미학적 완상의 대상이기도 하다. 여기에 최영욱의 달항아리 그림이 지닌 매력과 중의성이 있다. 그것은 한국의 전통적인 미감을 듬뿍 머금고 있는 동시에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한 느낌은 주로 색감이나 소재, 형태에서 온다. 한국의 전통 달항아리에 구현된 아취 있는 빛깔들의 다양한 스펙트럼-유백색에서부터 은은한 흰색 또는 다양한 회색이나 검정에 이르는-은 조선시대 도공들이 이루어낸 땀과 노력의 결정체이다. 최영욱은 한편으로는 그러한 전통에 한 발을 담그고 한 발로는 회화를 매개로 이를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기법적인 면에서 볼 때 최영욱의 달항아리 그림에는 일종의 시각적 트릭이 숨겨있다. 도자기의 불룩한 배 부분에 음영을 집어넣거나 산수화를 삽입하여 실제의 달항아리처럼 보이게 그리는 기법이 그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그의 빙열을 실제의 도자기에 난 균열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요인이며, 나아가서는 그의 그림을 극사실주의에 편입시키는 오해를 낳고 있다.

Ⅵ. 최근에 들어서 최영욱의 달항아리 그림은 보다 평면적이 되면서 '미니멀'해지고 있다. 불룩한 달항아리의 존재감이 밋밋해지면서 평평한 느낌이 가일층 강조되기에 이른다. 그와 동시에 균열을 암시하는 실선들이 달항아리의 전면에 번져나가면서 그와 비례해 달항아리의 형태감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그러한 도정은 매우 미세한 변화지만 어떤 극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필경 어떤 0도의 지점에 도달할 터인데 그 시기가 언제일런지 나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다만 이제까지 그의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느리게, 그러나 크고 작은 삶의 단면들이 타인의 그것과 얽혀 인연의 실타래를 엮었듯이, 그의 그림 또한 그것의 한 유비(analogy)로서 균열의 망을 점진적으로 엷게 키워가고 있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영도(零度)의 지점을 향한 끝없는 여행으로서 말이다. ■ 윤진섭

하태임_달항아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100cm_2022

달항아리 ● 순백색의 달항아리는 담백하고 넉넉한 조형미로 오랜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나에게 백색은 순수하고 담담한, 수용하고 밖의 것을 끌어안는 색이다. 동시에 시작의 색이기도 하다. 내가 그린 달항아리는 캔바스 공간에서 약간 비껴나가 있다. 캔바스 틀에 걸쳐져 구성되었는데 이는 확장되어지는 원의 형태를 사각 프레임에 담기엔 답답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토끼와 월계수가 살고 있다는 보름달을 올려다 보며 우리의 꿈과 소원을 떠올려 본 경험이 있듯이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달항아리에 반짝반짝 빛나는 오색 꿈조각을 투영시켜 보고 싶었다. ■ 하태임

마음과 접촉하는 생명력의 색공간 ● 처음 하태임의 작품을 마주한 것은 2011년도 서울시립미술관의 수장고에서였다. 서울시립미술관은 1900년대 초반부터 당해연도까지의 현대 미술 작품들을 수집, 소장하고 있다. 때문에 수장고는 한국미술사를 꿰어볼 수 있는 공간인 셈인데, 하태임의 맑고 투명한 색띠의 리듬(2007년작 「통로(Un Passage)」, 2010년 수집)은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도 단번에 눈을 사로잡았다. 당시 젊은 작가들에게서 많이 보였던 구상, 하이퍼리얼리즘의 경향과는 달랐던 그 작품 세계는 그로부터 10여년, 작가가 작업을 시작한지 26년차에 이르러 더욱 무르익고 있는 것 같다. 박서보, 이우환 같은 단색화 작가들 뿐 아니라 하인두, 최욱경처럼 색을 주요하게 사용하였던 작가들과 맥이 닿아 있으면서도 동시대적 감각을 공유하는 하태임의 색공간과 미학적 경험은 이전 세대의 회화론과는 또 다른 특질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가 미술사적으로 다음 세대의 중요한 추상회화 작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의 이유이다. 또한 그의 작품이 여러 국공립, 사립 미술관과 미술 시장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색으로 빚어낸 '소통'의 「통로」 ● 이번 전시 출품작 대부분을 차지하는 「통로」시리즈는 하태임 작품 세계의 가장 중심적인 축이다. 때문에 「통로」의 의미와 방법론이 어떻게 생성되고 변모했는지 우선 고찰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 「통로」가 시작되기 전, 1995년의 첫 개인전에서는 「토하기」, 「벙어리」, 「험담꾼들」, 「자화상」등의 작품들이 선보였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오른 프랑스 유학길에서 느꼈던 여러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주의 화풍으로 담아낸 것이었다. 「통로」가 정형화된 곡면의 요소가 반복되는 모습임에도 형식 실험 자체에만 몰두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이야기와 진정성을 화폭에 담아내는 기본적인 태도가 초기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이후 프랑스의 디종 국립미술학교(1994년 졸업)와 파리 국립미술학교(1998년 졸업)를 수학하면서 '소통'이라는 주제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유학 생활 동안 부딪혔던 언어적 문화적 소통의 어려움을, 처음에는 '타인과의 완전한 소통의 불확실성'으로, 부정의 의미를 내포하는 제스처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1998년부터는 화면에 문자 알파벳과 한글이 등장하여 이를 혼용하거나 중첩시키면서 문자가 가진 원래의 의미를 상실케 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1999년 귀국 이후 2003년부터는 색면과 색띠로 이 문자들을 덮거나 지우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작품 「통로」가 탄생한다. 소통의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이성, 진보, 남성 같은 서구의 기계론적 사고를 체현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문자의 성격이, 사실은 소통을 억압하고 소통의 불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점을, 문자와 그것을 부정하여 지우는 제스쳐를 통해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말처럼 "이는 역으로 완전한 소통을 희구하는 절실함의 발현"이었고, "자연의 색상이기도 하면서 인상적으로는 가장 인공적인 색상이라는 동시적 의미를 내포하는 노란색을 지우고 덮는 색으로 사용"함으로써 '소통에의 추구, 상징적 컬러와 제스처'라는 하태임 작품세계의 원형이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 ● 2004년 홍익대 박사과정에 진학한 후 2006년부터 2012년까지 「통로」, 「문(La Porte)」, 「인상(Un Impression」 등의 시리즈가 발전되어 나가기 시작했고, 문자를 지우는 의미의 컬러밴드보다는 색채의 대비에 관심이 옮겨가면서 문자는 점차 화면에서 사라진다. 이 과정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처음엔 노란색, 하얀색으로 그림 속의 글자를 지우는 걸 표현했어요. 그 후부터 제 작품에서 문자들이 점점 사라져요. 내용이나 형상이 없어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그 과정을 통해 남은 색깔과 빛, 이런 것들이 제게 위안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컬러로 소통하기로 결심했죠." (하태임, 인터뷰 - 리빙센스, 2020) ● 이렇게 작가가 지속해 온 「통로」라는 주제는 '색을 통한 소통'으로 나아가게 된다. 문자를 소거하는 역할로부터 출발하여 존재하던 색띠들은 이제 독립적인 조형 요소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반복적인 수행성이 더욱 강조된다. 「통로」는 노랑이나 하양의 지우기 패턴이 평평한 거미줄처럼 교차되고 틈새의 공간을 드러내었던 유형에서, 컬러밴드들이 각각의 화음으로 조화를 이루거나 층위를 구분하는 등 독립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유형으로 변화한다. 조금씩 결박에서 풀려난 컬러밴드는 마지막 유형에 다다르면 늘어난 여백 안에서 장력에 의해 서로 교차하고 밀고 당기는 듯한 음악적 리듬감을 보여주게 된다. 2012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 「컬러 밴드를 이용한 비선형 만곡 패턴 구성의 회화적 역동 효과」에는 컬러밴드와 그 음악적 역동성에 대한 연구가 체계화되어있다. ● 색채가 가지는 무의식적인 측면과 색채의 배열에 따라 야기되는 감정의 변화에 관심을 가졌던 작가는, 점차 색들이 스스로 말하게 되면서, 기호와 문자로 소통되는 언어의 영역 대신 시각과 감성을 통해 전달되는 감동의 파장과 그로 인한 소통을 얻게 된다. ● 이 시기부터 더욱 더 컬러밴드에 집중하게 되었고 2015년에 스테인레스 스틸을 재료로 3차원의 색띠를 보여준 「확장(Une Extension)」을, 2018년에는 「통로」의 영상 작품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 최근에는 그간 캔버스를 눕혀놓고 붓질을 해오던 방식에서 벗어나 벽에다 세워 그려 물감이 흘러내린 자국을 살리거나, 컬러밴드를 한쪽에 치우치게 하여 여백을 살리는 유형, 기존의 붉은 형광색이 빠진 회색바탕에 청색이나 녹색조 컬러밴드로 구성한 유형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몸을 통해 걸러지고 구축된 색공간과 색경험 ● 이번에는 하태임 작품 세계의 특질인 색공간과 색경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그의 작품을 선형적 시간의 흐름으로 읽었다면, 이제 하나의 작품이 품고 있는 화면의 조형적 구성을 관찰함으로서 우리가 하태임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미적 특성과 그만의 차별점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역사적으로 색채 화가들은 화폭의 색공간을 두 가지 방향에서 사용해왔다. 즉 구성주의적 경향과 표현주의적 경향이 그것인데, 올피즘과 레이오니즘 같은 구성주의 경향이 음악적 율동과 기하학적 패턴을 통합함으로써 형상을 실험했다면,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로 대표되는 표현주의 경향은 몰형상과 자동기술에 의한 내면 심상풍경을 창출하는데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하태임은 음악적 율동을 지닌 화면을 구성하면서도, 이것이 내면 심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화면에 두 가지 특성의 색 공간이 공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작품의 첫 번째 특징이다. ● "마주보기, 등 돌림, 같은 곳을 바라보기, 교차하기, 어긋남을 이룬 색띠들의 '반복과 차이'는 자신만의 몸이 기억하는 '색경험'이자 음의 높낮이로 조화를 이룬 멜로디다." (하태임, 「작업노트 - 색채 환상곡」, 2015) ● 이런 공존을 가능케하는 것은 만곡의 곡선을 수행하듯 반복해서 그려내는 제작 방식과, 색에 각각 자신만의 상징적, 경험적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는 작가의 철학이다. ● 작가는 캔버스에 배경색을 칠하고 그 위에 여러 색의 반투명한 색띠들을 칠하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여 여러 층의 레이어를 만들어낸다. 몸통을 컴퍼스의 축처럼 고정하고 팔을 뻗어 선을 그리면 자연스럽게 곡선이 나오게 된다. 빨강의 경우는 5,6회, 흰색의 경우는 11회 정도 덧올려야 하기 때문에 완성까지는 두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작가의 신체를 바탕으로 반복되는 이 행위는 내면적 규칙과 운동으로 이루어진 내재율을 만들어낸다. 컬러밴드라는 동일한 형식의 반복과 색채들 간의 대비로 인해 시각적 힘의 강약 효과가 생겨나면서 시선이 이를 따라 이동하게 되며, 이것이 상대적으로 동적인 느낌을 주어 리듬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 동시에 작가는 색이 "탈합리적(irrational) 요소와 존재론적(ontological)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고유한 순색들은 망막을 통해 뇌까지 전달되는 신경계의 고유한 기억이나 경험을 통해 데이터화 된다", 또 "색은 그리는 자의 본질이다. 본인의 작업에서 색은 심리적 상태를 있는 그대로 천명해주는 하나하나의 생명을 지닌 생명체이자 원형질이다"라는 언급으로 자신만의 몸이 기억하는 '색경험'에 대해 설명한다. 또한 "노랑은 빛이다. 찬란한 기억 또는 치유의 에너지이거나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인식된다. 연두는 초여름의 싱싱함, 휴식과 정신적 평화를 상징한다. 하양은 역사적으로는 천상의 순결함을 의미하지만 슬픔과 고독한 색으로 읽을 때도 있다." 같은 말로 자신의 내적 심상을 색으로 그려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 이렇게 음악적 구성과 내면의 표현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작품의 첫 번째 특징이라면 두 번째의 특징은 반복되는 제스처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틈새의 공간에 있다. 작가는 "집중해서 선을 반복적으로 그리다보면 이 작업이 명상이고 수행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이 반복 제스처는 자아의 긍정과 부정, 그리고 현실의 초월됨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단색화 작가들의 자연에 대한 몰아일체와도 표현형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초기의 지우기나 감추기에서 차차 자기 자신에 대한 받아들임과 위로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틈새의 공간은 특히 기존 색채 화가들과의 변별점을 드러내는 것으로, 물감의 투명성이 극대화된 컬러패턴들이 화면에 중첩되어지면서 발생한 간격과 미묘한 차이, 컬러 패턴의 '어긋남'과 '교차'의 결과로 나타난, 층과 층 사이에서 발생하는 틈새의 집합을 일컫는다. 전 홍익대 교수 김복영은 이 틈새 공간에 주목하면서 색공간 내에서 틈새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조응들이 '차이의 원리에 의한 새로운 색공간의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평한바 있다. ● 종합하면 때로는 가려지고 지워지는 반복의 붓질이고 때로는 각각이 자신의 삶을 담아내는 생명체인 이 컬러밴드들이 화면 위에서 음악적인 병치로 다른 색채들과 관계하고 조응하여 역동성을 이끌어내는 한편, 이것들의 반복과 확장을 통해 만들어지는 공간은 시간을 투사하는 결과물로서 화면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그 틈새들은 점차 무한한 공간으로 확장되는 것이자 소통의 통로로서 기능하게 된다. 이것이 다른 작가들과는 다른 하태임만의 색공간이다.

마음과 접촉하는 화면, 생명력과 위로 ● 마지막으로 동시대의 시각체계 안에서 하태임의 작품이 어떻게 공명하고 있는지,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지 찾아보려고 한다. ● 우리는 일상의 가장 많은 시간을 컴퓨터, 모바일, TV 스크린 앞에서 보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은 우리의 감각을 변화시키고 있는데, 구글어스 같은 맵, 포토샵 같은 그래픽 툴, 영상 플랫폼인 유투브 등을 생각해보면, 이것들이 이전과는 다른 공간성과 시간성, 평면성을 경험케함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동시대 작가들의 평면 작품들은 이미지의 전유를 실험하는 등 현재의 재현체계에 대해 실험하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기본적으로는 비물질적 스크린의 성격을 내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온라인으로 연결된 기기들을 사용하면서는 이것들이 확장된 신체로서 기능하게 되는데, 때문에 스크린의 표면과 그 너머의 행위들이 물리적 감각으로 지각되게 된다. 하태임의 작품은 이런 무빙 이미지나 변환의 감각과 닮아있다. 복수의 레이어는 무한한 스크린 너머의 공간과 성격을 같이 하며, 유동적이고 느슨하게 서로 연결된 요소들은 시각을 넘어 몸으로 확장된 감각을 자극한다. 자연색 뿐 아니라 형광 느낌이 나는 색의 사용은 빛나는 스크린과 현재 소비사회의 색채를 반영한다. ● 때문에 우리는 직관적으로 작품의 표면을 스크린처럼 감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태임의 색공간과 그 표면을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동시대 시각물들과의 구조적 유사성 때문만은 아니다. 그 표면에서는 신체적, 감정적 접촉이 일어나기 때문이며, 그 안의 색공간에서 작가와 관객이 공간을 공유하고 서로의 체험을 주고받는 미학적 경험이 일어나 우리에게 위로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가지 요소에서 연유하는데, 첫 번째는 스크린과 닮았지만 물질성을 가진 화면이다. 물감과 커다란 캔버스, 사람 몸의 스케일을 반영하는 붓질은 마치 사람과의 포옹이 그렇듯 리듬감과 생명력이 가득한 표면에서 감정의 접촉과 그로 인한 위로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두 번째로는 내적 심상과 그린 자의 시간이 녹아있는 색공간이다. 작가는 이 색공간에 자신의 삶과 깨달음을 담아낸다.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굴곡의 시간들, 같은 자세로 그림을 그리다보니 발생한 어깨의 통증, 다시 그림을 그리지 못할까 두려웠던 감정들까지, 40대의 작가에게 작품은 세계와의 대응에서 빚어진 이항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이다. 작가는 이를 회복하고 치유했던 것은 역시 색이었다고, 색이 자신을 위로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치유 받았던 것처럼, 관객들도 색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기를 바란다. 그런 바람처럼 우리는 이 색의 공간에서 작가와 대화하고 있다. ● "핑크는 화해와 너그러움의 색이다. 깊고 쓸쓸한 겨울을 살아내게 한 핑크는 따스하다.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버리는 다시금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색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사춘기에 이르면 유년기에 사랑해 마지않던 핑크를 유치하고 여성성을 드러내는 색이라고 외면하게 된다. 하지만 인생의 거친 풍랑을 지나고 내면을 마주하고서야 만난 자신의 비뚤어진 고집스러움에 용서를 구하는 색이다." (하태임, 「블루가 핑크를 만나면.. 가나아트 나인원 개인전에 부쳐」, 전시도록, 2020) ● '인생의 거친 풍랑을 지나고 내면을 마주하고서 만난 자신'을 색으로써 드러내는 작가는 인생을 살아가는 선배로서, 친구로서, 딸로서 우리에게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 만곡의 색띠가 조형적 쾌를 넘어 앞으로도 사람의 마음에 닿는 생명력과 위로를 전하기를 기대한다. ■ 권혜인

Vol.20220604g | 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시대의 눈: 해석된 달항아리展